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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따박, 따박.
졸졸졸졸.
이백에 이르는 시체 사이를 흑풍신장과 그의 흑마는 천천히 지나갔다.
터지고 찢어지고 양단된 왜적의 무리들.
그들의 몸에서 울컥울컥 쏟아져 나온 선혈이 모이고 모여 작은 개울을 만들고 있었다.
제대로 무장을 갖춘 이백 명을 도살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일 각.
흑풍신장은 먼저 왜적들의 앞에 있던 두어 줄을 뭉개버렸다.
흑마의 발굽에 짓밟힌 왜적들 위로 또 다른 수십 구의 시체들이 순식간에 쌓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훌쩍 왜적의 한가운데로 날아 들어갔다.
자비심 없는 창무(槍舞)가 시작되었다.
길이가 거의 구 척(尺)에 다다른 월아당이었다.
이 무지막지한 병기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서는 이삼십 명의 왜적들이 우르르 박살이 나거나 으깨졌다.
조총의 심지에 불을 붙일 여유도, 장궁에 화살을 먹일 시간도 없었다.
기다란 태도를 채 쥐기도 전에 왜장들은 머리를 잃었고, 또 상체가 터져 죽어 나갔다.
흑풍신장은 미친 야수와도 같았다.
마치 흑마와 한 몸인 양, 종횡무진 왜적무리의 중심을 누비며 잔혹함의 끝을 보여주었다.
“끄으으으.”
개중에는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채 고통에 겨워하는 자들도 있어서 신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푹. 푹.
그런 그들의 이마와 목젖, 심장에 월아당의 가운데 뾰족한 정봉이 푹푹 박혀 들어갔다.
자비로운지고.
조금 전의 잔혹성은 어디 갔는지, 죽어가는 자들의 아픔을 깔끔하게 덜어주는 흑풍신장이었다.
잠시 후, 그는 진흙처럼 이겨진 왜적들의 시체 더미 중간에 눈길을 주었다.
거기에는 삐져나온 시체의 손에 쥐어진 쥘부채가 있었다.
십(十)자 형태의 문양이 그려진 종이에 도진(島津)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
도진. 왜에서는 꽤나 알려진 가문이 아니던가.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할 정도로.
즉, 이들은 그저 그런 왜구들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도진 가문의 문양에다가 장창과 조총, 기마와 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매복전술을 쓸 줄 아는 집단.
그것은 군(軍)이었다. 국가나 지방의 호족들이 그 권력으로서 만들어낸.
왜국의 정규 또는 그에 준하는 군 병력이 대명제국의 영토를 침입했다? 무슨 연유로?
그것도 고작 일천이라니. 이쪽을 시험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흑풍신장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무언가 짐작 되는 부분이 있는 듯, 고개마저 끄덕이고 있었다.
챠앙-!
갑자기 흑풍신장이 시체더미 쪽으로 그의 월아당을 뻗었다.
“…….”
그릉.
시체 한 구가 들썩였다.
그리고 잠시 후, 무언가가 이 작은 시원(屍原)의 뒤편에서 나타났다.
번쩍.
그것은 귀기(鬼氣)가 서려보이는 푸른 눈을 가진 은색 여우였다.
여우를 본 흑풍신장이 월아당의 끝을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 시원 쪽으로 걸어갔다.
끼긱, 철컥, 쿵, 철컥, 쿵.
둔탁한 쇠의 마찰음과 무거운 발소리.
흑풍신장의 묵직한 갑옷이 가진 무게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소리였다.
그르르릉.
여우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그 순간 흑풍신장은 여우가 물고 있던 옥빛의 자그마한 물체를 보았다.
쩔그덕.
흑풍신장은 투구와 제천대성 가면을 벗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이상하리만치 높고 거슬리는 음성이었다.
* * *
솨아아아~ 솨아아아~
바람에 밀린 갈대들이 누웠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강가를 가득 채운 황금빛 물결은 바람이 불 때마다 규칙적인 파동을 그리며 일대에 장관을 연출했다.
똥~!
갈대밭의 끝자락, 강과 인접한 모래사장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휘리릭~ 똥!
한 사내가 강을 향해 작게 뭉친 떡밥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몇 마리의 물고기들이 물 위로 등을 보이다가 사라지는 광경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고 있는 사내.
그는 평평한 돌판 위에 앉아 세 개의 기다란 낚싯대를 앞에 두고 입에는 갈댓잎을 물었다.
꽤나 젊어 보이면서, 평범한 외모에 보통의 성인들보다 다소 작은 키.
그 외에 별다른 특징을 찾아보자면, 이마 윗부분에 희미하게 드러난 두 개의 점이 나란히 자리한 정도?
“헛헛헛.”
사내가 갑자기 나이답지 않게 늙은 웃음을 흘렸다.
“숙방선생님~!”
이때 갑자기 아이들이 사내를 부르며 갈대를 비집고 나왔다.
숙방선생이라. 사내는 아마도 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인 듯했다.
“어? 아직도 집에 안 갔어?”
“히히히.”
아이들이 희희덕거리며 사내의 곁으로 다가왔다.
“와! 많이 잡았네요, 숙방선생님.”
“아니, 그러니까 공부 끝난 지가 언젠데, 지금까지 뭐 하냐 너희들?”
“주세요, 주세요!”
아이들은 자기들이 숙방선생이라고 부른 사내의 꾸중에도 아랑곳없이 웃고 떠들기 바빴다.
“이러다가 또 너희 부모님들께 혼나겠다, 어휴…….”
“괜찮아요, 괜찮아요. 숙방선생님이랑 같이 있었다고 하면 이제 뭐라 안 해요.”
“주세요! 주세요!”
사내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소란에 머리가 어지러운 듯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야야! 그거 다 이 어르신이 잡은 것들이라고. 몇 마리는 오늘 먹고 나머지는 말려서 보관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아이들은 사내가 잡은 물고기들을 마치 자기들 것인 양, 한 마리씩 들고는 천에 싸고 있었다.
“갈게요~!”
“숙방선생님! 내일 뵈어요.”
아이들은 이제 제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꾸벅 인사를 한 뒤 우르르 왔던 길로 돌아갔다.
“허…….”
사내는 기가 막혀 연신 허망한 신음만 흘렸다.
하지만 어이없어하는 그의 입과는 달리, 그의 두 눈에는 따스한 기운이 흘렀다.
“에그, 이런, 이런.”
사내의 뒤쪽에서 그 모양을 지켜보던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애써 다 잡아놓은 걸 어쩌누.”
“뭐, 어쩌겠습니까.”
사내는 노인을 향해 싱그러운 웃음을 보냈다.
“내 저것들 부모를 만나 값을 좀 받아다 줌세.”
“아, 아닙니다. 다들 항상 잘 챙겨주셔서 제가 더 미안한 걸요. 이 정도야 뭐.”
“쯧쯧. 저래 장난기들이 많아서야 공부는 제대로 할는지.”
“그래도 책을 펼치면 모두들 꽤나 진지해요.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 합니다.”
“숙방선생이 그러하다면야…….”
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이내 제 갈 길을 갔다.
휘릭.
사내는 다시 떡밥을 풀고 낚시를 이어갔다.
“오호, 오늘은 입질이 좋구만.”
사내의 고기 잡는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낚싯대들을 오가며 물고기들을 낚아 올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느덧 열댓 마리의 싱싱한 물고기들이 텅텅 비었던 대광주리 속에서 팔딱거렸다.
“이보우, 글방 총각. 고기 잡는가?”
누군가가 또다시 사내를 불렀다.
“좀 드릴까요?”
사내가 돌아본 자리에는 구부정한 팔순 노파와 증손녀로 보이는 예쁘장한 처자가 있었다.
“그러면 좋고. 령아야, 가서 몇 마리 받아오이라.”
“예.”
령이라 불린 여인은 다소곳이 대답을 한 다음, 사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홍 소저.”
사내는 그녀를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고기값이어요.”
여인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작은 손에는 무언가가 쥐어져 있었다.
“넣어두십쇼. 오늘은 운이 좋은지 요놈들이 쉽게 걸려드네요. 아무래도 녀석들이 소저 댁에 볼일들이 있나 봅니다.”
사내는 여인의 손을 밀고 나서, 물고기 몇 마리를 천과 종이로 곱게 싸서 건네주었다.
“짓궂으셔라.”
여인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양쪽 볼의 홍조를 거두지 않는 모양새가 사내의 농이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날씨 좋을 때 한 번 찾아오셔요. 아버님께서 적적하니 숙방선생님하고 대국(對局)을 치르고 싶다 하세요.”
“그거 좋지요. 안 그래도 지난 번 한 수가 계속 머릿속에 맴돕디다.”
“오시면… 아마도 어머니가 닭 한 마리를 잡아다가 대접할 거예요.”
“아니! 제가 닭요리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앗!”
여인은 저도 모르게 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런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노파는 곧이어 어서 가자며 채근을 했고, 얼굴이 벌게진 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노파의 팔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져갔다.
“허허…….”
두 사람의 뒷모습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사내, 숙방선생.
그는 잠시간 지었던 미소를 거두고 다시 낚시에 열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또 걸어왔다.
“여기에 있었군. 한참 찾았네그려.”
“아! 예.”
빼빼마른 중년의 남자를 보고 숙방선생은 반색을 했다.
“바쁜가?”
“아뇨.”
“그럼 부탁 좀 함세.”
“에? 또 부러졌어요?”
“그게… 자네가 손봐준 농기구는 멀쩡한데 꼭 새로 사온 것들이 말썽이라.”
“또또 속아서 사셨군요.”
숙방선생은 중년 남자의 손에 들린 부러진 곡원려(曲轅犁)를 보며 혀를 찼다.
“내 크게 한 턱 대접함세.”
“어휴, 알겠어요. 두고 가세요. 상태를 보니 이틀은 걸리겠네요.”
“그래?”
그의 말에 중년 남자는 얼굴이 환해졌다. 못해도 사나흘은 잡아먹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틀만 달라고 하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들 좀 챙겨 가세요.”
“아닐세, 아니야.”
숙방선생은 잡은 고기 중에서도 튼실한 놈으로 골라서 가는 새끼줄로 묶어 중년 남자의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
“형수님이 요즘 자주 입맛을 잃으신다면서요. 요것들을 푹 고아서 드시면 나아지실 겁니다.”
“자네가 그리 말하니, 내 고맙게 받겠네.”
“집에 바로 가실 거죠?”
“다, 당연하지.”
“일찍 일찍 좀 다니세요. 괜히 안 좋은 소문납니다.”
“알겠네, 알겠어, 이 사람아.”
중년 남자는 훠이훠이 손을 저으며 서둘러 길을 나섰다.
“휴우.”
숙방선생은 한숨을 푹 내쉬고 돌판에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역시나 오늘은 대운(大運)이 깃든 날이 확실했다.
이건 뭐 바늘에 미끼를 끼워 던지기가 무섭게 물고기가 퍼뜩퍼뜩 걸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낚은 고기를 척척 대광주리 안에 쌓으면서 숙방선생은 싱글벙글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따박, 따박, 삐그덕, 삐그덕.
“뭘 그리 신이 났는감? 입이 귀에 걸렸네, 걸렸어.”
소가 끄는 수레가 지나가다 숙방선생 근처에서 멈췄다.
“아, 형님이세요?”
“많이 낚았나봐. 응? 호오, 온 지 얼마나 됐어? 한 스무 마리는 되겠네.”
장발의 장년인은 수레 위에서 고개를 쑥 내밀며 놀라워했다.
“몇 마리 사세요, 그럼.”
숙방선생은 사악해 보이는 웃음을 툭툭 던졌다.
“에잉, 명색이 낚시꾼인 내가 너한테 돈 주고 사기는 좀 그렇고, 그냥 살집 많은 것들로 대여섯 놈들 줘봐.”
장년인은 그리 말하며 커다란 자루를 휙 던졌다.
“흐음, 지금 강도질 하시는 거?”
“물고기 요리는 내가 너보다 훨씬 낫다. 알지? 어둑어둑해지면 찾아와.”
장년인은 친히 숙방선생을 위해 요리를 해주겠다는 뜻을 돌려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형님. 일단 이거 다 넣어드릴 테니 반은 형님이 가지쇼.”
“낄낄.”
“나머지는 형님이 해주시는 찜이랑, 탕이랑, 구이 요리로 얻어먹어 봅시다.”
“어제 현(縣)에 나갔다가 괜찮은 매화주 다섯 동이도 사왔다.”
꿀꺽.
장년인의 말에 숙방선생은 침을 삼켰다.
“간만에 밤새 마셔보자고.”
“좋지요.”
“그럼 이따 봐.”
“예, 형님.”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석양이 그윽한, 초저녁에 가까운 시각이 되었다.
“…….”
이제 막 멀리서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한 갈대밭.
숙방선생은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낚싯대는 그대로 강을 향해 뻗은 상태였고, 돌판 위에 앉은 그의 모습도 그대로였다.
다만 광주리에 물고기가 한 마리도 안 보이는 것이, 근방의 물고기가 씨가 말랐든지 아니면 숙방선생이 오후의 낚시를 포기했든지 둘 중에 하나임은 분명했다.
스스스스.
어두워진 곳에서부터 시작된 안개가 물 위로 퍼졌다.
안개는 물가를 넘어 갈대들을 휘감고, 이내 숙방선생의 주변까지 차올랐다.
“…….”
그때, 안개 속에서 어떤 뭔가가 꿈틀거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 느낌만은 확실했다.
“하아…….”
숙방선생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따박, 따박.
졸졸졸졸.
이백에 이르는 시체 사이를 흑풍신장과 그의 흑마는 천천히 지나갔다.
터지고 찢어지고 양단된 왜적의 무리들.
그들의 몸에서 울컥울컥 쏟아져 나온 선혈이 모이고 모여 작은 개울을 만들고 있었다.
제대로 무장을 갖춘 이백 명을 도살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일 각.
흑풍신장은 먼저 왜적들의 앞에 있던 두어 줄을 뭉개버렸다.
흑마의 발굽에 짓밟힌 왜적들 위로 또 다른 수십 구의 시체들이 순식간에 쌓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훌쩍 왜적의 한가운데로 날아 들어갔다.
자비심 없는 창무(槍舞)가 시작되었다.
길이가 거의 구 척(尺)에 다다른 월아당이었다.
이 무지막지한 병기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서는 이삼십 명의 왜적들이 우르르 박살이 나거나 으깨졌다.
조총의 심지에 불을 붙일 여유도, 장궁에 화살을 먹일 시간도 없었다.
기다란 태도를 채 쥐기도 전에 왜장들은 머리를 잃었고, 또 상체가 터져 죽어 나갔다.
흑풍신장은 미친 야수와도 같았다.
마치 흑마와 한 몸인 양, 종횡무진 왜적무리의 중심을 누비며 잔혹함의 끝을 보여주었다.
“끄으으으.”
개중에는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채 고통에 겨워하는 자들도 있어서 신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푹. 푹.
그런 그들의 이마와 목젖, 심장에 월아당의 가운데 뾰족한 정봉이 푹푹 박혀 들어갔다.
자비로운지고.
조금 전의 잔혹성은 어디 갔는지, 죽어가는 자들의 아픔을 깔끔하게 덜어주는 흑풍신장이었다.
잠시 후, 그는 진흙처럼 이겨진 왜적들의 시체 더미 중간에 눈길을 주었다.
거기에는 삐져나온 시체의 손에 쥐어진 쥘부채가 있었다.
십(十)자 형태의 문양이 그려진 종이에 도진(島津)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
도진. 왜에서는 꽤나 알려진 가문이 아니던가.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할 정도로.
즉, 이들은 그저 그런 왜구들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도진 가문의 문양에다가 장창과 조총, 기마와 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매복전술을 쓸 줄 아는 집단.
그것은 군(軍)이었다. 국가나 지방의 호족들이 그 권력으로서 만들어낸.
왜국의 정규 또는 그에 준하는 군 병력이 대명제국의 영토를 침입했다? 무슨 연유로?
그것도 고작 일천이라니. 이쪽을 시험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흑풍신장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무언가 짐작 되는 부분이 있는 듯, 고개마저 끄덕이고 있었다.
챠앙-!
갑자기 흑풍신장이 시체더미 쪽으로 그의 월아당을 뻗었다.
“…….”
그릉.
시체 한 구가 들썩였다.
그리고 잠시 후, 무언가가 이 작은 시원(屍原)의 뒤편에서 나타났다.
번쩍.
그것은 귀기(鬼氣)가 서려보이는 푸른 눈을 가진 은색 여우였다.
여우를 본 흑풍신장이 월아당의 끝을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 시원 쪽으로 걸어갔다.
끼긱, 철컥, 쿵, 철컥, 쿵.
둔탁한 쇠의 마찰음과 무거운 발소리.
흑풍신장의 묵직한 갑옷이 가진 무게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소리였다.
그르르릉.
여우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그 순간 흑풍신장은 여우가 물고 있던 옥빛의 자그마한 물체를 보았다.
쩔그덕.
흑풍신장은 투구와 제천대성 가면을 벗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이상하리만치 높고 거슬리는 음성이었다.
* * *
솨아아아~ 솨아아아~
바람에 밀린 갈대들이 누웠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강가를 가득 채운 황금빛 물결은 바람이 불 때마다 규칙적인 파동을 그리며 일대에 장관을 연출했다.
똥~!
갈대밭의 끝자락, 강과 인접한 모래사장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휘리릭~ 똥!
한 사내가 강을 향해 작게 뭉친 떡밥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몇 마리의 물고기들이 물 위로 등을 보이다가 사라지는 광경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고 있는 사내.
그는 평평한 돌판 위에 앉아 세 개의 기다란 낚싯대를 앞에 두고 입에는 갈댓잎을 물었다.
꽤나 젊어 보이면서, 평범한 외모에 보통의 성인들보다 다소 작은 키.
그 외에 별다른 특징을 찾아보자면, 이마 윗부분에 희미하게 드러난 두 개의 점이 나란히 자리한 정도?
“헛헛헛.”
사내가 갑자기 나이답지 않게 늙은 웃음을 흘렸다.
“숙방선생님~!”
이때 갑자기 아이들이 사내를 부르며 갈대를 비집고 나왔다.
숙방선생이라. 사내는 아마도 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인 듯했다.
“어? 아직도 집에 안 갔어?”
“히히히.”
아이들이 희희덕거리며 사내의 곁으로 다가왔다.
“와! 많이 잡았네요, 숙방선생님.”
“아니, 그러니까 공부 끝난 지가 언젠데, 지금까지 뭐 하냐 너희들?”
“주세요, 주세요!”
아이들은 자기들이 숙방선생이라고 부른 사내의 꾸중에도 아랑곳없이 웃고 떠들기 바빴다.
“이러다가 또 너희 부모님들께 혼나겠다, 어휴…….”
“괜찮아요, 괜찮아요. 숙방선생님이랑 같이 있었다고 하면 이제 뭐라 안 해요.”
“주세요! 주세요!”
사내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소란에 머리가 어지러운 듯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야야! 그거 다 이 어르신이 잡은 것들이라고. 몇 마리는 오늘 먹고 나머지는 말려서 보관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아이들은 사내가 잡은 물고기들을 마치 자기들 것인 양, 한 마리씩 들고는 천에 싸고 있었다.
“갈게요~!”
“숙방선생님! 내일 뵈어요.”
아이들은 이제 제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꾸벅 인사를 한 뒤 우르르 왔던 길로 돌아갔다.
“허…….”
사내는 기가 막혀 연신 허망한 신음만 흘렸다.
하지만 어이없어하는 그의 입과는 달리, 그의 두 눈에는 따스한 기운이 흘렀다.
“에그, 이런, 이런.”
사내의 뒤쪽에서 그 모양을 지켜보던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애써 다 잡아놓은 걸 어쩌누.”
“뭐, 어쩌겠습니까.”
사내는 노인을 향해 싱그러운 웃음을 보냈다.
“내 저것들 부모를 만나 값을 좀 받아다 줌세.”
“아, 아닙니다. 다들 항상 잘 챙겨주셔서 제가 더 미안한 걸요. 이 정도야 뭐.”
“쯧쯧. 저래 장난기들이 많아서야 공부는 제대로 할는지.”
“그래도 책을 펼치면 모두들 꽤나 진지해요.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 합니다.”
“숙방선생이 그러하다면야…….”
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이내 제 갈 길을 갔다.
휘릭.
사내는 다시 떡밥을 풀고 낚시를 이어갔다.
“오호, 오늘은 입질이 좋구만.”
사내의 고기 잡는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낚싯대들을 오가며 물고기들을 낚아 올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느덧 열댓 마리의 싱싱한 물고기들이 텅텅 비었던 대광주리 속에서 팔딱거렸다.
“이보우, 글방 총각. 고기 잡는가?”
누군가가 또다시 사내를 불렀다.
“좀 드릴까요?”
사내가 돌아본 자리에는 구부정한 팔순 노파와 증손녀로 보이는 예쁘장한 처자가 있었다.
“그러면 좋고. 령아야, 가서 몇 마리 받아오이라.”
“예.”
령이라 불린 여인은 다소곳이 대답을 한 다음, 사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홍 소저.”
사내는 그녀를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고기값이어요.”
여인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작은 손에는 무언가가 쥐어져 있었다.
“넣어두십쇼. 오늘은 운이 좋은지 요놈들이 쉽게 걸려드네요. 아무래도 녀석들이 소저 댁에 볼일들이 있나 봅니다.”
사내는 여인의 손을 밀고 나서, 물고기 몇 마리를 천과 종이로 곱게 싸서 건네주었다.
“짓궂으셔라.”
여인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양쪽 볼의 홍조를 거두지 않는 모양새가 사내의 농이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날씨 좋을 때 한 번 찾아오셔요. 아버님께서 적적하니 숙방선생님하고 대국(對局)을 치르고 싶다 하세요.”
“그거 좋지요. 안 그래도 지난 번 한 수가 계속 머릿속에 맴돕디다.”
“오시면… 아마도 어머니가 닭 한 마리를 잡아다가 대접할 거예요.”
“아니! 제가 닭요리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앗!”
여인은 저도 모르게 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런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노파는 곧이어 어서 가자며 채근을 했고, 얼굴이 벌게진 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노파의 팔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져갔다.
“허허…….”
두 사람의 뒷모습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사내, 숙방선생.
그는 잠시간 지었던 미소를 거두고 다시 낚시에 열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또 걸어왔다.
“여기에 있었군. 한참 찾았네그려.”
“아! 예.”
빼빼마른 중년의 남자를 보고 숙방선생은 반색을 했다.
“바쁜가?”
“아뇨.”
“그럼 부탁 좀 함세.”
“에? 또 부러졌어요?”
“그게… 자네가 손봐준 농기구는 멀쩡한데 꼭 새로 사온 것들이 말썽이라.”
“또또 속아서 사셨군요.”
숙방선생은 중년 남자의 손에 들린 부러진 곡원려(曲轅犁)를 보며 혀를 찼다.
“내 크게 한 턱 대접함세.”
“어휴, 알겠어요. 두고 가세요. 상태를 보니 이틀은 걸리겠네요.”
“그래?”
그의 말에 중년 남자는 얼굴이 환해졌다. 못해도 사나흘은 잡아먹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틀만 달라고 하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들 좀 챙겨 가세요.”
“아닐세, 아니야.”
숙방선생은 잡은 고기 중에서도 튼실한 놈으로 골라서 가는 새끼줄로 묶어 중년 남자의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
“형수님이 요즘 자주 입맛을 잃으신다면서요. 요것들을 푹 고아서 드시면 나아지실 겁니다.”
“자네가 그리 말하니, 내 고맙게 받겠네.”
“집에 바로 가실 거죠?”
“다, 당연하지.”
“일찍 일찍 좀 다니세요. 괜히 안 좋은 소문납니다.”
“알겠네, 알겠어, 이 사람아.”
중년 남자는 훠이훠이 손을 저으며 서둘러 길을 나섰다.
“휴우.”
숙방선생은 한숨을 푹 내쉬고 돌판에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역시나 오늘은 대운(大運)이 깃든 날이 확실했다.
이건 뭐 바늘에 미끼를 끼워 던지기가 무섭게 물고기가 퍼뜩퍼뜩 걸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낚은 고기를 척척 대광주리 안에 쌓으면서 숙방선생은 싱글벙글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따박, 따박, 삐그덕, 삐그덕.
“뭘 그리 신이 났는감? 입이 귀에 걸렸네, 걸렸어.”
소가 끄는 수레가 지나가다 숙방선생 근처에서 멈췄다.
“아, 형님이세요?”
“많이 낚았나봐. 응? 호오, 온 지 얼마나 됐어? 한 스무 마리는 되겠네.”
장발의 장년인은 수레 위에서 고개를 쑥 내밀며 놀라워했다.
“몇 마리 사세요, 그럼.”
숙방선생은 사악해 보이는 웃음을 툭툭 던졌다.
“에잉, 명색이 낚시꾼인 내가 너한테 돈 주고 사기는 좀 그렇고, 그냥 살집 많은 것들로 대여섯 놈들 줘봐.”
장년인은 그리 말하며 커다란 자루를 휙 던졌다.
“흐음, 지금 강도질 하시는 거?”
“물고기 요리는 내가 너보다 훨씬 낫다. 알지? 어둑어둑해지면 찾아와.”
장년인은 친히 숙방선생을 위해 요리를 해주겠다는 뜻을 돌려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형님. 일단 이거 다 넣어드릴 테니 반은 형님이 가지쇼.”
“낄낄.”
“나머지는 형님이 해주시는 찜이랑, 탕이랑, 구이 요리로 얻어먹어 봅시다.”
“어제 현(縣)에 나갔다가 괜찮은 매화주 다섯 동이도 사왔다.”
꿀꺽.
장년인의 말에 숙방선생은 침을 삼켰다.
“간만에 밤새 마셔보자고.”
“좋지요.”
“그럼 이따 봐.”
“예, 형님.”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석양이 그윽한, 초저녁에 가까운 시각이 되었다.
“…….”
이제 막 멀리서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한 갈대밭.
숙방선생은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낚싯대는 그대로 강을 향해 뻗은 상태였고, 돌판 위에 앉은 그의 모습도 그대로였다.
다만 광주리에 물고기가 한 마리도 안 보이는 것이, 근방의 물고기가 씨가 말랐든지 아니면 숙방선생이 오후의 낚시를 포기했든지 둘 중에 하나임은 분명했다.
스스스스.
어두워진 곳에서부터 시작된 안개가 물 위로 퍼졌다.
안개는 물가를 넘어 갈대들을 휘감고, 이내 숙방선생의 주변까지 차올랐다.
“…….”
그때, 안개 속에서 어떤 뭔가가 꿈틀거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 느낌만은 확실했다.
“하아…….”
숙방선생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