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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무신(武神)이 사혼(邪魂)을 공격했다!
그게 정기적인 순찰을 나왔던 조장의 독단이든, 상층부의 명령이든, 어쨌거나 같은 시간에 세력의 경계를 점검하던 사혼맹 무인들에게 먼저 독수를 날렸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기습에도 사혼맹 측의 반격은 빨랐다.
마침 일이 잘되려고 했는지 이날 순찰에는 일류 이상의 고수가 동행했고, 그의 활약으로 사혼맹은 겨우 네 명의 무인만 잃은 채 대무신전 순찰조를 전멸시킬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사혼맹이 발표한 흑죽림 사태의 전말이었다.
대무신전은 즉각 이 일은 사혼맹의 음모이며, 오히려 억울하게 공격을 당해 멸마대 무인들이 살해당한 것이라며 반박에 나섰다.
그리고 곧장 절정 고수를 위시한 중앙의 무인 일백을 파견해 진상을 밝힐 것이라고 공표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 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명분’은 지극히 정치적인 장치였다. 실제로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싸워야 할 이유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소리 없는 전쟁이 끝나고, 바야흐로 거대 규모의 대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명진?
남자는 건무정을 명진이라 불렀다.
시신 없는 무덤의 비석에 쓰여 있던 이름 또한 명진.
아마도 남자는 건무정이 죽었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들은 과거 어떤 관계였고, 또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무덤의 주인들은 또 누구이며, 그들은 왜 천봉산에 고이 잠들어 있는 것일까.
건무정을 향한 적호의 태도를 보면, 한때는 ‘적’이었음이 확실한 건무정과 천산마교.
천마는 어찌하여 적의 하수인인 건무정을 거두어야 했고, 그토록 안타까운 정을 주었을까.
진목란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그래, 난 살아있다. 빌어먹게도.”
“크크크. 크크큿.”
남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겨 무덤들 안으로 들어갔다.
건무정 바로 옆의 비석 앞에 쪼그리고 앉은 남자.
어느덧 그의 눈은 다시금 말라서 조금 전의 그 냉정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홍두 이 녀석의 머리는 끝내 찾을 수 없었지.”
그는 비석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아직 어딘가의 바위 사이에 끼어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 진후는 그나마 나았어. 짐승들이 뜯어먹고 배가 불렀는지 얼굴은 남겨두었거든.”
곧이어 남자는 주변의 비석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양백이는 손가락 두 개만 남았다. 나머지는 다 터져 여기저기 흩어졌던 게지. 왼손 검지의 커다란 점이 아니었다면 나도 몰랐을 거야.”
“…….”
“이쪽 나옥 도장 기억나지? 우리보다 겨우 두 살 많은 주제에 어른처럼 굴어서 도장 어른이라고 부르며 놀렸었잖아.”
끄덕.
“그래도 형은 형이더라. 어린 녀석들 셋을 더 살리고 죽었어. 온몸을 난자당해 남아난 게 없었지만, 피 무더기 속에서 나옥 형이 꼈던 반지를 찾았으니 다행이랄까. 그런데 뭐 그 어린 것들도 결국엔 다 죽었더군. 걔네들 무덤은 저기 있어.”
남자의 입에서는 계속 무덤 주인들의 최후가 흘러나왔다.
그 죽음들이 하나같이 끔찍하고 처참하여 진목란은 상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지만, 건무정과 남자의 이 무거운 분위기에 압도당해 함부로 움직이기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남자는 스물두 명의 죽음들을 잔잔하게 읊었다.
“여긴 도저히 시신이든 뭐든 찾을 수 없었던 이들을 위해 만들었다. 그리고… 살아나가기는 했지만 못내 불행하게 죽어간 녀석들도.”
비석만 세워진 장소를 가리켰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건무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이윽고.
“많이 늦었구나.”
“그래.”
“조금만 더 일찍 오지 그랬냐.”
“원래는 지금보다 한 칠팔 년 정도는 더 걸릴 뻔했다.”
“그러냐.”
“…….”
“왜 살아있음을 진작 알려주지 않았어.”
“…….”
“네 녀석이… 명진이 네가 죽지 않았음을 남은 모두가 알았다면 철호도, 무석이도, 수라 형님도 각자 사문으로 돌아갔다가 억울하게 살해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진목란은 남자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원망과 대상을 알 수 없는 증오를 발견했다.
대체 왜?
왜 남자는 건무정을 만나자마자 저토록 슬프고도 비참한 이들의 얘기를 들려주는 것일까.
무덤의 주인들은 누구이며, 또 누구와 싸워야했고, 그 싸움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옛 비사를 알 길이 없던 진목란으로서는 그저 남자의 태도가 지나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나는 약했으니까.”
“어울리는 대답은 아니로군. 그래서 지금은 강해졌고?”
“아직.”
건무정은 이 말을 마치고 씨익 웃었다.
그 웃음 속에서 뭔가를 발견한 것일까. 남자는 잠시간 건무정을 응시했다.
“때리고 싶냐? 그럼 한 대 갈겨도 된다. 딱 거기까지만 봐줄 거야.”
“크크크.”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너다워서 안심했다.”
“칭찬이지?”
“그렇게 생각하든가.”
남자의 서늘했던 눈빛은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단 몇 마디의 말로 그의 마음을 녹여버린 건무정의 가공할 ‘친화력’에 진목란은 또 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이내 진목란을 지그시 응시하는 것으로 건무정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사정이 있어서 동행하게 된 누님이야.”
건무정이 머뭇거리는 진목란을 대신해 말했다.
그럼에도 남자는 진목란을 꺼려하는 듯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걱정 마. 일단 지금은 내가 목숨을 맡기고 있는 분이시니.”
“네가?”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그가 알고 있는 ‘명진’이라는 인간은 그 어떤 누구에게도 자신의 옆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존재였다.
홀로 싸우다 죽을지언정 타인의, 또 동료의 검을 곁에 두었다고 안심해버리는 자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믿지 않고,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살아가는 부류 또한 아니었다.
명진이 그토록 혼자 싸우길 고집했던 이유는 동료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적이 백 명이건, 천 명이건 상관없었다.
명진은 누구보다 먼저 검을 뽑았고, 누구보다 먼저 적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자신이 날뛰는 만큼 동료들의 숨이 더 오래 붙어 있을 테니까.
그 최후의 날에도 그랬다.
정의수호대라는 허울뿐인 이름으로 남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
명진은 그들의 방패가 되어 이 천봉산을, 저 수없이 많은 백석(白石)들을 적의 피로 물들였다.
아무튼 ‘명진’하면 떠오르는 추억은 이쯤에서 정리하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생명을 걸어볼 만큼 믿음직한 자가 명진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명진이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그 앞뒤 얘기는 더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진짜배기라는 뜻이니까.
그런데 왜 진목란이어야 했을까.
남자는 건무정이 진목란의 호위를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는 모습이었다.
“배고프다.”
건무정이 남자에게 말했다.
“올라오는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어.”
“이제야 네가 살아있는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 자꾸 죽일래?”
“그렇군.”
남자는 터덜터덜 걸어가 명진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 비석을 발로 걷어차려 했다.
“그건 그냥 내버려 둬.”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잖아.”
“아니. 명진은 죽었어.”
“…….”
“세상에 명진이라고 불렸던 어리석은 바보는 이제 없다. 이해하지?”
“스스로의 근본을 버렸다는 뜻이냐?”
“멍청이.”
건무정은 남자를 놀리며 껄껄 웃었다.
“내 처음 근본으로 돌아가는 거야.”
“네 의지가 그렇다면.”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더 이상의 의문을 접었다.
“이제 뭐라고 불러줄까?”
“무정. 건무정. 누가 지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적에는 그게 내 이름이었어. 꽤나 오랫동안 까먹고 있었지.”
건무정을 향해 알겠다는 대답 대신 눈을 한 번 깜박여 준 남자는 이내 진목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따라오라며 머리를 삐딱하게 기울인 뒤, 무덤 너머 자신의 거처로 발길을 옮겼다.
무덤 근처의 모옥은 초라한 겉과는 달리 내부는 비교적 잘 정돈되고 아늑했다.
사람 한 명이 부족함 없이 생활할 정도로 식량 사정도 넉넉해 보였고, 잠자리며 각종 생활용구들도 빠짐이 없었다.
건무정은 남자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신의 요리 솜씨를 과시하듯, 챙겨온 재료와 모옥에 딸린 부엌에 있는 재료를 섞어 보기에도 훌륭한 식사를 차려냈다.
남자는 끝까지 얼굴의 검은 천을 풀지 않았다.
아래를 잡고 천을 조금 들어 올려 진목란이나 건무정이 보지 못하도록 하고는 음식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서 한참을 씹으며 그 놀라운 맛을 음미했다.
그의 행동을 통해 진목란은 남자가 상당히 오랜 기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음을 눈치 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남자는 감은 눈 사이로 몇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세상에 음식을 먹으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사람이 있다니. 하지만 진목란은 신기해하면서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건무정의 요리에 흠뻑 빠져 언젠가는 비법을 얻어내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심지어 건무정에게 적대적(?)인 적호조차도 건무정이 만든 음식을 은근히 탐내기도 했음을 상기하면, 남자의 저러한 반응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자칭 ‘천하제일숙수의 수제자’라 주장하는 건무정의 솜씨이니만큼, 어디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특별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중이리라.
“어때? 육칠 년 만에 다시 만나본 내 음식 솜씨가.”
“좋아졌구나.”
“신경 좀 썼어.”
건무정의 저런 거만한 표정과 자세는 진목란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역시나… 저 남자가 친구이기 때문이려나.
친구니까, 친구이기에 뭐든지 자랑하고 싶고, 또 인정받고 싶어 하는 소년 같은 치기(稚氣)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어디서 똥을 주워 와서는 음식이랍시고 내놓더니.”
“그랬었나? 그래도 다들 잘도 먹었었지, 아마? 허허헛.”
“네 요리를 먹고 역겹다면서 토하던 녀석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식사 때가 되면 또 너의 그 음식인지 쓰레기인지 모를 그것들을 꾸역꾸역 입에 넣고는 했지.”
“그걸 먹고서라도 살아야 했고, 또 살고 싶었을 테니까.”
‘아……!’
그제야 진목란은 왜 남자가 눈물을 흘렸는지, 그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남자의 저 눈물은 건무정이 만들었다던 그 ‘똥’을 먹어가면서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했던 자신과 동료들을 위한 일종의 이별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사내들이었다.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들이 지금의 상황과 전혀 섞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진목란은 이런 멋없는 대화들이 저 둘의 가슴 속에 숨겨둔 뜨거운 오열을 대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둘을 보고 있자니 진목란은 왠지 모를 찡한 감정이 솟아남을 느꼈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게 부러움이라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삶에는 친구란 게 없었다.
산문의 얼마 되지 않는 또래들은 진목란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고, 심지어 어른들조차 그녀에게 쉬이 다가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대제자였고 그녀의 사촌오라비였던 ‘그’만이 그녀에게 살갑게 굴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녀의 세상에서 사라졌다.
잠시 상념에 잠겼었던 진목란은 남자의 음성에 다시금 현실로 돌아왔다.
-무신(武神)이 사혼(邪魂)을 공격했다!
그게 정기적인 순찰을 나왔던 조장의 독단이든, 상층부의 명령이든, 어쨌거나 같은 시간에 세력의 경계를 점검하던 사혼맹 무인들에게 먼저 독수를 날렸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기습에도 사혼맹 측의 반격은 빨랐다.
마침 일이 잘되려고 했는지 이날 순찰에는 일류 이상의 고수가 동행했고, 그의 활약으로 사혼맹은 겨우 네 명의 무인만 잃은 채 대무신전 순찰조를 전멸시킬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사혼맹이 발표한 흑죽림 사태의 전말이었다.
대무신전은 즉각 이 일은 사혼맹의 음모이며, 오히려 억울하게 공격을 당해 멸마대 무인들이 살해당한 것이라며 반박에 나섰다.
그리고 곧장 절정 고수를 위시한 중앙의 무인 일백을 파견해 진상을 밝힐 것이라고 공표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 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명분’은 지극히 정치적인 장치였다. 실제로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싸워야 할 이유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소리 없는 전쟁이 끝나고, 바야흐로 거대 규모의 대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명진?
남자는 건무정을 명진이라 불렀다.
시신 없는 무덤의 비석에 쓰여 있던 이름 또한 명진.
아마도 남자는 건무정이 죽었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들은 과거 어떤 관계였고, 또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무덤의 주인들은 또 누구이며, 그들은 왜 천봉산에 고이 잠들어 있는 것일까.
건무정을 향한 적호의 태도를 보면, 한때는 ‘적’이었음이 확실한 건무정과 천산마교.
천마는 어찌하여 적의 하수인인 건무정을 거두어야 했고, 그토록 안타까운 정을 주었을까.
진목란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그래, 난 살아있다. 빌어먹게도.”
“크크크. 크크큿.”
남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겨 무덤들 안으로 들어갔다.
건무정 바로 옆의 비석 앞에 쪼그리고 앉은 남자.
어느덧 그의 눈은 다시금 말라서 조금 전의 그 냉정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홍두 이 녀석의 머리는 끝내 찾을 수 없었지.”
그는 비석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아직 어딘가의 바위 사이에 끼어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 진후는 그나마 나았어. 짐승들이 뜯어먹고 배가 불렀는지 얼굴은 남겨두었거든.”
곧이어 남자는 주변의 비석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양백이는 손가락 두 개만 남았다. 나머지는 다 터져 여기저기 흩어졌던 게지. 왼손 검지의 커다란 점이 아니었다면 나도 몰랐을 거야.”
“…….”
“이쪽 나옥 도장 기억나지? 우리보다 겨우 두 살 많은 주제에 어른처럼 굴어서 도장 어른이라고 부르며 놀렸었잖아.”
끄덕.
“그래도 형은 형이더라. 어린 녀석들 셋을 더 살리고 죽었어. 온몸을 난자당해 남아난 게 없었지만, 피 무더기 속에서 나옥 형이 꼈던 반지를 찾았으니 다행이랄까. 그런데 뭐 그 어린 것들도 결국엔 다 죽었더군. 걔네들 무덤은 저기 있어.”
남자의 입에서는 계속 무덤 주인들의 최후가 흘러나왔다.
그 죽음들이 하나같이 끔찍하고 처참하여 진목란은 상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지만, 건무정과 남자의 이 무거운 분위기에 압도당해 함부로 움직이기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남자는 스물두 명의 죽음들을 잔잔하게 읊었다.
“여긴 도저히 시신이든 뭐든 찾을 수 없었던 이들을 위해 만들었다. 그리고… 살아나가기는 했지만 못내 불행하게 죽어간 녀석들도.”
비석만 세워진 장소를 가리켰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건무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이윽고.
“많이 늦었구나.”
“그래.”
“조금만 더 일찍 오지 그랬냐.”
“원래는 지금보다 한 칠팔 년 정도는 더 걸릴 뻔했다.”
“그러냐.”
“…….”
“왜 살아있음을 진작 알려주지 않았어.”
“…….”
“네 녀석이… 명진이 네가 죽지 않았음을 남은 모두가 알았다면 철호도, 무석이도, 수라 형님도 각자 사문으로 돌아갔다가 억울하게 살해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진목란은 남자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원망과 대상을 알 수 없는 증오를 발견했다.
대체 왜?
왜 남자는 건무정을 만나자마자 저토록 슬프고도 비참한 이들의 얘기를 들려주는 것일까.
무덤의 주인들은 누구이며, 또 누구와 싸워야했고, 그 싸움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옛 비사를 알 길이 없던 진목란으로서는 그저 남자의 태도가 지나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나는 약했으니까.”
“어울리는 대답은 아니로군. 그래서 지금은 강해졌고?”
“아직.”
건무정은 이 말을 마치고 씨익 웃었다.
그 웃음 속에서 뭔가를 발견한 것일까. 남자는 잠시간 건무정을 응시했다.
“때리고 싶냐? 그럼 한 대 갈겨도 된다. 딱 거기까지만 봐줄 거야.”
“크크크.”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너다워서 안심했다.”
“칭찬이지?”
“그렇게 생각하든가.”
남자의 서늘했던 눈빛은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단 몇 마디의 말로 그의 마음을 녹여버린 건무정의 가공할 ‘친화력’에 진목란은 또 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이내 진목란을 지그시 응시하는 것으로 건무정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사정이 있어서 동행하게 된 누님이야.”
건무정이 머뭇거리는 진목란을 대신해 말했다.
그럼에도 남자는 진목란을 꺼려하는 듯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걱정 마. 일단 지금은 내가 목숨을 맡기고 있는 분이시니.”
“네가?”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그가 알고 있는 ‘명진’이라는 인간은 그 어떤 누구에게도 자신의 옆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존재였다.
홀로 싸우다 죽을지언정 타인의, 또 동료의 검을 곁에 두었다고 안심해버리는 자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믿지 않고,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살아가는 부류 또한 아니었다.
명진이 그토록 혼자 싸우길 고집했던 이유는 동료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적이 백 명이건, 천 명이건 상관없었다.
명진은 누구보다 먼저 검을 뽑았고, 누구보다 먼저 적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자신이 날뛰는 만큼 동료들의 숨이 더 오래 붙어 있을 테니까.
그 최후의 날에도 그랬다.
정의수호대라는 허울뿐인 이름으로 남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
명진은 그들의 방패가 되어 이 천봉산을, 저 수없이 많은 백석(白石)들을 적의 피로 물들였다.
아무튼 ‘명진’하면 떠오르는 추억은 이쯤에서 정리하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생명을 걸어볼 만큼 믿음직한 자가 명진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명진이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그 앞뒤 얘기는 더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진짜배기라는 뜻이니까.
그런데 왜 진목란이어야 했을까.
남자는 건무정이 진목란의 호위를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는 모습이었다.
“배고프다.”
건무정이 남자에게 말했다.
“올라오는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어.”
“이제야 네가 살아있는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 자꾸 죽일래?”
“그렇군.”
남자는 터덜터덜 걸어가 명진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 비석을 발로 걷어차려 했다.
“그건 그냥 내버려 둬.”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잖아.”
“아니. 명진은 죽었어.”
“…….”
“세상에 명진이라고 불렸던 어리석은 바보는 이제 없다. 이해하지?”
“스스로의 근본을 버렸다는 뜻이냐?”
“멍청이.”
건무정은 남자를 놀리며 껄껄 웃었다.
“내 처음 근본으로 돌아가는 거야.”
“네 의지가 그렇다면.”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더 이상의 의문을 접었다.
“이제 뭐라고 불러줄까?”
“무정. 건무정. 누가 지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적에는 그게 내 이름이었어. 꽤나 오랫동안 까먹고 있었지.”
건무정을 향해 알겠다는 대답 대신 눈을 한 번 깜박여 준 남자는 이내 진목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따라오라며 머리를 삐딱하게 기울인 뒤, 무덤 너머 자신의 거처로 발길을 옮겼다.
무덤 근처의 모옥은 초라한 겉과는 달리 내부는 비교적 잘 정돈되고 아늑했다.
사람 한 명이 부족함 없이 생활할 정도로 식량 사정도 넉넉해 보였고, 잠자리며 각종 생활용구들도 빠짐이 없었다.
건무정은 남자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신의 요리 솜씨를 과시하듯, 챙겨온 재료와 모옥에 딸린 부엌에 있는 재료를 섞어 보기에도 훌륭한 식사를 차려냈다.
남자는 끝까지 얼굴의 검은 천을 풀지 않았다.
아래를 잡고 천을 조금 들어 올려 진목란이나 건무정이 보지 못하도록 하고는 음식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서 한참을 씹으며 그 놀라운 맛을 음미했다.
그의 행동을 통해 진목란은 남자가 상당히 오랜 기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음을 눈치 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남자는 감은 눈 사이로 몇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세상에 음식을 먹으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사람이 있다니. 하지만 진목란은 신기해하면서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건무정의 요리에 흠뻑 빠져 언젠가는 비법을 얻어내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심지어 건무정에게 적대적(?)인 적호조차도 건무정이 만든 음식을 은근히 탐내기도 했음을 상기하면, 남자의 저러한 반응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자칭 ‘천하제일숙수의 수제자’라 주장하는 건무정의 솜씨이니만큼, 어디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특별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중이리라.
“어때? 육칠 년 만에 다시 만나본 내 음식 솜씨가.”
“좋아졌구나.”
“신경 좀 썼어.”
건무정의 저런 거만한 표정과 자세는 진목란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역시나… 저 남자가 친구이기 때문이려나.
친구니까, 친구이기에 뭐든지 자랑하고 싶고, 또 인정받고 싶어 하는 소년 같은 치기(稚氣)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어디서 똥을 주워 와서는 음식이랍시고 내놓더니.”
“그랬었나? 그래도 다들 잘도 먹었었지, 아마? 허허헛.”
“네 요리를 먹고 역겹다면서 토하던 녀석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식사 때가 되면 또 너의 그 음식인지 쓰레기인지 모를 그것들을 꾸역꾸역 입에 넣고는 했지.”
“그걸 먹고서라도 살아야 했고, 또 살고 싶었을 테니까.”
‘아……!’
그제야 진목란은 왜 남자가 눈물을 흘렸는지, 그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남자의 저 눈물은 건무정이 만들었다던 그 ‘똥’을 먹어가면서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했던 자신과 동료들을 위한 일종의 이별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사내들이었다.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들이 지금의 상황과 전혀 섞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진목란은 이런 멋없는 대화들이 저 둘의 가슴 속에 숨겨둔 뜨거운 오열을 대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둘을 보고 있자니 진목란은 왠지 모를 찡한 감정이 솟아남을 느꼈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게 부러움이라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삶에는 친구란 게 없었다.
산문의 얼마 되지 않는 또래들은 진목란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고, 심지어 어른들조차 그녀에게 쉬이 다가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대제자였고 그녀의 사촌오라비였던 ‘그’만이 그녀에게 살갑게 굴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녀의 세상에서 사라졌다.
잠시 상념에 잠겼었던 진목란은 남자의 음성에 다시금 현실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