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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혐오 4화

#1 (4)





이런 쪽으로 아는 것 없이 자연인 조정오를 먼저 만나 버린 주헌에게는 좀 어색했지만, 그는 꽤 잘나가는 배우인 모양이다. 고등학생 시절에 하이틴 드라마로 데뷔한 이후 여러 편의 작품을 거치면서, 드라마나 본인의 개인적 성취에서 대체로 좋은 평판을 꾸준하게 받아 왔다고 한다.

특히 재작년 첫 주연작이었던 <그대로 멈춰라>가 대박을 터뜨린 뒤로는 지금까지 주가가 계속 상한가를 치는 중이라고. 여기저기 부르는 곳도 많고 광고에 뭐에 한창 들어오는 물 위에서 열심히 노를 젓고 있단다. 이렇게 작정하고 찾아다니다 보니, 구체적으로 기억을 못 해서 그렇지 어디서 본 듯한 광고 이미지가 종종 보였다.

눈에 띄는 악플이나 비난들은 대충 결이 비슷한 포인트를 문제 삼았다. 예의가 없다. 무식하다. 아무 생각이 없다. 말 함부로 한다. 촬영장에서 감독이랑 마찰이 있었다는 기사도 있고, 방송이나 인터뷰에서 한 말실수를 지적하는 블로그와 SNS 글은 여러 건.

다만 지금 그런 흠집에 발목을 잡히기엔 너무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사 댓글난마다 팬들의 화력도 대단하고,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비난조의 글 자체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비난이 적어서가 아니라, 호의적인 글이 범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최근에 올라온 기사가 눈에 띄었다. 정오가 현 소속사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새 회사와 계약하기 위해 물밑 작업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넷 언론 중에서도 찌라시 위주의 매체고 근거라곤 관계자 카더라뿐이어서 아직 주목을 받고 있는 기사는 아니다. 하지만 주헌에게는 짚이는 구석이 있는 얘기였다. 어쩌면 정오가 배성의 회사로 옮겨 오는 것도 이 ‘거래’에 포함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본인은 알고 있는 건가? 주헌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하니 소속사를 옮기는 얘긴데 본인이 모른대서야 말이 안 되지만, 지금 주헌과 정오는 본인들 모르게 진행되고 있는 결혼에 휘말려 있는 처지다. 이제 와 또 무슨 비밀이 드러난대도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

실제로 회사와의 계약이 좌우되고 있는 수준이라면 당사자에게는 사소한 일이 아니다. 가뜩이나 날벼락 같은 결혼 얘기로 심란할 판에, 제법 스트레스를 받게 될지도 몰랐다. 반쯤 강 건너 불구경하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만일 정오가 끝내 저항에 실패하게 되면 이 유명 연예인과 자신이 결혼해야 한다는 데에 뒤늦게 생각이 미쳤다. 

좀 부담스럽긴 하네……. 주헌은 신경질적으로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2 (1)





주헌의 중얼거림은 그만이 아니라 정오의 심정까지 정확하게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둘의 첫 만남이자 상견례라는 황당한 저녁 식사 자리가 있기 열흘 전, 집으로 불려 온 정오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일요일 일정에 관한 중대 발표를 전달받았다.

“내가 얼마 전에 네 선자리 알아보고 있다고 하지 않았냐.”

“그랬어요?”

“다음 주 일요일에 그쪽이랑 저녁 먹기로 했으니 시간 비워 둬라. 크레스트 엔터 대표 막내아들이 너랑 동갑인 오메가인데, 마침 그쪽도 지금 결혼 생각 중인가 보더라.”

“네? 싫은데요.”

“토 달지 말고 하라는 대로 해, 이 녀석아. 애비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아부지가 맘대로 약속한 거니까 먹칠은 아부지가 셀프로 하는 거죠. 난 안 가요. 다른 약속도 있고.”

“이놈 새끼가? 나도 시간을 내는데 어디서 지가 바쁜 척이야? 잔말 말고 다른 일정은 취소해라.”

이쯤 되자 정오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자니, 하나같이 정오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묵묵히 자기 밥그릇만 내려다보고 있다.

“아부지가 왜 시간을 빼요? 맞선이라면서.”

“피차 알 만한 집안끼리 구구절절 시간 끌 거 뭐 있냐. 양가 부모 형제 대동하고 같이 보기로 했다.”

씹던 생선을 거의 흘릴 뻔했다. 급히 물을 들이켜 함께 목으로 넘기고, 정오는 식탁 위로 꽥 고함을 질렀다.

“노망났냐?”

같은 피라고 부자는 나란히 다혈질이었다. 그길로 흠씬 두들겨 맞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정오는 굴하지 않고 외쳤다.

“아 아무튼 난 안 간다고요!”

이렇게 갑자기 ‘결혼 당하는’ 미래 따위는 정오의 머릿속에 전혀 없었다. 사실 몇 살쯤 어떻게 결혼하겠다든가 하는 식의 구체적인 생각도 없었고 막연한 기대 정도나 가지고 사는 편이었지만, 이런 결혼은 그 막연한 기대에서조차 한참 벗어나 있었다. 



확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러트 사이클이 널을 뛰었다. 이틀 뒤에 정오는 호텔 방을 잡고 효빈을 불렀다.

효빈은 최근에 정오가 사이클 때마다 만나서 러트를 해결하고 있는 파트너였다. 클럽에서 만나 같이 밤을 보낸 게 첫 시작이었는데, 마침 효빈이 임신 확률이 매우 낮은 열성 오메가인 데다 상성이 잘 맞아 벌써 너덧 번의 주기를 함께해 왔다. 연애 중이 아닐 땐 적당한 사람을 찾아 한 번 하고 잊어버리는 게 보통이었던 정오에게, 이렇게 여러 번을 만나게 되는 상대는 좀처럼 흔하지 않았다.

몸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양가 식구들을 모두 대동한 맞선이라는 무시무시한 얘기를 전해 들은 효빈은 곧장 흥미를 보였다.

“뭐냐 그게? 맞선도 아니고 상견례도 아니고 미쳤네. 맞견례 뭐 그렇게 불러야 되나? 상대가 누군데?”

“크레스트? 거기 대표 막내아들이라던데.”

크레스트는 업계에서 이름이 있는 회사라 정오도 기억하고 있었다. 효빈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크레스트 대표 완전 꼴통 새끼라고 유명한데 그 집이랑? 거기서 쓰는 경호 업체가 완전 건달 소굴이라 맨날 문제 터지는데 그게 대표 인맥이라 자르지도 못 한다고 소문 개판이잖아.”

옆에서 누가 궁금해하자 덩달아 바짝 호기심이 솟은 정오는 당장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하지만 크레스트 대표 이배성이 연예인도 아닐뿐더러, 그 막내아들은 더더욱 평범한 일반인에 가까웠다. 포털 사이트 검색만으로는 좀처럼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크레스트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배성 막내아들’ ‘크레스트 대표 아들’ ‘이배성 삼남’ ‘크레스트 엔터 삼남’ ‘이배성 가족관계’ 등등 구글링으로 나오는 게시물을 조합해 본 결과, 간신히 이주헌이라는 이름 석 자와 그가 변호사라는 사실을 건질 수 있었다. ‘이주헌 변호사’를 검색하자 훨씬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정오와 효빈은 머리를 맞대고 휴대 전화 화면에 뜬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개깐깐하게 생겼네. 그것이 주헌에 대한 정오의 첫인상이었다. 

효빈이 정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잘생겼는데?”

회사 홈페이지에 올라가 있는 프로필 사진이니까 스타일링도 촬영도 신경 써서 했을 것이다. 그걸 감안해도 미남이긴 했지만, 친절함마저 계산된 범위 안에서 베풀 것처럼 빈틈없는 이목구비가 정오의 심기를 거슬렀다. 잘생김을 추구했다기보단, 못생김을 용납하지 않은 결과로 빚어진 얼굴 같다고 할까.

이력도 그 인상에 충실했다. 내로라하는 명문대 출신으로 학부 재학 중에 사법 고시를 합격했고, 사법 연수원을 거의 마지막 기수로 수료……. 합격 정원이 100명으로 축소된 끝물의 사법 고시에 패스하는 것이 얼마나 변태같이 어려운 일인지 정오는 몰랐지만, 이제까지의 커리어에 거침이 없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정오는 다시 스크롤을 올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주헌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피부 위에 먼지가 앉았다가도 미끄러질 것만 같은 말끔함이다.

“크레스트 대표는 드럽게 생겼던데 얜 애비랑 인상이 완전 다르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잘생겼겠다, 돈 잘 벌겠다. 나이도 너랑 동갑이라 그랬다며.”

정오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걸렸다. 하나는, 조건이 괜찮아 보여도 실제로 만나 보기 전엔 알 수 없다는 것. 정오는 경험상 난놈들 대부분이 난 만큼 싸가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반반한 얼굴밖에 없으니 꼴값밖에 하지 않지만, 이쪽은 얼굴도 반반한 데다 공부까지 잘했으니 정오의 이론상 자신보다 두 배는 싸가지 없는 인간일 공산이 컸다.

두 번째는, 조건이 괜찮다는 그 자체다. ‘부친이 물어 온 결혼 상대’란 자고로 부친과 한패이자 한통속인 악의 무리요, 압제자의 동맹군 같은 존재다. 그런 자가 결혼 상대로 괜찮아 보여서 어쩌자는 건가.

“어차피 결혼은 안 할 거야.”

“왜? 배 나온 아저씨도 아니고, 나쁠 거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아부지가 정해 준 인간이랑 결혼을 하냐?”

“부모가 정해 준 사람이랑 결혼하면 어때서.”

정오는 팔을 세워 머리를 괴면서 효빈을 향해 돌아누웠다.

“생각을 해 봐. 결혼하면 어쨌든 한집에 살 거 아냐. 아침저녁으로 얼굴 보겠지. 어쩌다 밥도 같이 먹겠지. 그러다 정이 들겠지?”

“그렇겠지?”

“그럼 걔나 나나 사이클이 있는데 꼴리면 떡도 치겠지? 그러다 진짜로 마음이 생기면 서로 사랑도 하고, 애가 생기면 애도 낳겠지?”

“그렇겠지?”

정오는 그것 보라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야.”

“……대체 왜?”

“말했잖아, 아부지가 정해 준 인간이랑 그러기 싫다고.”

효빈은 기가 막혔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이상의 해피 엔딩이 없을 텐데, 최상의 시나리오를 그려 놓고는 그래서 안 된다니. 이게 무슨 되지도 않는 똥고집인가 싶었지만, 담배에 불을 붙이는 정오의 옆얼굴은 의외로 진지했다.

“결혼해서 만드는 가족은 내 거잖아. 결혼 정도는 내가 골라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어.”

사치스러운 구석이 없잖아 있는 희망 사항이라고, 효빈은 생각했다. 

상황을 막론하고 사랑만으로 결혼에 골인 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현실의 문턱에서 좌절되는 결혼이야 부지기수고, 애초에 연애를 할 때부터 그 문턱의 높이를 가늠하면서 시작하기도 하니까. 하긴, 집에 돈이 많으면 이 정도는 사치도 아닌가? 효빈은 가볍게 생각을 끊고 넘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