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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주문효와의 극적인 만남이 있고 나서 사흘이 지났다.
그간 한 차례 더 노숙을 했고, 바로 전날에는 어찌어찌 바위산 어귀에 버려진 움막을 발견해서 간신히 이슬을 피할 수가 있었다.
식사 준비는 늘 건무정의 차지였다.
그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는지, 주문효에게서 헛것이라는 말을 들은 뒤 우울해하던 진목란도 식사 때만큼은 얼굴이 밝아지고는 했다.
무언가 특별한 재료도 아니었건만 그 무엇이든 건무정의 손을 거치면 천하일미로 느껴질 정도였다.
심지어 적호조차 건무정이 불을 피우면 은신을 풀고 멀찍이 서서 침을 삼켰다.
진목란이 대체 어디서 요리를 배웠냐고 물었을 때, 건무정은 이렇게 대답했다.
“천하제일숙수한테서요.”
진목란은 그가 진실을 말하기 싫어서 이렇게 답했을 거라 짐작하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렇게 몇 끼의 밥 때가 지나고 사흘째가 된 이제야 진목란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이 사라졌다.
남의 말 몇 마디에 발끈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단번에 가치관을 바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진목란은 정성이 잔뜩 들어간 건무정의 음식을 먹으며 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만의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고.
따각, 따각.
말과 나귀가 만들어내는 굽 소리의 조화가 은근히 흥겨웠다.
그 흥에 기분이 좋아진 건무정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던 진목란은 그보다 약간 더 들뜬 표정이었다.
매사에 감정 표현을 아끼던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짓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반나절만 앞으로 나아가면 관도가 나오고, 그때부터는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성이나 촌락, 작은 장시(場市)에도 들를 수 있다고 건무정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어느 누가 편안한 잠자리를 마다할 것이며, 따뜻한 수욕(水浴)을 거부할 것인가.
특히 며칠 전까지 옥정(屋頂)이 있는 집에서 생활했던 진목란으로서는 꽤나 간절한 바람이었을 터였다.
그렇게 정확히 반나절이 지나자, 거의 다 지워져가는 길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길은 나아감에 따라 점점 넓어지고 선명해지며 길다운 길로 변모해갔다.
이는 남직례(南直隷) 동부에서 서부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흔히 접하는 광경이었다.
관(官)이 제 역할을 다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원인은 무림에 있었다.
과거 십년대전과 그 이후의 혼란기는 무림과 관계없는 사람들의 삶마저도 피폐하게 만들었다.
특히 남직례 동부는 황룡궁과 진마도의 세력쟁탈전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지역이었다.
마(魔)를 따르는 진마도, 그리고 대명 조정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 여겨지는 황룡궁.
이들의 전쟁은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문파 대 문파 간의 세력전과는 양상이 달랐다.
그들은 틈만 나면 상대의 점령지역을 공격해 초토화시키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땅에서 무림인들을 빼면 누가 남겠는가.
당연히 본래부터 그곳에서 살아오던 민초들일 것이다.
그런 민초들의 터전을 불태우고, 그들의 목숨도 서슴없이 앗아가며 일말의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던 자들이 바로 진마도와 황룡궁의 무인들이었다.
결국 진마도가 승자가 되어 이 땅의 패권을 거머쥐었으나, 이는 반쪽의 승리에 불과했다.
우선 세력유지의 기반이 되어야 할 동부 해안의 민초들 중에 상당수가 서부 내륙 및 산동, 절강 등으로 흩어졌다.
또한 잊을 만하면 왜적들이 나타나, 그나마 사람이 살고 있던 부락을 찾아다니며 약탈을 해대는 통에 풀뿌리 하나도 거두기가 어려운 지역이 되었다.
따라서 사실 반쪽의 승리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곳이 되어버렸다.
그런 이유로 진마도는 어렵사리 편입시킨 동부 지역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으니, 안 그래도 관(官)과 군(軍)의 영향력이 해안가에 쏠려있는 이 땅의 나머지 지역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이 없었다.
보다 서쪽인 남경(南京)과 이어지는 관도들을 오랜 시간 정비하지 않았다고 투덜거리기가 미안해질 지경이랄까.
노인의, 바로 그 천마의 은자림이 남직례 동부에 존재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 * *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나름 번화한 장시가 있었다.
여객(旅客)들을 위한 주루, 반점, 객잔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어, 하루를 편하게 지내기에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대충 가장 가까운 객잔을 찾은 건무정과 진목란은 각자 방을 잡고는 그간 몸에 쌓였던 때를 뜨끈한 물과 함께 내려 보낸 뒤, 식사를 할 수 있는 이층에서 다시 만났다.
바깥이 훤히 보이는 창가 근처의 식탁에 앉은 다음, 건무정은 몇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진목란은 입에 끈 하나를 물고서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부드럽게 비볐다.
그런 그녀의 자태를 보고 이층의 여러 남정네들은 가벼운 감탄을 흘렸다.
지극히 아름답지는 않아도 남심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그녀에게서 물씬 풍겼기 때문이리라.
그들 중에 일부는 진목란 맞은편의 건무정을 질투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아마도 그를 진목란의 남편이나 정인으로 여기는 듯했다.
이 요상한 시선들에도 아랑곳없이 건무정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그 안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의 모습은 건무정에게는 큰 흥밋거리였다.
그는 항상 사람을 관찰하기를 즐겨했다.
어떨 때에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상대를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민망함을 못이긴 상대가 먼저 고개를 돌리고는 했다.
이러한 관찰은 건무정의 버릇 중에 하나였다.
과거에 그가 다른 무언가로 불렸던 당시부터 가졌었던.
“뭘 그리 봐?”
“사람들, 그리고 정보.”
“정보?”
“예.”
진목란도 건무정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흔하디흔한 장시의 풍경만이 보일 뿐이었다. 한데 저기서 무슨 정보를 얻는다는 것인가.
“식재료와 옷가지가 유독 많이 거래되고 있군요. 그것도 대부분 건장한 남자 손님들. 전부 다 병기를 소지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강호인들이네요. 가판이 한 칸씩 건물 쪽으로 물러난 것은 여러 마리의 말들이 지나가기 쉽도록 배려한 것일 테고……. 여기 말고도 다른 객잔들 근처가 소란스러운 이유는 하루 정도 머물다 떠나려는 이들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겠지요.”
건무정의 말에 진목란은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어딘가로 강호인들이 움직이고 있어요. 그것도 급하게. 먹을 것, 입을 것들이 잘 팔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소집에 제대로 준비조차 못하고 나섰다는 거겠죠.”
“그럴 듯하네.”
진목란은 건무정의 분석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 듯했다.
“뭐, 이정도만 합시다. 이 동생은 배나 좀 채우고 푹 잘까 합니다, 허허허.”
잠시 후, 주문한 요리가 나왔고 둘은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을 한 점, 한 점 입에 넣을 때마다 그 맛에 흠뻑 빠져 미소를 짓는 건무정과는 달리 진목란의 하얀 얼굴은 조금씩 일그러졌다.
입술을 파르르 떨며 들고 있던 젓가락이 부서져라 꽉 쥐는 진목란.
그녀를 향해 건무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듣기 싫을 때는 귀를 막는 게 제일이지요.”
뿌드득.
진목란은 이를 갈았다.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말도 아니잖습니까. 누님의 귀가 밝은 탓이라 생각합시다.”
진목란은 지금 수치심에 온몸을 떨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절정의 고수다.
보통 사람들보다 수 배, 수십 배 예민한 감각을 지녔음은 당연했다.
어느 정도 집중력만 발휘하면, 여기 이층에서 사람들이 주절거리는 말소리 정도는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이는 건무정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이곳에 있던 어떤 이들이 지껄여대는 음담패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었다.
그들이 털어대는 역겨운 대화의 방향은 바로 진목란을 향해 있었다.
세상 그 어떤 여인이 들어도 참기 힘들 말들이 그녀의 귀에 박혔다.
사실 진목란의 사문은 저들 따위는 쳐다볼 엄두도 못 낼 만큼 강호에 위명이 자자한 곳이다.
아니, 그랬었다.
그런 대단한 곳에서 자란 그녀가 언제 저런 상스러운 소리를 들어보았겠는가. 그것도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한.
게다가 평소 ‘순결지신’임을 자랑스레 여겨왔던 진목란은 저들의 상상 속에서 자신의 몸이 천 번, 만 번 더럽혀졌음으로 인해 머릿속이 하얘지는 충격을 받았다.
이윽고 그녀의 손이 허리로 향했다. 요대에 감추어둔 면검을 꺼내려는 것인가.
“제가 어르신에게서 처음 배웠던 것은.”
멈칫.
“바로 인내였습죠.”
순간, 꽉 다물어졌던 진목란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뭐, 그랬다고요.”
“넌…….”
“인내했더니 어느 날부턴가 세상을 보는 눈이 변하더이다.”
탁.
건무정도 진목란을 따라 젓가락을 놓았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참으라고?”
“모든 일에 다 참기만 하라는 의미는 아마도 아닐 겁니다. 다만.”
“다만?”
“말 몇 마디 했다고 목이 달아난다면 참으로 억울하겠지요. 억울한 자의 죽음은 그 자체로 상당한 주목거리기도 하고요.”
“몇 마디?”
진목란의 음성에는 아직도 날이 서 있었다.
“납득이 안 되면 가서 베고 오세요. 누님이야 남의 모욕적인 ‘귓속말’을 듣고 정당하게 체면을 지켰다고 ‘속으로’ 항변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마인으로 보일 겁니다.”
그제야 진목란은 건무정이 말하는 ‘인내’의 뜻을 일부 깨달았다.
현재 진목란의 심리 상태에서 검을 든다면, 팔, 다리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터였다.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왜 저들이 죽어야 하는지 말할 일은 없을 테니, 느닷없이 벌어진 참상으로 이 장시가 들썩거릴 터.
객잔을 포함해 장시에는 꽤나 많은 무림인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여기서 피를 뿌리게 되면, 시시비비가 분명한 무림인들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다.
건무정이 말하던 인내는 기다림이거나 아니면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는 일종의 지혜였다.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한 진목란은 요대로 가있던 손을 다시 식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얼마나 짜증나겠어요. 누님이 나~ 중에 손자, 손녀를 무릎에 앉혀놓고 옛 무용담을 들려줄 때, 이 할미가 검을 써서 처음으로 응징한 자들은 할미를 말로써 몰래 욕보인 이름 모를 무뢰배들이었다… 라고 하시면.”
“풋.”
진목란은 저도 모르게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백성들을 괴롭히는 산적이나 해적, 이름 난 도적, 못된 마인이나 음적, 이런 놈들 정도는 돼야 손자, 손녀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라할 테지요.”
“알았어, 그만해. 건 동생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이해했으니까. 그리고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어. 동생 말처럼 말 몇 마디로 목이 달아나야 한다면, 세상에 멀쩡히 살아서 걸어 다닐 인간이 얼마나 되겠어.”
깊은 한숨을 내쉰 진목란은 안색을 되찾고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입맛이 쓴지 쉬이 음식을 입안에 넣지 못했다.
* * *
각자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건무정과 진목란은 여정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한 후 미련 없이 장시를 떠났다.
이런 와중에도 많은 무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곳을 나서고 있었다.
두 사람은 최대한 강호인들과 거리를 두고자 관도를 벗어나 산길을 따라 이동했다.
칼 쓰는 자들 중에는 괜히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녀석들이 꼭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 엉뚱한 놈들이 하나둘 말이라도 붙이면 그것도 꽤나 피곤한 일이 될 터.
귀찮아한다거나 건성으로 대했다가는 자신을 무시하느냐며 화를 냄과 동시에 결투를 걸어올 미친놈이 흔한 곳이 바로 강호다.
실제로 그런 정신병자 같은 애송이 하나 때문에 일행이 몰살당하는 사태가 종종 일어나는 곳 또한 강호다.
그러니 그저 조용히 딴 길로 가다가 나중에 관도를 타고 가는 것이 차라리 속편한 방법이다.
이런 건무정의 설명에 진목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기 있게 건무정을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역시나 그녀는 강호초출에 불과했다.
그렇게 나름 평온한 여정이 한 시진 정도 이어졌다.
아직까지는 둘 주변에 특이할 만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주문효와의 극적인 만남이 있고 나서 사흘이 지났다.
그간 한 차례 더 노숙을 했고, 바로 전날에는 어찌어찌 바위산 어귀에 버려진 움막을 발견해서 간신히 이슬을 피할 수가 있었다.
식사 준비는 늘 건무정의 차지였다.
그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는지, 주문효에게서 헛것이라는 말을 들은 뒤 우울해하던 진목란도 식사 때만큼은 얼굴이 밝아지고는 했다.
무언가 특별한 재료도 아니었건만 그 무엇이든 건무정의 손을 거치면 천하일미로 느껴질 정도였다.
심지어 적호조차 건무정이 불을 피우면 은신을 풀고 멀찍이 서서 침을 삼켰다.
진목란이 대체 어디서 요리를 배웠냐고 물었을 때, 건무정은 이렇게 대답했다.
“천하제일숙수한테서요.”
진목란은 그가 진실을 말하기 싫어서 이렇게 답했을 거라 짐작하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렇게 몇 끼의 밥 때가 지나고 사흘째가 된 이제야 진목란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이 사라졌다.
남의 말 몇 마디에 발끈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단번에 가치관을 바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진목란은 정성이 잔뜩 들어간 건무정의 음식을 먹으며 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만의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고.
따각, 따각.
말과 나귀가 만들어내는 굽 소리의 조화가 은근히 흥겨웠다.
그 흥에 기분이 좋아진 건무정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던 진목란은 그보다 약간 더 들뜬 표정이었다.
매사에 감정 표현을 아끼던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짓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반나절만 앞으로 나아가면 관도가 나오고, 그때부터는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성이나 촌락, 작은 장시(場市)에도 들를 수 있다고 건무정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어느 누가 편안한 잠자리를 마다할 것이며, 따뜻한 수욕(水浴)을 거부할 것인가.
특히 며칠 전까지 옥정(屋頂)이 있는 집에서 생활했던 진목란으로서는 꽤나 간절한 바람이었을 터였다.
그렇게 정확히 반나절이 지나자, 거의 다 지워져가는 길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길은 나아감에 따라 점점 넓어지고 선명해지며 길다운 길로 변모해갔다.
이는 남직례(南直隷) 동부에서 서부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흔히 접하는 광경이었다.
관(官)이 제 역할을 다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원인은 무림에 있었다.
과거 십년대전과 그 이후의 혼란기는 무림과 관계없는 사람들의 삶마저도 피폐하게 만들었다.
특히 남직례 동부는 황룡궁과 진마도의 세력쟁탈전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지역이었다.
마(魔)를 따르는 진마도, 그리고 대명 조정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 여겨지는 황룡궁.
이들의 전쟁은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문파 대 문파 간의 세력전과는 양상이 달랐다.
그들은 틈만 나면 상대의 점령지역을 공격해 초토화시키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땅에서 무림인들을 빼면 누가 남겠는가.
당연히 본래부터 그곳에서 살아오던 민초들일 것이다.
그런 민초들의 터전을 불태우고, 그들의 목숨도 서슴없이 앗아가며 일말의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던 자들이 바로 진마도와 황룡궁의 무인들이었다.
결국 진마도가 승자가 되어 이 땅의 패권을 거머쥐었으나, 이는 반쪽의 승리에 불과했다.
우선 세력유지의 기반이 되어야 할 동부 해안의 민초들 중에 상당수가 서부 내륙 및 산동, 절강 등으로 흩어졌다.
또한 잊을 만하면 왜적들이 나타나, 그나마 사람이 살고 있던 부락을 찾아다니며 약탈을 해대는 통에 풀뿌리 하나도 거두기가 어려운 지역이 되었다.
따라서 사실 반쪽의 승리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곳이 되어버렸다.
그런 이유로 진마도는 어렵사리 편입시킨 동부 지역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으니, 안 그래도 관(官)과 군(軍)의 영향력이 해안가에 쏠려있는 이 땅의 나머지 지역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이 없었다.
보다 서쪽인 남경(南京)과 이어지는 관도들을 오랜 시간 정비하지 않았다고 투덜거리기가 미안해질 지경이랄까.
노인의, 바로 그 천마의 은자림이 남직례 동부에 존재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 * *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나름 번화한 장시가 있었다.
여객(旅客)들을 위한 주루, 반점, 객잔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어, 하루를 편하게 지내기에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대충 가장 가까운 객잔을 찾은 건무정과 진목란은 각자 방을 잡고는 그간 몸에 쌓였던 때를 뜨끈한 물과 함께 내려 보낸 뒤, 식사를 할 수 있는 이층에서 다시 만났다.
바깥이 훤히 보이는 창가 근처의 식탁에 앉은 다음, 건무정은 몇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진목란은 입에 끈 하나를 물고서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부드럽게 비볐다.
그런 그녀의 자태를 보고 이층의 여러 남정네들은 가벼운 감탄을 흘렸다.
지극히 아름답지는 않아도 남심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그녀에게서 물씬 풍겼기 때문이리라.
그들 중에 일부는 진목란 맞은편의 건무정을 질투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아마도 그를 진목란의 남편이나 정인으로 여기는 듯했다.
이 요상한 시선들에도 아랑곳없이 건무정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그 안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의 모습은 건무정에게는 큰 흥밋거리였다.
그는 항상 사람을 관찰하기를 즐겨했다.
어떨 때에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상대를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민망함을 못이긴 상대가 먼저 고개를 돌리고는 했다.
이러한 관찰은 건무정의 버릇 중에 하나였다.
과거에 그가 다른 무언가로 불렸던 당시부터 가졌었던.
“뭘 그리 봐?”
“사람들, 그리고 정보.”
“정보?”
“예.”
진목란도 건무정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흔하디흔한 장시의 풍경만이 보일 뿐이었다. 한데 저기서 무슨 정보를 얻는다는 것인가.
“식재료와 옷가지가 유독 많이 거래되고 있군요. 그것도 대부분 건장한 남자 손님들. 전부 다 병기를 소지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강호인들이네요. 가판이 한 칸씩 건물 쪽으로 물러난 것은 여러 마리의 말들이 지나가기 쉽도록 배려한 것일 테고……. 여기 말고도 다른 객잔들 근처가 소란스러운 이유는 하루 정도 머물다 떠나려는 이들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겠지요.”
건무정의 말에 진목란은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어딘가로 강호인들이 움직이고 있어요. 그것도 급하게. 먹을 것, 입을 것들이 잘 팔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소집에 제대로 준비조차 못하고 나섰다는 거겠죠.”
“그럴 듯하네.”
진목란은 건무정의 분석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 듯했다.
“뭐, 이정도만 합시다. 이 동생은 배나 좀 채우고 푹 잘까 합니다, 허허허.”
잠시 후, 주문한 요리가 나왔고 둘은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을 한 점, 한 점 입에 넣을 때마다 그 맛에 흠뻑 빠져 미소를 짓는 건무정과는 달리 진목란의 하얀 얼굴은 조금씩 일그러졌다.
입술을 파르르 떨며 들고 있던 젓가락이 부서져라 꽉 쥐는 진목란.
그녀를 향해 건무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듣기 싫을 때는 귀를 막는 게 제일이지요.”
뿌드득.
진목란은 이를 갈았다.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말도 아니잖습니까. 누님의 귀가 밝은 탓이라 생각합시다.”
진목란은 지금 수치심에 온몸을 떨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절정의 고수다.
보통 사람들보다 수 배, 수십 배 예민한 감각을 지녔음은 당연했다.
어느 정도 집중력만 발휘하면, 여기 이층에서 사람들이 주절거리는 말소리 정도는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이는 건무정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이곳에 있던 어떤 이들이 지껄여대는 음담패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었다.
그들이 털어대는 역겨운 대화의 방향은 바로 진목란을 향해 있었다.
세상 그 어떤 여인이 들어도 참기 힘들 말들이 그녀의 귀에 박혔다.
사실 진목란의 사문은 저들 따위는 쳐다볼 엄두도 못 낼 만큼 강호에 위명이 자자한 곳이다.
아니, 그랬었다.
그런 대단한 곳에서 자란 그녀가 언제 저런 상스러운 소리를 들어보았겠는가. 그것도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한.
게다가 평소 ‘순결지신’임을 자랑스레 여겨왔던 진목란은 저들의 상상 속에서 자신의 몸이 천 번, 만 번 더럽혀졌음으로 인해 머릿속이 하얘지는 충격을 받았다.
이윽고 그녀의 손이 허리로 향했다. 요대에 감추어둔 면검을 꺼내려는 것인가.
“제가 어르신에게서 처음 배웠던 것은.”
멈칫.
“바로 인내였습죠.”
순간, 꽉 다물어졌던 진목란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뭐, 그랬다고요.”
“넌…….”
“인내했더니 어느 날부턴가 세상을 보는 눈이 변하더이다.”
탁.
건무정도 진목란을 따라 젓가락을 놓았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참으라고?”
“모든 일에 다 참기만 하라는 의미는 아마도 아닐 겁니다. 다만.”
“다만?”
“말 몇 마디 했다고 목이 달아난다면 참으로 억울하겠지요. 억울한 자의 죽음은 그 자체로 상당한 주목거리기도 하고요.”
“몇 마디?”
진목란의 음성에는 아직도 날이 서 있었다.
“납득이 안 되면 가서 베고 오세요. 누님이야 남의 모욕적인 ‘귓속말’을 듣고 정당하게 체면을 지켰다고 ‘속으로’ 항변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마인으로 보일 겁니다.”
그제야 진목란은 건무정이 말하는 ‘인내’의 뜻을 일부 깨달았다.
현재 진목란의 심리 상태에서 검을 든다면, 팔, 다리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터였다.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왜 저들이 죽어야 하는지 말할 일은 없을 테니, 느닷없이 벌어진 참상으로 이 장시가 들썩거릴 터.
객잔을 포함해 장시에는 꽤나 많은 무림인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여기서 피를 뿌리게 되면, 시시비비가 분명한 무림인들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다.
건무정이 말하던 인내는 기다림이거나 아니면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는 일종의 지혜였다.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한 진목란은 요대로 가있던 손을 다시 식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얼마나 짜증나겠어요. 누님이 나~ 중에 손자, 손녀를 무릎에 앉혀놓고 옛 무용담을 들려줄 때, 이 할미가 검을 써서 처음으로 응징한 자들은 할미를 말로써 몰래 욕보인 이름 모를 무뢰배들이었다… 라고 하시면.”
“풋.”
진목란은 저도 모르게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백성들을 괴롭히는 산적이나 해적, 이름 난 도적, 못된 마인이나 음적, 이런 놈들 정도는 돼야 손자, 손녀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라할 테지요.”
“알았어, 그만해. 건 동생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이해했으니까. 그리고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어. 동생 말처럼 말 몇 마디로 목이 달아나야 한다면, 세상에 멀쩡히 살아서 걸어 다닐 인간이 얼마나 되겠어.”
깊은 한숨을 내쉰 진목란은 안색을 되찾고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입맛이 쓴지 쉬이 음식을 입안에 넣지 못했다.
* * *
각자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건무정과 진목란은 여정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한 후 미련 없이 장시를 떠났다.
이런 와중에도 많은 무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곳을 나서고 있었다.
두 사람은 최대한 강호인들과 거리를 두고자 관도를 벗어나 산길을 따라 이동했다.
칼 쓰는 자들 중에는 괜히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녀석들이 꼭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 엉뚱한 놈들이 하나둘 말이라도 붙이면 그것도 꽤나 피곤한 일이 될 터.
귀찮아한다거나 건성으로 대했다가는 자신을 무시하느냐며 화를 냄과 동시에 결투를 걸어올 미친놈이 흔한 곳이 바로 강호다.
실제로 그런 정신병자 같은 애송이 하나 때문에 일행이 몰살당하는 사태가 종종 일어나는 곳 또한 강호다.
그러니 그저 조용히 딴 길로 가다가 나중에 관도를 타고 가는 것이 차라리 속편한 방법이다.
이런 건무정의 설명에 진목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기 있게 건무정을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역시나 그녀는 강호초출에 불과했다.
그렇게 나름 평온한 여정이 한 시진 정도 이어졌다.
아직까지는 둘 주변에 특이할 만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