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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넌 밖에서 자라.”

“치사해.”

“너 잘 때 옆에서 얼쩡거리다가 칼 맞기 싫다.”

“그건 옛날 일이고.”

“그럼 네 동행인과 같이 자겠다는 소리냐?”

“아, 그건 좀 무리네.”

‘아니, 이 사람들이 대체 무슨 소리를.’

진목란은 잠자리를 두고 쓸데없이 다투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완전히 질려버렸다.

“나는 밖에서 잔다 치고, 그럼 넌? 설마 너, 나의 진 누님한테…….”

“진? 지금 진(陳)이라고 했나?”

“어.”

“……네가 바보가 된 게 아니길 바란다.”

남자가 심각한 눈으로 쏘아보자, 건무정은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을 회피했다.

“아무튼 오늘 너의 밤 친구는 바깥에 널리고 널렸으니 그리 알아라. 난 부엌에서 잘 거고, 이 방은 ‘너의’ 진 누님에게 양보하지.”

남자는 여전히 진목란에게 직접 말을 걸지 않았다.

한데 나의 진 누님이라니. 장난이 심해도 이건 뭐…….

“진 누님, 들으셨죠? 이 친구가 무뚝뚝하고 그래 보여도 손님 대접은 제대로 하는 녀석이니, 마음 푹 놓으시고 쉬시면 됩니다.”

“그랬으면 좋겠네.”

진목란의 말투는 조금 쌀쌀했다.



* * *



천봉산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건무정과 남자는 이때까지도 던지면 툭 받고, 또 던지면 툭툭 받는 대화만 나눌 뿐이었다.

정말 수 년 만에 만난 친우가 맞는 걸까?

대강 듣자하니, 둘은 어떤 ‘적’을 상대하며 목숨을 바쳐 함께 싸웠던 전우가 분명했다.

한데 이들에게서는 전장에서 피를 나눈 끈끈함은 온데간데없었고, 그저 매일매일 일상을 같이한 동네 친구 이상의 모습도 없었다.

남자들의 세계는 원래 이런 건가?

건무정이 투덜대며 나가고, 남자도 말없이 방을 비워주자, 진목란은 참았던 한숨을 토해냈다.

이런 밤일수록 생각이 많아지고 깊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봐야 자신만 손해라는 사실을 잘 아는 진목란이었기에, 그녀는 불편한 잠자리였지만 어떻게든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심신에 안정을 주는 도가(道家) 계열 특유의 심법을 한껏 발휘하고, 몸을 따뜻이 해주는 호흡법을 한참이나 운용한 뒤에야 그녀는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흠칫.

진목란은 갑작스럽게 몸을 움츠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 느낌. 천봉산의 초입 때와 같다.

심연 깊은 곳에서부터 느릿하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이는 그것.

실체는 없으되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

귀(鬼).

‘네가 왜 이곳에 왔는지 묻고 있지 않느냐.’

천봉산의 황무 속에서 자신을 강하게 거부하며 던졌던 물음.

그것은 아직 진목란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나,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공포가 그녀의 머릿속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왜, 왜, 왜.’

“학!”

갑자기 무언가가 몸에서 빠져나와 그녀로부터 급격히 멀어졌다.

타타탓.

진목란은 침상에서 일어나 벌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달빛 아래에서 흐릿하게 흔들리는 푸르스름한 귀기(鬼氣)를.

“후읍.”

숨이 턱 막히는 충격이 그녀의 전신을 쓸고 지나갔다.

대체 이 산에서는, 이 산의 정상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아!”

간신히 시야를 회복한 진목란은 더욱 흐려진 귀기 가운데 선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는 바로 건무정이었다.

옛 동료들이 묻힌 무덤 터 가운데에 우뚝 서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신에게만큼은 분명히 보이는 저 푸른 귀신들을 건무정은 보지 못하는 걸까.

아까 전에 들었었던 의문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안개처럼 너울거리던 귀기는 사람의 형체를 잠깐씩 드러냈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건무정의 주위를 돌며 그의 말을 경청하는 듯하다가도, 갑자기 잔뜩 성을 내는 모습으로 화했다가, 건무정 앞에서 무너지듯 형태를 잃고 사라지는 모습들이 선명했다.

진목란은 차마 청력을 끌어올려 건무정이 하는 말을 듣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그만의 방식이 있다. 그것을 존중하기로 했기에, 그녀는 그의 ‘진혼의식’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스윽.

그때, 건무정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듯, 불편한 듯, 건무정은 떨리는 몸을 조금씩 이동해가며 허공에 어떤 선을 그렸다.

‘오!’

그래, 저것은 춤이다. 아니, 춤이 맞지만 또한 춤이 아니다.

순간, 그녀의 눈이 놀람으로 크게 떠졌다.

‘저 동작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던 움직임이 건무정에게서 발현되고 있었다.



진목란의 재능은 발군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사문은 그녀가 어릴 적부터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고 오직 무공 수련을 강제했다.

바깥세상에서는 마교와 중원정파가 공멸에 이를 만큼 처절한 싸움을 이어나갔고, 그 후에도 천하는 계속되는 강호인들간의 전쟁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당연히 그녀의 사문에서도 많은 이들이 죽어 돌아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문은 그녀를 꼭꼭 숨긴 채 수련에만 매진하게 했다. 이는 분명 미래를 위한 안타까운 결정이었으리라.

진목란은 사문의 무공 중 대부분을 철저히 익히면서, 타 문파의 무공들 또한 배워야 했다.

물론 그러한 무공들은 대개 정수를 빼놓은 반의 반쪽짜리들이었다. 즉, 어딜 가도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잡학이나 마찬가지랄까.

하지만 돌멩이를 만지는 손도 극에 이르면 그 안에서 금을 뽑아낸다고 하지 않던가.

연구하고 또 연구한다면 잡학 속에 녹아든 귀한 가르침들을 언젠가는 모두 뽑아낼 수 있음도 당연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녀는, 그녀의 사문은 진정한 천하제일로 거듭날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절정의 고수인 진목란이 다른 문파 무공의 정수를 알고 그 약점마저 꿰뚫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과연 천하에 그녀의 십초지적이라도 될 만한 무인들이 몇이나 될까.

그녀의 친조부가 수명이 다해 등선(登仙)하지 않았다면…….

그의 유언을 받들 겸, 일생에 품어온 목적도 이룰 겸, 진목란이 사문을 몰래 빠져나와 천마에게 가지 않았다면 말이다.



‘청성(靑城)의 청운적하검법!’

진목란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 건무정은 청성파가 자랑하는 비전 중의 비전인 청운적하검법을 펼치고 있었다.

그것도 그녀가 알고 있던 범위를 훨씬 넘어선 미지의 영역까지.

건무정은 손을 곧게 펴 검을 대신했다. 따라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무공이 검법인지 뭔지를 바로 눈치 채기는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진목란이 청운적하검법임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건무정이 아주 보란 듯이 느리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절정고수의 안목에다 이미 청운적하검법의 정수에 어느 정도 다가간 그녀였기에, 건무정이 얼마나 완벽하게 이 검법을 ‘원형’ 그대로 펼쳐내고 있는지를 깨닫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건 동생은 설마 청성의 문하였나…….’

그렇다면 이는 실로 무서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자파 무공의 극의를 넘어선 청년고수가 어찌 된 영문인지 천마의 귀여움을 받고, 또 그에게서 가르침을 얻어 강호를 진동시키려 한다?

물론 말이 안 되는 가정이었지만, 당장 건무정의 모습을 보면 완전히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한데 청성은 완전히 패망하여 문파의 뿌리 자체도 사라졌지 않았는가.

간신히 살아남은 도인들은 모조리 대무신전에 흡수되었고.

‘앗!’

진목란은 순간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십이성을 대성한 듯했던 청운적하검법이 갑자기 거두어지고, 또 다른 무공이 건무정을 통해 발휘되었기 때문이었다.

‘뭐지? 저것은… 곤륜(崑崙). 곤륜이다.’

태청검법.

이번에는 곤륜파의 상승 절학 중에 하나인 태청검법이 건무정에 의해 재현되었다.

‘도대체가…….’

태청검법은 곤륜파의 수제자에게만 전수된다는 극강의 검법이 아니던가.

혹시 건무정이 운룡검 태화진인의 후계?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익히 알려진 바에 따르면, 태화진인은 공인된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천산마교와의 전쟁 중에 사망했다.

사후 태화진인의 사형제들이 비전을 복구하여 몇몇 귀재들에게 가르침을 내렸다고는 하나, 그들 또한 강호의 전란 속에서 산화했다고 했다.

물론 곤륜파 또한 현재 강호의 전면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성세가 백분지일로 축소된 채 곤륜산 어딘가에 숨어들어 속세와 인연을 끊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는 있는데, 그게 진실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진목란의 의문이 깊이를 더해갈 무렵, 건무정이 내뿜던 기도가 또다시 달라졌다.

크엉! 크어엉!

용의 울부짖음.

이 강맹한 장법은… 개방(丐幇)의 항룡십팔장.

대체 어디까지 놀라야 할까.

건무정의 항룡십팔장 또한 진목란이 어렴풋이 깨우친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 * *



점창의 사일검법, 화산의 산화무영수, 공동의 복마검법, 종남의 태을검법, 하북팽가의 벽력도법, 아미의 복호권 등등, 등등등.

건무정은 잠시도 쉬지 않고 중원 제문파들의 신공절학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개중에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검, 도, 장, 권, 봉법들도 여럿 있었다.

아마도 강호의 대문파로 분류되는 곳이 아닌 다소 세력이 약한 문파들과 이름 없이 사라져간 은거기인들의 무공이기 때문이리라.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한 사람에게서, 수많은 절세의 무예들이, 그것도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미쳤다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도저히 말이 안 돼는, 모조리 다 기적의 영역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기적은 존재했다. 이 현실 세계에.

바로 저 앞에.

경악 그 자체였던 진목란의 눈동자는 시간이 한참이나 흐르자 이제는 몽롱하게 변했다.

완전히 감동에 사로잡혀버린 여인의 눈.

진목란은 볼을 타고 줄줄 흐르는 눈물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한때는 자신과 사문이 꾸었던 꿈이 바로 저기에 있었다. 그 정수를 듬뿍 머금은 상태로.

손을 뻗으면 분명 닿을 듯한데, 어쩐지 그러기가 싫었다.

그래, 저것은 춤이다. 춤.

무공이니 무예니 하는 기준에서 까마득히 위로 올라가면, 그것은 하나의 동작이요, 춤이 된다.

극을 돌파한 깨달음.

그 안에서 휘돌아 나오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 되고 감동이 되며 안식이 된다.

진목란의 눈물은 단순한 감정의 산물이 아니었다.

이는 깨달은 자를 최초로 맞이한 행운아의 전율임과 동시에 영혼의 상처를 회복하고 내뿜는 절정의 환희였다.

천봉산에서 강하게 느꼈던 미지의 공포.

그녀를 거부하던, 죽은 자들의 원한이 눈물과 함께 사라져갔다.

그것은 어쩌면, 건무정의 주위를 배회하던 검푸른 혼령들이 하나하나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승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건무정의 저 진혼무(鎭魂舞)에 이승의 업을 모두 씻어낸 고혼(孤魂)들이 진목란을 ‘용서’했기 때문은 또 아니었을까.

“아, 아…….”

진목란은 흐느껴 울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작게 소리 내어 탄식했다.



“이제 미련은 없을 겁니다, 모두들.”

화아악.

감동이 사라지고 충격이 전신을 덮쳤다.

이 음성은 그 남자의 것.

어느새 진목란의 옆에 선 남자는 한참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모양으로 건무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저에게도 저들이 보였지요?”

진목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 방심한 것인가.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건 정말 해도 너무했다.

이 남자에게 두 번이나 ‘당했다.’

그의 능력이 남달라서라고 납득해버리면 차라리 속이라도 편할 텐데.

아니, 혹여 그게 진실일 지도.

“가끔, 아주 가끔 진 소저처럼 특별한 수련 없이도 귀(鬼)의 경계를 보는 눈을 지닌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저쪽 세상의 친구들이 허락해야 하지만요.”

“아, 예.”

진목란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는 안 되었지만 일단 인정을 해주었다.

“저 녀석은 사실 아무것도 보지 못해요. 그냥… 막연하게나마 느끼는 게 전부랍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의무감을 가졌고요.”

“의무감이라고요?”

남자가 천천히 진목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더는 그의 눈빛에서 진목란에 대한 경계라든지 부담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다 돌려줌으로써 버리는 것.”

“돌려주고 버린다?”

“지금은 그리만 아셔도 됩니다. 나머지는 무정이가 후에 알려주지 않을까요?”

천 안에 가려진 남자의 입이 부드럽게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늦었지만 인사드리지요.”

“아.”

진목란은 상대가 정중하게 나오자, 이내 자세를 고치고 정면으로 그를 마주했다.

“모산파(茅山派)의 임휘(任輝)라고 합니다. 그리 밝은 성격이 아니라서 이름값을 못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