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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허!”
건무정의 표정은 황당 그 자체였다.
반면에 진목란의 드러난 두 눈은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말이에요?”
“어, 응.”
“진짜 노숙(露宿)이 처음이라고요?”
아침나절에 은자림을 떠나 밤이 다 되어서야 이른 곳은 커다란 강줄기가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건무정은 애초부터 노숙을 할 목적으로 일부러 관도를 벗어나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는 자신을 뒤따르던 진목란이 딱히 이유를 묻지 않았기에 당연히 노숙에 동의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건무정이 막상 나귀에서 내리며 ‘오늘은 여기서 잡시다.’라고 하자, 진목란은 ‘뭐라고?’라며 소리를 빽 질렀다.
그제야 건무정은 그녀가 자신의 생각과는 상당히 다른 부류의 인간임을 깨달았다.
“아니, 그럼 아까 얘기를 하셨어야지.”
“나는 몰랐지.”
“아, 됐습니다. 밖에서 자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지금이라도 성읍이나 마을을 찾아보는 건 어때?”
“진 누님.”
“어.”
“한 번 주위를 둘러보세요.”
진목란은 그의 말대로 사방을 쭈욱 훑어보았다.
“깜깜하죠?”
“그러네.”
“빛이라고는 저 하늘에 걸린 달과 강물에 비친 달, 두 개밖에 없죠?”
“…….”
건무정은 손가락으로 희미하게 경계를 드러낸 지평선을 가리켰다.
“여기서 저 끝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
“아마도 이 밤의 절반은 잡아먹을 겁니다. 그런데 사방 천지에 자그마한 불빛조차 없으니, 누님이 원하는 시간 내에 닿을만한 곳에는 사람이 살지 않음이 확실할 테죠. 혹, 저 너머에 성읍이 있다 해도 아침까지는 성문을 열지 않을 것이고, 정말로 어쩌다가 민가를 발견한다 해도 누가 맘 편히 재워준답디까?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게다가 누님은 검까지 차고 있잖아요. 뭐, 그걸로 협박이라도 한다면야 방 한 칸은 빌려주겠지만.”
건무정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진목란도 전혀 반박을 하지 못했다.
“노숙 그거 뭐 진짜 힘든 거 아니에요. 좀 춥다 싶으면 내력을 운용하시면 되고, 자리가 딱딱하니 불편하다 싶으면 흙이랑 풀이랑 깔아서 잘 다듬으면 됩니다. 어렵다고요? 그럼 제가 도와드리죠.”
“나는 뭘 하면 되지?”
편안한 잠자리를 반강제로 포기한 진목란이 물었다.
“여기랑 저기, 한 자 정도 땅을 파주세요. 저는 물하고 나무를 구해오죠.”
건무정의 말처럼 노숙은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이미 이런 잠자리를 마련하는 데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기도 했고, 그만큼 준비도 철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은자림에서 진목란을 위해 말에 실어준 짐들도 그야말로 노숙을 위한 물품들이었으니, 약간의 불편만 감수한다면 현재 조건에서 더 나은 무언가를 찾기는 어려울 터였다.
부글부글~ 퐁.
사람 머리통만 한 쇠솥에서 죽이 지글지글 거품을 올렸다.
볕에 바짝 말린 민물생선과 빻아서 가루를 낸 곡식을 물에 섞어 끓인 이 죽이 이들의 저녁 식사였다.
물론 전부 건무정이 챙겨온 식재료들이었다.
낮 동안 시큼한 냄새가 나는 육포만 씹었던 건무정은 이제야 제대로 된 요리를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침을 꼴깍 삼켜가며 죽을 휘휘 저었다.
반면, 진목란은 난생 처음 맡아보는 희한한 냄새에 코를 찡그리고 있었다.
“드시죠.”
건무정은 죽을 한 그릇 떠서 그 안에 턱턱 건더기까지 얹어가며 진목란에게 권했다.
진목란은 달리 도리가 없어서 그릇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것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인 표정이었다.
“저 혼자 다 먹기에는 양이 좀 많은데…….”
돌려서 하는 말이었지만, 어서 먹으라는 재촉이나 다름이 없었다.
“고마워.”
망설임을 끝낸 진목란은 감사를 표한 뒤 죽을 후후 불었다.
뜨거운 죽에서 일어난 허연 김이 이리저리 날리면서 차가운 대기 속으로 퍼졌다.
진목란은 대충 젓가락 대용으로 삼은 나뭇가지를 이용해 생선죽을 입안으로 조금씩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리는가 하더니, 찰나 눈을 크게 뜨고 건무정을 쳐다보는 진목란.
그녀가 예상했던 비린 맛과는 천양지차로, 고소하고 느끼하지도 않으며 산뜻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때요, 이 동생의 솜씨가?”
건무정이 말캉말캉해진 고기 건더기를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맛있어.”
진목란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겨우 말린 생선 몇 마리와 누렇고 하얀 곡물가루 서너 주먹일 뿐이었다. 더 곁들인 것이라고는 한 술의 기름, 그리고 뻑뻑하게 물기를 빼고 부순 회색빛 건초(乾草) 한 움큼 정도?
이후 진목란은 죽을 다 먹을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흐뭇하게 웃던 건무정도 솥의 바닥을 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노숙도 할 만하죠?”
“그거랑은 다르지.”
맛난 저녁식사와 이슬 맞고 자는 밤은 별개임을 확실히 하는 진목란이었다.
“허허허.”
건무정은 모닥불에 나뭇가지 몇 개를 던지며 그 특유의 웃음소리를 흘렸다.
“아차.”
“왜?”
“적당히 남겨놓을 걸.”
건무정은 이마를 탁 쳤다.
“서운해 하겠네.”
그는 어딘가에 있을 적호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럼 다시 만들면 되잖아.”
탁.
건무정은 또다시 이마를 쳤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대기는 싸늘했다.
하지만 뒤쪽에 큰 바위를 두고 피운 모닥불의 열기와 몇 겹을 두른 모포 덕분에 진목란은 그다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건무정의 충고대로 내기를 일주천한다면 훨씬 따스한 밤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네.”
진목란이 맞은편에 앉은 건무정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꼭 알아야 할 것들이 더 있었다면 어르신께서 다 말씀해주셨을 테니까요.”
즉, 궁금한 게 전혀 없다는 뜻.
“그렇겠지…….”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휘돌다 지나갔다.
떨그럭.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다 비웠군, 다 비웠어.”
건무정은 다시 만든 생선죽을 그릇에 담아 언덕 아래 바위 옆에 놓아두었었다.
지금은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듯한 적호에게 알아서 가져다가 먹으라는 뜻으로.
“아, 미안. 잘 먹었다는 인사도 못했네.”
진목란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건무정에게 말했다.
“제 앞에서 기쁜 얼굴로 다 드셔주셨으니, 그것으로 이미 인사는 받았습니다.”
“어제 저녁도. 훌륭했어.”
“그때는 특히 식재료가 좋아서 그래요.”
“솔직히 할아버지가 음식을 남기지 않고 다 드시는 건 처음 봤어.”
“에? 그분이요? 생돌도 씹어 먹던 위인이셨는데.”
“그랬구나…….”
건무정은 그녀의 음성에 자괴감이 섞여 있음을 느꼈다.
아마도 그간 노인의 식사는 진목란이 만들었을 터.
뭐든지 잘 먹던, 아니 대식가였던 노인이 그녀의 손을 거친 밥과 반찬을 남겼다라.
“뭐, 그래도 누님께서 우려주신 차는 괜찮았어요.”
“위로는 되네.”
딸그락. 딸그락.
건무정과 진목란은 동시에 그릇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더 달라는 건가? 남은 게 없는데.”
건무정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아니야.”
순간 진목란이 청검을 쥐고 일어섰다.
“…….”
쉬이이잉~
잔잔하던 대기가 거친 바람에 요동쳤다.
시야를 거멓게 먹어버린 밤이었지만, 진목란은 용케도 여기저기 널린 바위들을 피하고 뛰어넘어가며 달렸다.
달그락, 달그락.
탓.
진목란이 멈춘 곳은 막 언덕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
바람결을 따라 휘날리는 길고도 붉은 머리카락.
풍성하기 그지없는 홍의(紅衣).
심지어 아래쪽으로 늘어뜨린, 검신이 짧은 양날검조차도 그 색이 검붉었다.
적호.
은자림의 장년인이 진목란의 호위라며 붙여준 은신의 달인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뒤로 돌아선 자세인 채로 적호는 쉬지 않고 왼손을 놀렸다.
건무정이 죽을 담아주었던 목그릇이 그 안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소리를 냈다.
적호는 이런 식으로 건무정과 진목란에게 ‘경고’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
아니나 다를까.
적호의 오 장 앞에 커다랗고 검은 형체가 가만히 서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목란이 있는 뒤쪽을 향해 적호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는 호랑이를 닮은, 아니 고양이에 가깝게 생긴 면구를 쓴 상태였다. 은신은 풀었으나 진면목은 여전히 보여주기 싫다는 뜻이리라.
어쨌거나 적호는 미지의 인물이 이 언덕으로 다가오자 자신의 본분을 수행하고자 나섰다.
그런데 적호도, 상대방도 기세를 올리지 않고 있었다.
진목란은 기이하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더 앞으로 나섰다.
크르릉.
순간 검은 형체로부터 살기가 일어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형체를 이루는 것들 중 아래쪽의 짐승으로부터였다.
터벅, 터벅.
짐승 따위가 사람에게 살기를?
진목란은 청검의 검파(劍把)를 가볍게 매만지며 코웃음을 쳤다.
이때 적호가 진목란에게 손을 뻗어 보이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나서지 말라는 의미일까.
마치 자신은 그저 ‘경고’를 보냈을 뿐, 그대는 또 그대의 역할에 충실하시오 라는 말을 하는 듯 느껴졌다.
진목란의 역할이라면? 바로 건무정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
진목란은 자신이 경솔하게 건무정의 곁을 비워두었음을 깨닫고는, 서둘러 언덕 위를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갔다.
하지만 모닥불 가까이에 도착한 진목란은 아까보다 더욱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술 한 병을 꺼내 든 건무정이 꿀꺽꿀꺽 내용물을 마셔대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를 당황케 만든 존재는 건무정의 옆에 얌전히 자리 잡은 은빛… 저건 뭐지?
“바람처럼 내려가시더니 다시 바람처럼 돌아오셨군.”
입을 스윽 닦은 건무정은 손바닥을 오므려 거기에 술을 부었다.
은빛의 무언가가 스르륵 움직였다.
“여우?”
마치 늙은이처럼 눈을 게슴츠레 반쯤 감고 있던 그것은 은색 여우였다.
“한 잔 더해라.”
첩~ 첩~
여우는 술이 담긴 손바닥에 주둥이를 갖다 대고는 혀를 날름거렸다.
“이거 웃긴 녀석일세, 허허헛!”
건무정은 이런 상황을 무척이나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진 누님, 이놈 좀 보세요. 갑자기 나타나서 제 옆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더니, 제가 마시던 술을 달라고 옷깃을 잡아끌지 뭡니까.”
“대체…….”
“영물이 아니고서야 이런 건방진 요구를 할 리는 없고, 그런데 이렇게 술을 좋아하는 녀석은 처음이네요. 껄껄껄껄!”
술을 다 핥아먹고 입맛을 다시던 은색 여우는 웃음을 터트린 건무정을 잠시 흘겨보다가 그의 옷을 물어 당겼다.
“또? 이거야 원, 쯧쯧.”
건무정은 몇 번 혀를 찬 뒤, 아예 목그릇에 술을 콸콸 부어 여우 앞에 내밀었다.
“독한 술인데 네가 다 마시는구나.”
첩첩첩~
“건 동생.”
“예.”
“이거 다 설명해봐.”
“보시다시피, 밤은 깊어가고 찾아온 손님은 있고…….”
푸릉~!
챠앙-!
말 울음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진목란이 청검을 뽑았다.
낭창낭창 탄력을 머금고 흔들리는 푸른 면검(綿劍).
면검이 가리키는 끝에서 두 개의 붉은 빛 덩어리가 아른거렸다.
틀림없이 조금 전의 그 말이었다. 사람 하나를 등에 태운.
적호는 어떻게 되었지? 이자와 맞붙은 게 아니었던가?
“아서요, 아서.”
그르르르.
진목란의 기세에 은색 여우도 곧장 반응하며 털을 빳빳이 세우고 이를 드러냈다.
“영물 어쩌고 치켜세워주었지만, 근본은 짐승인 것들이올시다. 사람의 행동과 감정에 쉽게 휘둘린다는 말씀. 지금 독한 짐승들이 날뛰면 이 동생은 감당키 어려우니, 그만 검을 거두시고 잠시 손님의 얘기도 들어봅시다.”
커다란 말에 오른 ‘손님’을 매섭게 노려보던 진목란을 건무정이 살살 달랬다.
이제 막 약관을 벗어난 건무정의 말과 행동에는 수십 년을 굴러먹은 노구(老狗)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약은 면이 있었다.
적의를 드러냈던 진목란의 눈동자를 흔들리게 만들었으니.
스릉.
짧게 고민하던 진목란은 이내 청검을 거두었다.
“…….”
은색 여우는 다시금 여유로운 자세로 술을 핥아대기 시작했고, 눈에 불을 켰던 말도 차분히 대가리를 낮추었다.
턱.
그때, 손님이 말에서 내렸다.
“허!”
건무정의 표정은 황당 그 자체였다.
반면에 진목란의 드러난 두 눈은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말이에요?”
“어, 응.”
“진짜 노숙(露宿)이 처음이라고요?”
아침나절에 은자림을 떠나 밤이 다 되어서야 이른 곳은 커다란 강줄기가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건무정은 애초부터 노숙을 할 목적으로 일부러 관도를 벗어나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는 자신을 뒤따르던 진목란이 딱히 이유를 묻지 않았기에 당연히 노숙에 동의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건무정이 막상 나귀에서 내리며 ‘오늘은 여기서 잡시다.’라고 하자, 진목란은 ‘뭐라고?’라며 소리를 빽 질렀다.
그제야 건무정은 그녀가 자신의 생각과는 상당히 다른 부류의 인간임을 깨달았다.
“아니, 그럼 아까 얘기를 하셨어야지.”
“나는 몰랐지.”
“아, 됐습니다. 밖에서 자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지금이라도 성읍이나 마을을 찾아보는 건 어때?”
“진 누님.”
“어.”
“한 번 주위를 둘러보세요.”
진목란은 그의 말대로 사방을 쭈욱 훑어보았다.
“깜깜하죠?”
“그러네.”
“빛이라고는 저 하늘에 걸린 달과 강물에 비친 달, 두 개밖에 없죠?”
“…….”
건무정은 손가락으로 희미하게 경계를 드러낸 지평선을 가리켰다.
“여기서 저 끝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
“아마도 이 밤의 절반은 잡아먹을 겁니다. 그런데 사방 천지에 자그마한 불빛조차 없으니, 누님이 원하는 시간 내에 닿을만한 곳에는 사람이 살지 않음이 확실할 테죠. 혹, 저 너머에 성읍이 있다 해도 아침까지는 성문을 열지 않을 것이고, 정말로 어쩌다가 민가를 발견한다 해도 누가 맘 편히 재워준답디까?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게다가 누님은 검까지 차고 있잖아요. 뭐, 그걸로 협박이라도 한다면야 방 한 칸은 빌려주겠지만.”
건무정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진목란도 전혀 반박을 하지 못했다.
“노숙 그거 뭐 진짜 힘든 거 아니에요. 좀 춥다 싶으면 내력을 운용하시면 되고, 자리가 딱딱하니 불편하다 싶으면 흙이랑 풀이랑 깔아서 잘 다듬으면 됩니다. 어렵다고요? 그럼 제가 도와드리죠.”
“나는 뭘 하면 되지?”
편안한 잠자리를 반강제로 포기한 진목란이 물었다.
“여기랑 저기, 한 자 정도 땅을 파주세요. 저는 물하고 나무를 구해오죠.”
건무정의 말처럼 노숙은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이미 이런 잠자리를 마련하는 데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기도 했고, 그만큼 준비도 철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은자림에서 진목란을 위해 말에 실어준 짐들도 그야말로 노숙을 위한 물품들이었으니, 약간의 불편만 감수한다면 현재 조건에서 더 나은 무언가를 찾기는 어려울 터였다.
부글부글~ 퐁.
사람 머리통만 한 쇠솥에서 죽이 지글지글 거품을 올렸다.
볕에 바짝 말린 민물생선과 빻아서 가루를 낸 곡식을 물에 섞어 끓인 이 죽이 이들의 저녁 식사였다.
물론 전부 건무정이 챙겨온 식재료들이었다.
낮 동안 시큼한 냄새가 나는 육포만 씹었던 건무정은 이제야 제대로 된 요리를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침을 꼴깍 삼켜가며 죽을 휘휘 저었다.
반면, 진목란은 난생 처음 맡아보는 희한한 냄새에 코를 찡그리고 있었다.
“드시죠.”
건무정은 죽을 한 그릇 떠서 그 안에 턱턱 건더기까지 얹어가며 진목란에게 권했다.
진목란은 달리 도리가 없어서 그릇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것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인 표정이었다.
“저 혼자 다 먹기에는 양이 좀 많은데…….”
돌려서 하는 말이었지만, 어서 먹으라는 재촉이나 다름이 없었다.
“고마워.”
망설임을 끝낸 진목란은 감사를 표한 뒤 죽을 후후 불었다.
뜨거운 죽에서 일어난 허연 김이 이리저리 날리면서 차가운 대기 속으로 퍼졌다.
진목란은 대충 젓가락 대용으로 삼은 나뭇가지를 이용해 생선죽을 입안으로 조금씩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리는가 하더니, 찰나 눈을 크게 뜨고 건무정을 쳐다보는 진목란.
그녀가 예상했던 비린 맛과는 천양지차로, 고소하고 느끼하지도 않으며 산뜻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때요, 이 동생의 솜씨가?”
건무정이 말캉말캉해진 고기 건더기를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맛있어.”
진목란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겨우 말린 생선 몇 마리와 누렇고 하얀 곡물가루 서너 주먹일 뿐이었다. 더 곁들인 것이라고는 한 술의 기름, 그리고 뻑뻑하게 물기를 빼고 부순 회색빛 건초(乾草) 한 움큼 정도?
이후 진목란은 죽을 다 먹을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흐뭇하게 웃던 건무정도 솥의 바닥을 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노숙도 할 만하죠?”
“그거랑은 다르지.”
맛난 저녁식사와 이슬 맞고 자는 밤은 별개임을 확실히 하는 진목란이었다.
“허허허.”
건무정은 모닥불에 나뭇가지 몇 개를 던지며 그 특유의 웃음소리를 흘렸다.
“아차.”
“왜?”
“적당히 남겨놓을 걸.”
건무정은 이마를 탁 쳤다.
“서운해 하겠네.”
그는 어딘가에 있을 적호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럼 다시 만들면 되잖아.”
탁.
건무정은 또다시 이마를 쳤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대기는 싸늘했다.
하지만 뒤쪽에 큰 바위를 두고 피운 모닥불의 열기와 몇 겹을 두른 모포 덕분에 진목란은 그다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건무정의 충고대로 내기를 일주천한다면 훨씬 따스한 밤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네.”
진목란이 맞은편에 앉은 건무정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꼭 알아야 할 것들이 더 있었다면 어르신께서 다 말씀해주셨을 테니까요.”
즉, 궁금한 게 전혀 없다는 뜻.
“그렇겠지…….”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휘돌다 지나갔다.
떨그럭.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다 비웠군, 다 비웠어.”
건무정은 다시 만든 생선죽을 그릇에 담아 언덕 아래 바위 옆에 놓아두었었다.
지금은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듯한 적호에게 알아서 가져다가 먹으라는 뜻으로.
“아, 미안. 잘 먹었다는 인사도 못했네.”
진목란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건무정에게 말했다.
“제 앞에서 기쁜 얼굴로 다 드셔주셨으니, 그것으로 이미 인사는 받았습니다.”
“어제 저녁도. 훌륭했어.”
“그때는 특히 식재료가 좋아서 그래요.”
“솔직히 할아버지가 음식을 남기지 않고 다 드시는 건 처음 봤어.”
“에? 그분이요? 생돌도 씹어 먹던 위인이셨는데.”
“그랬구나…….”
건무정은 그녀의 음성에 자괴감이 섞여 있음을 느꼈다.
아마도 그간 노인의 식사는 진목란이 만들었을 터.
뭐든지 잘 먹던, 아니 대식가였던 노인이 그녀의 손을 거친 밥과 반찬을 남겼다라.
“뭐, 그래도 누님께서 우려주신 차는 괜찮았어요.”
“위로는 되네.”
딸그락. 딸그락.
건무정과 진목란은 동시에 그릇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더 달라는 건가? 남은 게 없는데.”
건무정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아니야.”
순간 진목란이 청검을 쥐고 일어섰다.
“…….”
쉬이이잉~
잔잔하던 대기가 거친 바람에 요동쳤다.
시야를 거멓게 먹어버린 밤이었지만, 진목란은 용케도 여기저기 널린 바위들을 피하고 뛰어넘어가며 달렸다.
달그락, 달그락.
탓.
진목란이 멈춘 곳은 막 언덕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
바람결을 따라 휘날리는 길고도 붉은 머리카락.
풍성하기 그지없는 홍의(紅衣).
심지어 아래쪽으로 늘어뜨린, 검신이 짧은 양날검조차도 그 색이 검붉었다.
적호.
은자림의 장년인이 진목란의 호위라며 붙여준 은신의 달인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뒤로 돌아선 자세인 채로 적호는 쉬지 않고 왼손을 놀렸다.
건무정이 죽을 담아주었던 목그릇이 그 안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소리를 냈다.
적호는 이런 식으로 건무정과 진목란에게 ‘경고’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
아니나 다를까.
적호의 오 장 앞에 커다랗고 검은 형체가 가만히 서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목란이 있는 뒤쪽을 향해 적호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는 호랑이를 닮은, 아니 고양이에 가깝게 생긴 면구를 쓴 상태였다. 은신은 풀었으나 진면목은 여전히 보여주기 싫다는 뜻이리라.
어쨌거나 적호는 미지의 인물이 이 언덕으로 다가오자 자신의 본분을 수행하고자 나섰다.
그런데 적호도, 상대방도 기세를 올리지 않고 있었다.
진목란은 기이하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더 앞으로 나섰다.
크르릉.
순간 검은 형체로부터 살기가 일어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형체를 이루는 것들 중 아래쪽의 짐승으로부터였다.
터벅, 터벅.
짐승 따위가 사람에게 살기를?
진목란은 청검의 검파(劍把)를 가볍게 매만지며 코웃음을 쳤다.
이때 적호가 진목란에게 손을 뻗어 보이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나서지 말라는 의미일까.
마치 자신은 그저 ‘경고’를 보냈을 뿐, 그대는 또 그대의 역할에 충실하시오 라는 말을 하는 듯 느껴졌다.
진목란의 역할이라면? 바로 건무정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
진목란은 자신이 경솔하게 건무정의 곁을 비워두었음을 깨닫고는, 서둘러 언덕 위를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갔다.
하지만 모닥불 가까이에 도착한 진목란은 아까보다 더욱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술 한 병을 꺼내 든 건무정이 꿀꺽꿀꺽 내용물을 마셔대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를 당황케 만든 존재는 건무정의 옆에 얌전히 자리 잡은 은빛… 저건 뭐지?
“바람처럼 내려가시더니 다시 바람처럼 돌아오셨군.”
입을 스윽 닦은 건무정은 손바닥을 오므려 거기에 술을 부었다.
은빛의 무언가가 스르륵 움직였다.
“여우?”
마치 늙은이처럼 눈을 게슴츠레 반쯤 감고 있던 그것은 은색 여우였다.
“한 잔 더해라.”
첩~ 첩~
여우는 술이 담긴 손바닥에 주둥이를 갖다 대고는 혀를 날름거렸다.
“이거 웃긴 녀석일세, 허허헛!”
건무정은 이런 상황을 무척이나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진 누님, 이놈 좀 보세요. 갑자기 나타나서 제 옆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더니, 제가 마시던 술을 달라고 옷깃을 잡아끌지 뭡니까.”
“대체…….”
“영물이 아니고서야 이런 건방진 요구를 할 리는 없고, 그런데 이렇게 술을 좋아하는 녀석은 처음이네요. 껄껄껄껄!”
술을 다 핥아먹고 입맛을 다시던 은색 여우는 웃음을 터트린 건무정을 잠시 흘겨보다가 그의 옷을 물어 당겼다.
“또? 이거야 원, 쯧쯧.”
건무정은 몇 번 혀를 찬 뒤, 아예 목그릇에 술을 콸콸 부어 여우 앞에 내밀었다.
“독한 술인데 네가 다 마시는구나.”
첩첩첩~
“건 동생.”
“예.”
“이거 다 설명해봐.”
“보시다시피, 밤은 깊어가고 찾아온 손님은 있고…….”
푸릉~!
챠앙-!
말 울음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진목란이 청검을 뽑았다.
낭창낭창 탄력을 머금고 흔들리는 푸른 면검(綿劍).
면검이 가리키는 끝에서 두 개의 붉은 빛 덩어리가 아른거렸다.
틀림없이 조금 전의 그 말이었다. 사람 하나를 등에 태운.
적호는 어떻게 되었지? 이자와 맞붙은 게 아니었던가?
“아서요, 아서.”
그르르르.
진목란의 기세에 은색 여우도 곧장 반응하며 털을 빳빳이 세우고 이를 드러냈다.
“영물 어쩌고 치켜세워주었지만, 근본은 짐승인 것들이올시다. 사람의 행동과 감정에 쉽게 휘둘린다는 말씀. 지금 독한 짐승들이 날뛰면 이 동생은 감당키 어려우니, 그만 검을 거두시고 잠시 손님의 얘기도 들어봅시다.”
커다란 말에 오른 ‘손님’을 매섭게 노려보던 진목란을 건무정이 살살 달랬다.
이제 막 약관을 벗어난 건무정의 말과 행동에는 수십 년을 굴러먹은 노구(老狗)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약은 면이 있었다.
적의를 드러냈던 진목란의 눈동자를 흔들리게 만들었으니.
스릉.
짧게 고민하던 진목란은 이내 청검을 거두었다.
“…….”
은색 여우는 다시금 여유로운 자세로 술을 핥아대기 시작했고, 눈에 불을 켰던 말도 차분히 대가리를 낮추었다.
턱.
그때, 손님이 말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