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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숙방선생은 안개 너머의 검은 무언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람인가? 사람의 형상을 한 짐승? 아니면 혹, 귀신?

“그만 나와요. 이 시간에 여기 올 사람은 없으니까.”

스스스스.

안개가 숙방선생의 말에 반응했다.

숙방선생을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며 마치 회오리치듯 하늘로 솟구친 안개는 이내 일정한 공간을 두고 뒤로 물러났다.

“오랜만입니다.”

숙방선생은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반갑다거나 놀랍다거나 하는 감정이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은 자신의 진짜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불쾌, 원망, 증오가 그것이었다.

우두커니 서서 숙방선생을 내려다보고 있는 검은 존재.

귀신도 짐승도 아닌 사람.

“좋아 보이는구나.”

입이라 짐작되는 부분이 흐물거리며 거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안 좋을 건 또 뭐가 있겠습니까.”

“…….”

숙방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낚싯대를 걷었다.

“한 삼 년 되었나요?”

“정확하게는 삼 년 하고도 육 개월.”

“맞네. 내 나이가 이제 스물둘에 석 달이니까 얼추 그렇겠네요.”

뿌두둑.

숙방선생은 짐을 다 정리한 다음 허리를 쭉 폈다.

“우리가 만난 게 너무 빠르다고는 생각 안 해요?”

“…….”

“아, 또 잊고 있었네. 당신은 그저 그분의 입이요, 다리요, 병기일 뿐이었지. 스스로는 그 무엇도 하지 않고 할 줄도 모르는. 허허헛.”

“…….”

“재미없네.”

숙방선생은 손을 내저으며 상대의 묵묵함에 지겨움을 나타냈다.

“적어도 십 년 이상은 안 볼 거라 여겼는데… 쯥.”

“나도 그러길 바랐다.”

“거짓말.”

“…….”

숙방선생이 싸늘하게 말하자 흑영(黑影)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래, 변덕쟁이 노인네는 잘 있수?”

그의 말에 흑영이 크게 일렁거렸다.

“아서요, 아서. 당신한테나 지존이지 나한테는 그냥 짜증나는 늙은이일 뿐이니까.”

“네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이다.”

“그게 짜증난다니까 그러네.”

흑영의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조용하지만 강한 분노.

만약 분노로만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숙방선생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서 형체조차 남기지 못했으리라.

“그만합시다, 쯧쯧.”

숙방선생이 눈앞에 얼쩡거리는 파리를 내쫓듯 손을 휘휘 내젓자, 흑영의 기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간만에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지는 못할망정 이게 뭐요.”

“네 태도에 달렸다.”

“정말 한 잔 하시게?”

숙방선생은 손가락을 오므려 입 근처에 대고는 훌쩍 고개를 뒤로 넘기는 시늉을 했다.

“…….”

“아, 여전히 재미없는 사람일세.”

장난을 걸어도 반응이 저 따위니, 숙방선생으로서는 맥이 빠질 만도 했다.

“썩을…….”

숙방선생은 낮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흑영.

실제로 흑영의 눈이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꼭 그러하리라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넌 여전히 차갑구나.”

“제가요? 이렇게 유쾌한 남자가 차갑다니요. 허허허헛!”

흑영의 말에 숙방선생은 어이없어하며 크게 웃었다.

“네 입은 항상 웃고 있으되, 네 눈은 항상 얼음호수처럼 무겁구나.”

“그건 제가 자주 쓰는 말툰데…….”

“명진(明眞).”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전에 분명 경고했을 텐데요.”

“이 이름 외에 너를 달리 불러본 적이 없다.”

“아무튼 그리 부르지 마쇼. 우울해지니까.”

“…….”

“노인네가 마음이 급했나보네요. 당신이 직접 오다니. 난 건방진 영물이나 하나 보낼 줄 알았는데.”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가더구나.”

“그 늙어 죽지도 않는 귀신이 그렇게 말합디까?”

“내 생각이다.”

“하하하하하!”

숙방선생은 앙천대소했다.

뚝.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빠를수록.”

“사흘만 줘요.”

“왜?”

“만남만큼 소중한 게 또 이별 아니우.”

“그래라.”

스스스스.

그 말을 끝으로 흑영은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

-잊지 말아라. 사흘이다.

숙방선생은 귀찮다는 듯 대충 손을 흔들어주며 흑영을 ‘배웅’했다.



그날 밤 숙방선생은 정말로 장년인과 더불어 밤을 새워가며 독하기 짝이 없는 매화주 다섯 동이를 비웠다.

그리고 다음날, 멀쩡한 모습으로 숙방에 모인 아이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쳤으며.

이틀이 걸릴 거라던 곡원려 수리를 반나절 만에 끝마쳤다.

또 하루가 더 지나서는, 은퇴하여 고향에 내려온 제왕부 대학사와 바둑을 두고 닭요리를 대접받았다.

이후 마을을 돌아다니며 작은 인연이나마 맺었던 모든 이들을 만나 덕담을 나누었고, 자신에게서 글을 배우던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약속한 사흘이 지난 후.

숙방선생이 일 년 넘게 머물던 작은 모옥에는 미약한 온기와 함께 글자가 가득 적혀있는 종이만이 남았다.

갑자기 마을을 떠나게 되어 죄송하다는 내용과 더불어 아이들에게는 공부에 정진하라는 당부와 마음을 열고 친하게 지냈던 이들의 안녕(安寧) 기원, 그리고 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새로운 스승에 관한 이야기가 거기에 담겨 있었다.



* * *



육대문파로 대변되는 중원강호와 세외의 대적(大敵) 천산마교가 장장 십 년에 걸쳐 피로 피를 씻어내는 전쟁을 벌여 양쪽이 모두 몰락한 게 벌써 칠 년 전이었다.

이후 강호는 사파의 준동과 대명황실의 개입으로 또 한 번의 짧은 혼란기를 겪었고, 마침내 일곱 개의 거대 세력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네 무벌(武閥)을 사패(四霸)라 했고, 나머지를 삼강(三剛)이라 칭했다.

북부의 대무신전(大武神殿), 서부의 사혼맹(邪魂盟), 남부의 황룡궁(黃龍宮), 동부의 진마도(眞魔徒)가 사패요,

사패 안쪽으로 동, 서, 남에 자리한 검산(劍山), 군자도(君子道), 세가련(世家聯)이 곧 삼강이었다.

대무신전과 검산은 옛 정도문파들의 직계를 각기 표방하였으며, 사혼맹은 사도(邪道)를 따랐고, 황룡궁은 조정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 여겨졌으며, 진마도는 세외가 아닌 중원 고유의 정통마도를 그 본으로 삼고 있었다.

세가련은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 과거 강호에서 알아주던 무림세가들의 후신이었고, 군자도는 특이하게도 그 모태(母胎)를 전혀 알 수 없는 신진무인들의 집합체였다.

그렇다면 소림이나 무당과 같은 과거의 전통 강호(强豪)들은 어찌 되었을까.

사패삼강의 태동기에 짧게나마 무림의 전면에 나서고자 저력을 발휘하기도 했던 그들은 결국 마교와의 결전이 남겨준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했다.

소림을 필두로 했던 구파연합은 현 사혼맹의 전신인 사혼당(邪魂黨)과 벌였던 일 년간의 전쟁에서 남은 무력의 팔 할이 소멸된 뒤로 강호에서 그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결과적으로 그 대부분의 문파들은 사패와 삼강에 흡수되어 이름조차 사라졌으며, 극히 일부의 고집쟁이들만이 남아 각각 산문을 굳게 닫은 채 실낱같은 명맥만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뭐, 알려지기로는 그랬다.

사패와 삼강의 천하.

한데 진정 이것이 다일까?

그래 맞다. 이게 끝이 아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모를 신비로운 세력.

강호인들은 이를 은자림(隱者林)이라 불렀다.

은자림이 언제 생겼고, 또 어떤 이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만, 사패와 삼강이 강호무림의 세력구도를 형성하기 이전부터 그들은 이미 ‘있었다.’ 라는 게 정설이었다.

사패삼강이 벌이는 각축전에 일절 발을 담그지 않는 은자들의 세상.

어쩌면 홀로 천하를 재패할 만큼 강대한 힘을 갖추었을 은자림은 여전히 미연에 휩싸인 채 세상을 관조할 뿐이었다.

세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게 진실인지 상상인지는 아마도 훗날의 역사(歷史)가 증명해주리라.



따박, 따박.

나귀의 걸음은 느긋하기만 했다.

위에 올라탄 사내가 조금만 재촉했더라도 이보다는 훨씬 더 빨리 움직였을 테지만, 사내도, 나귀도 전혀 서두르려는 기색이 없었다.

갈댓잎을 물고 죽립을 눌러 쓴 사내.

그는 얼마 전, 정들었던 마을을 떠나온 숙방선생, 흑영으로부터 명진이라고 불렸던 바로 그였다.

길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소로 양 옆으로는 황금빛 들판이 있었다.

한참을 더 나아가자 햇빛을 반사해 영롱하게 빛나는 강이 이들을 반겼다.

강이 끝날 즈음 높다란 산이 나타났고, 어느 시점부턴가 주변에 깔린 안개로 인해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안개 너머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절벽 중간에 굽이굽이 나있는 험로를 나귀는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고 걸어갔다.

그렇게 절벽길을 지나자 높이를 가늠하기 힘든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란 숲에 들어섰고, 어느새 숲을 뒤로하고 사내와 나귀는 드넓은 공간의 초입에 서있었다.

사내의 눈앞에 펼쳐진 밭은 지평선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과일나무들이 줄지어 심어져, 이곳이 사람의 손을 거친 곳임을 알려주었다.

“고생했어.”

사내는 나귀의 뺨을 쓰다듬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테니까 넌 돌아다니면서 배나 채워라.”

후훙~

사내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나귀는 기분 좋은 울음을 토했다.

갈댓잎을 오물거리며 뒷짐을 진 사내는 밭 사이의 샛길을 천천히 걸었다.

예전에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것인지, 그는 익숙한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움직였다.

가끔은 죽립을 벗어 이마의 땀을 닦기도 하고,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장시간의 이동으로 인한 피로를 풀기도 하며 나아가길 약 반 각.

그의 시야에 사람들이 들어왔다.

엉성하게 만든 납작한 초립을 쓰고 밭일에 열중하고 있는 남녀들. 대충 보아도 서른은 넘어 보였다.

소년에서부터 노년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들은 사내의 등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힐끗.

드디어 누군가가 사내의 시선을 훔쳤다. 상당히 앳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소녀는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흙을 헤집어 돌을 골라냈다.

그 작은 손이 가늘게 떨리는 듯한 느낌은 그저 자신만의 착각일까.

사내는 빙긋 웃으며 눈을 돌렸다. 그리고 어떤 이의 등을 향해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살짝 굽은 등, 왜소한 체격, 딱딱하게 굳은 오른쪽 어깨.

초립 아래로 드러난 머리카락이 하얗게 탈색된 모양새는 그가 꽤나 나이든 노인임을 짐작케 했다.

사내는 노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움찔.

그러자 일꾼들 중에 덩치가 큰 청년이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곧 중년 여인에 의해 제지당했다.

뽀삭, 뽀삭.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들리도록 땅을 내딛는 사내.

이윽고 그가 노인의 뒤쪽에 다다랐다.

“…….”

노인은 사내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땅을 고르며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크흠.”

사내는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노인의 반응은 여전히 무(無).

“제 기억으로는.”

스스스.

노인이 막 뭔가를 심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여기에 나무가 무진장(無盡藏) 많이 심어져 있었던 것 같은데, 다 어디 갔죠?”

우두둑.

노인은 허리를 쭉 피며 등을 톡톡 두드렸다.

“부처의 끝없는 자비[無盡藏]와는 어울리지 않아서 다 베어냈니라.”

이제야 몸을 돌려 사내와 마주한 노인.

쭈글쭈글한 외양에 처진 눈은 여느 늙은이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킥킥.”

사내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모습이 위협적이라 생각했을까. 노인 근처에 있던 일꾼들 중에 몇몇은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제가 많이 늦었나요?”

“사정이 있었으니 늦었겠지.”

“오래도록 앉아서만 생활했더니 엉덩이가 워낙에 무거워져서 말이죠.”

“수련을 게을리 한 건 아니고?”

“어느 순간부터는 몸을 움직여도 진전이 없더군요.”

“예끼. 껄껄껄껄.”

노인은 유쾌하게 웃었다.

“무정아, 건무정(乾無停)아. 간만에 보는구나.”

“…….”

순간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제 옛 이름을 어르신의 입으로 들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전처럼 대충 부르거나, 또 누구처럼 ‘명진’이라고 부르실 줄 알았죠.”

숙방선생, 명진, 그리고 건무정.

각각 다른 이들에게서 불린 이름이지만 가리키는 대상은 오직 하나.

사내, 건무정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름이 무에 중요하더냐. 그냥 불러주는 사람에게나 의미가 있는 법이거늘.”

“그런가요?”

건무정은 짓궂은 표정으로 눈가에 주름을 만들었다.

“저도 차암~ 간만에 뵙는군요, 은자림주(隱者林主) 어르신. 겨우 삼! 년 육! 개월 만이네요. 허허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