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8화]
건무정과 진목란은 그 길로 산 아래까지 내려왔다.
보통 때 같았으면 이른 아침부터 많은 이들이 나와 밭일로 분주했을 터.
하지만 지금은 일하는 이들의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밭 샛길 가운데에 두 명의 남자가 서서 건무정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막힘없이 그들에게 다가가는 건무정.
이윽고 서로 대화가 가능한 거리에 이르자, 그는 걸음을 멈췄다.
한 명은 덩치가 크고 얼굴이 험상궂은 청년.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오른쪽 안면이 흐물흐물 내려앉은 장년인이었다.
둘을 잠시 쳐다보던 건무정은 이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림(林) 바깥에 소저가 탈 말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장년인이 진목란에게 말했다.
진목란은 차분히 그에게 목례를 하며 감사를 표했다.
“적호(赤虎)가 소저를 따를 겝니다.”
웬 뻘건 호랑이 새끼?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진목란은 장년인의 ‘호의’를 거절하고자 했다.
“지존께서는 소저를 조손(祖孫)의 예로 맞이하셨지요. 소저의 사문과 저희 사이의 과거야 어떻든 간에, 우리에게는 지존의 뜻을 받들 의무가 있습니다.”
장년인은 메마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 과거를 완전히 묻어둘 수도 없는 법. 저희 중에는 아직도 소저의 조부와 부친을 지독히 미워하는 이들이 있지요. 그래서 크게 도움을 드리지는 못합니다. 이 정도까지가 제가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랍니다. 그러니 부디 거절치 마시길.”
장년인의 음성에는 거부하기 힘든 무언가가 스며있는 듯했다.
그의 말에 진목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게다가 이곳에서 짧게나마 몇 년 머물다 가시는 분이 밖에서 해라도 입는다면, 제가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고 다닐 것입니다.”
마지막 몇 마디를 하며 장년인은 슬쩍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지켜야 할 상대가 틀린 것 같군요.”
진목란은 턱짓으로 건무정을 가리켰다.
“…….”
그녀의 행동에 장년인도, 청년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에게 있어 건무정은 어떤 의미일까.
노인의 후계자? 새로운 은자림주?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로 불려야 할 존재?
“강호의 바람은 매섭고 차갑습니다. 가셔야 할 길이 멀고 험하니 항상 주위를 둘러보고, 가까이 있는 이들을 아끼셔야 뜻한 바를 이루실 겁니다.”
장년인이 진목란을 향해 정중하게 읍을 하며 말했다.
그에게 마주하여 읍하던 진목란이 힐끔 건무정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귀를 쫑긋 세우고 뒤에서 들려오는 말들을 듣고 있는 건무정.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장년인이 하는 말들의 대부분이 진목란이 아닌 건무정 자신을 향한 것임을 모를 리는 없을 터였다.
“살펴 가십시오.”
“감사해요.”
잠시 후, 장년인과 청년은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갔다.
밭과 숲의 경계 즈음에 이르자, 근처에서 꾸벅거리던 나귀가 다가왔다.
나귀는 건무정의 손을 핥으며 반가움을 표했고, 건무정도 애정 어린 눈으로 나귀를 쓰다듬었다.
“잘 먹고 잘 잤냐?”
으흐으어어어~
“괴로워하는 것인가요?”
나귀의 울음소리를 처음 들어본 진목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뇨. 얘들은 원래 이렇게 울어요.”
“아…….”
나귀의 등을 슬슬 문지르던 건무정은 이내 훌쩍 그 등에 올라탔다.
“제 뒤에 타실래요?”
“싫어요.”
“크흠,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될 것을.”
‘아니요~’와 ‘싫어요!’는 어감부터가 다르다. 후자 쪽이 훨씬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랄까.
한탄하는 건무정을 보며 진목란은 뭐라고 더 심하게 말을 하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그만두었다.
“두 사람의 무게를 나귀가 힘들어할 것 같아서 서둘러 말하다보니 실례를 했네요.”
“나귀에 대해 정말 잘 모르시는군.”
건무정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나귀를 몰아 숲으로 들어갔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나가는 길은 어둡고 칙칙했다.
건무정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숲의 진짜 모습임을.
이 숲에는 본래 엄청난 규모의 절진이 형성되어 있었다.
누구의 접근도 허용치 않겠다는 ‘은자림’의 의지와도 같은.
건무정이 어제 이곳을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노인이 그의 방문을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노인의 허가가 없었다 할지라도 숲은 건무정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건무정은 예전에 숲의 절진을 지긋지긋하게 겪어보았고, 나중에는 눈을 감고도 생로(生路)를 찾아낼 정도로 단련이 된 상태였다.
그렇다 하여 지금 느껴지는 이 스산함에 적응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항상 그래왔듯, 어디선가 ‘죽음’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뻐근함이 뒤통수를 맴돌았다.
으허어어~ 꺼럭꺼럭.
나귀도 불쾌한 듯 낮게 울었다.
“너 참 예민하다. 이거 원래 짐승들한테는 영향을 안 주는 건데.”
건무정은 나귀를 쓰다듬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흐흠.”
건무정은 눈에 힘을 꽉 준 채 자신을 묵묵히 따르고 있는 진목란을 보며 가벼운 감탄성을 흘렸다.
강호의 초일류 고수들도 반 각이면 거품을 문다는 절진 속에서 그녀는 상당히 잘 버티는 중이었다.
이는 그녀의 성취가 초일류를 넘어 절정에 이르렀음을 방증하는 것.
노인이 진목란에게 건무정의 호위를 ‘부탁’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숲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진의 형세가 변하며 그 영향력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그제야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는 진목란.
건무정과는 달리, 그녀는 제대로 발동한 숲의 절진을 처음 겪었기 때문에 꽤나 많은 심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저기.”
건무정은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가리켰다.
나무들이 듬성듬성한 길 끝에 말이 한 마리 서 있었다.
하얀 바탕에 검은 점들이 가득한, 중원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외형의 말이었다.
헌데 진목란을 따를 것이라던 적호라는 인물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장년인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아마도 적호는 은신 능력에 있어 대단한 기량을 가진 자임이 분명했다.
기감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던 건무정조차도 어디에 적호가 숨어 있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으니까.
“건 공자님,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알려드려도 잘 모르실 걸요. 아, 그리고 그 ‘공자(公子)’ 소리는 좀 빼시죠. 저 그렇게 잘난 집안 출신은 아니거든요.”
“그럼 소협이라고 불러드릴까요?”
“협을 행해본 적도 없고, 그럴 예정도 없으니 소협도 아니고……. 그냥 나이대로 정합시다. 혹, 몇 살이신지? 저는 이제 갓 스물을 넘었습니다만.”
“스물다섯.”
보통의 여인네들은 쉬이 나이 밝히기를 꺼린다. 이는 강호 무가(武家)에 속한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아직도 혼인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상대가 남자라면 뭐.
각별한 사이가 아닌 이상, 여자가 남자에게 직접적으로 나이를 말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진목란은 건무정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본인의 연령을 망설임 없이 말했다.
확실히 그녀에게는 천하를 통틀어 여느 여인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그게 어느 방향이든 간에.
“동생이라 부르시죠. 저는 누님이라고 할 테니.”
“그래, 건 동생.”
“깔끔하니 좋네요, 허허.”
“동생, 다시 물을게. 이제 어디로 갈 거지?”
누나, 동생 사이가 되기는 했지만, 진목란은 여전히 엄격하고 정중한 ‘선(線)’을 그어놓고 건무정을 대했다.
“오래 전에 잊힌 이들을 만나러 갑니다.”
“…….”
“때가 되면 가장 먼저 찾아가겠노라고 약속을 했지요.”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거로군.”
끄덕.
건무정은 진목란에게 긍정을 표했다. 그러면서 눈을 돌려 어딘가를 진하게 응시했다.
그의 뜻은 명백했다. 굳이 여기서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상대가 진목란이어서가 아닌, 그 ‘어딘가’에 은신하고 있을 적호가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믿지 말라.’
노인의 이러한 충고 때문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천천히 가도 열흘은 안 넘길 테니 썩 먼 곳은 아닙니다.”
진목란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거린 후 바로 말에 올라탔다.
쉬이잉~
안개 자욱한 산자락에 이르렀을 때,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건무정을 훑고 지나갔다.
건무정은 잠시 나귀를 멈추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저 너머에 존재하는 은자림.
중원 곳곳 험지에 은밀하게 자리한 수많은 은자림들 중에 하나지만, 저곳이 더욱 특별했던 이유는 바로 건무정이 어르신이라 했던 그 노인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잘 가십시오, 어르신.’
건무정은 속으로 노인의 명복을 빌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과거에 세상은 어르신을 천마라 부르며 공포에 떨었고 또 증오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하고 편하게 세상을 뜨셨는데.’
건무정이 아련한 눈으로 이제는 노인, 천마의 무덤이 된 은자림 쪽을 바라보자, 진목란도 잠시 감상에 젖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뵙지요. 아마도 꼭 그리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또한 지옥으로 떨어질 테니까요.’
“허허허.”
건무정은 그 나이답지 않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늘 이런 식으로 웃음을 짓고는 했다.
“이제 가십시다.”
“…….”
“너도 출바알~”
건무정은 발로 나귀의 배를 툭툭 건드렸다.
* * *
불이 꺼진 복도를 무언가가 지나갔다.
마치 유령과도 같은 움직임.
두 다리가 멀쩡한 것으로 보아 사람임에는 분명하건만, 핏기 없는 얼굴에 하얗게 죽어버린 눈동자, 일체의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 팔과 다리는 그 실체를 의심케 했다.
스스스스.
‘괴인’이 멈춘 곳은 등(燈)이 밝혀진 방 바로 앞이었다.
빛과 어둠.
공존할 수 없는 두 세계가 창(窓)을 경계로 마주했다.
빛 속에 위치한 장대한 체구의 남자는 곧 잠자리에 들 예정이었는지, 머리를 풀어헤친 상태로 자리에 앉아 한 권의 고서(古書)를 보는 중이었다.
이윽고 남자가 이 오래된 책을 덮으며 말했다.
“맹덕과 본초의 결전은 언제 읽어도 흥미롭다네.”
남자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강한 자가 경계해야 할 모든 것들이 이들의 이야기에 다 들어있다고나 할까.”
조조와 원소의 하북 패권전쟁을 논할 때, 대부분은 조조의 편에서 교훈을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남자는 오히려 원소의 입장에서 취하고 또 버려야 할 부분을 생각하는 듯했다.
강자(强者)들의 사고방식은 일반인들의 이해영역과는 궤를 달리 한다더니, 딱 이 남자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래, 어인 일인가?”
스윽.
남자가 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짙은 눈썹 아래로 부드럽고도 그윽한 빛을 머금은 눈.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
중년을 훨씬 넘겼을 나이임에도 주름 하나 없는 피부.
그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호인이요, 제왕의 풍모였다.
“……회천(回天).”
창 바깥의 괴인으로부터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그런가?”
말투와는 달리 남자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눈썹만 살짝 올렸다 내릴 뿐이었다.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가셨구먼.”
분명 입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서서히 나타나는 것은 핏발이었다.
“다 늙은 나이에 뭔 좋은 꼴을 보겠다고 그리 버티셨는지, 쯧쯧.”
남자는 창 바깥의 괴인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지금껏 단 한 차례도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 믿기 힘든 상황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말을 전한 이는?”
“…….”
“그래, 그랬겠지.”
지난번과 같이 암어(暗語)를 중얼거린 뒤 스스로 심맥을 끊고 자결했을 터.
독심을 품은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그들’은 몸소 보여주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했던 두 영웅이 차례대로 떠났다네. 무당의 일검(一劍) 청명진인과 마교의 천마가.”
“…….”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네는 알겠는가?”
“속하가 부족하여 가르침을 청하옵니다.”
“새로운 영웅의 시대가 도래했음이야.”
광오하다. 미칠 듯이 광오한 남자의 말.
새로운 영웅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제 그분이 떠나셨으니… 사패와 삼강의 천하에 한바탕 광풍이 불겠군. 더 이상 두려워할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으니 말일세.”
“그러하옵니다.”
“일단 자네도 들어가 푹 쉬게나. 앞으로 할 일이 차고 넘칠 테니.”
“명을 받드옵니다.”
스스스스스.
괴인의 존재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남자.
그는 한참이나 가만히 앉아서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게 무엇이든, 미래에 대한 설계든, 혹은 과거에 대한 추억이든, 그의 상념은 끝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스스스스스.
사라졌던 괴인이 복도 끝에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허공을 부유하듯 뻣뻣한 몸으로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화아악~!
괴인의 전신이 검고 칙칙한 안개에 휩싸였다.
시꺼먼 안개를 두른 흑영.
그의 시선은 저 어딘가에 있을 무언가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건무정과 진목란은 그 길로 산 아래까지 내려왔다.
보통 때 같았으면 이른 아침부터 많은 이들이 나와 밭일로 분주했을 터.
하지만 지금은 일하는 이들의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밭 샛길 가운데에 두 명의 남자가 서서 건무정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막힘없이 그들에게 다가가는 건무정.
이윽고 서로 대화가 가능한 거리에 이르자, 그는 걸음을 멈췄다.
한 명은 덩치가 크고 얼굴이 험상궂은 청년.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오른쪽 안면이 흐물흐물 내려앉은 장년인이었다.
둘을 잠시 쳐다보던 건무정은 이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림(林) 바깥에 소저가 탈 말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장년인이 진목란에게 말했다.
진목란은 차분히 그에게 목례를 하며 감사를 표했다.
“적호(赤虎)가 소저를 따를 겝니다.”
웬 뻘건 호랑이 새끼?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진목란은 장년인의 ‘호의’를 거절하고자 했다.
“지존께서는 소저를 조손(祖孫)의 예로 맞이하셨지요. 소저의 사문과 저희 사이의 과거야 어떻든 간에, 우리에게는 지존의 뜻을 받들 의무가 있습니다.”
장년인은 메마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 과거를 완전히 묻어둘 수도 없는 법. 저희 중에는 아직도 소저의 조부와 부친을 지독히 미워하는 이들이 있지요. 그래서 크게 도움을 드리지는 못합니다. 이 정도까지가 제가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랍니다. 그러니 부디 거절치 마시길.”
장년인의 음성에는 거부하기 힘든 무언가가 스며있는 듯했다.
그의 말에 진목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게다가 이곳에서 짧게나마 몇 년 머물다 가시는 분이 밖에서 해라도 입는다면, 제가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고 다닐 것입니다.”
마지막 몇 마디를 하며 장년인은 슬쩍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지켜야 할 상대가 틀린 것 같군요.”
진목란은 턱짓으로 건무정을 가리켰다.
“…….”
그녀의 행동에 장년인도, 청년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에게 있어 건무정은 어떤 의미일까.
노인의 후계자? 새로운 은자림주?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로 불려야 할 존재?
“강호의 바람은 매섭고 차갑습니다. 가셔야 할 길이 멀고 험하니 항상 주위를 둘러보고, 가까이 있는 이들을 아끼셔야 뜻한 바를 이루실 겁니다.”
장년인이 진목란을 향해 정중하게 읍을 하며 말했다.
그에게 마주하여 읍하던 진목란이 힐끔 건무정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귀를 쫑긋 세우고 뒤에서 들려오는 말들을 듣고 있는 건무정.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장년인이 하는 말들의 대부분이 진목란이 아닌 건무정 자신을 향한 것임을 모를 리는 없을 터였다.
“살펴 가십시오.”
“감사해요.”
잠시 후, 장년인과 청년은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갔다.
밭과 숲의 경계 즈음에 이르자, 근처에서 꾸벅거리던 나귀가 다가왔다.
나귀는 건무정의 손을 핥으며 반가움을 표했고, 건무정도 애정 어린 눈으로 나귀를 쓰다듬었다.
“잘 먹고 잘 잤냐?”
으흐으어어어~
“괴로워하는 것인가요?”
나귀의 울음소리를 처음 들어본 진목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뇨. 얘들은 원래 이렇게 울어요.”
“아…….”
나귀의 등을 슬슬 문지르던 건무정은 이내 훌쩍 그 등에 올라탔다.
“제 뒤에 타실래요?”
“싫어요.”
“크흠,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될 것을.”
‘아니요~’와 ‘싫어요!’는 어감부터가 다르다. 후자 쪽이 훨씬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랄까.
한탄하는 건무정을 보며 진목란은 뭐라고 더 심하게 말을 하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그만두었다.
“두 사람의 무게를 나귀가 힘들어할 것 같아서 서둘러 말하다보니 실례를 했네요.”
“나귀에 대해 정말 잘 모르시는군.”
건무정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나귀를 몰아 숲으로 들어갔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나가는 길은 어둡고 칙칙했다.
건무정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숲의 진짜 모습임을.
이 숲에는 본래 엄청난 규모의 절진이 형성되어 있었다.
누구의 접근도 허용치 않겠다는 ‘은자림’의 의지와도 같은.
건무정이 어제 이곳을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노인이 그의 방문을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노인의 허가가 없었다 할지라도 숲은 건무정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건무정은 예전에 숲의 절진을 지긋지긋하게 겪어보았고, 나중에는 눈을 감고도 생로(生路)를 찾아낼 정도로 단련이 된 상태였다.
그렇다 하여 지금 느껴지는 이 스산함에 적응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항상 그래왔듯, 어디선가 ‘죽음’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뻐근함이 뒤통수를 맴돌았다.
으허어어~ 꺼럭꺼럭.
나귀도 불쾌한 듯 낮게 울었다.
“너 참 예민하다. 이거 원래 짐승들한테는 영향을 안 주는 건데.”
건무정은 나귀를 쓰다듬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흐흠.”
건무정은 눈에 힘을 꽉 준 채 자신을 묵묵히 따르고 있는 진목란을 보며 가벼운 감탄성을 흘렸다.
강호의 초일류 고수들도 반 각이면 거품을 문다는 절진 속에서 그녀는 상당히 잘 버티는 중이었다.
이는 그녀의 성취가 초일류를 넘어 절정에 이르렀음을 방증하는 것.
노인이 진목란에게 건무정의 호위를 ‘부탁’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숲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진의 형세가 변하며 그 영향력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그제야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는 진목란.
건무정과는 달리, 그녀는 제대로 발동한 숲의 절진을 처음 겪었기 때문에 꽤나 많은 심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저기.”
건무정은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가리켰다.
나무들이 듬성듬성한 길 끝에 말이 한 마리 서 있었다.
하얀 바탕에 검은 점들이 가득한, 중원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외형의 말이었다.
헌데 진목란을 따를 것이라던 적호라는 인물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장년인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아마도 적호는 은신 능력에 있어 대단한 기량을 가진 자임이 분명했다.
기감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던 건무정조차도 어디에 적호가 숨어 있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으니까.
“건 공자님,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알려드려도 잘 모르실 걸요. 아, 그리고 그 ‘공자(公子)’ 소리는 좀 빼시죠. 저 그렇게 잘난 집안 출신은 아니거든요.”
“그럼 소협이라고 불러드릴까요?”
“협을 행해본 적도 없고, 그럴 예정도 없으니 소협도 아니고……. 그냥 나이대로 정합시다. 혹, 몇 살이신지? 저는 이제 갓 스물을 넘었습니다만.”
“스물다섯.”
보통의 여인네들은 쉬이 나이 밝히기를 꺼린다. 이는 강호 무가(武家)에 속한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아직도 혼인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상대가 남자라면 뭐.
각별한 사이가 아닌 이상, 여자가 남자에게 직접적으로 나이를 말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진목란은 건무정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본인의 연령을 망설임 없이 말했다.
확실히 그녀에게는 천하를 통틀어 여느 여인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그게 어느 방향이든 간에.
“동생이라 부르시죠. 저는 누님이라고 할 테니.”
“그래, 건 동생.”
“깔끔하니 좋네요, 허허.”
“동생, 다시 물을게. 이제 어디로 갈 거지?”
누나, 동생 사이가 되기는 했지만, 진목란은 여전히 엄격하고 정중한 ‘선(線)’을 그어놓고 건무정을 대했다.
“오래 전에 잊힌 이들을 만나러 갑니다.”
“…….”
“때가 되면 가장 먼저 찾아가겠노라고 약속을 했지요.”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거로군.”
끄덕.
건무정은 진목란에게 긍정을 표했다. 그러면서 눈을 돌려 어딘가를 진하게 응시했다.
그의 뜻은 명백했다. 굳이 여기서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상대가 진목란이어서가 아닌, 그 ‘어딘가’에 은신하고 있을 적호가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믿지 말라.’
노인의 이러한 충고 때문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천천히 가도 열흘은 안 넘길 테니 썩 먼 곳은 아닙니다.”
진목란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거린 후 바로 말에 올라탔다.
쉬이잉~
안개 자욱한 산자락에 이르렀을 때,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건무정을 훑고 지나갔다.
건무정은 잠시 나귀를 멈추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저 너머에 존재하는 은자림.
중원 곳곳 험지에 은밀하게 자리한 수많은 은자림들 중에 하나지만, 저곳이 더욱 특별했던 이유는 바로 건무정이 어르신이라 했던 그 노인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잘 가십시오, 어르신.’
건무정은 속으로 노인의 명복을 빌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과거에 세상은 어르신을 천마라 부르며 공포에 떨었고 또 증오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하고 편하게 세상을 뜨셨는데.’
건무정이 아련한 눈으로 이제는 노인, 천마의 무덤이 된 은자림 쪽을 바라보자, 진목란도 잠시 감상에 젖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뵙지요. 아마도 꼭 그리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또한 지옥으로 떨어질 테니까요.’
“허허허.”
건무정은 그 나이답지 않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늘 이런 식으로 웃음을 짓고는 했다.
“이제 가십시다.”
“…….”
“너도 출바알~”
건무정은 발로 나귀의 배를 툭툭 건드렸다.
* * *
불이 꺼진 복도를 무언가가 지나갔다.
마치 유령과도 같은 움직임.
두 다리가 멀쩡한 것으로 보아 사람임에는 분명하건만, 핏기 없는 얼굴에 하얗게 죽어버린 눈동자, 일체의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 팔과 다리는 그 실체를 의심케 했다.
스스스스.
‘괴인’이 멈춘 곳은 등(燈)이 밝혀진 방 바로 앞이었다.
빛과 어둠.
공존할 수 없는 두 세계가 창(窓)을 경계로 마주했다.
빛 속에 위치한 장대한 체구의 남자는 곧 잠자리에 들 예정이었는지, 머리를 풀어헤친 상태로 자리에 앉아 한 권의 고서(古書)를 보는 중이었다.
이윽고 남자가 이 오래된 책을 덮으며 말했다.
“맹덕과 본초의 결전은 언제 읽어도 흥미롭다네.”
남자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강한 자가 경계해야 할 모든 것들이 이들의 이야기에 다 들어있다고나 할까.”
조조와 원소의 하북 패권전쟁을 논할 때, 대부분은 조조의 편에서 교훈을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남자는 오히려 원소의 입장에서 취하고 또 버려야 할 부분을 생각하는 듯했다.
강자(强者)들의 사고방식은 일반인들의 이해영역과는 궤를 달리 한다더니, 딱 이 남자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래, 어인 일인가?”
스윽.
남자가 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짙은 눈썹 아래로 부드럽고도 그윽한 빛을 머금은 눈.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
중년을 훨씬 넘겼을 나이임에도 주름 하나 없는 피부.
그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호인이요, 제왕의 풍모였다.
“……회천(回天).”
창 바깥의 괴인으로부터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그런가?”
말투와는 달리 남자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눈썹만 살짝 올렸다 내릴 뿐이었다.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가셨구먼.”
분명 입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서서히 나타나는 것은 핏발이었다.
“다 늙은 나이에 뭔 좋은 꼴을 보겠다고 그리 버티셨는지, 쯧쯧.”
남자는 창 바깥의 괴인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지금껏 단 한 차례도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 믿기 힘든 상황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말을 전한 이는?”
“…….”
“그래, 그랬겠지.”
지난번과 같이 암어(暗語)를 중얼거린 뒤 스스로 심맥을 끊고 자결했을 터.
독심을 품은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그들’은 몸소 보여주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했던 두 영웅이 차례대로 떠났다네. 무당의 일검(一劍) 청명진인과 마교의 천마가.”
“…….”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네는 알겠는가?”
“속하가 부족하여 가르침을 청하옵니다.”
“새로운 영웅의 시대가 도래했음이야.”
광오하다. 미칠 듯이 광오한 남자의 말.
새로운 영웅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제 그분이 떠나셨으니… 사패와 삼강의 천하에 한바탕 광풍이 불겠군. 더 이상 두려워할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으니 말일세.”
“그러하옵니다.”
“일단 자네도 들어가 푹 쉬게나. 앞으로 할 일이 차고 넘칠 테니.”
“명을 받드옵니다.”
스스스스스.
괴인의 존재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남자.
그는 한참이나 가만히 앉아서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게 무엇이든, 미래에 대한 설계든, 혹은 과거에 대한 추억이든, 그의 상념은 끝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스스스스스.
사라졌던 괴인이 복도 끝에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허공을 부유하듯 뻣뻣한 몸으로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화아악~!
괴인의 전신이 검고 칙칙한 안개에 휩싸였다.
시꺼먼 안개를 두른 흑영.
그의 시선은 저 어딘가에 있을 무언가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