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7화]







저것은 무덤일까?

사람이 묻힌 것 치고는 지나치게 작기는 하다.

물론 어떤 것은 상당히 컸다. 만일 진짜 누군가가 죽어 누워있다면, 그는 살아생전 상당히 큰 덩치의 소유자였으리라.

그렇게 여기저기 봉긋봉긋 땅에서 솟은 돌무더기 앞 비석들이 스물… 스물두 개.

그리고 그저 평평한 바닥에 비석만 삐쭉 세워져 있는 것이 열네 개.

도합 서른여섯 개에 이르는 비석들에는 한 사람의 필체로 각각의 이름들이 쓰여 있었다.

오래 전에 세상에서 잊힌 이들의.



사각사각.

푸른 안개가 얕게 깔려있는 땅을 밟는 소리.

이 발소리의 주인인 건무정은 한참 전에 나귀에서 내려 이곳까지 걸어왔다.

진목란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함께 땅을 밟았다.

이유는 몰랐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손길처럼 애틋하게 건무정을 감싸며 길을 인도하는 안개를 보노라니,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간 모였다가 흩어지는 안개의 형체는 사람의 그것과도 흡사했다.

건무정의 어깨를 두드리는가 하면, 그를 살포시 안았다가 사라지기도 했으며, 서너 사람의 형상을 이루어 잠깐 길을 막았다가 이내 비켜주듯 내려앉았다.

예전에 어떤 도사(道士)가 세상은 넓고 항상 신비롭기만 하다고 그랬던가.

진목란은 그러한 신비가 지금 자신 앞에 펼쳐져있음을 깨달았다.

이제껏 그녀는 죽은 이의 넋이라는 게 있음을 믿지 않았었다.

한평생 배워왔던 도문(道門)의 가르침은 그 반대를 설파했으나, 역시나 현실적인 진목란은 그 뜬구름 같았던 이야기들을 속으로는 부정했었다.

한데 지금 보고 있는 저 현상들은 그녀의 현실 인식을 아득히 넘어선 일종의 기적이었다.

스르르.

안개가 뭉쳐 그녀의 코앞에서 또 사람의 형체를 이루었다.

확 돋아나는 소름은 절정고수의 육체를 가진 그녀조차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진목란이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집중하자, 너울거리던 안개들이 잠잠해졌다.

이때까지도 건무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보지 못한 건가? 설마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걸까?

아니면 이 귀기어린 안개의 본질을 자신만이 볼 수 있었던 걸까?

여러 차례 깊이 심호흡을 마친 진목란은 이내 얼굴을 굳히고 앞으로 나아갔다.



“왜 다들 여기 누워있는 거야…….”

건무정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니, 진목란은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쉬이이~

사방에서 바람이 일어 안개들을 흐트러뜨렸다.

건무정은 비석들 사이를 거닐며 말을 계속했다.

“원망해? 왜 이제야 왔느냐고?”

원망이라……. 무엇 때문에?

“내 용기가 부족했던 건데 누구를 탓할까. 다 버리고 나서야 이곳으로 돌아오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은 핑계였던 거겠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건무정을 지켜보던 진목란은 왜 건무정이 천봉산과 가까워질수록 말이 줄어들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그 자신의 과거와 만나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유쾌한 매력덩어리인 건무정이 아닌, 가면 속의 진짜 건무정과.

이 서글픔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진목란은 절로 나오는 탄식을 금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 유난히 검은 색을 띈 비석 하나가 들어왔다.

명진(明眞).

다른 열세 개의 비석들처럼 돌무덤조차 남기지 못한 불행한 이의 이름일 터.

그녀는 애써 기억을 더듬어 과거에 명진이라는 이름을 썼던 무인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어쩌면 여기 묻혔거나 비석으로만 남은 이들 모두가 세상에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 존재들일지도 몰랐다.

진목란은 다시금 밀려오는 울적함에 소리 죽여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시오?”

흠칫.

그때, 바로 뒤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오자 진목란은 반사적으로 내력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명색이 자신은 ‘절정’이라 불리는 지고한 경지의 고수가 아니던가.

그런데 벌써 여러 번이나 경계를 풀고 기감을 살피지 않았다.

잘난 것도 없으면서 괜히 혼자 잘난 맛에 쓸데없이 거들먹거리기라도 한 것일까.

험난하기 짝이 없는 아래 세상에서 이랬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았으리라.

“누구신데 남의 거처를 서성거리고 있는 게요?”

돌아본 자리에는 헝클어진 장발을 늘어뜨린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얼굴 대부분이 검은 천에 가려져 진면목을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차갑게 번뜩이는 두 눈만은 그대로 드러나 그의 감정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은 ‘침입자’에 대한 경계심. 그리고 어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느냐는 궁금증에 더해, 허튼짓을 하면 죽이겠다! 라는 의지였다.

“이보시오, 거기서 나오시오. 그대가 감히 산책할 공간이 아니외다.”

남자는 비석들 사이에 선 건무정을 향해 경고를 던졌다.

그 순간, 남자는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깜짝 놀라더니 뒷걸음질을 쳤다.

“역시.”

건무정이 조금 몸을 돌리며 말했다.

“너일 줄 알았어.”

남자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우리 중에 네가 제일 정이 많았지.”

“너… 살아있었느냐?”

진목란은 남자의 눈이 순식간에 습해지는 장면을 보았다.

“말해라, 명진. 너 살아있는 게 맞느냐?”



* * *



농서와 사천의 경계 어딘가에 위치한 대나무 숲.

유난히 그 색이 검다 하여 흑죽림이라고 불리는 이 숲에도 밤이 찾아왔다.

스윽, 스윽.

일대의 무인들이 숲의 가운데를 지나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 수는 약 이십.

모두가 무장을 든든히 갖추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최근에 윗사람들끼리 수군거리는 말들이 이들과 같은 아랫사람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전해졌기 때문일 터.

그래서인지 표정들이 한결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바스락.

앞쪽에서 마른 풀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이쪽의 무인들이 일제히 옆으로 퍼지며 자세를 잡았다.

여차하면 바로 병기를 뽑아들고 달려들 수 있도록.

“…….”

맨 앞에 선 중년 무인은 미간을 좁히며 정면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천삼월.”

일종의 암구호였다. 중년 무인은 이 말을 내뱉고 나서 가만히 저쪽의 반응을 기다렸다.

“백팔배.”

자신이 원하던 대답이 맞는 듯, 중년 무인의 주름진 이마가 평평하게 펴졌다.

중년 무인이 먼저 몸을 세우고 힘을 풀자, 나머지 인원들도 몸의 긴장을 쫙 빼며 굳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창호냐?”

“맞소. 나요, 칠구 형님.”

중년 무인을 형님이라 일컬으며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뒤쪽으로 이쪽과 비슷한 수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뭘 그렇게 쫄고 그러오, 킬킬킬.”

창호라 불린 근육질 사내는 중년 무인 칠구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시끄럽다, 이놈아. 네놈들도 겁을 먹고 컴컴한 데에 숨어 있지 않았느냐.”

“니들 겁먹었어?”

창호는 자신이 이끌고 온 무인들을 돌아보며 확 인상을 찌푸렸다.

“대무신전(大武神殿)의 고수들을 앞에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조장.”

“몸이 오슬오슬 떨리는 걸 멈출 길이 없소이다. 아무래도 뱃속이 좀 뜨뜻해야 나아질 것 같은데 말이오.”

창호는 조원들의 뻔뻔함이 지겹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저런 놈들이오, 참나. 내 저것들을 뭘 믿고 데리고 다니나 몰라.”

“간만에 만났는데 술이나 풀자.”

“바라던 바요.”

분위기가 훈훈해지자 양측은 가까이 붙어서 서너 명씩 어울려 자리를 만들었다.

“한 잔 따라 봐라.”

“그럽시다. 대무신전 동검성 사벌단 멸마대 구천삼조 조장 어른께 이 미천한 동생이 한 잔 올려 드리오.”

창호가 준비해온 술병을 들어 칠구의 잔에 부었다.

칠구는 술이 가득 찬 잔을 곧바로 입에 털어 넣고는 크게 이맛살을 구겼다.

“크으. 역시 술은 너희 쪽이 더 독해. 뱃속에서 불이 일어나는구만.”

“소제도 한 잔 주시오.”

“그래. 사혼맹(邪魂盟) 북살진 천웅백팔조 조장께 이 부덕한 형님이 한 잔 내려 드리오.”

“감사, 감사.”

대무신전, 그리고 사혼맹.

이 자리에서 껄껄대고 있는 무인들을 제외하고 다른 누군가가 이 말을 들었다면, 기절초풍에 중풍막풍 하고도 대풍태풍할 노릇이었다.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 그 자체인 대무신전과 사혼맹의, 그것도 각 세력의 최전방이라 할 수 있는 이 땅에서 야심한 밤에 함께 모여 술잔을 기울인다?

“얼마 만이오, 이게.”

“열흘은 된 듯싶구나.”

칠구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형님네도 영 공기가 안 좋은 것 같구려.”

“안 좋다 뿐이겠냐. 요 며칠간은 숨이 막히더라.”

“그건 저희도 같소. 위에 것들이 어찌나 무게를 잡던지 원. 기강을 잡는다고 본보기로 두 놈의 모가지를 따고 가더이다, 젠장.”

창호는 그날 느꼈던 공포가 떠올랐는지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너희도 참… 그렇다.”

“뭐 어쩌겠소. 애초에 몸담은 곳이 그런 곳인데. 조용히 살다 가기는 글러버린 듯하오.”

“그래도 몸조심해라. 널 기다리는 제수씨랑 애들 생각해서라도.”

“그러는 형님도 주의하쇼. 큰 애 혼인 날짜가 내일모레 아니오?”

“흐음, 그 정도는 아니고 아직 두 달 남았구나.”

“미리 축하드리오. 자자, 한 잔 더 드쇼.”

꿀꺽꿀꺽.

창호와 칠구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술을 들이켜는 동안, 다른 무인들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그간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이들 구천삼조와 천웅백팔조는 때때로 야간 경계순찰을 핑계로 흑죽림에서 만나 조촐한 모임을 가져온 듯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결코 썩 어울리는 상황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명색이 한쪽은 천하에서 사인(邪人)들의 씨를 말리겠다고 작정한 곳이고, 다른 한쪽은 정인(正人)들이라면 그 키우는 똥개새끼까지 도륙을 내버리겠다고 공언하는 곳이 아니던가.

“아참, 선물이 있소.”

“선물?”

“마음이 못 돼먹은 이 의숙부가 주는 혼인 선물이오.”

“호오, 그래?”

창호의 말에 칠구의 얼굴이 밝아졌다. 비록 창호가 사악한 세력의 하수인이기는 하지만 요 몇 년간 나눈 정이 꽤나 돈독한 바, 정파에 속한 의형님의 자식 결혼까지 신경 쓰는 ‘경지’에 이른 게 기뻤으리라.

“그건……?”

칠구는 창호가 꺼낸 푸른색 단도를 보고 의아해했다.

“이놈은 청옥도라 하외다. 소제의 고향에서는 여식을 혼인시킬 때 꼭 이걸 하나씩 들려 보내지요. 뭐, 오래오래 푸르게 살라는 의미라 하더이다. 흐흐.”

“귀해 보이네.”

“당연하지요. 이거 진짜 옥(玉)이오. 제대로 볼라오?”

“내가 마다할 줄 알았지? 클클클.”

스릉.

그의 말에 창호는 청옥도를 도실(刀室)에서 꺼냈다.

불빛이 미약했던지라 칠구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안 보이오? 좀 가까이 오시오.”

“그래, 그래.”

칠구의 얼굴이 청옥도 쪽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진짜 옥이구먼. 호! 날이 아주 잘 섰어.”

“형님.”

“응?”

칠구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눈을 들어 창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조금 전에 주의하라 했잖소.”

“응?”

“미안하오.”

쑤욱.

갑자기 청옥도가 칠구의 아래턱 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게겍…….”

그 순간, 사방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일었다.

써억. 스걱. 터턱!

눈을 부릅뜬 칠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창호의 냉막한 얼굴을 응시했다.

구멍 난 턱 아래로 걸쭉한 핏물이 철철 쏟아져 내리는 것도 모른 채.

곳곳에서 천웅백팔조 무인들의 병기가 번쩍번쩍 춤을 추었다.

독한 술에 취하고 그동안의 우호적인 행위들에 마음을 크게 놓았던 구천삼조 무인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날아가고 심장에 칼이 깊이 박히고 목줄이 끊기는 등, 일방적인 칼질에 그들은 결국 하나하나 숨을 놓았다.

“거, 거거거거…….”

입천장까지 꿰뚫린 칠구는 끝끝내 말을 내뱉지 못했다.

“진심이오. 내 이렇게 사람을 죽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처음이오, 형님.”

“크르르륵.”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소. 형님 말대로 마누라랑 애새끼들이 소제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형님이 좋은 일 하고 간 셈 칩시다. 내 나중에 여기 다시 와서 술 한 잔 부어 드리리다.”

“크르…….”

칠구는 눈알을 뒤집으며 절명했다.

“살아있는 놈 있나?”

창호가 취기를 해소시키는 자그마한 단환을 씹어 먹으며 말했다.

“목 없는 새끼들 빼고 나머지는 뒤통수에 돌아가며 한 번씩 더 쑤셔주었으니, 이제는 살아있기도 힘들 거요, 조장.”

“좋아. 그럼 이 흑죽림과 함께 다 태워버려.”

끄덕.

“아, 그리고.”

“하명하시오.”

“쟤, 쟤랑 쟤, 그리고 쟤도.”

창호가 갑자기 조원 네 명을 골랐다.

“알지?”

왜 자신들이 조장에게 지명되었는지 이해를 못한 넷은 차갑게 자신들을 쳐다보는 ‘동료’들의 눈빛에서 한기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