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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저 다들 얼빠진 표정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표두의 풀어졌던 눈동자에 이내 초점이 돌아왔다.
“망했다…….”
정신이 돌아온 후 그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망했다, 망했어.”
힘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표두를 보며 젊은 보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젊은 보표는 모르고 있지만, 지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표정은 아주 묘했다.
마왕채의 왕태산이라 하면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미친개와 동급인 존재였다.
성격이 포악하기로는 이쪽 업계에서 수위를 다툴 지경이었고, 무공 또한 고강하여 관부에서도 손을 놓아버린 작자였다.
만약 조금만 성질을 죽이고 살았다면, 녹림에서 쫓겨나 이런 곳에서 왕 노릇이나 하며 살고 있지는 않았을 터.
한데 그런 대단한 무인을 일개 표사가 베었다.
그냥 척척 걸어가 곡도를 휘둘렀을 뿐인데, 몸이 거의 절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방심? 진짜 방심인가? 저 왕태산이?
젊은 보표를 향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번져 나갔다.
“휴우…….”
잠시 후, 얼굴색이 수십 번도 더 바뀌던 늙은 보표가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 누구신지는 모르오나 저희에게 큰 짐을 주셨습니다그려.”
“전 보표님, 갑자기 웬 공대를…….”
“아니외다, 아니외다.”
늙은 보표, 전충호는 손을 내저었다.
상대는 힘을 감추고 창성표국에 들어온 고수였다.
몰랐다면 넘어가겠지만, 이제는 알았으니 강호의 생리에 따라 공대를 해줌이 옳았다.
“지키고 싸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오. 자세히 말하면 복잡하기만 하고 바로 이해하기도 어려울 듯하니,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표물 운송의 목적은 결국, 표물이 제때에 잘 도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피를 보아야 할 일이 있다면, 피해가는 게 상책이란 뜻이외다.”
“…….”
“의뢰를 잘 수행하여 얻는 이득이 통행세를 상회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누구도 다치지 않고 서로가 다 이익을 얻는 부분이 있다면 당연히 그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산채도, 표국도, 의뢰인도 전부 이기고 들어가는 방향이 제일이란 의미지요.”
“흐흠…….”
젊은 보표는 완전히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이 소문이 나면 창성표국은 앞으로 이쪽 세계에서는 살아가기가 힘들 것입니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여기 우리들의 표정을 잘 보도록 하십시오. 그럼 아실 거외다. 혹, 그대가 창성표국을 천년만년 끝까지 지켜주시려오?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만.”
“아, 또 하나 배웠네.”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젊은 보표.
그는 난감해하면서도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살랑.
그 순간, 불그스름한 어떤 것이 젊은 보표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이맛살이 찰나의 순간 딱딱하니 일그러졌다가 펴졌다고 느낀 것은 전충호만의 착각이었을까.
젊은 보표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천공을 선회하는 붉은 점.
그것이 무엇인지는 젊은 보표만이 알고 있으리라.
“오랜만이다, 이 빨간 까마귀 새끼야.”
전충호는 언뜻 그의 입가에 나타난 미소를 보며 섬뜩한 감정이 일었다.
“때가 되었다는 뜻이렷다? 생각보다 빠르기는 하지만 마음에는 드네.”
젊은 보표는 또다시 혼자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전 보표님.”
“말씀하시지요.”
“며칠뿐이었지만 이것저것 잘 알려주시고 좋게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만 둘게요.”
전충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만 벌여놓고 저렇듯 무책임하게 그만두겠다니. 역시나 힘이 있는 자들은 제멋대로인 것인가.
“소문이 나면 표국이 곤란할 거라고 하셨죠?”
“아무래도 그러지 싶습니다.”
왕태산이라는 거물을 신생 표국이 제거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후폭풍이 꽤나 클 터.
“표국 사람들 입단속은 표두님이 하세요.”
“망했다. 망했… 어엉?”
“기왕 이리 된 거 마무리는 확실히.”
척.
젊은 보표는 휙 몸을 돌려 아직까지도 정신줄을 잡지 못하고 있는 산적들 쪽으로 향했다.
철컥.
그는 느릿하게 걸으며 엄지로 곡도를 살짝 밀어 올렸다.
“아, 그리고.”
여전히 밝고 쾌활한 목소리.
“한 이삼 년만 버티세요. 제가 나중에 천하제일의 표국으로 만들어드릴 테니.”
척. 척. 척. 척.
* * *
땡강! 땡강! 땡강! 치이이이-!
땡강! 땡!
치이이이-!
불에 달군 쇠막대에 떨어진 땀이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수십 번의 망치질 후, 다시 뜨거운 숯 더미 속으로 들어가는 쇠막대.
그 사이에도 망치의 주인은 발을 쉴 새 없이 놀려 풀무질을 해댔다.
자세히 보니 망치를 잡은 손이 꽤나 가늘어 보였다.
자루를 잡은 손가락과 손바닥에는 물집이 잡혔다가 터지고 또 잡혔다 터져서 생긴 굳은살들이 가득했지만, 그 색이 하얗고 선이 고운 것이 틀림없는 여자의 손이었다.
튀는 불똥이 손등과 팔뚝에 약한 화상을 남겨댔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다.
땡강! 치이이이-!
얼마나 두들겨대고 또 얼마나 식혔을까. 그렇게 열과 냉을 오가길 두 시진.
두툼한 쇠막대는 어느덧 사람의 팔 길이만 하게 펴지고 늘어나 있었다.
땡. 땡.
두껍고 투박하며 또 주름이 가득한 손이 나타나 길어진 쇠막대를 가볍게 튕겼다.
끄덕.
허락의 표시인가. 여인의 손이 다시 움직여 쇠막대를 한쪽으로 치웠다.
카카카카카.
이번에는 숫돌이었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숫돌이 쇠막대를 갈고 또 갈며 날을 세웠다.
이때까지 거의 반나절이 지났다.
쇠를 갈고 있는 여인도, 늙고 두꺼운 손의 주인도, 이 긴 시간동안 서로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조심스럽게 날과 그에 따른 선을 다듬는 여인.
날이 어둑해져 더더욱 그늘진 여인의 턱선을 따라 한 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인이 날 세우기를 멈추자, 예의 그 투박한 손이 나타나 이제는 거의 검의 형태를 갖춰가고 있는 쇠붙이를 받아들었다.
“좋구먼.”
이 한 마디에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완전한 밤이 찾아왔다.
일반적인 대장간 같으면 벌써 한참 전에 문을 닫았을 테지만, 지금 이곳에는 여전히 열기가 남아 있었다.
여인은 ‘검’의 하단에 천을 칭칭 감았다.
따로 바깥에 검파(劍把)를 대지 않은 일체형. 결코 완성품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딸깍.
“하아.”
마지막으로 미리 만들어둔 환(環)을 검수에 체결하고서야 여인의 입에서 고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철방의 한쪽 벽면.
그곳에는 여인이 방금 완성한 검과 비슷한 모양의 검이 아홉 개나 걸려 있었다.
“드디어 모두 완성했구나.”
여인을 향해 말을 거는 이는 이 철방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노인이었다.
거칠고 탄탄한 피부.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과 대충 묶은 머리.
무엇보다, 짓눌려 형체를 잃어버린 왼쪽 눈은 그를 더욱 인상 깊게 만들고 있었다.
“다 어르신 덕입니다.”
여인의 음성은 무척이나 차분하고 매력적이었다.
“아니다, 아니야. 난 그저 네가 찾은 길 위에 물을 뿌려주었을 뿐.”
여인은 벽으로 걸어가 마지막 남은 자리에 검을 걸었다.
“배우겠다고 억지를 부려 그게 더 죄송한 걸요.”
“그래서 많이 배웠느냐?”
“그저 어르신 흉내 내기에만 바빴지요.”
“헛허허허.”
노인은 기분 좋게 웃었다.
“넌 최고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최고의 따라쟁이였느니라. 껄껄껄.”
“그럼 어르신의 최고 제자는 누군데요?”
“있다. 그런 놈이.”
노인은 그 최고의 제자라는 이를 떠올리는 듯 입술을 삐쭉거렸다.
“…….”
“어르신?”
“내게 남은 한 달의 시간을 함께 해주어 고맙구나.”
한 달? 고작 한 달 만에 노인의 기술을 모두 습득했다는 뜻인가.
“너도 알고 있지?”
여인은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네가 감추고 있어도, 네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내 모르는 바가 아니란다. 그런 너이니 저 멀리 바깥의 상황도 잘 알 테고.”
“제가 지켜드릴게요.”
여인이 간절함을 담아 서둘러 말했다.
“불가(不可).”
“어르신!”
“은원이란 건 말이다… 홀로 풀지 않으면, 영원히 엉키는 실타래와도 같단다.”
“누군가에게는 은원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욕심에 불과해요.”
“호오, 어린 네가 그런 이치를? 갑자기 널 키운 분이 뉘신지 궁금하구나.”
“…….”
노인이 천천히 일어나 여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녀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은원을 풀 테니, 넌 누군가의 과욕을 경계하거라. 그것이 새로운 은원이 되지 않도록.”
노인은 철방 구석에 대충 놓인 무언가로 눈길을 돌렸다.
검고 표면이 거친 검.
세상의 모든 빛을 다 흡수한 듯, 차가운 순흑(純黑)을 머금은 검이었다.
“떠날 시간이 되었구나.”
터벅, 터벅.
“가는 길에 이 쓸모없는 놈이나 가져다 버리거라.”
여인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다그닥, 다그닥.
새벽을 품은 대지를 달리는 아홉 마리의 말.
어딘가로 질주하는 말들 위에는 흑풍의(黑風衣)를 머리끝까지 걸친 사내들이 타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연신 말의 배를 차는 그들의 앞쪽으로 멀리 불빛이 아른거렸다.
“저기로군. 지독하게도 긴 악연이었다.”
어느새 말을 멈춘 무리들.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한 가득 원한을 담은 말투로 말했다.
사박사박.
그때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조용한 발소리가 있었다.
중년인의 바로 뒤편에 있던 자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한 여인이 말없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수상? 당연히 수상했다.
설마 자신들을 막고자 ‘적철괴마’가 살수를 보낸 것인가?
스르륵.
아니었다. 여인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그들을 그저 스쳐 지나갔다.
“잡을까요?”
“……되었다.”
중년인은 이내 여인에게서 관심을 끊고 다시금 불이 켜진 철방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로부터 한 시진이 훌쩍 지났다.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벼랑 끝에 그 여인이 서 있었다.
두꺼운 사슴가죽 외투 안쪽으로 낀 팔짱에는 아까의 그 흑검(黑劍) 자루가 보였다.
아직 다 차오르지 않아 둘레가 희미하게 이지러진 달.
여인은 안타깝고 애잔한 표정으로 달을 응시하고 있었다.
휘이잉~
그때, 여인의 뒤쪽에서 한 차례 바람이 불어왔다.
은은한 혈향과 함께.
스슥.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방을 향해 길을 재촉하던 바로 그 중년인. 그리고 그를 수행하던 남자들.
숫자를 세어보니 딱 여덟이었다. 하나는 아마도…….
“너였나?”
중년인의 물음에 여인은 답하지 않았다.
“네가 적철괴마의 ‘암야(暗耶)’를 가지고 갔느냐?”
암야? 여인의 품에 고이 모셔진 저 흑검을 말하는 것인가.
“그걸 내놓거라. 그럼 목숨은 거두지 않겠다.”
“…….”
“그 검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았다. 내 부친도, 형제들도, 가문의 많은 이들도.”
“…….”
“그놈을 부수어 이 모든 원한을 끊으려 한다. 그러니 내게 다오.”
스스스스스.
여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이 마치 유령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달을 등지고 선 여인의 얼굴은 짙게 그늘져 표정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은원이 욕심으로 변했구나.”
서리를 한 주먹 머금고 내뱉는 듯한 음성이 여인에게서 흘러나왔다.
스스스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여인의 머리카락을 뒤흔들었다.
그저 다들 얼빠진 표정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표두의 풀어졌던 눈동자에 이내 초점이 돌아왔다.
“망했다…….”
정신이 돌아온 후 그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망했다, 망했어.”
힘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표두를 보며 젊은 보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젊은 보표는 모르고 있지만, 지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표정은 아주 묘했다.
마왕채의 왕태산이라 하면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미친개와 동급인 존재였다.
성격이 포악하기로는 이쪽 업계에서 수위를 다툴 지경이었고, 무공 또한 고강하여 관부에서도 손을 놓아버린 작자였다.
만약 조금만 성질을 죽이고 살았다면, 녹림에서 쫓겨나 이런 곳에서 왕 노릇이나 하며 살고 있지는 않았을 터.
한데 그런 대단한 무인을 일개 표사가 베었다.
그냥 척척 걸어가 곡도를 휘둘렀을 뿐인데, 몸이 거의 절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방심? 진짜 방심인가? 저 왕태산이?
젊은 보표를 향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번져 나갔다.
“휴우…….”
잠시 후, 얼굴색이 수십 번도 더 바뀌던 늙은 보표가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 누구신지는 모르오나 저희에게 큰 짐을 주셨습니다그려.”
“전 보표님, 갑자기 웬 공대를…….”
“아니외다, 아니외다.”
늙은 보표, 전충호는 손을 내저었다.
상대는 힘을 감추고 창성표국에 들어온 고수였다.
몰랐다면 넘어가겠지만, 이제는 알았으니 강호의 생리에 따라 공대를 해줌이 옳았다.
“지키고 싸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오. 자세히 말하면 복잡하기만 하고 바로 이해하기도 어려울 듯하니,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표물 운송의 목적은 결국, 표물이 제때에 잘 도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피를 보아야 할 일이 있다면, 피해가는 게 상책이란 뜻이외다.”
“…….”
“의뢰를 잘 수행하여 얻는 이득이 통행세를 상회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누구도 다치지 않고 서로가 다 이익을 얻는 부분이 있다면 당연히 그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산채도, 표국도, 의뢰인도 전부 이기고 들어가는 방향이 제일이란 의미지요.”
“흐흠…….”
젊은 보표는 완전히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이 소문이 나면 창성표국은 앞으로 이쪽 세계에서는 살아가기가 힘들 것입니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여기 우리들의 표정을 잘 보도록 하십시오. 그럼 아실 거외다. 혹, 그대가 창성표국을 천년만년 끝까지 지켜주시려오?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만.”
“아, 또 하나 배웠네.”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젊은 보표.
그는 난감해하면서도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살랑.
그 순간, 불그스름한 어떤 것이 젊은 보표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이맛살이 찰나의 순간 딱딱하니 일그러졌다가 펴졌다고 느낀 것은 전충호만의 착각이었을까.
젊은 보표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천공을 선회하는 붉은 점.
그것이 무엇인지는 젊은 보표만이 알고 있으리라.
“오랜만이다, 이 빨간 까마귀 새끼야.”
전충호는 언뜻 그의 입가에 나타난 미소를 보며 섬뜩한 감정이 일었다.
“때가 되었다는 뜻이렷다? 생각보다 빠르기는 하지만 마음에는 드네.”
젊은 보표는 또다시 혼자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전 보표님.”
“말씀하시지요.”
“며칠뿐이었지만 이것저것 잘 알려주시고 좋게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만 둘게요.”
전충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만 벌여놓고 저렇듯 무책임하게 그만두겠다니. 역시나 힘이 있는 자들은 제멋대로인 것인가.
“소문이 나면 표국이 곤란할 거라고 하셨죠?”
“아무래도 그러지 싶습니다.”
왕태산이라는 거물을 신생 표국이 제거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후폭풍이 꽤나 클 터.
“표국 사람들 입단속은 표두님이 하세요.”
“망했다. 망했… 어엉?”
“기왕 이리 된 거 마무리는 확실히.”
척.
젊은 보표는 휙 몸을 돌려 아직까지도 정신줄을 잡지 못하고 있는 산적들 쪽으로 향했다.
철컥.
그는 느릿하게 걸으며 엄지로 곡도를 살짝 밀어 올렸다.
“아, 그리고.”
여전히 밝고 쾌활한 목소리.
“한 이삼 년만 버티세요. 제가 나중에 천하제일의 표국으로 만들어드릴 테니.”
척. 척. 척. 척.
* * *
땡강! 땡강! 땡강! 치이이이-!
땡강! 땡!
치이이이-!
불에 달군 쇠막대에 떨어진 땀이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수십 번의 망치질 후, 다시 뜨거운 숯 더미 속으로 들어가는 쇠막대.
그 사이에도 망치의 주인은 발을 쉴 새 없이 놀려 풀무질을 해댔다.
자세히 보니 망치를 잡은 손이 꽤나 가늘어 보였다.
자루를 잡은 손가락과 손바닥에는 물집이 잡혔다가 터지고 또 잡혔다 터져서 생긴 굳은살들이 가득했지만, 그 색이 하얗고 선이 고운 것이 틀림없는 여자의 손이었다.
튀는 불똥이 손등과 팔뚝에 약한 화상을 남겨댔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다.
땡강! 치이이이-!
얼마나 두들겨대고 또 얼마나 식혔을까. 그렇게 열과 냉을 오가길 두 시진.
두툼한 쇠막대는 어느덧 사람의 팔 길이만 하게 펴지고 늘어나 있었다.
땡. 땡.
두껍고 투박하며 또 주름이 가득한 손이 나타나 길어진 쇠막대를 가볍게 튕겼다.
끄덕.
허락의 표시인가. 여인의 손이 다시 움직여 쇠막대를 한쪽으로 치웠다.
카카카카카.
이번에는 숫돌이었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숫돌이 쇠막대를 갈고 또 갈며 날을 세웠다.
이때까지 거의 반나절이 지났다.
쇠를 갈고 있는 여인도, 늙고 두꺼운 손의 주인도, 이 긴 시간동안 서로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조심스럽게 날과 그에 따른 선을 다듬는 여인.
날이 어둑해져 더더욱 그늘진 여인의 턱선을 따라 한 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인이 날 세우기를 멈추자, 예의 그 투박한 손이 나타나 이제는 거의 검의 형태를 갖춰가고 있는 쇠붙이를 받아들었다.
“좋구먼.”
이 한 마디에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완전한 밤이 찾아왔다.
일반적인 대장간 같으면 벌써 한참 전에 문을 닫았을 테지만, 지금 이곳에는 여전히 열기가 남아 있었다.
여인은 ‘검’의 하단에 천을 칭칭 감았다.
따로 바깥에 검파(劍把)를 대지 않은 일체형. 결코 완성품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딸깍.
“하아.”
마지막으로 미리 만들어둔 환(環)을 검수에 체결하고서야 여인의 입에서 고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철방의 한쪽 벽면.
그곳에는 여인이 방금 완성한 검과 비슷한 모양의 검이 아홉 개나 걸려 있었다.
“드디어 모두 완성했구나.”
여인을 향해 말을 거는 이는 이 철방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노인이었다.
거칠고 탄탄한 피부.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과 대충 묶은 머리.
무엇보다, 짓눌려 형체를 잃어버린 왼쪽 눈은 그를 더욱 인상 깊게 만들고 있었다.
“다 어르신 덕입니다.”
여인의 음성은 무척이나 차분하고 매력적이었다.
“아니다, 아니야. 난 그저 네가 찾은 길 위에 물을 뿌려주었을 뿐.”
여인은 벽으로 걸어가 마지막 남은 자리에 검을 걸었다.
“배우겠다고 억지를 부려 그게 더 죄송한 걸요.”
“그래서 많이 배웠느냐?”
“그저 어르신 흉내 내기에만 바빴지요.”
“헛허허허.”
노인은 기분 좋게 웃었다.
“넌 최고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최고의 따라쟁이였느니라. 껄껄껄.”
“그럼 어르신의 최고 제자는 누군데요?”
“있다. 그런 놈이.”
노인은 그 최고의 제자라는 이를 떠올리는 듯 입술을 삐쭉거렸다.
“…….”
“어르신?”
“내게 남은 한 달의 시간을 함께 해주어 고맙구나.”
한 달? 고작 한 달 만에 노인의 기술을 모두 습득했다는 뜻인가.
“너도 알고 있지?”
여인은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네가 감추고 있어도, 네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내 모르는 바가 아니란다. 그런 너이니 저 멀리 바깥의 상황도 잘 알 테고.”
“제가 지켜드릴게요.”
여인이 간절함을 담아 서둘러 말했다.
“불가(不可).”
“어르신!”
“은원이란 건 말이다… 홀로 풀지 않으면, 영원히 엉키는 실타래와도 같단다.”
“누군가에게는 은원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욕심에 불과해요.”
“호오, 어린 네가 그런 이치를? 갑자기 널 키운 분이 뉘신지 궁금하구나.”
“…….”
노인이 천천히 일어나 여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녀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은원을 풀 테니, 넌 누군가의 과욕을 경계하거라. 그것이 새로운 은원이 되지 않도록.”
노인은 철방 구석에 대충 놓인 무언가로 눈길을 돌렸다.
검고 표면이 거친 검.
세상의 모든 빛을 다 흡수한 듯, 차가운 순흑(純黑)을 머금은 검이었다.
“떠날 시간이 되었구나.”
터벅, 터벅.
“가는 길에 이 쓸모없는 놈이나 가져다 버리거라.”
여인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다그닥, 다그닥.
새벽을 품은 대지를 달리는 아홉 마리의 말.
어딘가로 질주하는 말들 위에는 흑풍의(黑風衣)를 머리끝까지 걸친 사내들이 타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연신 말의 배를 차는 그들의 앞쪽으로 멀리 불빛이 아른거렸다.
“저기로군. 지독하게도 긴 악연이었다.”
어느새 말을 멈춘 무리들.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한 가득 원한을 담은 말투로 말했다.
사박사박.
그때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조용한 발소리가 있었다.
중년인의 바로 뒤편에 있던 자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한 여인이 말없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수상? 당연히 수상했다.
설마 자신들을 막고자 ‘적철괴마’가 살수를 보낸 것인가?
스르륵.
아니었다. 여인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그들을 그저 스쳐 지나갔다.
“잡을까요?”
“……되었다.”
중년인은 이내 여인에게서 관심을 끊고 다시금 불이 켜진 철방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로부터 한 시진이 훌쩍 지났다.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벼랑 끝에 그 여인이 서 있었다.
두꺼운 사슴가죽 외투 안쪽으로 낀 팔짱에는 아까의 그 흑검(黑劍) 자루가 보였다.
아직 다 차오르지 않아 둘레가 희미하게 이지러진 달.
여인은 안타깝고 애잔한 표정으로 달을 응시하고 있었다.
휘이잉~
그때, 여인의 뒤쪽에서 한 차례 바람이 불어왔다.
은은한 혈향과 함께.
스슥.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방을 향해 길을 재촉하던 바로 그 중년인. 그리고 그를 수행하던 남자들.
숫자를 세어보니 딱 여덟이었다. 하나는 아마도…….
“너였나?”
중년인의 물음에 여인은 답하지 않았다.
“네가 적철괴마의 ‘암야(暗耶)’를 가지고 갔느냐?”
암야? 여인의 품에 고이 모셔진 저 흑검을 말하는 것인가.
“그걸 내놓거라. 그럼 목숨은 거두지 않겠다.”
“…….”
“그 검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았다. 내 부친도, 형제들도, 가문의 많은 이들도.”
“…….”
“그놈을 부수어 이 모든 원한을 끊으려 한다. 그러니 내게 다오.”
스스스스스.
여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이 마치 유령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달을 등지고 선 여인의 얼굴은 짙게 그늘져 표정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은원이 욕심으로 변했구나.”
서리를 한 주먹 머금고 내뱉는 듯한 음성이 여인에게서 흘러나왔다.
스스스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여인의 머리카락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