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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몇 시진 전.

진목란은 눈을 찡그리며 건무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무정과의 동행도 어느덧 칠 일째로 접어들었다. 물론 식사 때 멀리서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적호도 함께였다.

예상했던 대로 건무정은 또 다시 길을 돌아 장강의 어느 이름 모를 포구로 그녀를 이끌었다.

이제 와서 묻기도 그렇고 건무정도 굳이 먼저 말해주지 않으니, 진목란은 묵묵히 그를 따를 뿐이었다.

포구는 출항하는 객선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들을 종합해보았을 때, 꽤나 여러 날 배가 뜨지 않은 듯했다.

“이것도 계획에 있던 건가?”

진목란이 묻자 건무정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가는 곳은 배가 없다고 못갈 위치는 아니기는 합니다.”

“그럼 뭘 망설여.”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또 장강 유람을 해봅니까.”

진목란은 기가 막혔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왜 이런 녀석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일까.

마음 깊이 존경하고 사랑했던 의조부의 당부가 아니었다면 벌써 엉덩이를 걷어찼으리라.

“아! 진 누님, 저기 배가 와요.”

진목란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든 말든 건무정은 먼 곳을 손가락질하며 기뻐했다.

“야야, 이제 너희들도 좀 쉬겠구나. 얼마 안 남았으니 좀 편하게 가볼까?”

건무정은 나귀와 점박이를 쓰다듬었다.

그의 말대로 커다란 객선 한 척이 포구로 들어왔다.

안도의 숨을 내쉬던 상인들과 며칠간 숙소와 포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발을 구르던 행객들은 환성을 질렀다.



강바람이 원래 이리도 시원했던가.

진목란은 커다란 객선의 선미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거품과 함께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조금 전까지 가슴을 답답하게 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쓸려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무엇을 걱정하고 또 무엇을 고민할까.

그저 지나온 강물처럼 흘려보내면 그만인 것을.

마음이 가벼워진 진목란은 잠시 후 뒤쪽에 앉아 있던 건무정 쪽으로 다가갔다.

건무정을 쳐다보는 진목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얼굴에 자못 심각함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목란의 시선을 느낀 건무정은 표정을 풀고 하얀 미소를 보냈다.

“좀 속이 편해졌습니까?”

“어.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응? 왜요?”

“달라보여서. 내가 방해한 건가?”

“방해라고 할 건 없습니다. 그냥…….”

이때 진목란은 건무정의 눈가에 얼핏 스친 회한의 감정 같은 것을 읽었다.

“장강에 온 게 처음은 아니구나.”

“맞습니다. 이번까지 세 번째네요.”

“별로 좋은 기억도 아니고.”

“그때는 감히 유람이니 뭐니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으니 아마도 좋은 기억은 아닐 테지요.”

진목란은 거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잘은 모르지만 사람에게는 운명이라는 게 있다고 합디다.”

“그런 걸 믿는 줄은 몰랐네.”

“안 믿어요, 진짜.”

건무정이 투정부리듯 말하자, 진목란은 그제야 그가 자신보다 몇 살 더 어리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게, 내가 그걸 믿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는 다 알고 있더란 말이죠. 남의 운명 같은 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그런 게 있어요. 뭐, 결국 내 운명은 남이 정해준다… 이거?”

“…….”

진목란은 또 다시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불행한 운명이로군.”

“그럴까요?”

건무정은 예의 그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타인이 정한 운명에 갇혀 사는 이들이 오죽 많겠습니까마는, 그들 모두가 불행하지는 않지요. 아마 알지도 못한 채 거기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자신이 불행한지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너는 알지 않던가?”

진목란은 건무정의 과거를 몰랐다.

다만, 오래 전부터 그를 짓누르고 있는 운명의 무게가 지나치게 무겁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건무정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자리에는 귀여운 인상의 소녀와 그녀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있었다.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녀의 모습을 건무정은 한동안 멍하니 응시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더 불행한 자들이 있기에 위안을 얻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지요.”

“더 불행하다니?”

“운명을 알되, 그게 자신의 선택인 줄 착각하며 사는 인간들.”

건무정은 참으로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가끔씩 저런 식으로 던지는 말들 속에는 무서운 지혜가 스며있었다.

문득 진목란은 건무정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그는 스물둘의 청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생각의 골이 깊었다.

그녀가 듣기로는 천마가 건무정을 거두었을 때, 그는 길들이기 힘든 맹수와도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본모습은 아니었을 터.

진짜 건무정은 늑대의 가면 뒤에 숨어있었다.

진목란이 알고 있는 의조부 천마는 사람을 쉽게 자신의 그늘에 들이는 이가 아니었다.

천산마교라는 초거대 집단의 최정상에 있으면서도 제자라고는 고작 둘밖에 두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러했던 천마가 단숨에 그를 다음 세대의 강호를 쥐락펴락할 인물로 낙점했다.

그만큼 건무정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는 뜻.

그녀는 아직 볼 수 없는 무언가를 천마는 보았던 것이다. 그게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천마가 미리 만나지 못해 아쉬워했을 만큼 뛰어난 건무정의 오성을 알아보고 그를 키워 세상에 내어놓은 이는 과연 누굴까.

건무정은 필시 대단한 명사(名師) 아래에서 자랐던 인물이 분명했다.

중원에 그 정도 그릇을 가진 이는 손에 꼽힐 정도로 많지 않았다.

적어도 드러난 위인들 중에는.

그녀의 이러한 궁금증을 뒤로하고 건무정은 다시 말을 이었다.

“뭐, 어쨌거나 운명이 있다 치면 이런 거겠죠.”

“어. 응?”

“장강이요. 좋든 싫든 여길 세 번이나 오고 가는 게 그리 쉽답디까. 그러니 일단은 운명이라 치자고요.”

이 얘기를 하려고 지금껏 장황하게 운명론을 늘어놓았던 것인가.

진목란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에는 건무정에게 거북한 감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하지만 이곳까지 오면서 겪어본 건무정은 상당히 유쾌한 매력을 지닌 남자였다.

그에게는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대화를 통해서건 행동을 통해서건.

항상 예의를 갖추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예의에 벗어나지도 않았다.

또 언뜻언뜻 드러나는 배움의 깊이와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선은 백 년을 수련한 도인을 방불케 했다.

이런 건무정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성으로서 마음에 든다는 게 아니라, 인간적으로 오랫동안 곁에 두고 보아도 될 친구로서의 감정이 앞선다는 것이다.

물론 아까처럼 지나치게 엉뚱해서 사람의 속을 긁는 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길게 앙금이 남는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두근!

“저기 배 한 척이 옵니다!”

이때 선주에게 고용된 낭인무사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순간 많은 선객들이 웅성거리며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세가련의 감시가 느슨한 지금, 장강은 수적들의 안마당이나 다름이 없었다.

혹여 지금 나타난 배가 놈들의 일부라면 크게 피를 볼 것이 자명했다.

그러니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흐흠.”

그때, 건무정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배에 탄 어떤 인물에게 흥미를 느낀 듯했다.

그러나 반면, 진목란의 표정은 약간 굳어 있었다.

두근!

그녀의 심장이 뜻하지 않게 격한 고동을 전해왔다.



진목란은 곧 평정을 되찾고 객선과 반대 방향으로 지나가던 소선을 내려다보았다.

소선에는 한 남자가 앉아서 입 안 가득 사과를 베어 물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수염 하나 없이 매끈매끈한 얼굴에 커다란 눈을 가진, 꽤나 호감이 가는 인상의 남자.

그를 본 진목란의 심장이 또 한 번 세차게 뛰었다.

하지만 그녀는 극도의 평정심을 발휘해 얼굴에서 아예 감정을 지웠다.

곧이어 진목란과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도, 남자도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기이한 감정에 휩싸였다.

진목란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처음 접해보는 아득한 느낌이 너무나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남자가 탄 배는 객선을 완전히 지나쳐 뒤쪽으로 한없이 멀어져만 갔다.

아마도 그녀는 앞으로 다시는 이러한 묘한 격정을 느낄 수 없으리라.

“운명이려나…….”

진목란은 옆에서 건무정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뭐라고?”

“아닙니다, 흐흐.”

비직비직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는 건무정이 진목란은 왠지 얄미웠다.

“어땠어요?”

“뭐가?”

“방금 그 친구.”

“왜?”

그녀는 건무정이 그 남자를 언급하자 더욱 짜증이 솟구쳤다.

“보통내기는 아닌 듯 보입니다만.”

“그랬나?”

“허.”

건무정은 진심으로 진목란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어쩌라고.”

“아주 배에서 피 냄새가 진동을 하던데, 몰랐어요?”

진목란쯤 되는 고수라면 당연히 알 터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마치 전혀 몰랐다는 눈으로 건무정을 바라보았다.

“대충, 강한 무인임은 알겠어. 뒤에 풀어놓은 긴 칼도 그리 흔한 병기는 아니었고.”

“아아, 우리 노인장께서 왜 누님을 저에게 붙여주셨는지 대강 알겠습니다그려.”

건무정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는데도 억지로 자신을 ‘보호’하라며 진목란을 딸려 보낸 천마의 의도.

깊이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속세의 경험이 일천한 진목란을 건무정 네가 제대로 좀 가르쳐라…….

하지만 건무정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유야 뭐, 그냥 귀찮아서.

뭔가 정신이 약간 풀어진 것 같은 진목란에게 무슨 대단한 걸 가르치겠다고 입 아프게 떠들어대겠는가.

건무정은 의아해하는 진목란을 잠시간 쳐다보다가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방금 그 남자.

상상 이상의 고수다.

건무정은 직감적으로 상대가 심상치 않은 자임을 알아보았고,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치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기척을 지웠다.

그런데 상대는 건무정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의 신경은 분명 진목란에게 쏠려있었으나, 찰나를 쪼개고 또 쪼갠 그 미세의 극치 간에 남자의 눈은 건무정이 존재하는 공간을 훑었다.

그리고 살짝 드러난 비웃음.

건무정도, 남자도 서로가 누구인지 곧장 깨달았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야수를 알아보는 존재는 그와 같은 야수이거늘.

건무정은 지금까지 길들여지지 않은 괴물 셋을 만났다.

주문효와 연화령, 그리고 흑립의 남자.

굳이 셋을 비교하자면, 주문효는 투쟁심을 불러일으키는 자였고, 연화령은 적이 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으며, 흑립의 남자는 목에 걸린 가시와도 같은 불편함을 주는 존재였다.

마치 우연처럼 스쳐간 세 괴물과의 만남.

지금은 각자의 길을 가는 중이겠지만 언젠가,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어떤 형태로든 다시 만나게 될 터.

속을 알기 어려운 자들일수록 경계해야 하는 법이다.

그것도 그들이 천하를 진동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더욱 더.

“아, 지금은 누구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네.”

이렇게 중얼거리는 건무정을 진목란은 또 다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