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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여인의 음성은 애꾸 노인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발끝에서 시작된 한기(寒氣)가 머리카락 끝까지 번져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크흠.”
사내들 중에 하나가 손등에 돋아난 소름을 슥슥 문질렀다.
“헛소리!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암, 잘 알지. 그 잘나신 반양 목(木)가의 가주 목일소가 아닌가?”
“이년이 감히!”
사내들이 성을 내며 여인에게 호통을 쳤다.
자신들에게는 하늘같은 가주이거늘, 나이도 어려 보이는 여자가 반말을 하다니.
사내들은 목일소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분을 삭였다.
화를 내야 마땅할 당사자는 오히려 차갑게 웃고만 있었다.
“그럼 적철괴마와 우리 목가의 피맺힌 악연도 알고 있겠구나. 놈이 얼마나 잔인한 괴물이었는지도 말이다.”
“그를 괴물로 만든 작자들이 누구였더라?”
“스스로 검에 미쳐 마귀가 된 놈이었느니라. 그 더러운 검으로 수없이 많은 인명을 해하였지. 어린 아이라 해도 예외가 없었다.”
“그럴 테지. 너희 목가의 태상이 옛 황씨 철방 사람들을 다 죽이고 흑검 암야를 훔쳐갔을 때도, 어린 아이라 하여 자비를 베풀지는 않았으니까.”
“흐흐흐흐.”
“적철괴마 황현. 황씨 철방 최후의 생존자.”
여인은 애꾸 노인이 마지막에 짓던 그 처연한 미소를 떠올렸다.
“사람이 죽는 이유는 별 게 없단다. 다 입이 방정일 뿐. 아이야, 목가의 검이 매섭다고 원망하지는 말거라.”
“호호호호호!”
차가운 밤을 찢는 교성(嬌聲).
“미친 것.”
목일소는 더는 여인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는지 사내들에게 손짓을 했다.
스르릉.
각자의 검을 빼들고 사내들이 천천히 여인에게로 걸어갔다.
여인은 사내들이 반 장 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얘야, 어서 그 검을 다오. 내 가주께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라 권하겠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내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손녀뻘밖에 되지 않는 ‘소녀’를 베는 게 달갑지 않은 듯했다.
“무얼 하는가! 계집이 본 가주와 가문을 모독했다!”
하지만 목일소는 여인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만 웃고 눈이라도 감거라, 쯧쯧.”
말을 걸었던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세워 가슴 앞까지 들어 올렸…….
쉭.
팅-!
앞서 있던 사내들의 검이 반으로 잘렸다.
툭.
기우뚱.
동시에 머리가 뒤로 기울어졌다.
투웅. 퉁. 데구르르르.
울컥, 울컥.
두 사내의 막 잘려진 목의 단면에서 핏물이 꿀렁꿀렁 쏟아졌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린 목일소.
“저, 저년을……!”
화르르르.
전신에 피 칠갑을 한 여인이 거대한 화염에 휩싸인 철방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살아서 이곳에 있다는 것은, 목일소와 사내들 전원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는 의미였다.
화륵, 화르륵.
화염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여인을 향해 불줄기를 날름거렸다.
목일소가 철방에 불을 지른 것인가? 아니었다. 불을 낸 장본인은 바로 여인이었다.
한때 마도제일의 철장(鐵匠)이자, 지금은 몰락한 천산마교 십대호교사자의 일인이었던 적철괴마 황현을 위한 불무덤.
여인은 그녀만의 방식으로 잠시나마 스승으로 생각했던 이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녀의 옆에는 철방 벽에 걸려있던 열 자루의 검이 놓여있었다.
본래는 그냥 두고 떠날 생각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인은 자신이 한 달간 만들었던 검들을 모조리 챙겨 나왔다.
휘익~
여인은 손에 들고 있던 순흑의 검, 암야를 화염 속으로 던졌다.
은원과 욕심.
그 모든 것들을 끊어내기 위해.
사박사박.
여인은 감았던 눈을 떴다. 뭔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끼이잉.
작은 짐승의 울음소리.
여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로구나.”
어느새 그녀의 발아래까지 다가와 자그마한 머리를 비비는 짐승은 빛나는 황금색 털을 가진 담비였다.
“그래… 나도 다시 만나서 기뻐.”
여인은 담비를 안아 들었다.
“이제 시작이란 말이지? 아쉽네. 아직도 세상에서 배우고 얻지 못한 것들이 너무도 많은데.”
끼이잉.
“알았어. 가자.”
쉬이잉~
잠시 후, 바람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여인도, 담비도, 열 자루의 검도 사라지고 없었다.
* * *
땅! 따따땅!
삼십여 정의 조총(鳥銃)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허연 연기가 눈앞을 가리고, 사람과 말의 비명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대여섯 명의 경장기병들이 피를 쏟으며 낙마했다.
뒤따르던 말들이 그런 그들을 짓밟고 지나갔다.
따따따땅!
이번에는 제이열의 조총이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구름을 피워 올렸다.
“크헉!”
또 다시 기병들이 우르르 흙바닥에 떨어졌다.
광동(廣東)의 해안에 인접한 산악지대.
지금 이곳에서 부는 피바람은 바다를 건너온 것이었다.
으드득.
맨 앞에서 말을 몰던 유격(遊擊) 서문동파는 이를 갈았다.
이 원망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감히 대명제국의 군세를 함정에 빠트린 저들인가.
아니면 무리한 명령을 내린 참장(參將)인가.
광동에 천여 명의 왜적(倭賊)이 출몰했다는 급보를 받은 복건총병(福建總兵)은 제일진으로 기병 삼백, 보병 일천을 급파했다.
드넓은 광동 지역 또한 복건총병의 관할이었기에, 이쪽에서 먼저 군병을 파견하는 게 형식상의 절차였기 때문이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산길을 얼쩡거리던 왜적 오십을 사로잡아 모조리 목을 베었으니.
광동수사 측의 전언에 따르면, 왜적들은 해안을 따라 남으로 이동하며 양민들을 학살하고 마을들을 약탈하고 있다 했다.
놈들을 급습할 수 있는 지름길의 존재 또한 그 전언에 포함되어 있었다.
광동 병력은 이미 적도들의 후미를 공격하고 있어 군사들을 빼기가 어렵다는 사족까지.
서문동파를 위시해 복건 토박이들이 대부분인 제일진은 처음에는 아무런 의심 없이 지름길로 향했다.
하지만 길의 초입에 도착하고 나서야 몇몇 장수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산이 삐쭉삐쭉 솟은 사이에 난 지름길은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군세는 한 번에 통과하기 어려울 정도로 좁고 구불구불했다.
만약 삼십 리에 이르는 저 길 곳곳에 왜적들이 매복이라도 하고 있다면, 결과는 돌이킬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왜적은 지금도 대명의 백성들을 잔인하게 도륙하는 중일 테고, 다시 돌아가기에는 해안지대까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터였다.
제일진을 이끌고 있던 참장은 결국 진입을 명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시간을 끌다가 큰 피해를 방치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보다는 모험을 선택하는 게 차라리 나았으리라.
한 십여 리 정도 이동했을까.
명군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바위산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피바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참장이 죽었다. 그리고 몇 명의 상급자들이 화살에 희생되었다.
놈들은 어찌 알았는지 장수들만 골라 저격했다.
졸지에 지휘관이 되어버린 서문동파는 즉각적으로 돌파를 지시하고는 자신이 가장 앞서 달렸다.
헌데 왜적들 중에 꽤나 영리한 자가 있음인지, 지대가 높은 곳에는 궁수들이, 조금이나마 길이 트인 양쪽에는 조총병들이 있었다.
비록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매복이 괜히 매복인가.
삼백의 기병들은 어느새 수가 줄고 줄어 절반 가까이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참장이 급한 마음에 일천 보병 중 체격이 좋고 날랜 자들 이백 정도만을 뒤따르게 하고 나머지는 산 외곽을 타고 따로 내려오도록 한 것이었다.
서문동파와 남은 기병들은 어떻게든 그쪽과 합류해 왜적을 상대해야만 했다. 그래야 약간이나마 책임을 면할 수 있을 테니까.
“우테!”
‘젠장.’
저 외침이 있으면 어김없이 탄환이 날아왔다.
이번에도 역시 따당 소리와 함께 기병들이 넘어갔다.
“도스께끼!”
길이 넓어졌다 싶으니 한쪽에서 장창 십여 자루가 튀어나와 말과 기병들을 꿰뚫었다.
이 정도면 뒤의 보병들은 전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대부분 등패(藤牌)와 만도를 든 그들은 이런 식의 공격을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이게 야만적인 도적들이라고?’
서문동파는 적들이 노략질 수준에 머물던 그간의 왜적(賊)이 아님을 깨달았다.
흘려듣기로는 왜에 풍신수길이라는 자가 있어 전토를 일통하였다고 하더니, 일개 해적들마저도 군사화 시킬 정도로 대단한 호걸이었다는 말인가.
‘단단히 잘못되었어, 단단히.’
얼마를 더 달렸을까.
정신을 가다듬은 서문동파는 왜적들이 더 이상은 공격을 가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분명 저 뒤쪽에서는 놈들의 장창병들과 숨어 있던 기마대가 추격을 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길이 끝나가는 이곳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그런 기미를 깨달은 기병들은 불안해하면서도 더욱 힘을 주어 말을 몰아 이곳을 빠져나가고자 했다.
그런데.
빛이 들어오는 길의 막바지에 커다란 형체가 어른거렸다.
‘누구지?’
그들을 맞이한 존재는 투박하고 두꺼운 복건식 갑주를 걸친 중장기(重裝騎) 단 한 명뿐이었다.
제천대성의 가면을 쓰고, 제 몸보다 훨씬 더 긴 월아당(月牙鎲)을 땅바닥까지 늘어뜨린 육척장신의 무장.
본래는 검었을 그의 갑주는 누군가의 피를 흠뻑 머금어 시뻘겋게 변색되어 있었다.
올라앉은 흑마(黑馬)는 또 어찌나 육중한지, 딛고 선 돌바닥에 금이 가 있을 정도였다.
녀석의 드드득 갈리는 이 사이로는 쉴 새 없이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검은 마갑(馬甲)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인간의 살점들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지옥의 나찰(羅刹)이 저러할까.
가히 초패왕에 비견될 만큼의 압도적인 위엄을 뿜어내고 있는 이 무장은 누구란 말인가.
서문동파는 묵묵히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무장의 주변에 수많은 왜적들이 육편으로 화해 흩어져 있는 광경을 목도했다.
‘무, 무슨!’
어림잡아도 삼십에서 사십 명분의 시체 조각이었다.
저 많은 병사들을 혼자서? 그것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워! 워!”
살아남은 기병들도 서문동파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가 말을 세우자 동시에 멈춰 섰다.
“…….”
하지만 그 누구도 가면의 무장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거친 숨소리를 내며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대는…….”
스윽.
가면의 무장이 월아당을 들어 올리자 몇몇 기병들은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혹… 그대가 소문의 그 사람이 맞소?”
뒤쪽에서 기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서문동파는 속으로 그의 용기를 칭찬하며 다시금 가면의 무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문의 그 사람이라니, 대체 누구를 말함일까.
하지만 가면의 무장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운남과 광서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던 만족(蠻族)들을 홀로 물리쳤다는 흑풍신장(黑風神將)이 그대요?”
처음 나섰던 기병이 더욱 확신에 찬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테끼다!”
그때 협곡 안쪽에서 명군을 추격하던 왜적들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따각, 따각.
그러자 흑풍신장이라 짐작되는 가면의 무장이 기병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갔다.
쿵.
흑마가 앞발을 구르자 지축이 요동쳤다.
스으으으으.
흑풍신장의 갑옷 틈 사이에서 안개와 같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서문 부장.”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서문동파에게 기병 하나가 길을 재촉했다.
“가라는 의미 같습니다. 그리고 저희도… 할 일이 남았잖습니까?”
“그렇군.”
서문동파는 문득, 조금 전에 마주했던 흑풍신장의 투구와 가면 사이에서 유난히 빛나던 두 눈을 떠올렸다.
마치 여인네의 그것처럼 곱고 길었던 속눈썹과 흔들림 없이 차분했던 눈동자를.
“길을 터주어 고맙소.”
서문동파가 흑풍신장에게 읍을 하자 나머지 기병들도 같은 자세를 취했다.
“목숨을 구원해준 은혜, 절대 잊지 않으리다. 또한 후일 다시 뵙기를 소망하오이다.”
끄덕.
흑풍신장이 살짝 턱을 주억거리자, 그제야 명군은 바람처럼 말을 달려 나갔다.
히이이이잉~ 흐어어어어어~!
협곡 바깥에서 불어 들어온 바람이 좁은 틈을 빠져나오며 흡사 여인의 곡성과도 같은 소리를 냈다.
스르르르.
푸릉.
드드드드.
검게 그늘진 길 너머에서 진동이 전해져왔다.
무장은 가만히 자신이 탄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끼기긱, 끼기기긱.
그의 월아당이 단단한 돌로 된 땅을 긁으며 긴 줄을 남겼다.
“난다 고레…….”
어느새 흑풍신장의 앞까지 도달한 왜적들.
그들은 예상치 못했던 참상을 목도하고는 약간 얼이 빠진 상태였다.
장창을 든 보병들의 뒤쪽으로 말에 올라 있던 옻빛 갑옷의 왜장은 창백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니[鬼]……?”
여인의 음성은 애꾸 노인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발끝에서 시작된 한기(寒氣)가 머리카락 끝까지 번져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크흠.”
사내들 중에 하나가 손등에 돋아난 소름을 슥슥 문질렀다.
“헛소리!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암, 잘 알지. 그 잘나신 반양 목(木)가의 가주 목일소가 아닌가?”
“이년이 감히!”
사내들이 성을 내며 여인에게 호통을 쳤다.
자신들에게는 하늘같은 가주이거늘, 나이도 어려 보이는 여자가 반말을 하다니.
사내들은 목일소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분을 삭였다.
화를 내야 마땅할 당사자는 오히려 차갑게 웃고만 있었다.
“그럼 적철괴마와 우리 목가의 피맺힌 악연도 알고 있겠구나. 놈이 얼마나 잔인한 괴물이었는지도 말이다.”
“그를 괴물로 만든 작자들이 누구였더라?”
“스스로 검에 미쳐 마귀가 된 놈이었느니라. 그 더러운 검으로 수없이 많은 인명을 해하였지. 어린 아이라 해도 예외가 없었다.”
“그럴 테지. 너희 목가의 태상이 옛 황씨 철방 사람들을 다 죽이고 흑검 암야를 훔쳐갔을 때도, 어린 아이라 하여 자비를 베풀지는 않았으니까.”
“흐흐흐흐.”
“적철괴마 황현. 황씨 철방 최후의 생존자.”
여인은 애꾸 노인이 마지막에 짓던 그 처연한 미소를 떠올렸다.
“사람이 죽는 이유는 별 게 없단다. 다 입이 방정일 뿐. 아이야, 목가의 검이 매섭다고 원망하지는 말거라.”
“호호호호호!”
차가운 밤을 찢는 교성(嬌聲).
“미친 것.”
목일소는 더는 여인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는지 사내들에게 손짓을 했다.
스르릉.
각자의 검을 빼들고 사내들이 천천히 여인에게로 걸어갔다.
여인은 사내들이 반 장 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얘야, 어서 그 검을 다오. 내 가주께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라 권하겠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내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손녀뻘밖에 되지 않는 ‘소녀’를 베는 게 달갑지 않은 듯했다.
“무얼 하는가! 계집이 본 가주와 가문을 모독했다!”
하지만 목일소는 여인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만 웃고 눈이라도 감거라, 쯧쯧.”
말을 걸었던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세워 가슴 앞까지 들어 올렸…….
쉭.
팅-!
앞서 있던 사내들의 검이 반으로 잘렸다.
툭.
기우뚱.
동시에 머리가 뒤로 기울어졌다.
투웅. 퉁. 데구르르르.
울컥, 울컥.
두 사내의 막 잘려진 목의 단면에서 핏물이 꿀렁꿀렁 쏟아졌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린 목일소.
“저, 저년을……!”
화르르르.
전신에 피 칠갑을 한 여인이 거대한 화염에 휩싸인 철방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살아서 이곳에 있다는 것은, 목일소와 사내들 전원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는 의미였다.
화륵, 화르륵.
화염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여인을 향해 불줄기를 날름거렸다.
목일소가 철방에 불을 지른 것인가? 아니었다. 불을 낸 장본인은 바로 여인이었다.
한때 마도제일의 철장(鐵匠)이자, 지금은 몰락한 천산마교 십대호교사자의 일인이었던 적철괴마 황현을 위한 불무덤.
여인은 그녀만의 방식으로 잠시나마 스승으로 생각했던 이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녀의 옆에는 철방 벽에 걸려있던 열 자루의 검이 놓여있었다.
본래는 그냥 두고 떠날 생각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인은 자신이 한 달간 만들었던 검들을 모조리 챙겨 나왔다.
휘익~
여인은 손에 들고 있던 순흑의 검, 암야를 화염 속으로 던졌다.
은원과 욕심.
그 모든 것들을 끊어내기 위해.
사박사박.
여인은 감았던 눈을 떴다. 뭔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끼이잉.
작은 짐승의 울음소리.
여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로구나.”
어느새 그녀의 발아래까지 다가와 자그마한 머리를 비비는 짐승은 빛나는 황금색 털을 가진 담비였다.
“그래… 나도 다시 만나서 기뻐.”
여인은 담비를 안아 들었다.
“이제 시작이란 말이지? 아쉽네. 아직도 세상에서 배우고 얻지 못한 것들이 너무도 많은데.”
끼이잉.
“알았어. 가자.”
쉬이잉~
잠시 후, 바람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여인도, 담비도, 열 자루의 검도 사라지고 없었다.
* * *
땅! 따따땅!
삼십여 정의 조총(鳥銃)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허연 연기가 눈앞을 가리고, 사람과 말의 비명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대여섯 명의 경장기병들이 피를 쏟으며 낙마했다.
뒤따르던 말들이 그런 그들을 짓밟고 지나갔다.
따따따땅!
이번에는 제이열의 조총이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구름을 피워 올렸다.
“크헉!”
또 다시 기병들이 우르르 흙바닥에 떨어졌다.
광동(廣東)의 해안에 인접한 산악지대.
지금 이곳에서 부는 피바람은 바다를 건너온 것이었다.
으드득.
맨 앞에서 말을 몰던 유격(遊擊) 서문동파는 이를 갈았다.
이 원망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감히 대명제국의 군세를 함정에 빠트린 저들인가.
아니면 무리한 명령을 내린 참장(參將)인가.
광동에 천여 명의 왜적(倭賊)이 출몰했다는 급보를 받은 복건총병(福建總兵)은 제일진으로 기병 삼백, 보병 일천을 급파했다.
드넓은 광동 지역 또한 복건총병의 관할이었기에, 이쪽에서 먼저 군병을 파견하는 게 형식상의 절차였기 때문이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산길을 얼쩡거리던 왜적 오십을 사로잡아 모조리 목을 베었으니.
광동수사 측의 전언에 따르면, 왜적들은 해안을 따라 남으로 이동하며 양민들을 학살하고 마을들을 약탈하고 있다 했다.
놈들을 급습할 수 있는 지름길의 존재 또한 그 전언에 포함되어 있었다.
광동 병력은 이미 적도들의 후미를 공격하고 있어 군사들을 빼기가 어렵다는 사족까지.
서문동파를 위시해 복건 토박이들이 대부분인 제일진은 처음에는 아무런 의심 없이 지름길로 향했다.
하지만 길의 초입에 도착하고 나서야 몇몇 장수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산이 삐쭉삐쭉 솟은 사이에 난 지름길은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군세는 한 번에 통과하기 어려울 정도로 좁고 구불구불했다.
만약 삼십 리에 이르는 저 길 곳곳에 왜적들이 매복이라도 하고 있다면, 결과는 돌이킬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왜적은 지금도 대명의 백성들을 잔인하게 도륙하는 중일 테고, 다시 돌아가기에는 해안지대까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터였다.
제일진을 이끌고 있던 참장은 결국 진입을 명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시간을 끌다가 큰 피해를 방치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보다는 모험을 선택하는 게 차라리 나았으리라.
한 십여 리 정도 이동했을까.
명군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바위산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피바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참장이 죽었다. 그리고 몇 명의 상급자들이 화살에 희생되었다.
놈들은 어찌 알았는지 장수들만 골라 저격했다.
졸지에 지휘관이 되어버린 서문동파는 즉각적으로 돌파를 지시하고는 자신이 가장 앞서 달렸다.
헌데 왜적들 중에 꽤나 영리한 자가 있음인지, 지대가 높은 곳에는 궁수들이, 조금이나마 길이 트인 양쪽에는 조총병들이 있었다.
비록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매복이 괜히 매복인가.
삼백의 기병들은 어느새 수가 줄고 줄어 절반 가까이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참장이 급한 마음에 일천 보병 중 체격이 좋고 날랜 자들 이백 정도만을 뒤따르게 하고 나머지는 산 외곽을 타고 따로 내려오도록 한 것이었다.
서문동파와 남은 기병들은 어떻게든 그쪽과 합류해 왜적을 상대해야만 했다. 그래야 약간이나마 책임을 면할 수 있을 테니까.
“우테!”
‘젠장.’
저 외침이 있으면 어김없이 탄환이 날아왔다.
이번에도 역시 따당 소리와 함께 기병들이 넘어갔다.
“도스께끼!”
길이 넓어졌다 싶으니 한쪽에서 장창 십여 자루가 튀어나와 말과 기병들을 꿰뚫었다.
이 정도면 뒤의 보병들은 전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대부분 등패(藤牌)와 만도를 든 그들은 이런 식의 공격을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이게 야만적인 도적들이라고?’
서문동파는 적들이 노략질 수준에 머물던 그간의 왜적(賊)이 아님을 깨달았다.
흘려듣기로는 왜에 풍신수길이라는 자가 있어 전토를 일통하였다고 하더니, 일개 해적들마저도 군사화 시킬 정도로 대단한 호걸이었다는 말인가.
‘단단히 잘못되었어, 단단히.’
얼마를 더 달렸을까.
정신을 가다듬은 서문동파는 왜적들이 더 이상은 공격을 가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분명 저 뒤쪽에서는 놈들의 장창병들과 숨어 있던 기마대가 추격을 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길이 끝나가는 이곳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그런 기미를 깨달은 기병들은 불안해하면서도 더욱 힘을 주어 말을 몰아 이곳을 빠져나가고자 했다.
그런데.
빛이 들어오는 길의 막바지에 커다란 형체가 어른거렸다.
‘누구지?’
그들을 맞이한 존재는 투박하고 두꺼운 복건식 갑주를 걸친 중장기(重裝騎) 단 한 명뿐이었다.
제천대성의 가면을 쓰고, 제 몸보다 훨씬 더 긴 월아당(月牙鎲)을 땅바닥까지 늘어뜨린 육척장신의 무장.
본래는 검었을 그의 갑주는 누군가의 피를 흠뻑 머금어 시뻘겋게 변색되어 있었다.
올라앉은 흑마(黑馬)는 또 어찌나 육중한지, 딛고 선 돌바닥에 금이 가 있을 정도였다.
녀석의 드드득 갈리는 이 사이로는 쉴 새 없이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검은 마갑(馬甲)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인간의 살점들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지옥의 나찰(羅刹)이 저러할까.
가히 초패왕에 비견될 만큼의 압도적인 위엄을 뿜어내고 있는 이 무장은 누구란 말인가.
서문동파는 묵묵히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무장의 주변에 수많은 왜적들이 육편으로 화해 흩어져 있는 광경을 목도했다.
‘무, 무슨!’
어림잡아도 삼십에서 사십 명분의 시체 조각이었다.
저 많은 병사들을 혼자서? 그것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워! 워!”
살아남은 기병들도 서문동파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가 말을 세우자 동시에 멈춰 섰다.
“…….”
하지만 그 누구도 가면의 무장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거친 숨소리를 내며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대는…….”
스윽.
가면의 무장이 월아당을 들어 올리자 몇몇 기병들은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혹… 그대가 소문의 그 사람이 맞소?”
뒤쪽에서 기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서문동파는 속으로 그의 용기를 칭찬하며 다시금 가면의 무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문의 그 사람이라니, 대체 누구를 말함일까.
하지만 가면의 무장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운남과 광서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던 만족(蠻族)들을 홀로 물리쳤다는 흑풍신장(黑風神將)이 그대요?”
처음 나섰던 기병이 더욱 확신에 찬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테끼다!”
그때 협곡 안쪽에서 명군을 추격하던 왜적들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따각, 따각.
그러자 흑풍신장이라 짐작되는 가면의 무장이 기병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갔다.
쿵.
흑마가 앞발을 구르자 지축이 요동쳤다.
스으으으으.
흑풍신장의 갑옷 틈 사이에서 안개와 같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서문 부장.”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서문동파에게 기병 하나가 길을 재촉했다.
“가라는 의미 같습니다. 그리고 저희도… 할 일이 남았잖습니까?”
“그렇군.”
서문동파는 문득, 조금 전에 마주했던 흑풍신장의 투구와 가면 사이에서 유난히 빛나던 두 눈을 떠올렸다.
마치 여인네의 그것처럼 곱고 길었던 속눈썹과 흔들림 없이 차분했던 눈동자를.
“길을 터주어 고맙소.”
서문동파가 흑풍신장에게 읍을 하자 나머지 기병들도 같은 자세를 취했다.
“목숨을 구원해준 은혜, 절대 잊지 않으리다. 또한 후일 다시 뵙기를 소망하오이다.”
끄덕.
흑풍신장이 살짝 턱을 주억거리자, 그제야 명군은 바람처럼 말을 달려 나갔다.
히이이이잉~ 흐어어어어어~!
협곡 바깥에서 불어 들어온 바람이 좁은 틈을 빠져나오며 흡사 여인의 곡성과도 같은 소리를 냈다.
스르르르.
푸릉.
드드드드.
검게 그늘진 길 너머에서 진동이 전해져왔다.
무장은 가만히 자신이 탄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끼기긱, 끼기기긱.
그의 월아당이 단단한 돌로 된 땅을 긁으며 긴 줄을 남겼다.
“난다 고레…….”
어느새 흑풍신장의 앞까지 도달한 왜적들.
그들은 예상치 못했던 참상을 목도하고는 약간 얼이 빠진 상태였다.
장창을 든 보병들의 뒤쪽으로 말에 올라 있던 옻빛 갑옷의 왜장은 창백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니[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