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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푸드덕.
구름에 가려져 끝이 보이지 않는 산봉우리 어디선가 한 마리 적오아(赤烏鴉)가 날아올랐다.
그 방향은 북(北).
사사삿.
수백 기(基)의 무덤이 빼곡하게 자리한 사당을 뒤로하고 한 마리 황초(黃貂)가 내달렸다.
그 방향은 서(西).
퐁.
영롱한 달빛을 머금은 호수를 한 마리 은호(銀狐)가 가로질렀다.
그 방향은 남(南).
끼기긱. 쿵.
거대한 철벽(鐵壁)의 성(城). 육중한 성문이 열렸다 닫히며 비좁은 틈으로 한 줄기 흑연(黑煙)이 피어올랐다.
가느다란 흑연은 길게 꼬리를 끌며 어딘가를 향해 그어지다 이내 사라졌다.
그 방향은 동(東).
같은 날, 같은 시각, 동서남북 천하사로(天下四路).
세 마리의 영물과 형체 없는 귀혼이 네 개의 길을 따라 종적을 감추었다.
각각의 끝에 있을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서.
잠시 후, 어둠이 이내 모든 것을 삼키고 다시금 세상은 고요해졌다.
* * *
퍼드득.
강한 바람에 표기(鏢旗)가 펄럭거렸다.
“하나아~ 둘!”
장년의 표두가 지르는 고함에 맞춰 몇몇 보표들이 쇠붙이를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었다.
칭~! 척. 칭~! 척.
등짐을 진 쟁자수들은 맑은 쇳소리를 따라 한 발, 한 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관도를 벗어난 지 약 반 시진.
일부러 택한 산길은 이 표행에 나선 모두에게 힘든 선택이었다.
하지만 길게 산을 끼고 난 관도를 택했을 때보다 약 하루 정도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연히 선호될 수밖에 없는 길이기도 했다.
“꼭 이래야만 하나…….”
짐승이 끄는 수레에 앉은 늙은 보표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보표들과 쟁자수들을 합쳐 오십이 넘는 인원이었다.
결코 작은 머릿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덕분에 지금까지 여러 산길들만 골라 왔음에도 그 흔하다는 산적 무리들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사실 이 정도 규모를 갖춘 표행에 더해, 대놓고 산을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자신감을 보고 산의 주인들이 알아서 표국의 행사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한데 이 산은 앞서의 그것들과는 많이 달랐다.
일대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마왕채가 두 봉우리 건너에 자리하고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과거 마왕채의 무서움을 직접 겪어본 이 늙은 보표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저 자신감들이 걱정스럽기만 했다.
개국한 지 얼마 안 된 창성표국이었다.
성 내에 여럿 자리한 타 표국들에 비해 아직 열세인 게 당연하기도 했다.
그래서 국주는 표국을 빠르게 키우고자 무리한 표행을 거듭했다. 바로 지금처럼.
어떻게든 시간을 단축하려고 산적들이 빈번하게 출몰한다는 ‘지름길’만 골라 가지를 않나,
요즘은 다른 표국들도 잘 하지 않는 ‘표행중’ 의식을 다소 과장되게 치르지를 않나.
늙은 자신을 제 값에 받아준 감사함에 굳이 따르고는 있었지만, 불안한 마음이 항상 그를 흔들리게 만들고 있었다.
“휴우…….”
한숨을 푹푹 내쉬던 늙은 보표는 고개를 젓다가 바로 옆에서 신나게 철편들을 흔들어대는 젊은 보표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들떴는지 어깨춤까지 추어대는 이 젊은 보표는 표행이 있기 하루 전에 표국에 고용된 자였다.
‘보표 일이 처음이라고 했지, 아마?’
저렇게 들뜬 모양새라니.
젊은 혈기에 아직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보표로서의 삶이 얼마나 고된 줄도 잘 모르니 저러는 것일 게다.
그때였다.
떠들썩한 쇳소리와 힘찬 구령소리를 압도하는 커다란 사자후가 산길을 뒤흔들었다.
“멈추어라!”
뚝.
거짓말처럼 정적이 찾아왔다.
쟁자수들 중에 일부는 어지러운지 살짝 몸이 비틀거렸다.
강한 내공이 실린 사자후.
이 산길에서 저런 대단한 시위를 할 수 있는 존재라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마왕채의 채주 왕태산.
늙은 보표가 정말 바라지 않았던 인물이 직접 행차한 것이었다.
이 표행을 이끄는 표두에게 여러 차례 말했었다.
산을 돌아가거나 아니면 조용히 지나가자고.
하지만 표국주의 큰아들이기도 한 표두는 국주이자 아비의 명을 거스를 수 없다며 그의 의견을 묵살했다.
빠른 표물 운송은 표국의 신뢰를 키울 것이며, 표행을 알리는 시끄러운 의식은 만방에 창성표국을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국주의 생각이었으니까.
“감히 마왕채의 영역에서 난장을 벌이다니.”
쩌렁쩌렁한 음성과 함께 박도를 든 털북숭이 거한이 나타났다.
누가 봐도 ‘아! 산적 맞네.’ 할 정도로 전형적인 산적의 모습으로 등장한 거한.
늙은 보표는 그를 보며 몸을 잘게 떨었다.
예전에 그가 속했던 표행을 급습해 열에 아홉을 죽이고 표물까지 강탈해간 자.
왕태산의 우락부락한 외양은 당시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죽고 싶은 게로구나, 하하하핫!”
왕태산의 뒤로 삼십에 달하는 산도적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순 멍하니 긴장감에 휩싸였던 이들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표물을 중심으로 천천히 모여들었다.
신생 표국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맹탕들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조무래기들 같으니라고. 이 영웅님의 위용을 접하고 겁에 질린 것이더냐? 하하하핫!”
호탕한 척 웃어대는 버릇까지 그대로였다.
늙은 보표는 절망감에 안색이 파리해졌다.
“영웅께서 그 유명한 마왕채주 왕태산, 왕 대협이십니까?”
표두가 슬쩍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취했다.
표행을 이끄는 자가 산적에게 포권을?
“그렇다. 본 채주가 바로 그 유명한 마왕채주 왕태산이니라!”
“그간 왕 대협의 위명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실제로 보니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호오, 감히 본 채주에게 아첨을 하다니. 모가지가 비틀려봐야 주둥이를 잘못 놀렸음을 깨달을 놈이로구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모두 진심에서 드리는 말씀이오니 노여움을 거두시길.”
표두의 행동은 이상하리만치 침착했다. 게다가 약간의 비굴함마저 내비치지를 않는가.
“저희는 창성표국이라는 자그마한 표국에서 나왔습니다. 혹 들어는 보셨는지요?”
“본 채주가 표국 따위의 이름에 신경이라도 쓸 것 같으냐. 하하하하!”
몇 마디 말이 더 오갔다.
“안 그래도 이 산의 주인이신 왕 대협과 마왕채 영웅분들을 뵙기를 고대하였는데,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표두의 눈빛이 그윽하게 변했다.
“가져 오게.”
표두가 뒤쪽으로 손짓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쟁자수 한 명이 그에게 달려왔다.
“왕태산 대협께서는 한 번 친분을 맺은 이들에게는 한없는 은혜를 베푼다고 들었습니다.”
표두는 등짐을 받아들자마자 살짝 힘을 주어 등짐을 흔들었다.
찰랑.
왕태산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재물을 지극히 밝히는 그인지라 등짐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왕태산은 곧바로 수하를 시켜 표두에게서 등짐을 빼앗듯 가져왔다.
그리고 그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늙은 보표는 그제야 국주의 의도를 깨달았다.
국주는 결코 단순한 위인이 아니었다. 애써 산의 주인들을 시끄러운 표행으로 자극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일부러 위험한 길만 골라 다니도록 해서 흑도 무리들과 접촉할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적당히 상대의 체면을 세워줌과 동시에 상당한 재물을 바쳐 ‘인연’을 쌓는 것.
즉, 이후의 통행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 앞으로 잘해보자는 의미의 투자에 다름이 아니었다.
사실 뭐, 어쩔 수 없는 신생 표국의 비애랄까.
대부분의 신생 표국들은 힘을 갖출 때까지는 이런 식으로 도적들과 관계를 맺으며 큰 피해를 방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상대가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냐가 문제였지만.
터벅, 터벅.
왕태산이 몸소 앞으로 걸어 나왔다.
표두는 여전히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한 방울의 땀이 가식적인 웃음 뒤에 감춰둔 공포심을 대변해주었다.
“창성표국이라고 했지?”
“그, 그렇습니다, 대협.”
표두는 막상 바로 코앞에서 왕태산을 대하자 입술이 떨려 말을 더듬었다.
그가 인연 맺기를 거부하고 저 무식한 박도를 휘두른다면……. 찔끔 오줌이 나왔다.
“이처럼 본 채주를 우러러보는 이들을 내 어찌 외면하리오. 하하하핫!”
제안은 통했고 도박은 성공했다.
표두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려는 몸을 간신히 수습하고는 꿀꺽 침을 삼켰다.
“앞으로는 이쪽으로 표행 나올 일이 있으면 너희들의 표기를 더욱 크게 흔들어도 좋다. 혹여나 위해를 가하려는 애송이들이 있다면 본 채주의 이름을 팔아도 좋고.”
“가, 감읍 드립니다, 대협.”
보표들과 쟁자수들 또한 막대한 긴장감을 순간 떨쳐내고 가슴을 쓸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맺혔던 눈물까지 떨어뜨리며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어쨌거나 살았지 않은가.
“크하하핫! 아우라고 불러도 되겠는가?”
“제가 어찌 감히…….”
순식간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마왕채의 산적들도 창성표국의 보표와 쟁사수들도 웃음꽃을 피웠다.
그런데…….
턱. 턱. 턱. 턱.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앞서 나서는 이가 있었다.
늙은 보표는 그가 조금 전까지 자신의 옆에서 따르던 애송이 보표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턱. 턱. 턱. 턱.
거침없는 직진. 젊은 보표는 무표정한 얼굴로 왕태산과 표두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왕태산이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뭐지? 또 뭘 주려고? 하는 표정으로.
그리고 왕태산의 눈치를 살피던 표두도 뒤를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는……?”
표두가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그를 스치며 쑤아악~! 지나갔다.
펄럭.
젊은 보표의 잿빛 피풍의가 크게 들썩였다.
핏.
그 다음으로 뻘건 액체 한 방울이 튀었다.
추우우우.
마지막으로 서서히 내려앉는 피풍의.
비스듬하게 후방으로 쭉 뻗은 손. 그리고 그 손에 들린, 면이 좁고 기다란 곡도(曲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자세였다.
치잇.
도첨에 잠시 머물렀던 핏방울이 증발해 사라졌다.
“어……?”
왕태산은 방금 벌어진 사태에 의문을 표했다.
“어?”
표두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물음을 던졌다.
“어?”
늙은 보표도.
“어?”
왕태산의 수하들도.
“어?”
표행에서 가장 어렸던 막내 쟁자수까지.
툭. 투툭.
왕태산의 하의 가운데가 갈라졌다.
투투툭.
다음으로 상의 앞섶이 끊어지며 털이 숭숭한 뱃살이 드러났다.
찌이이익.
느닷없이 왕태산의 국부에서부터 뻘건 줄이 위로 그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빠르게 왕태산의 배와 가슴, 턱과 코를 지나 정수리에 이르렀다.
파아아아!
막혔던 둑이 터지듯 새빨간 피분수가 허공에 혈점을 날렸다.
삐질.
왕태산의 양쪽 눈알이 각기 반대로 돌아갔다.
영락없는 즉사였다.
털썩.
그의 커다란 몸이 반으로 갈라질 듯 벌어지더니 이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 순간,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쓰읍.”
침묵을 부순 이는 바로 ‘애송이’인 줄만 알았던 젊은 보표였다.
휙휙~ 철컥.
젊은 보표는 자세를 거두고 곡도를 두어 번 돌린 뒤 도초(刀鞘)에 밀어 넣었다.
“출발하시죠. 마두를 해치웠으니 나머지 것들은 함부로 덤비지 못할 것입니다.”
맑고 싱그러운 음성이었다. 방금 전 단칼에 사람을 거의 양분해버린 사람의 그것 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