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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손님에 대한 첫인상은 ‘크다’였다.

보통의 성인남성들보다 적어도 손바닥 한 뼘 정도는 더 되어 보였다.

그렇다고 덩치가 우락부락하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어깨는 조금 처져 있었고, 또한 몸매도 꽤나 호리호리했다.

터벅, 터벅.

첩첩~! 휘리릭.

순간, 술을 다 비운 여우가 펄쩍 뛰어 건무정을 향해 다가오던 손님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뭐야? 주인이 있었으면서 나한테 아양을 떤 거였어?”

건무정은 혀를 차며 아쉬워했다.

화르륵.

바람이 모닥불을 강하게 밀어 올렸다.

그러자 불빛이 크게 흔들리며 여우의 은빛 털에 반사되었다.

이때 손님의 얼굴이 완연히 드러났다.

무어라 해야 할까.

그냥 잘생겼다는 표현 정도로는 부족할 만큼 극강의 미(美)를 자랑하는 흑색 경장의 ‘남자’.

그의 얼굴을 본 진목란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심지어 같은 남자인 건무정조차도 눈썹을 위로 올리고 고개를 앞으로 쭉 내밀며 감탄했을 지경이었다.

흑의 미남은 묵묵히 걸어와 건무정의 앞에 섰다.

진목란은 다시 한 번 건무정을 쳐다보며 어찌 할지를 눈으로 물었다.

하지만 건무정은 그녀에게 어떠한 의사도 표하지 않았다.

“…….”

서로를 잠시간 바라보는 건무정과 흑의 미남.

은색 여우가 몸을 타다닥 털자, 그제야 건무정이 입을 열었다.

“앉지.”

끄덕.

흑의 미남은 맨땅에 정좌하면서 감사를 표했다.

“남은 걸 다 비울까 하는데, 같이 할 텐가?”

건무정은 병을 들고 흔들었다.

끄덕.

또르르르.

어느새 여우가 땅에 내려와 술이 채워지던 그릇 앞에서 혀를 날름거렸다.



이후 서너 순배 정도 술그릇이 돌았다.

탁.

돌 위에 마지막 잔이 올려졌다.

건무정과 흑의 미남은 이때까지 주거니 받거니 술만 마실 뿐,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주문효(朱璊梟).”

드디어 흑의 미남이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혔다.

그의 목소리에 진목란은 눈썹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분명 그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음성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딘지 모르게 갈라지는 듯, 묘하게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었다.

“난… 건무정.”

“네가 천랑(天狼)이로군. 천마가 키운 늑대.”

주문효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그를 보던 건무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긍정의 표현일까.

“묻겠다.”

“물어봐.”

“네 강함을 어찌 증명할 것인가?”

“휘유~!”

뜬금없는 물음에 건무정은 휘파람을 불었다.

“강해야 하나?”

끄덕.

“왜?”

“난 가장 강한 이에게 힘을 빌려주기로 맹세했으니까.”

“그러냐…….”

그의 말에 건무정의 얼굴에 호기심이 서렸다.

“그걸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나와 싸워.”

단도직입적인 주문효의 말에 진목란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례한 자로군.”

진목란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여자 따위에게 입을 열어도 된다고 허락한 적은 없다.”

주문효는 진목란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붙어볼 테냐?”

진목란의 음성에 서리가 깔렸다.

그제야 주문효의 눈길이 진목란에게로 향했다.

“여자 따위와 검예를 논할 만큼 한가하지 않아.”

스릉.

진목란은 엄지로 청검의 검격(劍格)을 슬쩍 밀어 올렸다. 동시에 잠재해있던 내기를 외부로 발산시켰다.

주문효는 그녀의 몸 주위에 너울거리는 청염(靑炎)과도 같은 기운을 감지해냈다.

그의 눈동자에 찰나, 놀라움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강한 쪽은 외려 이쪽이로군. 그러나…….”

주문효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넋이 나갈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지금 여기에는 그것에 마음이 녹아내릴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혈기(血氣)가 없는 투지는 만용에 불과하지.”

“무슨 소리냐?”

진목란은 성큼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럴싸한 만용이다만, 그 검도, 네가 자랑하고 싶어 안달인 무예도 헛것에 다름없다.”

으드득.

진목란에게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문효가 한 말은 그녀의 사문을 모독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진목란의 ‘사연 있는’ 청검과 자랑하고파 ‘안달’인 무공을 헛것이라 치부해버렸으니.

스스스스스.

진목란에게서 바람이 일어나 주문효를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받아주던 상대에게서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한껏 여유를 부리며 뒷짐마저 진 주문효.

그를 보며 당장이라도 출수할 것처럼 검수(劍首)를 두드리는 진목란.

이를 두고 일촉즉발의 상황이라고 하지, 아마?

탁.

두 사람 사이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들떠있던 공간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거 참…….”

가만히 있던 건무정이 끼어들었다. 돌을 던진 이도 역시 그였고.

“한 마디로 누님한테서는 피 맛이 안 난다는 얘기올시다.”

“뭐라고?”

“피를 먹어보지 못한 모기는 평생 과즙만 빨다가 생을 마감합지요.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말입니다. 이제 이해하시겠죠?”

건무정의 해설에 진목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강했다. 실제,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진목란의 무예는 출중했다.

이미 이십대 초반에 절정의 경계를 어루만지던 진목란이었다.

지금은 만 명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다는 절정고수의 반열에 올라서기까지 했다.

단순히 무력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진목란은 현 시점의 건무정보다 뛰어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없는 단 하나.

진목란의 검에는 피의 흔적이 일절 존재치 않았다.

즉, 그녀는 아직 살인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의미.

종이 한 장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강호 고수들의 싸움에서, 살인 경험의 유무는 종이 만 장의 차이와 동급이었다.

주문효가 속으로 진목란의 수준을 높게 평가했음에도 그녀를 몇 수 아래로 보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어이, 어이. 너도 그리 생각하다가 큰 코 다쳐. 이분이 이래봬도 천마가 평생의 지기로 여겼던 어른의 친손녀에다가 천마 본인이 기꺼이 의손녀로 삼아버린 분이셔. 애초에 너와 나랑은 그릇이 다르다는 말씀이지.”

건무정이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도발하지 마. 내 앞에서 대련을 핑계로 후환을 제거할 요량이라면 방법이 틀렸어. 게다가 이 누님 뒤… 아니지, 네 뒤에는 좀 무시무시한 친구가 있거든.”

스윽.

주문효가 삐딱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한참 뒤편으로 붉은 천 같은 게 펄럭거렸다.

호랑이 가면을 쓴 적호였다.

그는 주문효를 주시하며 그에게 무언의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너도 느꼈겠지? 저 빨간 친구는 아예 피바다에서 허우적대던 존재라는 걸. 네가 나에게 볼일이 있는 듯하니 그냥 올려 보내준 거지, 이쪽 누님을 목표로 했다면 죽자 살자 널 공격했을 거야. 이제 네 뜻이 그래 보이니까 슬슬 칼질할 준비를 마친 게고.”

“들켰나?”

주문효는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어쩐지 진목란의 음성에서 북해의 냉기가 느껴졌다.

“너희 둘 다 나를 놀리고 있는 거냐?”

“아니 그게요.”

건무정이 얼버무리려는 찰나.

슈웃.

쾅!

몸을 엿가락처럼 늘어뜨리며 빛의 속도와도 같이 주문효가 건무정을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 * *



치이이이~

뜨거운 쇠붙이에 떨어진 물방울이 증발하는 듯한 소리.

거꾸로 쥐어진 청검과 철로 만든 호완(護腕)이 맞닿은 지점에서 일어난 기현상이었다.

뜨드득.

진목란의 청검은 어느새 금강석과도 흡사하게 단단해져 있었다.

그녀의 내기가 잔뜩 주입된 청검은 이미 그 자체로 천하의 명검.

그런데 이 명검의 예리한 날과 정통으로 부딪힌 주문효의 호완에는 약간의 흠도 보이지 않았다.

“비겁하다.”

진목란은 주문효를 냉엄하게 꾸짖었다.

“정대(正大)하지 못하게 기습이나 하다니.”

순간, 주문효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진목란을 일별했다.

“너!”

“그렇게 말할 시간에 누님께서 저 친구를 공격했다면 꽤나 당황했을 겁니다. 안 그래?”

정곡을 찌르는 건무정의 말에 주문효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난 방금 널 죽일 생각으로 움직였다.”

“알고 있어.”

“그럼에도 넌 그저 가만히 있었고.”

“취했나보지 뭐.”

“저 여자를 그만큼 믿는다는 건가?”

“그럴 지도.”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목란은 ‘흥!’ 코웃음을 치고는 청검을 거두었다.

“…….”

잠시 건무정과 진목란을 번갈아 보던 주문효는 몸을 돌렸다.

“이제 가려나?”

끄덕.

“어땠어?”

건무정이 물었다.

뒤돌아섰던 주문효는 짧게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턱을 들었다.

“문즉병불문약(聞則病不聞藥).”

들어서 병에 걸릴 바에는 차라리 안 듣는 게 이롭다라…….

형편이 없다거나 별로라거나 하는 말보다 더욱 잔인하게 들릴 만한 언사가 아닌가.

“아니, 나에 대한 네 생각 말고. 이 술 말이야. 내가 작년에 담갔던 건데 괜찮았나?”

“…….”

주문효는 다시금 건무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건무정이 하는 말 속에 담긴 어떤 의도를 읽은 듯, 고민에 빠진 눈치였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문효는 이내 말에 올랐고, 타박타박 말을 몰아 떠나려 했다.

“건무정.”

그때, 주문효가 건무정을 불렀다.

“삼 년 육 개월 전, 황룡을 받드는 무인들 일백이 양주에서 실종되었음을 혹 아는가?”

“글쎄다.”

“후일 그들이 발견되었을 때, 갈기갈기 난도질당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지.”

“불쌍해라.”

“그때의 야랑(野狼)은 어디가고 늙은 산달(山獺)만이 눈앞에 있구나.”

“허허허헛.”

“이 또한 네가 선택한 가면일 터.”

뚝.

“널 지켜보겠다.”

“…….”

“만약 네게 자격이 없다 판단되면.”

스륵 몸을 틀어 건무정을 응시하는 주문효.

“이 강호는 내가 차지할 테다.”

“잘 가시게.”

건무정은 손을 흔들어 주문효를 배웅했다.



주문효가 떠나고 다시금 고요가 찾아왔다.

나뭇가지들이 타닥거리며 불타는 울림이 더더욱 선명히 들렸다.

“누구야, 저 녀석은?”

어느새 평온을 찾은 진목란이 건무정에게 물었다.

“가끔 저런 정신 나간 자들도 있어서 세상이 재밌는 거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어이없네.”

“그렇죠? 뭐, 사실 제가 생각해도 다 미친놈들 같기는 합니다그려.”

부르르.

그때 진목란은 건무정의 하체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구나.

건무정은 참고 있었다.

주문효가 제안한 일전(一戰)을.

본래 야수와 야수가 만나면 한쪽이 죽거나 불구가 될 때까지 싸우는 법이다.

진목란은 알지 못하겠지만, 건무정은 과거 피를 물처럼 마셔대던 야수 중의 야수였다.

그랬던 그가 본능을 자극하는 또 다른 야수 주문효를 만났으니, 그 몸이 어찌 흥분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현재 그의 몸 상태로는 저 거대한 무인과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느닷없이 찾아온 깨달음은 불완전했고, 그로 인해 건무정의 수준은 한층 퇴보했으니까.

만약, 몸이 온전했더라도 승리를 점칠 수 없는 이가 주문효였다.

그가 간직한 깊은 어둠은 그 끝을 파악하기조차 불가능했다.

사실 무엇보다도 지금은 누구와도 부딪칠 때가 아니었다.

아직… 아직은 모든 것을 감추어야만 했다. 세상 어딘가에서 분명히 이쪽을 주시하는 눈들이 있을 테니까.

“어렵다, 어려워.”

건무정은 머리를 긁으며 옆을 보았다.

“어? 너 아직도 안 갔냐?”

크르르.

은색 여우가 낮게 으르렁댔다.

“뭐야, 너? 크크크크, 이놈 좀 보게. 바라는 게 있구만.”

여우는 건무정이 아까 술병을 꺼낸 나무 상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알았다, 알았어. 휴우.”

건무정은 아까워하면서도 몸을 일으켜 상자에서 술 한 병을 꺼냈다.

“가서 네 주인과 나눠 마셔라. 더는 못 줘.”

휘리릭.

술병의 주둥이를 물고 펄쩍 뛰어오르는 은색 여우.

여우는 술병을 바닥에 살짝 내려놓고는 ‘캬앙!’ 괴성을 질렀다.

“응? 네 주인이 아냐?”

용케도 짐승의 말을 알아듣는(?) 건무정이었다. 진짜 알아듣는 건지, 아니면 그렇게 듣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잘 가라, 너도. 어쨌거나 나중에 보거든 또 한 잔 할래?”

키잉!

“허허허헛!”

어쩐지 저쪽에서 적호가 한숨을 푹 내쉬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