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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건무정은 끝끝내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적호와 은자림을 신뢰하지 못하는 듯했다.

일부러 길을 빙 둘러가고 있음을 모를 만큼 진목란은 바보가 아니었다.

직선거리로 이틀이면 닿을 이곳까지 닷새가 걸렸으니까.



적호.

그는 누구인가.

진목란은 천마 노인의 곁에서 이 년을 넘게 지냈지만 그를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스쳐가듯 보았을 수도 있다.

지금은 해괴한 호면(虎面)을 쓰고 있기에 그 진면목을 눈치 채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한데 건무정은 적호를 아는 듯했다.

그는 적호를 가리켜 피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던 자라 일컬었다.

즉, 둘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교차했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애써 외면하기는 했지만 은자림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덩치 큰 청년과 장년인 역시도 건무정과 단순히 안면만 있던 사이는 아닐 터였다.

진목란은 건무정이 은자림에 발을 디뎠을 때, 멀리서 사람들의 반응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들 중에 다수는 건무정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몇몇은 그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건무정은 천마의 은자림에서 삼 년을 살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기간 동안 그는 지옥 같은 투쟁을 벌였으리라.

그곳의 구성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한때 천마와 함께 중원을 유린하던 거마(巨魔) 중의 거마들이 아니던가.

진목란 자신조차도 가끔은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존재감 자체가 곧 죽음이란 단어에 필적하는 마인들.

그들의 기억 속에서 건무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진목란이 할아버지라 불렀던 천마는 왜 최후의 순간까지 건무정의 진실한 모습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그저 보호해달라는 말만 남기고서.

문득 진목란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따각, 따각, 딱.

그때, 나귀가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진목란의 점박이 말 또한 그 자리에 섰다.

“…….”

한참 앞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관도를 피해 산길을 따라 가고 있었건만, 둘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또 있었나보다.

다시 다른 길로 돌아가기에는 귀찮고, 그러한 생각은 건무정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건무정이 먼저 나귀의 머리를 슥슥 문지르며 앞으로 나아가길 재촉했으니까.

이때, 순간적으로 진목란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절정고수인 자신의 솜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무언가가 저쪽에 있음은 확실했다.

갑자기 그녀의 인상이 심하게 구겨졌다. 이번에는 다른 게 원인이었다.

“그놈들이야.”

그녀는 더러운 무언가를 씹어 뱉듯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청력을 집중하자 들려오는 목소리들.

이는 분명 어제 객잔에서 진목란에게 음탕한 눈길을 주며 소곤소곤 말로써 그녀를 욕보이던 자들의 음성이었다.



* * *



“그 가여운 몸, 이 탄탄한 어깨에 올리고 먼 길 가보자는데, 어찌 그리 빼시오.”

남자의 걸걸한 목소리 속에서는 억지가 느껴졌다.

“험한 산길을 가시면서 지고 있는 짐도 무거워 보이는데, 홀로 힘들지 않겠소.”

이번에는 다른 남자의 느끼한 목소리.

“일이걸랑 이 건장한 강호 영웅들에게 맡겨 두시는 건 어떠실는지?”

남자들이 번갈아가며 지껄이는 소리들은 심상치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약 스무 명에 달하는 남자들이 좁은 길의 앞과 뒤를 막고 선 채, 가운데 서 있는 여인을 향해 계속해서 희롱하는 말들을 던지고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병기를 패용했는데, 그 모양과 종류가 제각각 달랐다.

즉, 강호인임을 내세우는 족속들인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하나의 문파에 소속된 자들은 아니란 뜻.

게다가 말투며 하는 행동거지며, 무엇 하나 정파스러운 꼴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갇힌 여인은 고개를 살짝 아래로 내린 채 무표정하게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가만히 미동조차 없는 모양새가 겁을 잔뜩 집어먹은 것 같았다.

“커흠.”

남자들 중에 하나가 헛기침을 하며 다른 이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길 옆 수풀이 무성하고 으슥한 곳을 가리키며 뭔가 준비를 하라는 식으로.

남자들 중에 일부는 여인의 새하얀 용모를 보며 벌써부터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희고 아리따운 얼굴과는 달리 그녀의 옷차림은 수수했다.

검게 물들인 마의 호복은 흙먼지에 잔뜩 더러워져 있었고, 사슴인지 뭔지 모를 짐승 가죽으로 만든 외투는 군데군데 찢어진 상태.

조금 특이한 부분이라면 누런색 담비 한 마리의 사체(?)를 통으로 목에 둘렀고, 등에 이고 있는 기다란 짐이 좀 무거워 보인다는 정도?

대충 봐도 어느 산골에서 짐승 사냥으로 먹고 사는 집안의 여식으로 여겨질 만한 그런 여인이었다.

“이보오, 소저. 긴 말 맙시다. 이 영웅님들 말만 잘 들으면 몸 성히 집에 돌아가게 해줄 테니, 괜히 소리를 지르거나 해서 눈먼 칼에 상처 입지 말고. 응?”

이들 남자 무리의 대장격인 녀석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협박을 가해왔다.

그때,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그녀의 눈동자는 보다 먼 곳을 향해 일렁거렸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로.

“호오, 이제 보니 정말 예쁘장하구만? 흐흐.”

여인의 얼굴을 제대로 살핀 놈 하나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도저히 못 참겠다! 너 이리 와!”

우악스러운 손이 여인의 등짐을 낚아챘다.

찌이익.

등짐을 감싸던 천이 찢어지면서 그 안의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챙그랑! 챙챙.

맑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

땅에 떨어진 것들은 열 개의 짧은 검이었다. 자루 부위에 누런 천을 둘둘 감은.

“이건 또 뭐야?”

“어디 철방에 고철 배달하러 가는 건가? 껄껄껄!”

남자들에게 있어 이 검들은 도저히 사람을 살상할 병기로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턱.

등짐을 찢은 손이 이번에는 여인의 손목을 꽉 잡았다.

“따라 오라니까?”

“당신들…….”

고와도 너무 고왔다. 여인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 또한 요염하기 그지없는 음성에 남자들 몇몇은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여인들에게 고통을 주었죠?”

“허허허, 고통이라니 이 아가씨야.”

여인의 음성에 취한 듯, 대장격의 무인이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다들 이 영웅님들의 품에서 극락을 경험하고 떠났단다. 한 백 명 될까. 이제 네 차례인 게야.”

그의 입에서 더러운 치부가 술술 흘러나왔다. 보통 때 같았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감추었을 그런.

“어디로 떠났다는 말이죠?”

“어디긴 어디야, 진짜 극락으로 갔지. 너는 내 말만 잘 듣는다면 특별히 오랫동안 귀여워해주마. 흐흐흐흐.”

놈의 표정이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몽롱해졌다.

홀리다니. 대체 무엇에 홀렸을까.

혹, 여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는 염기(艶氣)가 그의 이지를 흐트러뜨린 것은 아닐까.

“그래?”

뚝.

여인의 느닷없는 반말.

그와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차가워지면서 뭇 남자들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살아봐야 세상에 악만 남길 놈들이구나.”

터질 듯한 염기는 냉기가 되었다.

그리고 여인의 얼굴에 짙게 드리운 그늘을 헤집고 붉디붉은 두 개의 점이 나타났다.

스스스스.

“뭐, 뭐야?”

“이런 미친!”

“네년이 욕을 봐야 영웅님들 아랫도리 밑으로 설설 기겠구나!”

당황한 남자들은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하지만 그 소리들 속에서 미세한 떨림이 감지되는 것은 왜일까.

서걱. 퓻!

뭔가 잘리는 소리와 동시에 핏방울이 튀었다.

툭 하며 바닥에 떨어진 것은 사람의 손.

방금까지 여인을 붙잡고 있던 바로 그 손이었다.

“켁!”

손을 잃은 자는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휘리릭.

순간, 허연빛을 내는 어떤 것이 그자의 목 근처를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궤적을 따라 비릿한 혈향이 번졌다.

찰나의 시간, 목 위에 떠있는 듯했던 머리통이 이내 흘러내리듯 땅으로 떨어졌다.

데굴데굴 구르며 피를 쏟아내던 모가지는 이내 생기를 잃고 비명을 지르던 모습 그대로 굳었다.

“…….”

싸늘한 정적이 사위에 깔렸다.

쩔그렁. 윙~ 윙~

그제야 남자들은 허공에 뜬 채 진동을 계속하고 있는 물체를 볼 수 있었다.

들어 올린 여인의 손바닥 아래에서 조용히 흔들리는 짧은 검 하나를.

“주, 죽여!”

“마녀다!”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한 것인지, 남자들은 병기를 꺼내 여인을 위협했다.

“감히 우리를 속이다니.”

한 녀석이 이를 갈며 말했다.

“내 친구를 죽인 죄, 네년 목숨으로 갚아라!”

여인을 가운데 두고 스물에 이르는 남자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좋은 선택이야.”

그때, 여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갔다.

“무… 뭣?”

“너희가 사방으로 도망쳤다면 조금은 귀찮을 뻔했거든.”

“무슨 소리냐! 에잇, 쳐라! 저년을 찢어 죽…….”

파파파파팟!

마지막으로 고함을 지르던 자는 자신의 말을 끝까지 다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열 명의 머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끊어진 경동맥에서 세차게 뿜어지는 피분수만이 남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열 개의 검들이 제각각 살아있는 생명인 양 움직이며 남자들의 목을 베고 지나간 것.

지금도 그 검들은 여인의 몸을 중심으로 부챗살처럼 퍼져서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광경에 남은 자들은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이들은 평생을 강호인 흉내를 내면서 악행과 음행을 일삼아온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언제 이러한 신기(神技)를 보았겠는가.

여인이 열손가락을 따로따로 움직이자 검들도 물결치듯 고요히 흔들렸다.

설마 전설의 이기어검?

남자들은 호랑이가 내지른 포효에 얼어붙은 토끼처럼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여인의 눈이 한 차례 더 빛났다.

슈우웃.

푹푹. 푹푹푹푹.

검들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남자들의 몸에 박혀 들어갔다.

목젖을 관통당한 자는 입과 상처에서 피거품을 게워냈고, 심장을 내어준 자는 ‘아야!’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절명했으며, 이마 가운데 검이 박힌 자는 묘한 눈으로 검환을 응시했다.

풀썩.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일제히 쓰러졌다.

삽시간에 ‘음적’들이 전멸한 것이다.

여인이 한 것이라고는 고작 손가락을 살짝살짝 움직인 게 전부였지만, 결과는 이처럼 처참했다.

차르릉.

회수된 검들에는 놀랍게도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이 검들이 희대의 명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인의 솜씨가 그만큼 출중했기 때문일까.

여인은 시체들을 잠시 쳐다보다가, 그들 중에 가죽옷을 입은 자들에게서 상의를 벗겨냈다.

그리고 회수한 검들을 가죽옷으로 감싸서 단단히 묶은 뒤, 등에 걸쳤다.

아마도 다음번에는 손으로 가죽을 찢을 만큼의 강력한 역사(力士)를 만나지 않는 한, 쉽게 그녀의 병기가 드러나지는 않을 터였다.

“…….”

그녀는 땅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진 음적들의 병기 중에서 자신의 팔 길이만 한 곡도를 챙겼다.

잘 만들어진 칼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길이와 무게가 마음에 드는지 여인은 그것을 요대 뒤쪽에 비스듬하게 꽂았다.

이 정도면 못해도 열서너 번은 자신의 힘을 견뎌줄 것이라 여기며.

일을 마친 여인은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두 사람.

이미 여인은 저들이 이곳에 당도해서 자신이 행한 살육을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음을 알고 있었다.

일순 여인의 분홍빛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제게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사람의 심금을 뒤흔드는 미성(美聲).

그녀의 앞에서 각각 나귀와 말에 올라있던 두 사람 중에 한 명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