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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안 보여! 안 보인다고!
-명진은? 명진은 지금 어디에 있어?
-막아! 북쪽이 뚫렸어!
-젠자아앙! 아파! 아프다고!
-대주에게… 대주를 불러줘!
-아아아악!
-어, 어찌된 거야! 왜 마교놈들이.
-휘! 진이 무너졌다고!
타타타타탓-!
“헉! 헉!”
임휘는 달리고 또 달렸다.
온몸이 뻘건 피에 덮였고, 뻗어나가는 열기로 인해 어깨 위로 김이 풀풀 올라왔다.
‘힘들다. 목이 말라.’
이차 방어선까지 무너졌다. 더 이상 임휘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나 있다면 정의수호대가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암벽 사이의 좁은 길을 통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하루 먼저 움직였던 구파연합의 본대를 따라잡을 수만 있다면…….
처음에 사혼당의 잔챙이들이 자신이 설치한 진에 갇혀 허둥댈 때까지만 해도 크게 희망을 가졌었다.
가지고 있던 마지막 부적들을 전부 소진해가며 만든 세 개의 미혼진(迷魂陣).
북쪽 절벽 근처에 마지막으로 설치한 진은 남은 부적이 없어서 옷을 찢어 피를 발라가며 간신히 발동시킬 수 있었다.
그래도 부족하다 여겼던 걸까.
명진은 자청하여 북쪽을 맡겠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그를 따라 열 명이 서둘러 움직였고, 나머지 삼십이 사전에 정해둔 위치로 알아서 이동했다.
적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았다.
곧 엄청난 숫자의 사혼당 무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적의 제일선은 미리 설치한 함정에 빠져 전멸했으나 제이선, 제삼선이 다시 치고 올라왔다.
임휘의 조는 동료 둘을 잃고 이차 방어선까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미혼진의 영역.
못해도 두 시진만 버텨준다면…….
……희망은 깨졌다.
사혼당 놈들이 아무리 부딪혀도 파훼할 수 없었던 미혼진을 단 한 사람이 풀어버렸다.
그는 마교도의 복장을 한 젊은 남자였다.
갓 스무 살쯤 되었을까. 임휘가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친 미혼진을 손쉽게 해제해버릴 정도라면 최소한 초일류에 근접한 무인.
그 나이에 초일류라니, 있을 수가 없…….
아니지. 명진 그 자식만 보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경지였다.
젊은 마교도는 한껏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동시에 그의 양옆으로 다른 마교 무인들이 나는 듯 달려와서 임휘와 동료들을 공격했다.
“흐윽, 흐윽.”
숨이 거꾸로 넘어갈 지경에 이르자, 임휘는 전신에서 힘이 풀렸다.
임휘는 고개를 들었다.
저 십 장 앞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암산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를 쪼개고 나타난 좁은 통로.
임휘는 이를 부드득 갈며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앞쪽에 나타났다.
“대주?”
차가운 인상의 사내. 그는 바로 정의수호대의 대주였다.
“왜 당신이 여기에 있어요? 나, 남쪽을 막겠다며 내려간 것 아니었습니까?”
대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이제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요. 어서, 어서 나갑시다. 본대에 알려야 해요. 놈들의 뒤를 치겠다는 작전도 실패할 것 같다고요.”
“미안하구나.”
“예?”
“본대는 여길 지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처음부터 길은 두 개였다.”
“예에?”
“그렇게만 알아다오.”
임휘는 순간 무너져 내렸다.
“마교 쪽에 부교주의 손자와 손녀가 참전했다고 하더구나.”
그 젊은 놈이 손자였나? 그럼 손녀는?
“그 둘을 보호하고자 호교사자 둘이 또 따라붙었고.”
“제, 제가 왜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대주가 어서 절 데리고 다른 길로 나가세요. 살아서… 살아서…….”
“천마가 크게 분노한 것 같다더구나. 또한 청명진인께서도.”
“그만 말해요!”
“천마가 자신의 뜻을 어긴 교도들을 처벌할 것이야. 아마 사혼당도 거기에 휘말려 모조리 죽고 말겠지. 청명진인은 우리의 비겁함을 벌하실 테고.”
“야이, 미친 새끼야!”
임휘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휙~ 휘익~ 타타탓.
바로 그 순간, 몇 명의 무인들이 이들 근처로 몸을 날려 착지했다.
그들의 숫자는 여덟. 전부 명진을 따라 북쪽 방어에 나섰던 동료들이었다.
“임휘야! 어? 대주? 당신이 어째서…….”
몇 개의 자상으로 인해 얼굴이 피범벅으로 변한 그는 사문이 공동파인 이연숙이었다.
다른 동료들이 임휘를 부축해 일으킬 때까지도 대주는 말없이 이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왜 대주랑 임휘만 여기 있습니까? 나머지는요.”
“명진은?”
대주가 더욱 낮아진 음성으로 물었다.
“녀석은 뒤를 더 막고 오겠다며 남았습니다. 혼자 사혼당 놈들 전부를요.”
이연숙은 그동안 질리도록 보아온 명진의 잔혹한 무력이 다시금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명진이 대단한 놈인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가벼운 상처만 입고 거의 백에 가까운 적을 참살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적의 시신을 쌓아 벽을 만들었습니다. 저희는 거기까지만 돕고 바로 달려왔어요.”
“고생했구나.”
“다들 정신 차려! 대주는, 대주는 미쳤어. 계속 이상한 소리만 하고.”
“뭐? 넌 또 왜 그래.”
동료들은 오히려 임휘를 탓하며 앞으로 몸을 움직였다.
챙!
그때, 대주가 검을 뽑았다.
윙~ 윙~ 윙~
면검이 휘청거리며 진동했다.
“대주! 당신 돌았소?”
해남검파 출신의 고제옹이 빽 소리를 질렀다.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버텨줘야 해. 너희가 죽어야 정파가 산다.”
“미친 소리!”
“날 원망해라. 난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야. 너희의 증오를 먹고.”
삐이이이~
저 소리는……. 명진이다. 명진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대주는 소리가 난 방향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무력은 사문 내에서도 최상에 속했다.
명진과 붙는다면 백 초 이내에 제압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둘 다 서로에게 살초를 전개한다면 명진이 유리했다.
살인에 있어서 명진은 가히 천재였다. 무조건 그의 절대적 우위다.
“그런가? 녀석도 필사적이었군 그래. 왜 아니었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대주가 중얼거리는 말 따위는 이제 잘 들리지도 않았다.
“지옥에서 너흴 만난다면.”
“끄윽!”
“허리 숙여 깊이 사죄하마.”
“대주우우우!”
순식간에 대주가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암벽에 난 통로에서 폭음이 울렸다.
크콰콰콰콰!
마주한 두 암산의 하단부가 사정없이 깨지며 돌무더기를 쏟아냈다.
대주가, 그가 저 안에서 벽력탄을 터트렸으리라.
이번 황산결전에서는 귀하디귀한 벽력탄이 여섯 개나 소모되었다.
저것은 그 마지막 남은 하나.
벽력탄 제조 기술은 군부에서도 극비로 취급하는 것인지라, 저 벽력탄들은 그저 흉내만 낸 정도였다.
그래서 심지도 없고 쏘아 보낼 장비도 없었다.
터트리기 위해서는 오직 고수의 내력을 주입하는 것뿐.
그렇다는 것은 대주가…….
한데 그 자신은 생존할 수 있었음에도 왜 죽음과 맞바꿔 정파의 일원들이자 정의수호대원들인 이들의 탈출을 막으려 했을까.
그 알량한 정파의 자존심 때문에?
휘리릭~ 척!
한 인영이 마지막 남은 정의수호대원들 앞으로 날아와 안착했다.
“명진!”
“명진아!”
“…….”
두상(頭相)을 따라 짧게 자란 머리카락.
반으로 동강나버린 검.
그 검면을 따라 흘러내리는 걸쭉한 핏물.
이제는 명진의 상징이 되어버린 모습이었다.
명진은 통로가 무너진 광경을 보자마자 전후사정을 대번에 알아차린 듯했다.
완전한 혈인이 되었음에도 번뜩이는 두 눈에서 안광이 폭사되었다.
“이제 우린 다 죽었다.”
“젠장. 그래도 다른 녀석들보다는 오래 살았잖아. 가서 무용담 몇 개는 더 늘어놓겠네.”
어차피 진작 생을 포기한 정의수호대였다.
즉, 모두가 천봉산에 뼈를 묻을 각오를 오래 전에 다져놓았다는 뜻.
이들은 겉으로 만큼은 죽음에 초연한 척이라도 하는 게 자신들답다고 여기는 사내들이었다.
“살아.”
갑자기 명진이 입을 열었다.
“꼭 살아.”
“이제는 힘들겠다.”
“아니. 여기 말고 조금 북서쪽으로 가다보면 땅 밑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뭐?”
“어쩌면 거기도 놈들이 장악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곳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명진이 너.”
아마도 명진은 여기까지 오면서 나름대로 다른 탈출로를 찾아본 것 같았다.
“먼저 남쪽으로 가서 살아있는 동료들이 더 있는지 찾아봐. 그래서 함께 탈출해.”
“시간이 없잖아.”
“시간은 내가 만든다. 그리고 너희의 뒤도 내가 지킨다.”
“…….”
일순간 모두는 명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또 다시 홀로 싸우려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천봉산 전체가 그의 상대였다.
“살아야 복수를 하든, 싸질러 놓은 똥을 처먹든 할 수 있다.”
“크윽.”
“썩을 강호무림.”
“……명진아.”
“이 더러운 세상.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알겠어?”
“그래!”
“그러자!”
“빌어먹을! 다 뒈져버려!”
임휘는 벌겋게 가려진 명진의 입가에서 미세한 움직임을 보았다.
그것은 눈물이 날 정도로 처연한 웃음이었다.
* * *
또르르.
진목란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그랬구나, 건무정.
너는 그토록 처절하게 살아왔구나.
그 천봉산에서 천마를 만났고, 거기서 그의 눈에 들어 억겁의 인연을 만들었구나.
늘 고통을 독차지하고, 늘 슬픔을 인내하고, 그래서 천마의 늑대가 되어 강호에 이빨을 드러냈구나.
아아,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온 자신이 너무 부끄럽구나.
정의가 사라지고, 의리도 사라지고, 믿음마저 사라진 강호여.
그 어느 것도 머무르지 않는 무정강호(無停江湖)여…….
“호, 혹시… 하나 여쭈어도 될까요?”
임휘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웃고 있는 것인가.
“임 도사님이 말씀하신 정의수호대에 ‘무당(武當)’의 인물도 있었나요? 있었다면 그… 그는 어찌 되었습니까?”
임휘의 예언은 적중했다.
진목란이 누군가의 생사에 대해 물었으니까.
“딱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꿀꺽.
“대주. 정의수호대주. 그가 유일한 무당의 무인이었지요. 그리고 그의 이름은 진유상(陳流霜).”
진목란의 얼굴이 경악으로 시퍼레졌다.
휘청.
진목란은 한 차례 크게 무너질 뻔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아아.”
절정고수인 진목란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의 충격이라니.
‘이럴 수가. 제발, 제발 아니길 빌었건만. 내가 왜 산문을 속이고 강호로 나왔는데.’
진목란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왜 진 소저께서 정의수호대주의 이름을 듣고 놀라시지요?”
임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나 모르는 척하는 게 분명했다.
말투와는 달리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차가웠으니까.
“아니에요. 아니에요.”
간신히 흐트러진 몸을 추스르고 자세를 바로잡은 진목란이었다.
하지만 사정없이 떨리는 하체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진 소저.”
“……말씀하세요.”
“어찌 하여 이 천봉산이, 저 가여운 귀혼들이 그대를 미워하고 거부했는지 아십니까?”
순간적으로 진목란은 뭔가 뜨끔한 기분에 조금 더 정신이 돌아왔다.
이전까지 계속 자신을 괴롭히던 의문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천봉산은 과거부터 신령한 산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보아왔고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지요. 그러한 신령과 원한이 만났으니 보통의 인간은 그 기운에 넋이 나가버릴 정도랍니다. 그러나 그게 실체에 가깝게 나타나는 일은 드물어요.”
“…….”
“제가 아까 했던 말 기억하나요? 아무리 귀혼을 보는 눈을 가졌어도, 저쪽 세상의 친구들이 허락해야만 혼의 세계를 볼 수 있다는 말.”
“예.”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다시 떨려왔다.
“그들이 당신에게 허락한 겁니다. 와서 보라고. 보고 듣고 고통 받으라고.”
“왜… 일까요?”
“아시잖습니까?”
임휘의 눈에서 푸르스름한 귀기가 증폭되었다.
“당신이 무당의 일맥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주와 피를 나눈, 아주 가까운 혈육이니까요.”
-안 보여! 안 보인다고!
-명진은? 명진은 지금 어디에 있어?
-막아! 북쪽이 뚫렸어!
-젠자아앙! 아파! 아프다고!
-대주에게… 대주를 불러줘!
-아아아악!
-어, 어찌된 거야! 왜 마교놈들이.
-휘! 진이 무너졌다고!
타타타타탓-!
“헉! 헉!”
임휘는 달리고 또 달렸다.
온몸이 뻘건 피에 덮였고, 뻗어나가는 열기로 인해 어깨 위로 김이 풀풀 올라왔다.
‘힘들다. 목이 말라.’
이차 방어선까지 무너졌다. 더 이상 임휘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나 있다면 정의수호대가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암벽 사이의 좁은 길을 통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하루 먼저 움직였던 구파연합의 본대를 따라잡을 수만 있다면…….
처음에 사혼당의 잔챙이들이 자신이 설치한 진에 갇혀 허둥댈 때까지만 해도 크게 희망을 가졌었다.
가지고 있던 마지막 부적들을 전부 소진해가며 만든 세 개의 미혼진(迷魂陣).
북쪽 절벽 근처에 마지막으로 설치한 진은 남은 부적이 없어서 옷을 찢어 피를 발라가며 간신히 발동시킬 수 있었다.
그래도 부족하다 여겼던 걸까.
명진은 자청하여 북쪽을 맡겠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그를 따라 열 명이 서둘러 움직였고, 나머지 삼십이 사전에 정해둔 위치로 알아서 이동했다.
적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았다.
곧 엄청난 숫자의 사혼당 무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적의 제일선은 미리 설치한 함정에 빠져 전멸했으나 제이선, 제삼선이 다시 치고 올라왔다.
임휘의 조는 동료 둘을 잃고 이차 방어선까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미혼진의 영역.
못해도 두 시진만 버텨준다면…….
……희망은 깨졌다.
사혼당 놈들이 아무리 부딪혀도 파훼할 수 없었던 미혼진을 단 한 사람이 풀어버렸다.
그는 마교도의 복장을 한 젊은 남자였다.
갓 스무 살쯤 되었을까. 임휘가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친 미혼진을 손쉽게 해제해버릴 정도라면 최소한 초일류에 근접한 무인.
그 나이에 초일류라니, 있을 수가 없…….
아니지. 명진 그 자식만 보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경지였다.
젊은 마교도는 한껏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동시에 그의 양옆으로 다른 마교 무인들이 나는 듯 달려와서 임휘와 동료들을 공격했다.
“흐윽, 흐윽.”
숨이 거꾸로 넘어갈 지경에 이르자, 임휘는 전신에서 힘이 풀렸다.
임휘는 고개를 들었다.
저 십 장 앞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암산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를 쪼개고 나타난 좁은 통로.
임휘는 이를 부드득 갈며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앞쪽에 나타났다.
“대주?”
차가운 인상의 사내. 그는 바로 정의수호대의 대주였다.
“왜 당신이 여기에 있어요? 나, 남쪽을 막겠다며 내려간 것 아니었습니까?”
대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이제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요. 어서, 어서 나갑시다. 본대에 알려야 해요. 놈들의 뒤를 치겠다는 작전도 실패할 것 같다고요.”
“미안하구나.”
“예?”
“본대는 여길 지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처음부터 길은 두 개였다.”
“예에?”
“그렇게만 알아다오.”
임휘는 순간 무너져 내렸다.
“마교 쪽에 부교주의 손자와 손녀가 참전했다고 하더구나.”
그 젊은 놈이 손자였나? 그럼 손녀는?
“그 둘을 보호하고자 호교사자 둘이 또 따라붙었고.”
“제, 제가 왜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대주가 어서 절 데리고 다른 길로 나가세요. 살아서… 살아서…….”
“천마가 크게 분노한 것 같다더구나. 또한 청명진인께서도.”
“그만 말해요!”
“천마가 자신의 뜻을 어긴 교도들을 처벌할 것이야. 아마 사혼당도 거기에 휘말려 모조리 죽고 말겠지. 청명진인은 우리의 비겁함을 벌하실 테고.”
“야이, 미친 새끼야!”
임휘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휙~ 휘익~ 타타탓.
바로 그 순간, 몇 명의 무인들이 이들 근처로 몸을 날려 착지했다.
그들의 숫자는 여덟. 전부 명진을 따라 북쪽 방어에 나섰던 동료들이었다.
“임휘야! 어? 대주? 당신이 어째서…….”
몇 개의 자상으로 인해 얼굴이 피범벅으로 변한 그는 사문이 공동파인 이연숙이었다.
다른 동료들이 임휘를 부축해 일으킬 때까지도 대주는 말없이 이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왜 대주랑 임휘만 여기 있습니까? 나머지는요.”
“명진은?”
대주가 더욱 낮아진 음성으로 물었다.
“녀석은 뒤를 더 막고 오겠다며 남았습니다. 혼자 사혼당 놈들 전부를요.”
이연숙은 그동안 질리도록 보아온 명진의 잔혹한 무력이 다시금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명진이 대단한 놈인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가벼운 상처만 입고 거의 백에 가까운 적을 참살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적의 시신을 쌓아 벽을 만들었습니다. 저희는 거기까지만 돕고 바로 달려왔어요.”
“고생했구나.”
“다들 정신 차려! 대주는, 대주는 미쳤어. 계속 이상한 소리만 하고.”
“뭐? 넌 또 왜 그래.”
동료들은 오히려 임휘를 탓하며 앞으로 몸을 움직였다.
챙!
그때, 대주가 검을 뽑았다.
윙~ 윙~ 윙~
면검이 휘청거리며 진동했다.
“대주! 당신 돌았소?”
해남검파 출신의 고제옹이 빽 소리를 질렀다.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버텨줘야 해. 너희가 죽어야 정파가 산다.”
“미친 소리!”
“날 원망해라. 난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야. 너희의 증오를 먹고.”
삐이이이~
저 소리는……. 명진이다. 명진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대주는 소리가 난 방향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무력은 사문 내에서도 최상에 속했다.
명진과 붙는다면 백 초 이내에 제압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둘 다 서로에게 살초를 전개한다면 명진이 유리했다.
살인에 있어서 명진은 가히 천재였다. 무조건 그의 절대적 우위다.
“그런가? 녀석도 필사적이었군 그래. 왜 아니었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대주가 중얼거리는 말 따위는 이제 잘 들리지도 않았다.
“지옥에서 너흴 만난다면.”
“끄윽!”
“허리 숙여 깊이 사죄하마.”
“대주우우우!”
순식간에 대주가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암벽에 난 통로에서 폭음이 울렸다.
크콰콰콰콰!
마주한 두 암산의 하단부가 사정없이 깨지며 돌무더기를 쏟아냈다.
대주가, 그가 저 안에서 벽력탄을 터트렸으리라.
이번 황산결전에서는 귀하디귀한 벽력탄이 여섯 개나 소모되었다.
저것은 그 마지막 남은 하나.
벽력탄 제조 기술은 군부에서도 극비로 취급하는 것인지라, 저 벽력탄들은 그저 흉내만 낸 정도였다.
그래서 심지도 없고 쏘아 보낼 장비도 없었다.
터트리기 위해서는 오직 고수의 내력을 주입하는 것뿐.
그렇다는 것은 대주가…….
한데 그 자신은 생존할 수 있었음에도 왜 죽음과 맞바꿔 정파의 일원들이자 정의수호대원들인 이들의 탈출을 막으려 했을까.
그 알량한 정파의 자존심 때문에?
휘리릭~ 척!
한 인영이 마지막 남은 정의수호대원들 앞으로 날아와 안착했다.
“명진!”
“명진아!”
“…….”
두상(頭相)을 따라 짧게 자란 머리카락.
반으로 동강나버린 검.
그 검면을 따라 흘러내리는 걸쭉한 핏물.
이제는 명진의 상징이 되어버린 모습이었다.
명진은 통로가 무너진 광경을 보자마자 전후사정을 대번에 알아차린 듯했다.
완전한 혈인이 되었음에도 번뜩이는 두 눈에서 안광이 폭사되었다.
“이제 우린 다 죽었다.”
“젠장. 그래도 다른 녀석들보다는 오래 살았잖아. 가서 무용담 몇 개는 더 늘어놓겠네.”
어차피 진작 생을 포기한 정의수호대였다.
즉, 모두가 천봉산에 뼈를 묻을 각오를 오래 전에 다져놓았다는 뜻.
이들은 겉으로 만큼은 죽음에 초연한 척이라도 하는 게 자신들답다고 여기는 사내들이었다.
“살아.”
갑자기 명진이 입을 열었다.
“꼭 살아.”
“이제는 힘들겠다.”
“아니. 여기 말고 조금 북서쪽으로 가다보면 땅 밑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뭐?”
“어쩌면 거기도 놈들이 장악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곳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명진이 너.”
아마도 명진은 여기까지 오면서 나름대로 다른 탈출로를 찾아본 것 같았다.
“먼저 남쪽으로 가서 살아있는 동료들이 더 있는지 찾아봐. 그래서 함께 탈출해.”
“시간이 없잖아.”
“시간은 내가 만든다. 그리고 너희의 뒤도 내가 지킨다.”
“…….”
일순간 모두는 명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또 다시 홀로 싸우려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천봉산 전체가 그의 상대였다.
“살아야 복수를 하든, 싸질러 놓은 똥을 처먹든 할 수 있다.”
“크윽.”
“썩을 강호무림.”
“……명진아.”
“이 더러운 세상.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알겠어?”
“그래!”
“그러자!”
“빌어먹을! 다 뒈져버려!”
임휘는 벌겋게 가려진 명진의 입가에서 미세한 움직임을 보았다.
그것은 눈물이 날 정도로 처연한 웃음이었다.
* * *
또르르.
진목란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그랬구나, 건무정.
너는 그토록 처절하게 살아왔구나.
그 천봉산에서 천마를 만났고, 거기서 그의 눈에 들어 억겁의 인연을 만들었구나.
늘 고통을 독차지하고, 늘 슬픔을 인내하고, 그래서 천마의 늑대가 되어 강호에 이빨을 드러냈구나.
아아,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온 자신이 너무 부끄럽구나.
정의가 사라지고, 의리도 사라지고, 믿음마저 사라진 강호여.
그 어느 것도 머무르지 않는 무정강호(無停江湖)여…….
“호, 혹시… 하나 여쭈어도 될까요?”
임휘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웃고 있는 것인가.
“임 도사님이 말씀하신 정의수호대에 ‘무당(武當)’의 인물도 있었나요? 있었다면 그… 그는 어찌 되었습니까?”
임휘의 예언은 적중했다.
진목란이 누군가의 생사에 대해 물었으니까.
“딱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꿀꺽.
“대주. 정의수호대주. 그가 유일한 무당의 무인이었지요. 그리고 그의 이름은 진유상(陳流霜).”
진목란의 얼굴이 경악으로 시퍼레졌다.
휘청.
진목란은 한 차례 크게 무너질 뻔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아아.”
절정고수인 진목란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의 충격이라니.
‘이럴 수가. 제발, 제발 아니길 빌었건만. 내가 왜 산문을 속이고 강호로 나왔는데.’
진목란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왜 진 소저께서 정의수호대주의 이름을 듣고 놀라시지요?”
임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나 모르는 척하는 게 분명했다.
말투와는 달리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차가웠으니까.
“아니에요. 아니에요.”
간신히 흐트러진 몸을 추스르고 자세를 바로잡은 진목란이었다.
하지만 사정없이 떨리는 하체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진 소저.”
“……말씀하세요.”
“어찌 하여 이 천봉산이, 저 가여운 귀혼들이 그대를 미워하고 거부했는지 아십니까?”
순간적으로 진목란은 뭔가 뜨끔한 기분에 조금 더 정신이 돌아왔다.
이전까지 계속 자신을 괴롭히던 의문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천봉산은 과거부터 신령한 산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보아왔고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지요. 그러한 신령과 원한이 만났으니 보통의 인간은 그 기운에 넋이 나가버릴 정도랍니다. 그러나 그게 실체에 가깝게 나타나는 일은 드물어요.”
“…….”
“제가 아까 했던 말 기억하나요? 아무리 귀혼을 보는 눈을 가졌어도, 저쪽 세상의 친구들이 허락해야만 혼의 세계를 볼 수 있다는 말.”
“예.”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다시 떨려왔다.
“그들이 당신에게 허락한 겁니다. 와서 보라고. 보고 듣고 고통 받으라고.”
“왜… 일까요?”
“아시잖습니까?”
임휘의 눈에서 푸르스름한 귀기가 증폭되었다.
“당신이 무당의 일맥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주와 피를 나눈, 아주 가까운 혈육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