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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
“왜 저를 택하여 한없는 고해(苦海)에 밀어 넣으신 겁니까?”
“몰라서 물은 게냐?”
“예?”
“네 녀석이 원래 내가 찍어둔 놈을 쳐 죽여 버렸잖아.”
“아, 맞다.”
건무정은 이마를 탁 쳤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그걸 악운(惡運)이라고 하는 게야.”
말을 하며 노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그를 건무정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루 정도 더 빨리 올 걸.”
“왜?”
“그래야 힘없는 노인네 눈 감을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놀려 먹죠.”
“웃으라고 한 소리냐?”
“어? 안 웃겼어요?”
“실없는 놈.”
“…….”
노인의 말처럼 건무정은 끊임없이 ‘실없는’ 소리를 해댔다.
마치 이렇게 해야만 노인이 조금이라도 더 살아서 숨을 쉴 수 있다는 듯이.
그는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인이 하고자 하는 진짜 얘기를 다 하면 곧 숨을 멈추고 영면에 들리라는 것을.
건무정은 이런 식으로라도 노인의 끝을 더 붙잡고 싶었다.
그토록 징그럽게도 싫어했던 노인이었건만.
“그런데 제 이름은 어찌 아셨어요? 저도 가물가물했었는데.”
“강호에 뿌려놓았던 내 새끼들이 몇인데 그 정도도 모를까.”
“그럼… 왜 처음부터 그리 부르지 않았습니까…….”
원망.
그랬다. 건무정의 음성 속에 진하게 드러난 감정은 원망이었다.
“대머리 까까놈, 못난 찌질이, 틀려먹은 놈. 항상 이렇게만 부르셨지요.”
“그랬었지.”
“아, 진짜. 그걸 또 바로 인정해버리시네. 재미없게.”
“의미가 될까봐 그랬단다.”
“…….”
“네가 정말로 내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까봐. 도구… 이기를 바랐었지.”
“압니다.”
“한데 이건 또 아느냐? 내 구십 평생, 너같이 바락바락 대드는 놈은 처음이었느니라. 신기하고도 오묘했다고나 할까.”
“어르신도 알아요? 제가 그리 굴면 정말로 때려 죽여주실 줄 알고 그랬던 거.”
“그래서 딱 죽기 직전까지만 패줬었지?”
“비 오는 날만 되면 그때가 자꾸 생각나요. 허리가 쑤셔서. 낄낄낄낄.”
“컬컬컬컬.”
노인과 건무정은 같이 웃었다.
“‘정’이라는 게 정말로 세상에 있더구나. 네놈과 그렇게 격식 없이 지냈던 그 짧은 몇 년, 다 늙어서야 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
정(情).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느껴야 할 이것을 노인은 삶의 끝에 가서야 알았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네 어깨에 너무나도 무거운 짐을 얹어야 해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끝까지 안 찾아주시길 기대했었어요.”
“그럴까도 했단다. 허나, 이것은 네 운명.”
“또 그 소리. 쩝.”
“그날, 천봉산(千峯山)에서 ‘교’의 무인들과 네가 만나지 않았다면, 그들 중에 내가 눈독 들였던 놈이 있지 않았다면, 네 운명은 필시 바뀌었을 터.”
“…….”
“지금에 와서 싫다고 발 빼도 소용없어 이 녀석아. 너도 동의했지 않느냐?”
“내내 후회했다니까요.”
말은 이리 했지만, 건무정의 눈가에 진정 후회는 보이지 않았다.
“어려운 길이 될 게다.”
“제 인생 자체가 시궁창이었습죠. 어렵다거나 뭐 그런 건 상관 안합니다.”
“아무도 믿지 말고.”
“정말요?”
“으음… 개중에 두어 명 정도는 괜찮을 듯하구나.”
“충고, 가슴에 깊이 새기지요.”
이때 노인의 숨소리가 흐트러졌다.
건무정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노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괜찮다니까. 이 모든 것이 다 섭리(攝理)인 것을.”
“그걸 거스르셨던 분 아닙니까, 어르신은.”
“네가 말했지 않느냐. 지옥이 날 부른다고.”
“……?”
“부르면 가야지. 그것이 섭리이니라.”
순간 건무정의 미간에서 무언가가 움찔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그것을 본 노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의 말로 인해 찰나지간 건무정이 깨달음의 세계에 다녀왔음을 알아챘다.
“보았느냐?”
흐릿해졌던 건무정의 눈동자가 서서히 초점을 회복했다.
“잡은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뭐였는지는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
참으로 건조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순간에 이런 대화라니.
“진짜로 어르신은 좋은 곳 가기는 글렀습니다. 마지막까지 남한테 쓸데없는 고민이나 안겨주고.”
“네놈이 하도 굼떠서 종이 위에 점 하나를 찍어주었느니라.”
무인에게 깨달음이란 종이 한 장의 두께를 넘는 것이라지만, 그것을 뚫고 넘어가기 위해서는 몇 십 년을 허비하면 다행이고, 아예 근처에도 못 가는 이들이 구 할 구 푼이었다.
특히나 고작 타인의 말 한두 마디에 정각(正覺)의 경계를 돌파해버리는 경우는 거의 ‘영(零)’에 가까웠다.
즉, 이는 수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사(奇事)였다.
그런데도 실마리를 던져준 사람이나, 깨달음을 얻어 진일보한 사람이나, 이 놀라운 상황을 그저 지나가는 바람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으음, 슬슬 갈 때가 된 것 같구나.”
“어르신…….”
건무정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나왔다.
“아니, 너 말이다. 저녁 먹고 가라고 했지, 자고 가라고는 안했다.”
“하!”
이번에는 건무정이 한 방 먹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끝없는 유쾌함이랄까.
이런 사람 앞에서 괜한 슬픔 같은 것은 오히려 실례였다.
“알겠어요, 알겠어. 할 말은 다 했다 이거죠?”
건무정은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을 만나거든.”
노인의 음성이 또 한 번 건무정을 붙잡았다.
“잘 판단해라. 약삭빠른 늙은이들이 키운 것들이라 그 속을 쉬이 알기 어려울지니.”
건무정은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라…….
“때가 되었다 싶으면.”
노인이 내뿜은 숨결에서는 완연한 죽음의 기운이 읽혔다.
“다 가져봐. 아니면 아예 지워버리고.”
“강호(江湖).”
“그래, 강호.”
삐걱, 삐걱.
건무정은 더 이상 노인에게 말을 걸지도,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 나갔다.
문을 열고 나서자 한 여인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바로 노인의 손녀인 ‘란’.
건무정과 가까이 마주했으나, 그녀의 시선은 그에게 있지 않았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살짝 깨문 입술은 보일 듯 말 듯 떨렸고, 꽉 쥔 주먹 사이에는 한 방울 핏물이 맺혀 있었다.
건무정은 몸을 움직여 문 앞에서 비켜섰다.
이제는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의 시간을 그녀에게 양보할 때였다.
란은 고개를 숙여 건무정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는 힘든 걸음으로 노인에게 다가갔다.
건무정은 조용히 문을 닫아준 뒤, 하늘 끝에 자리한 달을 바라보았다.
* * *
한 일 각 정도 지났을까.
어둠과 적막만이 가득했던 부락 여기저기에 불이 밝혀졌다.
뿌우-
누군가가 뿔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이에 호응하듯 각기 다른 음을 가진 뿔나팔들이 길게 울리기 시작했다.
뿌우우우우-
장엄하기 그지없는 화음(和音).
갈 곳 없는 영혼들을 천공(天空)으로 인도하려는 천신의 울음소리가 저러할까.
그 진하고 깊은 울림은 듣는 이의 심장에 애틋한 떨림을 전해왔다.
잠시 후,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무언가를 읊는 소리가 화음에 섞였다.
그렇구나.
노인이, 은자림주가 숨을 거두었다.
저들, 은자림의 형제자매들은 이미 옛적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노인의 생이 종국(終局)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그래서 더더욱 건무정을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등장은 곧 노인의 죽음과 직결되었기에.
은자림의 거주자들치고 고수가 아닌 이는 없었다.
그들 중에는 건무정을 상회하는 자들도 존재했다.
그 정도의 고수들이라면 노인과 한 공간에 있기만 해도 그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 터.
오늘밤이 고비임을 몰랐을 리가 없다.
아마도 저들은 모든 감각을 열어 둔 채, 노인의 마지막 한 숨을 기다렸을 것이다.
불경도, 도경도 아닌 미지의 경문을 읊는 소리는 새벽을 지나 태양이 어렴풋이 드러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득한 태양빛이 천지를 깨우는 순간, 은자림은 고요로 뒤덮였다.
“…….”
꽤나 오랜 시간을 가만히 서 있던 건무정이었다.
답답하고 지겹기도 했으련만, 그는 맑은 눈을 빛내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이윽고, 모옥의 문이 열렸다.
짤랑.
영롱한 쇳소리를 들은 건무정은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모옥에서 나온 이가 건무정의 옆에 섰다.
단단히 조인 회색의 무복. 챙이 넓고 뚜껑이 없는 초립. 얼굴을 가린 검은 면사.
그리고 요대 왼쪽에 느슨하게 걸려 있는, 좁은 검신의 청검(靑劍) 한 자루.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 인물은 노인의 의손녀 ‘란’이었다.
둘은 잠시 나란히 서서 길게 드리워진 산자락의 그늘을 응시했다.
“편히 가셨습니까?”
드디어 건무정이 입을 열었다.
낮게 깔린 음성은 그가 노인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임을 상기시켜주었다.
“웃으며 떠나셨어요.”
“그럼 되었습니다.”
건무정은 빙그레 웃었다.
죽음 직전, 일부러 자신을 나가도록 했던 노인의 뜻을 그라고 어찌 모를까.
“소저도 여기서 나가시게요?”
건무정이 물었다.
“예.”
답하는 란.
“그럼 부디 보중하시길.”
건무정은 포권을 취한 후 먼저 몸을 움직였다.
굳이 노인이 웃으며 떠났다는 말을 듣기 위해 지금껏 기다렸으니, 이제 이 여인과도, 이곳과도 안녕이었다.
“그래요. 갑시다.”
“응? 예?”
자신을 따라나서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건무정은 의아해했다.
“가시자고요.”
“으음… 아니, 먼저 가시지요. 큼.”
건무정은 슬쩍 한 발을 다시 물리며 뒷짐을 졌다.
“…….”
그런 건무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란.
그녀는 건무정이 움직이기 전에는 단 한 걸음도 내딛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말투며 눈빛이 어제와는 많이 달랐다.
조곤조곤하고 싱그러웠던 모습은 사라지고, 단단한 게 결코 부서지지 않을 바위의 기세가 은근히 느껴졌다.
노인은 그녀가 건무정보다 뛰어나다고 말했다. 이는 건무정도 인정한 바.
그러니 한 명의 ‘무인’으로서 란이 내뿜는 분위기에 저절로 경탄이 일어날 수밖에.
“할아버지께서 건 공자와 동행하며 한동안 보호하라 하셨습니다.”
“누구? 저를요?”
“예.”
“허허, 허허헛!”
그녀의 대답에 건무정은 공허하게 웃었다.
“건 공자는 막 껍질을 깨고 나온 취응(鷲鷹)과도 같다 말씀하셨지요.”
취응은 사나운 하늘의 지배자.
하지만 아직 한참이나 덜 자란 새끼 취응은 어미의 보호 없이는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건무정의 지금 상태가 딱 그러했다.
갑작스럽게 이끌린 돈오(頓悟)로 인해 오히려 그의 육체는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당장 서 있기도 힘든 게 사실이었다.
“노인네가 참……. 끝까지 걱정만 하다 가셨구만.”
“쓸데없는 기우는 아니셨지요. 건 공자도 아실 텐데요.”
“소저의 성함이……?”
“진목란(陳木蘭).”
역시나 시원시원하게 짧고 간결한 자기소개였다.
“건씨 성에 무정이라 하오. 잘 부탁합니다, 진 소저.”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에게 포권을 취했다.
“…….”
“왜 저를 택하여 한없는 고해(苦海)에 밀어 넣으신 겁니까?”
“몰라서 물은 게냐?”
“예?”
“네 녀석이 원래 내가 찍어둔 놈을 쳐 죽여 버렸잖아.”
“아, 맞다.”
건무정은 이마를 탁 쳤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그걸 악운(惡運)이라고 하는 게야.”
말을 하며 노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그를 건무정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루 정도 더 빨리 올 걸.”
“왜?”
“그래야 힘없는 노인네 눈 감을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놀려 먹죠.”
“웃으라고 한 소리냐?”
“어? 안 웃겼어요?”
“실없는 놈.”
“…….”
노인의 말처럼 건무정은 끊임없이 ‘실없는’ 소리를 해댔다.
마치 이렇게 해야만 노인이 조금이라도 더 살아서 숨을 쉴 수 있다는 듯이.
그는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인이 하고자 하는 진짜 얘기를 다 하면 곧 숨을 멈추고 영면에 들리라는 것을.
건무정은 이런 식으로라도 노인의 끝을 더 붙잡고 싶었다.
그토록 징그럽게도 싫어했던 노인이었건만.
“그런데 제 이름은 어찌 아셨어요? 저도 가물가물했었는데.”
“강호에 뿌려놓았던 내 새끼들이 몇인데 그 정도도 모를까.”
“그럼… 왜 처음부터 그리 부르지 않았습니까…….”
원망.
그랬다. 건무정의 음성 속에 진하게 드러난 감정은 원망이었다.
“대머리 까까놈, 못난 찌질이, 틀려먹은 놈. 항상 이렇게만 부르셨지요.”
“그랬었지.”
“아, 진짜. 그걸 또 바로 인정해버리시네. 재미없게.”
“의미가 될까봐 그랬단다.”
“…….”
“네가 정말로 내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까봐. 도구… 이기를 바랐었지.”
“압니다.”
“한데 이건 또 아느냐? 내 구십 평생, 너같이 바락바락 대드는 놈은 처음이었느니라. 신기하고도 오묘했다고나 할까.”
“어르신도 알아요? 제가 그리 굴면 정말로 때려 죽여주실 줄 알고 그랬던 거.”
“그래서 딱 죽기 직전까지만 패줬었지?”
“비 오는 날만 되면 그때가 자꾸 생각나요. 허리가 쑤셔서. 낄낄낄낄.”
“컬컬컬컬.”
노인과 건무정은 같이 웃었다.
“‘정’이라는 게 정말로 세상에 있더구나. 네놈과 그렇게 격식 없이 지냈던 그 짧은 몇 년, 다 늙어서야 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
정(情).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느껴야 할 이것을 노인은 삶의 끝에 가서야 알았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네 어깨에 너무나도 무거운 짐을 얹어야 해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끝까지 안 찾아주시길 기대했었어요.”
“그럴까도 했단다. 허나, 이것은 네 운명.”
“또 그 소리. 쩝.”
“그날, 천봉산(千峯山)에서 ‘교’의 무인들과 네가 만나지 않았다면, 그들 중에 내가 눈독 들였던 놈이 있지 않았다면, 네 운명은 필시 바뀌었을 터.”
“…….”
“지금에 와서 싫다고 발 빼도 소용없어 이 녀석아. 너도 동의했지 않느냐?”
“내내 후회했다니까요.”
말은 이리 했지만, 건무정의 눈가에 진정 후회는 보이지 않았다.
“어려운 길이 될 게다.”
“제 인생 자체가 시궁창이었습죠. 어렵다거나 뭐 그런 건 상관 안합니다.”
“아무도 믿지 말고.”
“정말요?”
“으음… 개중에 두어 명 정도는 괜찮을 듯하구나.”
“충고, 가슴에 깊이 새기지요.”
이때 노인의 숨소리가 흐트러졌다.
건무정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노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괜찮다니까. 이 모든 것이 다 섭리(攝理)인 것을.”
“그걸 거스르셨던 분 아닙니까, 어르신은.”
“네가 말했지 않느냐. 지옥이 날 부른다고.”
“……?”
“부르면 가야지. 그것이 섭리이니라.”
순간 건무정의 미간에서 무언가가 움찔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그것을 본 노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의 말로 인해 찰나지간 건무정이 깨달음의 세계에 다녀왔음을 알아챘다.
“보았느냐?”
흐릿해졌던 건무정의 눈동자가 서서히 초점을 회복했다.
“잡은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뭐였는지는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
참으로 건조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순간에 이런 대화라니.
“진짜로 어르신은 좋은 곳 가기는 글렀습니다. 마지막까지 남한테 쓸데없는 고민이나 안겨주고.”
“네놈이 하도 굼떠서 종이 위에 점 하나를 찍어주었느니라.”
무인에게 깨달음이란 종이 한 장의 두께를 넘는 것이라지만, 그것을 뚫고 넘어가기 위해서는 몇 십 년을 허비하면 다행이고, 아예 근처에도 못 가는 이들이 구 할 구 푼이었다.
특히나 고작 타인의 말 한두 마디에 정각(正覺)의 경계를 돌파해버리는 경우는 거의 ‘영(零)’에 가까웠다.
즉, 이는 수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사(奇事)였다.
그런데도 실마리를 던져준 사람이나, 깨달음을 얻어 진일보한 사람이나, 이 놀라운 상황을 그저 지나가는 바람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으음, 슬슬 갈 때가 된 것 같구나.”
“어르신…….”
건무정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나왔다.
“아니, 너 말이다. 저녁 먹고 가라고 했지, 자고 가라고는 안했다.”
“하!”
이번에는 건무정이 한 방 먹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끝없는 유쾌함이랄까.
이런 사람 앞에서 괜한 슬픔 같은 것은 오히려 실례였다.
“알겠어요, 알겠어. 할 말은 다 했다 이거죠?”
건무정은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을 만나거든.”
노인의 음성이 또 한 번 건무정을 붙잡았다.
“잘 판단해라. 약삭빠른 늙은이들이 키운 것들이라 그 속을 쉬이 알기 어려울지니.”
건무정은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라…….
“때가 되었다 싶으면.”
노인이 내뿜은 숨결에서는 완연한 죽음의 기운이 읽혔다.
“다 가져봐. 아니면 아예 지워버리고.”
“강호(江湖).”
“그래, 강호.”
삐걱, 삐걱.
건무정은 더 이상 노인에게 말을 걸지도,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 나갔다.
문을 열고 나서자 한 여인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바로 노인의 손녀인 ‘란’.
건무정과 가까이 마주했으나, 그녀의 시선은 그에게 있지 않았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살짝 깨문 입술은 보일 듯 말 듯 떨렸고, 꽉 쥔 주먹 사이에는 한 방울 핏물이 맺혀 있었다.
건무정은 몸을 움직여 문 앞에서 비켜섰다.
이제는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의 시간을 그녀에게 양보할 때였다.
란은 고개를 숙여 건무정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는 힘든 걸음으로 노인에게 다가갔다.
건무정은 조용히 문을 닫아준 뒤, 하늘 끝에 자리한 달을 바라보았다.
* * *
한 일 각 정도 지났을까.
어둠과 적막만이 가득했던 부락 여기저기에 불이 밝혀졌다.
뿌우-
누군가가 뿔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이에 호응하듯 각기 다른 음을 가진 뿔나팔들이 길게 울리기 시작했다.
뿌우우우우-
장엄하기 그지없는 화음(和音).
갈 곳 없는 영혼들을 천공(天空)으로 인도하려는 천신의 울음소리가 저러할까.
그 진하고 깊은 울림은 듣는 이의 심장에 애틋한 떨림을 전해왔다.
잠시 후,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무언가를 읊는 소리가 화음에 섞였다.
그렇구나.
노인이, 은자림주가 숨을 거두었다.
저들, 은자림의 형제자매들은 이미 옛적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노인의 생이 종국(終局)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그래서 더더욱 건무정을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등장은 곧 노인의 죽음과 직결되었기에.
은자림의 거주자들치고 고수가 아닌 이는 없었다.
그들 중에는 건무정을 상회하는 자들도 존재했다.
그 정도의 고수들이라면 노인과 한 공간에 있기만 해도 그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 터.
오늘밤이 고비임을 몰랐을 리가 없다.
아마도 저들은 모든 감각을 열어 둔 채, 노인의 마지막 한 숨을 기다렸을 것이다.
불경도, 도경도 아닌 미지의 경문을 읊는 소리는 새벽을 지나 태양이 어렴풋이 드러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득한 태양빛이 천지를 깨우는 순간, 은자림은 고요로 뒤덮였다.
“…….”
꽤나 오랜 시간을 가만히 서 있던 건무정이었다.
답답하고 지겹기도 했으련만, 그는 맑은 눈을 빛내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이윽고, 모옥의 문이 열렸다.
짤랑.
영롱한 쇳소리를 들은 건무정은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모옥에서 나온 이가 건무정의 옆에 섰다.
단단히 조인 회색의 무복. 챙이 넓고 뚜껑이 없는 초립. 얼굴을 가린 검은 면사.
그리고 요대 왼쪽에 느슨하게 걸려 있는, 좁은 검신의 청검(靑劍) 한 자루.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 인물은 노인의 의손녀 ‘란’이었다.
둘은 잠시 나란히 서서 길게 드리워진 산자락의 그늘을 응시했다.
“편히 가셨습니까?”
드디어 건무정이 입을 열었다.
낮게 깔린 음성은 그가 노인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임을 상기시켜주었다.
“웃으며 떠나셨어요.”
“그럼 되었습니다.”
건무정은 빙그레 웃었다.
죽음 직전, 일부러 자신을 나가도록 했던 노인의 뜻을 그라고 어찌 모를까.
“소저도 여기서 나가시게요?”
건무정이 물었다.
“예.”
답하는 란.
“그럼 부디 보중하시길.”
건무정은 포권을 취한 후 먼저 몸을 움직였다.
굳이 노인이 웃으며 떠났다는 말을 듣기 위해 지금껏 기다렸으니, 이제 이 여인과도, 이곳과도 안녕이었다.
“그래요. 갑시다.”
“응? 예?”
자신을 따라나서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건무정은 의아해했다.
“가시자고요.”
“으음… 아니, 먼저 가시지요. 큼.”
건무정은 슬쩍 한 발을 다시 물리며 뒷짐을 졌다.
“…….”
그런 건무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란.
그녀는 건무정이 움직이기 전에는 단 한 걸음도 내딛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말투며 눈빛이 어제와는 많이 달랐다.
조곤조곤하고 싱그러웠던 모습은 사라지고, 단단한 게 결코 부서지지 않을 바위의 기세가 은근히 느껴졌다.
노인은 그녀가 건무정보다 뛰어나다고 말했다. 이는 건무정도 인정한 바.
그러니 한 명의 ‘무인’으로서 란이 내뿜는 분위기에 저절로 경탄이 일어날 수밖에.
“할아버지께서 건 공자와 동행하며 한동안 보호하라 하셨습니다.”
“누구? 저를요?”
“예.”
“허허, 허허헛!”
그녀의 대답에 건무정은 공허하게 웃었다.
“건 공자는 막 껍질을 깨고 나온 취응(鷲鷹)과도 같다 말씀하셨지요.”
취응은 사나운 하늘의 지배자.
하지만 아직 한참이나 덜 자란 새끼 취응은 어미의 보호 없이는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건무정의 지금 상태가 딱 그러했다.
갑작스럽게 이끌린 돈오(頓悟)로 인해 오히려 그의 육체는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당장 서 있기도 힘든 게 사실이었다.
“노인네가 참……. 끝까지 걱정만 하다 가셨구만.”
“쓸데없는 기우는 아니셨지요. 건 공자도 아실 텐데요.”
“소저의 성함이……?”
“진목란(陳木蘭).”
역시나 시원시원하게 짧고 간결한 자기소개였다.
“건씨 성에 무정이라 하오. 잘 부탁합니다, 진 소저.”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에게 포권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