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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대륙의 물길은 넓다.
남직례를 아래위로 두 번 잘라먹는 장강(長江)이 그러했다.
이곳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이들도, 장강의 넓고 긴 물길을 이용해 물류를 유통시키는 이들도, 장강이야말로 천하의 으뜸이요, 장강을 지배하는 자가 천하를 지배한다고 입을 모아 말해왔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장강의 이 고고한 흐름을 제대로 이용한 이들 중에 일부는 중원을 호령했던 거상(巨商)이 되기도 했고, 또 일부는 뛰어난 군왕(君王)이나 군사(軍師)로 자라나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강호의 전설이 되어 위대한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그들이 천하에 크게 떨쳐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장강의 수운(水運)이었다.
잘 발달된 수운은 그 자체로 곧 축복이었다.
장강 연안의 몇몇 기점은 이름난 상업의 중심지였고, 그곳을 통해 막대한 부(富)가 퍼져나갔다.
돈의 흐름이 활발해지면 필연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거기에서 또 새로운 부가 생겨난다.
장강을 다스리는 것 하나만으로도 거대한 금력과 인력을 거머쥔다는 의미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황금의 강이니 만큼 어느 한 사람, 한 세력이 독점하기는 불가능했다.
건무정이 말했듯, 한 사람의 욕심은 언젠가는 사라지나, 인간이라는 존재의 욕심은 영원히 이어가기 때문이다.
특히, 장강의 하류로 갈수록 부의 편중이 심했던 바, 남직례와 호광이 맞닿은 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원이 여러 국가로 분열되어 있을 때는 곧잘 전쟁으로 내몰렸고, 통일 왕조의 치세 때는 무림 문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피를 뿌려대는 통에 이곳에서 나무를 키우면 사람의 대가리가 열린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던 혼란을 막강한 무력과 넘치는 재력, 아무리 죽어나가도 금세 채워지는 머릿수로 평정해버린 곳이 남궁세가였다.
세가(世家) 또는 세가(勢家)라 읽고 쓰며, 본래는 대당제국 말기 군부의 유력한 인물이 상인들과 연합하여 장강 이남에 터를 잡고 가문을 세운 게 시초라고 전해진다.
남궁세가는 오랜 세월을 거쳐 완벽한 무림세가로 탈바꿈한 뒤, 여러 가문, 여러 문파들이 난립하고 있던 장강 일대를 완전히 제패한 후에 아예 합비(合肥) 전체를 남궁의 이름으로 세력화해버렸다.
뭐, 여차여차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 지금은 옛 이름값을 못하고는 있지만, 근 몇 십 년 이래 강호의 대환란을 용케도 견뎌내고, 중원 여기저기서 멸문을 피해 살아남은 여러 세가들을 규합해 세가련(世家聯)을 창설한 공이 남궁세가의 온전한 저력임에는 분명했다.
어쨌거나 현재 장강이 관통하는 남직례 서부와 호광의 동부는 남궁세가를 주축으로 한 세가련의 영역이었다.
사패삼강 중 순수한 무력으로는 거의 최하위권인 세가련이었지만, 금싸라기 땅을 아우르는 덕분에, 괴물 집단인 진마도와 ‘내 목숨 따위야 어쩌라고?’하는 식으로 저돌적인 황룡궁과의 국지전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일단 아직까지는 과거와는 달리 사패삼강 간의 전면전이 일어나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다만, 그 긴장감이야 한결같아서 세가련은 늘 외부의 침입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돌려 말하면, 장강 일대를 포함한 세력권 내부의 단속에는 그만큼 덜 신경을 쓴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따라서 알게 모르게 이 땅에 들어온 어중이떠중이들과 조정과 강호의 영원한 골칫거리인 장강 수적들에 대한 방비가 이전에 비해 현저히 부족해진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요 며칠, 갑작스럽게 각 지역과 수십, 수백의 중소 가문에 소집령을 내리는 바람에 이 어수선함은 거의 극에 달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칠 수적들이 아니었다.
* * *
협곡 사이를 흐르는 널따란 강줄기.
그 느릿한 유속에 맞추어 한 척의 배가 물살을 갈랐다.
거대한 협곡의 그림자에 뒤덮인 배 위에는 무언가가 잔뜩 실린 상태였다.
와그작.
퐁!
선수에 앉은 누군가가 씹어 먹던 사과를 강에 던졌다.
가라앉은 듯했던 사과는 선미 근처에서 둥실 떠올랐다.
시뻘겋고 끈적끈적한 액체를 잔뜩 머금은 채로.
푸드덕.
새의 날갯짓 소리에 선수에 앉은 남자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천공 끝에 한 마리 붉은 까마귀가 원을 그리며 배회하고 있었다.
“…….”
선수의 남자가 일어섰다.
잿빛 피풍의. 얼굴 전체를 가린 흑립.
길쭉한 몸을 가진 남자의 특징은 이게 다였다.
“어이, 끝났으니까 이제 내려와.”
남자가 까마귀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까마귀가 빠른 속도로 하강해 남자의 어깨에 올라섰다.
잠시 후, 배가 서서히 협곡을 빠져나왔다.
동시에 강렬한 태양빛이 수면에 반사되어 하얀 빛 무리를 퍼트렸다.
남자와 까마귀도 빛에 휩싸여 그 신형이 흐릿하게 지워졌다.
이때, 어두운 그림자가 점점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드러난 배 위의 상황.
줄줄줄줄.
겹겹이 쌓여있는 무언가의 정체가 드러났다.
수십, 그래 못해도 사십 명은 된다고 치자.
사십에 달하는 사람들이 마치 막 도살당한 돼지들처럼 배 위에 수북이 쌓여 핏물을 철철 쏟아냈다.
배가 지나는 물길 뒤쪽은 혈수(血髓)만이 가득한 죽음의 강으로 변해 있었다.
이 시체들은 장강의 한 지류에 똬리를 틀었던 수룡채의 수적들이었다.
하늘이 주신 기회를 살려 사업을 크게 일으켜보려 했던 자들의 최후랄까.
결국 채주를 포함해 강으로 나섰던 자들 모두가 도륙되어 썩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것도 단 한 사람에 의해.
“알아, 안다고. 갈 길이 바쁜 몸이 웬 칼자랑이냐고?”
가악~ 가악~
남자가 붉은 까마귀의 부리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냐. 세상에는 덜 떨어진 정의밖에 안 남았거늘.”
까각!
“노인네가 늦게 왔다고 성질내면, 뭐 내라지. 그래봐야 몇 대 얻어맞고 말 텐데 뭐. 훗하하하하!”
남자는 몸을 돌려 자신이 창조한 시구(屍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미 축축한 혈액으로 범벅이 된 시체들은 제대로 눈을 감은 자가 없었다.
한때 신출귀몰 장강을 누비며 대명의 수군과 세가련을 농락하던 수적들의 최후는 이토록 비참했다.
남자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모가지 하나를 응시했다.
수룡채의 채주였던 자.
불과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크게 어이없어하며 수하들에게 남자를 치워버리라고 소리쳤던 채주는 빛보다 빠른 참격에 가장 먼저 대가리가 썰렸다.
쑤우욱.
남자는 손을 뻗어 시체들 사이에 박아두었던 자신의 곡도를 잡아 뽑았다.
치이이.
수적들의 피로 얼룩졌던 도면이 빛과 만났다. 그러자 그 얼룩은 순식간에 증발되어 미미한 점만 남긴 채 완전히 사라졌다.
남자의 곡도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영능(靈能)을 머금은 양, 빛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정화시켰다.
가악가악.
“아하, 왜 한 놈은 살려서 보냈느냐 이거지? 당연한 거 아니냐.”
철컥.
“놈을 쫓다보면 수룡채인지 토룡채인지, 저것들 본거지가 나올 거야. 그 다음은 알지?”
남자는 킥킥거렸다.
“그동안 뭘 배웠기에 성격이 이 모양이냐고? 틀렸어, 이 까마귀 새끼야. 제대로 배웠으니 실천하는 거야. 마무리는 확실히. 그리고 후환 따위는 남기지 않는다. 이해하겠냐?”
설마 까마귀와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닐 테니, 지금까지 남자는 혼자 상상하며 지껄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너도 시끄럽게 굴지 말고 저기 올라가서 이 때려죽일 놈드… 아니지. 이 죽은 놈들 눈알이라도 파먹어라. 뭐라고? 식성이 워낙에 고급이라 수적들 시체는 싫다고? 허!”
남자는 혀를 찼다.
그가 데리고 다니는 붉은 까마귀는 어디를 가도 영물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존재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감히 제 입맛이 어쩌고 할 만큼 잘난 녀석은 또 아니었다.
“됐다. 먹는 걸로 간섭 안할 테니까, 넌 노인네 얘기 그만 해라.”
가오옥.
“그렇긴 하네. 대낮에 꽤나 흉물스럽지?”
툭툭.
남자가 도수(刀首)로 시체 하나를 건드렸다.
그러자 강한 압력이 발생해 펑 소리를 내며 시체들을 날려 보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사십여 구의 시체들 전부가 강물로 떨어져 가라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들 중에 일부는 불어터진 몸뚱이들이 떠오르겠지만, 그쯤 되면 누가 무슨 수법으로 칼질을 해댔는지 알아낼 길은 요원하리라.
촤악-! 촤악-!
이번에는 남자가 수면으로 곡도를 휘둘렀다.
그가 허공에 그린 유려한 선(線)을 따라 강물이 요동쳤다. 그리고 마치 전설로만 내려오는 장강의 이무기처럼 강물이 형태를 갖추고 배 위를 요리조리 쓸고 지나갔다.
그 덕분에 아직 남아있던 핏물이며, 살점이며, 굴러다니던 손가락, 발가락, 코, 귀, 눈알 등등이 깔끔하게 씻겨 내려갔다.
“야, 정말 아무것도 안 먹을 거야?”
남자는 붉은 까마귀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품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으직! 한입을 깨물었다.
두근.
“어?”
남자는 갑자기 자신의 심장이 강하게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두근! 두근!
휙.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남자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앞쪽 어딘가에 자신을 긴장시키는, 또는 자신과 어떻게든 운명을 공유할 존재가 있음을.
“호오, 이것 봐라?”
푸드득.
까마귀가 남자를 벗어나 다시금 천공으로 솟구쳤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남자의 시야에 커다란 객선 한 척이 들어왔다.
수적들의 난동 때문에 그간에는 장강에서 저 정도 규모의 객선을 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결국은 서로 먹고 살기 급급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객선을 띄우는 선주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세가련이 당장에 보호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아마도 선주는 여러 곳을 전전하던 낭인들을 고용했을 터였다.
설마 자신의 신경을 잡아끈 미지의 누군가가 그 낭인들 사이에?
“아냐, 아냐.”
요즘 같은 시기에 굉장한 고수가 낭인의 신분으로 살아갈 이유가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힘이 넘치는 자들은 각각의 성향에 따라 사패의 어느 한 곳에 적을 두거나, 삼강의 그늘로 들어가기를 원했으니까.
철썩, 철써억~
그사이 객선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저쪽에서도 남자의 배가 다가옴을 알아차리고는 병기를 든 무인 몇 명이 난간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남자는 배에 주저앉아 흑립을 벗어 뒤로 넘기고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무인들은 저들끼리 말을 주고받더니 남자를 향해 같이 손을 흔들며 답례를 보냈다.
이는 서로 귀찮게 말 걸지 말고 그냥 가던 길 가자는 장강 사람들끼리의 인사법이었다.
그렇게 객선과 남자의 배가 스쳐지나가면서 거의 중간 정도에 이르렀을 때.
남자의 고개가 들렸다.
객선에는 상인들과 강을 거슬러 오르려는 많은 선객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상당수가 난간에 기대어 남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남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닿았다.
초립을 쓰고 흑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
그녀는 무심히 남자를 일별한 뒤 다시 고개를 돌렸다.
“훗훗.”
이 즐거워하는 듯한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마음이 바뀌었어. 원래 마무리는 적당히 하는 법이지, 암.”
재미있다, 재미있어.
그녀 옆에 있던 작은 녀석도.
대륙의 물길은 넓다.
남직례를 아래위로 두 번 잘라먹는 장강(長江)이 그러했다.
이곳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이들도, 장강의 넓고 긴 물길을 이용해 물류를 유통시키는 이들도, 장강이야말로 천하의 으뜸이요, 장강을 지배하는 자가 천하를 지배한다고 입을 모아 말해왔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장강의 이 고고한 흐름을 제대로 이용한 이들 중에 일부는 중원을 호령했던 거상(巨商)이 되기도 했고, 또 일부는 뛰어난 군왕(君王)이나 군사(軍師)로 자라나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강호의 전설이 되어 위대한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그들이 천하에 크게 떨쳐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장강의 수운(水運)이었다.
잘 발달된 수운은 그 자체로 곧 축복이었다.
장강 연안의 몇몇 기점은 이름난 상업의 중심지였고, 그곳을 통해 막대한 부(富)가 퍼져나갔다.
돈의 흐름이 활발해지면 필연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거기에서 또 새로운 부가 생겨난다.
장강을 다스리는 것 하나만으로도 거대한 금력과 인력을 거머쥔다는 의미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황금의 강이니 만큼 어느 한 사람, 한 세력이 독점하기는 불가능했다.
건무정이 말했듯, 한 사람의 욕심은 언젠가는 사라지나, 인간이라는 존재의 욕심은 영원히 이어가기 때문이다.
특히, 장강의 하류로 갈수록 부의 편중이 심했던 바, 남직례와 호광이 맞닿은 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원이 여러 국가로 분열되어 있을 때는 곧잘 전쟁으로 내몰렸고, 통일 왕조의 치세 때는 무림 문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피를 뿌려대는 통에 이곳에서 나무를 키우면 사람의 대가리가 열린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던 혼란을 막강한 무력과 넘치는 재력, 아무리 죽어나가도 금세 채워지는 머릿수로 평정해버린 곳이 남궁세가였다.
세가(世家) 또는 세가(勢家)라 읽고 쓰며, 본래는 대당제국 말기 군부의 유력한 인물이 상인들과 연합하여 장강 이남에 터를 잡고 가문을 세운 게 시초라고 전해진다.
남궁세가는 오랜 세월을 거쳐 완벽한 무림세가로 탈바꿈한 뒤, 여러 가문, 여러 문파들이 난립하고 있던 장강 일대를 완전히 제패한 후에 아예 합비(合肥) 전체를 남궁의 이름으로 세력화해버렸다.
뭐, 여차여차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 지금은 옛 이름값을 못하고는 있지만, 근 몇 십 년 이래 강호의 대환란을 용케도 견뎌내고, 중원 여기저기서 멸문을 피해 살아남은 여러 세가들을 규합해 세가련(世家聯)을 창설한 공이 남궁세가의 온전한 저력임에는 분명했다.
어쨌거나 현재 장강이 관통하는 남직례 서부와 호광의 동부는 남궁세가를 주축으로 한 세가련의 영역이었다.
사패삼강 중 순수한 무력으로는 거의 최하위권인 세가련이었지만, 금싸라기 땅을 아우르는 덕분에, 괴물 집단인 진마도와 ‘내 목숨 따위야 어쩌라고?’하는 식으로 저돌적인 황룡궁과의 국지전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일단 아직까지는 과거와는 달리 사패삼강 간의 전면전이 일어나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다만, 그 긴장감이야 한결같아서 세가련은 늘 외부의 침입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돌려 말하면, 장강 일대를 포함한 세력권 내부의 단속에는 그만큼 덜 신경을 쓴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따라서 알게 모르게 이 땅에 들어온 어중이떠중이들과 조정과 강호의 영원한 골칫거리인 장강 수적들에 대한 방비가 이전에 비해 현저히 부족해진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요 며칠, 갑작스럽게 각 지역과 수십, 수백의 중소 가문에 소집령을 내리는 바람에 이 어수선함은 거의 극에 달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칠 수적들이 아니었다.
* * *
협곡 사이를 흐르는 널따란 강줄기.
그 느릿한 유속에 맞추어 한 척의 배가 물살을 갈랐다.
거대한 협곡의 그림자에 뒤덮인 배 위에는 무언가가 잔뜩 실린 상태였다.
와그작.
퐁!
선수에 앉은 누군가가 씹어 먹던 사과를 강에 던졌다.
가라앉은 듯했던 사과는 선미 근처에서 둥실 떠올랐다.
시뻘겋고 끈적끈적한 액체를 잔뜩 머금은 채로.
푸드덕.
새의 날갯짓 소리에 선수에 앉은 남자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천공 끝에 한 마리 붉은 까마귀가 원을 그리며 배회하고 있었다.
“…….”
선수의 남자가 일어섰다.
잿빛 피풍의. 얼굴 전체를 가린 흑립.
길쭉한 몸을 가진 남자의 특징은 이게 다였다.
“어이, 끝났으니까 이제 내려와.”
남자가 까마귀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까마귀가 빠른 속도로 하강해 남자의 어깨에 올라섰다.
잠시 후, 배가 서서히 협곡을 빠져나왔다.
동시에 강렬한 태양빛이 수면에 반사되어 하얀 빛 무리를 퍼트렸다.
남자와 까마귀도 빛에 휩싸여 그 신형이 흐릿하게 지워졌다.
이때, 어두운 그림자가 점점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드러난 배 위의 상황.
줄줄줄줄.
겹겹이 쌓여있는 무언가의 정체가 드러났다.
수십, 그래 못해도 사십 명은 된다고 치자.
사십에 달하는 사람들이 마치 막 도살당한 돼지들처럼 배 위에 수북이 쌓여 핏물을 철철 쏟아냈다.
배가 지나는 물길 뒤쪽은 혈수(血髓)만이 가득한 죽음의 강으로 변해 있었다.
이 시체들은 장강의 한 지류에 똬리를 틀었던 수룡채의 수적들이었다.
하늘이 주신 기회를 살려 사업을 크게 일으켜보려 했던 자들의 최후랄까.
결국 채주를 포함해 강으로 나섰던 자들 모두가 도륙되어 썩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것도 단 한 사람에 의해.
“알아, 안다고. 갈 길이 바쁜 몸이 웬 칼자랑이냐고?”
가악~ 가악~
남자가 붉은 까마귀의 부리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냐. 세상에는 덜 떨어진 정의밖에 안 남았거늘.”
까각!
“노인네가 늦게 왔다고 성질내면, 뭐 내라지. 그래봐야 몇 대 얻어맞고 말 텐데 뭐. 훗하하하하!”
남자는 몸을 돌려 자신이 창조한 시구(屍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미 축축한 혈액으로 범벅이 된 시체들은 제대로 눈을 감은 자가 없었다.
한때 신출귀몰 장강을 누비며 대명의 수군과 세가련을 농락하던 수적들의 최후는 이토록 비참했다.
남자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모가지 하나를 응시했다.
수룡채의 채주였던 자.
불과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크게 어이없어하며 수하들에게 남자를 치워버리라고 소리쳤던 채주는 빛보다 빠른 참격에 가장 먼저 대가리가 썰렸다.
쑤우욱.
남자는 손을 뻗어 시체들 사이에 박아두었던 자신의 곡도를 잡아 뽑았다.
치이이.
수적들의 피로 얼룩졌던 도면이 빛과 만났다. 그러자 그 얼룩은 순식간에 증발되어 미미한 점만 남긴 채 완전히 사라졌다.
남자의 곡도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영능(靈能)을 머금은 양, 빛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정화시켰다.
가악가악.
“아하, 왜 한 놈은 살려서 보냈느냐 이거지? 당연한 거 아니냐.”
철컥.
“놈을 쫓다보면 수룡채인지 토룡채인지, 저것들 본거지가 나올 거야. 그 다음은 알지?”
남자는 킥킥거렸다.
“그동안 뭘 배웠기에 성격이 이 모양이냐고? 틀렸어, 이 까마귀 새끼야. 제대로 배웠으니 실천하는 거야. 마무리는 확실히. 그리고 후환 따위는 남기지 않는다. 이해하겠냐?”
설마 까마귀와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닐 테니, 지금까지 남자는 혼자 상상하며 지껄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너도 시끄럽게 굴지 말고 저기 올라가서 이 때려죽일 놈드… 아니지. 이 죽은 놈들 눈알이라도 파먹어라. 뭐라고? 식성이 워낙에 고급이라 수적들 시체는 싫다고? 허!”
남자는 혀를 찼다.
그가 데리고 다니는 붉은 까마귀는 어디를 가도 영물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존재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감히 제 입맛이 어쩌고 할 만큼 잘난 녀석은 또 아니었다.
“됐다. 먹는 걸로 간섭 안할 테니까, 넌 노인네 얘기 그만 해라.”
가오옥.
“그렇긴 하네. 대낮에 꽤나 흉물스럽지?”
툭툭.
남자가 도수(刀首)로 시체 하나를 건드렸다.
그러자 강한 압력이 발생해 펑 소리를 내며 시체들을 날려 보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사십여 구의 시체들 전부가 강물로 떨어져 가라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들 중에 일부는 불어터진 몸뚱이들이 떠오르겠지만, 그쯤 되면 누가 무슨 수법으로 칼질을 해댔는지 알아낼 길은 요원하리라.
촤악-! 촤악-!
이번에는 남자가 수면으로 곡도를 휘둘렀다.
그가 허공에 그린 유려한 선(線)을 따라 강물이 요동쳤다. 그리고 마치 전설로만 내려오는 장강의 이무기처럼 강물이 형태를 갖추고 배 위를 요리조리 쓸고 지나갔다.
그 덕분에 아직 남아있던 핏물이며, 살점이며, 굴러다니던 손가락, 발가락, 코, 귀, 눈알 등등이 깔끔하게 씻겨 내려갔다.
“야, 정말 아무것도 안 먹을 거야?”
남자는 붉은 까마귀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품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으직! 한입을 깨물었다.
두근.
“어?”
남자는 갑자기 자신의 심장이 강하게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두근! 두근!
휙.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남자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앞쪽 어딘가에 자신을 긴장시키는, 또는 자신과 어떻게든 운명을 공유할 존재가 있음을.
“호오, 이것 봐라?”
푸드득.
까마귀가 남자를 벗어나 다시금 천공으로 솟구쳤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남자의 시야에 커다란 객선 한 척이 들어왔다.
수적들의 난동 때문에 그간에는 장강에서 저 정도 규모의 객선을 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결국은 서로 먹고 살기 급급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객선을 띄우는 선주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세가련이 당장에 보호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아마도 선주는 여러 곳을 전전하던 낭인들을 고용했을 터였다.
설마 자신의 신경을 잡아끈 미지의 누군가가 그 낭인들 사이에?
“아냐, 아냐.”
요즘 같은 시기에 굉장한 고수가 낭인의 신분으로 살아갈 이유가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힘이 넘치는 자들은 각각의 성향에 따라 사패의 어느 한 곳에 적을 두거나, 삼강의 그늘로 들어가기를 원했으니까.
철썩, 철써억~
그사이 객선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저쪽에서도 남자의 배가 다가옴을 알아차리고는 병기를 든 무인 몇 명이 난간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남자는 배에 주저앉아 흑립을 벗어 뒤로 넘기고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무인들은 저들끼리 말을 주고받더니 남자를 향해 같이 손을 흔들며 답례를 보냈다.
이는 서로 귀찮게 말 걸지 말고 그냥 가던 길 가자는 장강 사람들끼리의 인사법이었다.
그렇게 객선과 남자의 배가 스쳐지나가면서 거의 중간 정도에 이르렀을 때.
남자의 고개가 들렸다.
객선에는 상인들과 강을 거슬러 오르려는 많은 선객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상당수가 난간에 기대어 남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남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닿았다.
초립을 쓰고 흑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
그녀는 무심히 남자를 일별한 뒤 다시 고개를 돌렸다.
“훗훗.”
이 즐거워하는 듯한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마음이 바뀌었어. 원래 마무리는 적당히 하는 법이지, 암.”
재미있다, 재미있어.
그녀 옆에 있던 작은 녀석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