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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혐오 3화

#1 (3)





“아버지가 원하는 거니까 내 생각이야 어떻든 하게 되겠지.”

게다가 만나 본바, 조현구 의원도 배성과 썩 다른 스타일일 것 같지도 않다. 현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야, 그런 게 어딨냐? 아무리 그래도 본인이 싫으면 안 하는 거지. 너한테 총이라도 들이대고 결혼식장에 들여보내겠냐?”

배성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주헌은 못 이기는 척 잠깐이나마 진지하게 생각을 해 봤다. 

결혼이라.

“안 하면 귀찮은 일들 중에 원인이 결혼인 건 덜어 낼 수 있어서 좋긴 하겠네.”

하지만 결혼을 하든 안 하든 귀찮은 일은 인생의 모든 방향에서 항상 몰려오고 있다. 거기에 새로운 원인 요소가 몇 가지 늘어난다 한들, 뭐가 그렇게 달라질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번 결혼을 어떻게든 막아 낸다고 해도 배성은 다시 이런 식의 기회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될 테고, 그것도 막아 내면 그다음이, 그것도 막아 내면 또 그다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과연 이 결혼을 해서 얻게 되는 귀찮음보다 덜할까. 주헌은 좀처럼 고정되지 않는 저울의 눈금을 신중하게 읽어 보려고 아직도 애쓰고 있었다.

현아가 주헌의 등짝을 짝, 소리 나게 쳤다.

“이주헌이 아무튼 헛똑똑이라서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니까. 정 헷갈리면 날 한번 보여 주든가. 내가 남의 남자 관상 하나는 아주 기가 막히게 보거든.”

상대방이 어떤 놈인지가 제일 중요하지. 

현아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 생각보다 오래 뇌리에 머물렀다. 주헌은 미심쩍은 마음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이 결혼은 껍데기만 있으면 되지 알맹이는 필요가 없다. 예복을 입고 식장에 들어가 사진이나 몇 장 찍힐 알파와 오메가. 혼인 신고서에 도장 찍고 관청에 제출할 호적상의 그 사람들. 이배성의 자식과 조현구의 자식일 것, 그리고 생존해 있을 것 말고는 중요한 일이랄 게 딱히 없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인지, 그날 오후 정오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았을 때 주헌은 당황하고 말았다.

― 시간 있죠? 좀 만납시다.

“지금요?”

이 경우 없고 짜증 나는 화법은 어쩐지 익숙하다. 주헌은 흘긋 오늘의 일정표를 보았다. 다른 곳은 모조리 빼곡한 일정표가 어찌 된 일인지, 오늘 오후 일정만 구멍을 뚫어 놓은 것처럼 뻥 비어 있었다.

“시간이 되긴 하네요. 저한테 용건이 있으시면 이쪽으로 오세요. 회의실 잡아 놓겠습니다.”

― 아뇨, 그쪽 건물은 말고요. 내가 도착해서 연락할 테니까 내 차로 내려와요. 무슨 소문 나려고 남들 보는 데서 변호사를 만나고 다닙니까?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연예인이었다. 좋을 대로 오라 가라 하는 건 맘에 들지 않지만, 이해 못 할 사정은 아니다. 게다가 상처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을 테니까. 우선 맞춰 주기로 한 주헌은 정오의 연락을 기다렸다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평소에는 주차장에서 본 적 없었던 흰색 푸조가 서 있었다.

주헌이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정오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할 거예요? 이 결혼.”

주헌은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지나가는 투로 물은 것치고, 조정오는 주헌을 시선으로 뚫어 버리기라도 할 듯이 뜨겁게 쳐다보고 있었다. 토요일보다는 조금 작고 얇은 걸로 바꿔 붙이긴 했지만 여전히 입가와 눈가에 덕지덕지한 반창고. 그래도 부기가 좀 가라앉으니 훨씬 날렵한 인상으로 돌아왔다.

“내가 하자고 한 결혼도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안 하려면 우리가 안 한다고 해야죠.”

우리? 주헌은 자세를 편하게 고쳐 앉으며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나랑 그쪽이 안 한다고 해서 안 할 수 있는 결혼입니까? 그쪽은 그쪽 부모님 이길 자신 있어요?”

“아니 그럼 싸워 이기질 못 한다고 결혼을 해요? 떠밀려서 할 게 따로 있지. 목숨이라도 걸어야죠. 죽겠다는데 설마 결혼을 시키겠어요?”

“담배 있어요?”

“뭐요?”

“담배 있냐고요.”

정오는 좀 당황한 것 같았지만 순순히 글로브 박스에서 담배를 꺼내 주었다. 불을 빌려 붙인 주헌은 조수석 창문을 살짝 내리고 담배를 태웠다. 연기를 길게 뱉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목숨이라도 걸어야 한다, 라. 확실히 이 일로 배성의 뜻을 거스르려면 그 정도 각오는 있어야 될 것 같긴 하다.

“오해 말고 들으세요. 저도 별로 이 결혼을 하고 싶은 건 아닌데, 목숨은 좀 아깝거든요. 뭘 그렇게까지 의미 부여를 해요? 그냥 형식만 맞춰 드리면 되는 건데. 누가 연애를 하랍니까, 섹스를 하랍니까. 어차피 양가에서 필요한 물물 교환 끝나고 나면 피차 사돈 관계 유지하고 싶어 할 스타일들 아니잖아요. 길면 한 2년 가려나. 혼인 신고서 내고 좀 지내다가 이혼 서류 내는 거, 이렇게 투쟁하는 것보단 덜 귀찮지 않겠어요?”

입을 딱 벌린 채 듣고 있던 정오는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얼굴에 전부 드러나는 스타일인 모양이다. 머릿속에서 회로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한참 만에야 반박의 실마리를 찾았는지, 번뜩 눈을 빛내며 한다는 소리라는 게.

“같이 살다 보면 뭐, 연애 안 하고 섹스 안 할 거 같아요? 난 알파고 그쪽은 오메가인데. 어떻게 실수로라도 사고 나는 일 한 번 없겠냐고요.”

“그럼 하면 되죠.”

“그러…… 예?”

“하면 되죠.”

둘은 서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시선을 교환했다. 주헌은 두 손을 양쪽으로 펼치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저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데.”

“이건 그런 문제가―”

“나랑 연애하고 섹스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목숨 걸고 저항해야겠다는 말이에요?”

“아니…… 이거 보쇼.”

정오는 답답한 듯 운전석 목 받침에 뒤통수를 쿵 하고 갖다 박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딱히 달변가 스타일은 아닌 모양이다.

“그쪽이 어때서 하는 얘기는 아니에요. 분하지도 않아요? 집에서 정해 준 사람이랑 사랑하는 거.”

아주 낭만파가 따로 없어. 주헌은 거의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빈정거릴 뻔했다.

“안 그런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 것 같아요? 그게 정 분하면 안 하면 되는 거죠. 면식도 없던 사람이랑 갑자기 같이 살게 된다고 꼭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원수가 될 확률이 높으면 높았지. 만나던 사람 있으면 계속 만나시고, 딴 사람 만나고 싶으면 맘껏 만나세요. 말했잖아요. 이건 그냥 형식만 있으면 되는 거라니까.”

정오는 이제 말싸움으로 이기는 건 포기한 것 같았다. 주헌을 돌아보는 눈에 환멸의 빛이 일렁거렸다.

“이제 보니 쿨병 환자셨네.”

“철이 들었다고 해 줘요.”

차에서 내려 다시 사무실로 올라가기 직전에, 주헌은 열린 창문 틈으로 마지막 인사를 던져 넣었다.

“참,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굳이 발버둥 치는 게 귀찮아서 가만히 있을 뿐이지 나라고 꼭 이 결혼이 좋아서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혹시 저항을 계속하실 생각이라면, 제가 응원하고 있다는 건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파이팅!”

정오의 얼빠진 시선을 뒤로 하고 올라가는데 등 뒤에서 항의하는 것처럼 짧은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주헌은 못 들은 척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사무실이 있는 층의 버튼을 눌렀다. 부드러운 고양감과 함께 계기판의 숫자가 천천히 높아진다.

사랑마저 집에서 골라 준 사람과 해야 하는 기분쯤은, 당연히 진저리가 나도록 잘 안다. 누군들 그 분함을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나이브해 가지고…….’

주헌은 그런 단순한 인간이 싫었다. 금방 화내고 억울해하고, 세상 부조리한 일은 자기에게만 일어나는 양.

사무실로 돌아오자니, 대표 변호사인 민희가 막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려 방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이변, 명인유통 사건 서면은 다 돼 가나? 기일 언제였지?”

“다음 주 화요일요. 그때 말씀하신 방향으로 거의 다 수정했는데, 제가 한 번 더 보고 오늘 퇴근 전에 보여 드릴게요.”

“그래그래. 그거만 쳐 내면 이 변이 들고 있는 큰 사건은 거의 땡이지?”

“왜 이러세요. 또 선배만 파트너인 줄 아시고. 이럴 때 보면 꼭 교수님 같다니까요.”

“억울하면 너도 파트너 시켜 줄게. 진짜라니까?”

“아, 안 된다고요. 전 영업 못해요. 아직 재판 나가는 것도 벌벌 떨리는데요.”

법률 사무소 신록은 명운 대학교 출신의 선후배 변호사 다섯 명이 적을 두고 있는 소규모의 부띠끄 펌으로, 지금은 파트너 변호사 셋 아래에 현아와 주헌 두 사람의 어쏘 변호사(assosiate lawyer: 소속 변호사)가 일하고 있다. 파트너인 세 사람의 동기들이 의기투합하여 개업한 사무실에 작년부터 후배 둘이 합류하여 지금의 구성이 되었기 때문에, 파트너라고 해도 두 어쏘에 비해 고작 2, 3년쯤 학번이 앞서 있는 정도다.

세 파트너 중에는 민희가 최고 상사다. 한 명은 아예 학번이 하나 낮아서 제치고, 남은 두 명이 가위바위보를 한 결과 민희가 승리함으로써 왕대장 대표 변호사라는 비공식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가장 많은 고객을 들고 있는 사람이 민희이기 때문에, 실없이 후배를 놀릴 목적으로 선배 라인에서 지어낸 설화일 가능성이 높은 얘기다.

주헌은 신록에 꽤 애착이 있었다. 회사의 공기와 지금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합이 좋았다. 민희가 농담 섞어 예고하듯 몇 년 더 경력이 쌓이고 자리가 잡히면 정말 파트너로 전환될 것 같긴 하지만, 서초동의 부띠끄 펌이 그때까지 버티려면 모든 멤버들이 전력을 다해 일해 줘야 한다. 아직 어쏘 변호사인 두 사람에게도 그 정도의 의식은 있었다.

그래서 주헌은 어지간하면 근무 시간에도 딴짓을 하지 않지만, 오늘은 잠깐 틈이 난 사이 인터넷에서 배우 조정오에 관한 정보를 찾아 돌아다녔다. 이쯤이 되어서야 드디어 주헌도 궁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여태 본 거라고는 얻어맞아 얼룩덜룩한 얼굴뿐인데, 포털 사이트 검색 결과 첫 화면에 뜬 프로필 사진은 다른 사람처럼 훤칠하다. 얼빵하게 웃고 있는 탓인지, 이렇게 보자니 의외로 상당한 동안이다. 나이는 주헌과 동갑인 스물일곱. 운동선수 같은 키와 체중. 알아주는 대학의 연극 영화과 졸업. 프로필만 봐도 인기가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