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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천봉산은 본래 황산의 거봉(巨峯)들과 맥을 같이하는, 수십 개의 봉우리들을 묶어 칭하는 명칭이었다.

천봉(千峯)이라는 이름은 기괴하게 뻗은 거암(巨巖)들이 마치 수백, 수천 개의 작은 봉우리들로 갈라져 보이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험준하기로는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이며, 위태로이 걸쳐진 기암들과 끊길 듯 구불구불 이어진 협곡, 지상을 다 덮은 수림(樹林)에 더해 한낮에도 사위를 가득 채운 황무(黃霧)는 오랜 세월 천봉산 일대를 가히 인세의 마경이라 부르는 데에 주저함이 없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곳을 진정 지옥도라 일컫게 된 사건이 있었으니… 물론 꽤나 오래 전의 일이었다.



스스스.

안개가 살아있다면 이런 소리를 내지 않을까.

짙다 못해 두터운 감촉마저 느껴질 정도로 뭉쳐진 안개는 그 자체로 이미 독과 같았다.

호흡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답답함이 밀려오고, 한가슴 꽉 숨을 들이마시면 코로 물을 삼킨 듯 심한 통증이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 가운데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는 형체가 있었다.

끄드득, 끄드득.

잘게 부서져 푸석해진 돌조각을 밟는 이것은 분명 짐승의 발이었다.

정확하게는 나귀나 말의 발굽.

사람도 견디기 힘든 이 안개지대를 짐승이라고 환영할 리는 만무했지만, 이 나귀 녀석은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투릉, 투릉 숨을 잔뜩 쉬어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귀의 주변으로 물결이 갈라지듯 안개가 제 힘을 잃고 스르르 휘돌아 사라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설마 이 나귀가? 아니다. 안개를 걷어내며 나귀를 직진시키는 이는 역시나 사람이었다.

훠이훠이 손을 저어 자신과 나귀의 편안한 여정을 위해 노력하는 이 자의 이름은 건무정.

얼마 전까지 장강을 유람하겠다며 객선에서 여유를 부렸던 그가 이곳에 있었다.

일단 중간의 여정은 가뿐하게 생략하고, 건무정이 이 불쾌한 땅에 ‘돌아왔음’에 의미를 두자.

진목란은 어디 갔지? 하는 의문을 품을 필요도 없다.

그녀는 건무정을 따라 나선 첫날과 똑같이 그의 뒤를 묵묵히 따르고 있었으니까.

힛힛거리며 이리저리 손을 움직이는 건무정과는 달리 진목란은 가만히 말을 몰았다.

그녀는 건무정의 행동이 우습다는 양, 그저 막강한 내기를 외부로 뿜어내는 것만으로 자신과 말이 호흡할 공간을 확보했다.

절정고수가 되면 삶이 편해진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주는 진목란.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리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이 천봉산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진목란의 기분은 바닥까지 가라앉아 있었다.

딱히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여기에 존재했다.

위협이라고까지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기이하게도 자신을 밀어내고자 하는 이 무형의 거북함은 그녀에게 한 가지 확실한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네가 왜 이곳에 왔느냐.’

황무가, 천봉산이 진목란을 거부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따라붙을 것만 같았던 안개가 옅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추어졌던 천봉산의 비경이 드러났다.

“오오!”

진목란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끝이 보이지 않으리만치 늘어선 수목들과 그 옆을 병풍처럼 지키고 선 엄청난 높이의 석봉들.

하늘을 다 가린 나뭇잎들 사이로 하얀 선을 그리며 내리 비치는 빛줄기.

그 빛의 무리를 영롱하게 반사하며 흐르는 개울은 여기가 선경(仙境)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일게 했다.

그녀는 지금껏 자신이 이십여 년을 넘게 살아왔던 그곳이야말로 천하제일의 산세와 풍광을 자랑한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만인이 칭송해 마지않는 그녀의 본산조차도 천봉산이 숨기고 있던 세상에 비하면 감동의 깊이가 얕았다.

잠시간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진목란을 향해 건무정이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다들 누님처럼 그렇게 신기해하고는 했지요.”

다들?

“아름다워.”

“그런가요?”

어쩐지 건무정의 음성이 메말라 있다고 느낀 진목란은 고개를 내렸다.

“이곳이 건 동생이 말했던 곳이로군.”

“그런 셈이죠.”

“오래 전에 잊혔던 사람들이… 여기에 있겠네, 그럼.”

“아무래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무슨 대답이 그래?”

건무정에게 퉁명스레 말을 내뱉은 진목란은 이내 표정을 고쳤다.

건무정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잠깐 드러냈던 진지함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진목란은 거의 본능적으로 건무정을 감싸고 있는 감정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서글픔이었다. 지독히도 어두운.

건무정에게서 이토록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겪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건무정의 진실한 모습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음을 상기했다.

그는 강호라는 거대한 산맥을 향해 겨누어진 검이자 천마가 선택한 비정한 늑대.

진목란은 건무정을 쉬이 재단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건무정은 이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뜻을 존중하듯 진목란도 입을 닫았다.

주위의 경치가 눈에 들어오는 둥 마는 둥 지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건무정이 나귀를 세웠다.

“…….”

앞쪽에 무언가, 아니 누군가가 있었다.



* * *



울창했던 수림의 끝은 메말라 있었다.

마치 동경(銅鏡)처럼 빛을 이리저리 반사하던 개울도 거짓말 같이 사라졌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날카로이 각을 세운 바위들뿐이었다.

‘붉다.’

진목란의 눈에 비친 바위들은 지나치리만큼 붉었다.

그녀는 이제껏 자연 상태의 석암(石巖)이 붉은빛을 띠는 광경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저것은…….

한데 붉은 것은 바위만이 아니었다.

풍성한 홍의와 적빛의 장발이 인상적인 인물.

바로 적호가 거기에 있었다.

진목란은 의혹에 찬 시선을 보냈다. 그는 지금껏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아니 건무정을 호위하고 있었다.

물론 근 이틀 정도 적호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그가 자신들을 앞질러 여기, 천봉산의 비경 아래에 당도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적호는 건무정과 진목란이 다가옴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등을 돌린 채, 일부가 부서져 가루처럼 무너져 내린 석벽 앞에 무릎을 꿇은 적호.

그리고 그런 적호를 아주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는 건무정.

진목란은 왠지 모를 긴장감에 말의 고삐를 강하게 쥐었다.

따각, 따각.

건무정은 적호가 무엇을 하든 신경 쓸 이유가 없다는 듯 그저 그를 스쳐지나가려 했다.

그 순간, 적호의 몸이 미미하게 떨렸다.

천천히, 정말로 천천히 일어서는 적호.

진목란은 이때 그의 몸에서 기이한 향초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나귀와 말이 앞으로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쓰읍.”

건무정은 짜증스러워하며 이 사이로 바람을 삼켰다.

스스스스스.

돌아선 적호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적개심.

그랬다. 지금 적호가 건무정에게 보이는 태도는 명백한 적개심이었다.

비록 호면에 가려져 그 눈과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지금쯤 적호의 눈에서 불길이 일어나고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왜지? 그는 은자림에서 건무정을 보호하기 위해 딸려 보낸 자가 아니었던가.

누구보다 건무정에게 우호적이어야 할 적호가 오히려 적의를 드러내다니.

진목란은 느닷없는 지금의 사태에 적이 당황하며 건무정과 적호를 번갈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적호의 발아래에서부터 아지랑이처럼 퍼지던 진홍(眞紅)의 기운은 나귀와 말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 두 짐승은 조금이라도 그 기운에 닿을세라 조금씩 뒷걸음을 치며 혼란스러워했다.

“거, 그쯤 하지?”

뚝.

솨아아앗-

건무정이 툭 내뱉은 말에 적호가 반응을 했다.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기운이 빠르게 회수되었고, 터질 것만 같았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해소되었다.

진목란은 어느새 청검의 검파에 가 있던 오른손을 슬며시 내렸다.

방금 전 적호의 저러한 행동은 단순한 겁주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순 적호는 건무정에게 강한 살심을 드러냈고, 진목란은 거의 본능적으로 검을 잡고자 했었다.

분명 든든한 아군이었던 적호였다. 그런데 대체 저자가 왜?

혹여 처음부터 은자림은 천마의 죽음 이후로 건무정을 제거할 요량이었던 것인가.

아니다. 그럴 거였다면 건무정이 은자림을 나서기 전에 손을 썼을 터였다.

건무정과 진목란을 능가하는 괴물들이 바글거리는 은자림이었으니, 건무정의 모가지를 뜯어내는 것 따위는 일도 아니었으리라.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적호가 개인적으로 건무정에게 말 못할 감정을 품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지난번에도 잠깐 생각했었지만, 진목란은 이번에야말로 과거 둘 사이에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은 접점이 있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스윽.

적호가 손가락을 들어 무너진 석벽을 가리켰다.

그는 건무정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건무정 역시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건무정은 눈을 좁힌 채 적호를 쳐다볼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부르르.

손을 내리는 적호의 몸이 잘게 떨렸다.

진목란은 적호가 지금 얼마나 분노했는지 잘 알 것 같았다.

또한 그가 건무정에게 더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할 수 없음에 좌절하고 있다는 것도 알 것 같았다.

따각.

건무정은 끝끝내 적호를 외면한 채 다시금 나귀에게 길을 재촉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떠는 적호.

그는 건무정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데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적호를 그 자리에 두고 지나온 지 일 각 정도 흘렀을 때, 진목란이 입을 열었다.

“적호가 우릴 뒤따를까?”

“아니요. 그는 절대 이 산을 오르지 못합니다.”

“왜?”

“천봉산은 천산마교에게는 금지(禁地)나 다름없어요.”

진목란은 이번에는 ‘왜?’라는 말을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저들만의 복잡한 사연을 억지로 캐내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는 그보다는 다른 사연을 알고 싶었다.

“아까…….”

“왜 그랬냐고요?”

“물어도 안 알려주겠지?”

“그게 뭐 비밀이라고요.”

무심하게 대답하는 건무정.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는 나는 당연히 몰라. 하지만 네가 굳이 그런 식으로 거절할 만큼 어려운 요구였나?”

적호에게 안쓰러움을 느끼는 진목란이었다.

“저는 말입니다……. 제가 살아오며 했던 수많은 일들에 대해 후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

“그것이 옳은 일이든, 옳지 못한 일이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차갑다. 너무도 차가워서 솜털이 다 일어설 정도로 냉혹한 말투였다.

“그 친구는 제게서 후회를 끄집어내려 했어요.”

“그와 관계된 누군가를 건 동생이 해쳤구나. 아까 그 석벽에서.”

“정답.”

“할아버지가 얘기했던 그때의 일인가?”

“엿듣고 계셨어요?”

“그런 식으로 찾아온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으니까. 호기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

“허허허.”

건무정은 이제야 웃음을 터트렸다.

진목란은 이쯤에서 질문을 멈춰야 함을 깨달았다.

만약 여기서 더 물음을 던진다면, 그것은 건무정의 ‘과거’를 캐보겠다는 것과도 같았다.

선(線). 그래, 선이다.

건무정과 진목란 사이에 그어진 깊은 선.

조심스레 넘을 필요도, 힘주어 밟아 지울 필요도 없는 선이었다.

모든 관계란 적당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깊어질수록 헤어날 수 없는 게 사람 사이의 관계다.

깊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

그러니 건무정도, 진목란도 둘 사이에 그어진 선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는 진목란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그녀가 이 강호에 뛰어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따박, 따박.

어느새 둘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다시금 안개가 스멀스멀 바닥에 깔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안개는 아까의 그 누렇고 칙칙했던 안개와는 달랐다.

‘뭘까, 이 기분은.’

진목란은 그 황무 속에서 사이하고도 거대한 위협을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 말 무릎 근처에서 맴돌기만 하는 이 푸른 안개는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비탄(悲嘆), 그리고 애도(哀悼).

휙.

진목란은 얼굴을 들어 저 높이 솟은 산의 정상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분명 어떤 존재가 있다. 정상에서 눈처럼 흘러내려오고 있는 이 안개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건무정의 비밀(?) 하나에 다가서고 있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