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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또 다른 위기? 기회!(1)
(1)
싸움이 벌어질 것 같다는 담천우의 장담은 곧 사실로 밝혀졌다.
“표행은 제자리에서 멈춰라. 이 어르신께서 기다리신지 어언 삼천갑자시다.”
그로부터 딱 한 식경 뒤의 일이었다.
누가 봐도 녹림이라고 할 만한 복장을 갖춘 이들이 우후죽순 길목을 막아섰다.
담천우는 혀를 찼다.
전생에서도 몇 번 맞닥뜨린 적이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영 변한 게 없었다.
생전 다듬지 않은 듯한 거친 수염과 짐승 가죽을 얼기설기 엮은 옷은 십여 년 전과 비교해도 똑같았다.
“우린 산동의 송가상단이오. 녹림영웅께서 길을 가로막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대표로 나선 것은 마전이었다.
본래는 책임자인 송린이 나서야 했지만, 모습을 드러냈다가 놈들이 미색에 홀려 괜한 탐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주변의 만류에 마전이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나타난 산적들을 보고 담천우는 이상한 점 몇 가지를 발견했다.
우선은 녹림들의 분위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정도 호송 인원이면 경험 많은 산적이라도 조금은 긴장한 기색을 보이기 마련인데, 어딜 봐도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먹이를 가지고 노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통행세는 드리고 갈 요량이 있소이다. 부디 길을 터주시오.”
마전의 발언에 드디어 산적 쪽에서도 누군가가 나섰다. 꽤나 영활하게 눈알을 굴리는 왜소한 체구의 사내였는데, 그런 걸 보면 나름 산채에서는 머리를 쓰는 위치인 듯했다.
“산채에 기근이 들어 통행세만 가지고는 아니 될 것 같소. 송가상단은 우리와 거래했던 표국이 아니기도 하고…….”
“그럼 산채의 영웅들께서는 얼마를 원하시는 게요?”
“전부를 주시는 게 어떻겠소? 기왕이면 저기 이쁜이도 놓고 가시고.”
그의 무례한 발언에 발끈한 무사들이 검병으로 손을 가져갔다.
물론 여기서 칼부림을 하면 하책(下策)이다. 녹림에서 이정도 희롱이야 비일비재하고, 더욱이 상단을 운영하자면 항상 겪을 일이었다.
실제로 송린은 내심이야 어떻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죽여 버릴 테다.]
물론 충현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좀 걸리는 게 있는데.’
녹림이야 이쪽이 대형 표국도 아니고 무공이 강해보이는 놈도 없는 것 같으니, 이미 제단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전부 먹자, 뭐 이런.
그런데 담천우가 이상하다고 느낀 부분은 녹림 쪽이 아니었다.
‘저놈들, 설마…….’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산적들에게 야유를 날리는 무사들의 말끝에는 힘이 서려 있었고, 행수들의 안색은 더없이 밝았다.
그리고 마전은 방심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무기력했다. 마치 자신쯤은 어떻게 해도 된다는 식으로.
‘하아, 어이가 없네. 실력도 없는 것들이 벌써부터 기대려고 해?’
그런데 그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건, 현재 담천우는 쟁자수이며, 그가 지켜야 할 사람은 송린 하나뿐이라는 것이었다.
“산채 영웅들께서 그리 나오신다면 우리도 결사항쟁을 할 수밖에 없소. 부디 칼을 뽑지 말고 좋게 넘어가시는 것이 어떻겠소?”
“흥! 칼을 뽑으면 우리를 감당할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는군.”
이미 난전만 안 벌어졌지, 상황은 좋게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미안한데요, 마전 조장.”
“네, 하명하십시오.”
“……하명이라뇨?”
담천우는 표정이 묘해졌다.
마전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절대적 신뢰.
불 속으로 뛰어들라고 하면 곧장 뛰어들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나서지 못할 것 같네요.”
하늘이 무너진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게 맞을 것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아직 부상에서 회복이 덜 되어서요. 삼 일 전에 힘을 너무 많이 썼어요.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힘이 안 돌아오네요.”
느슨해졌던 실이 팽팽해지는 느낌.
마전의 무기력했던 눈에 번쩍하고 빛이 들어왔다.
“지,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네. 이번에는 마 조장님께 부탁드릴게요.”
“……이, 이건 실로 예상치 못한 큰일입니다.”
목소리를 한껏 낮춘 마전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다급함이 드러나 있었다. 그게 좀 과해서 담천우로서는 미안해질 정도였다
담천우는 마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뒤로 물러났다.
“제가 뒤에서 응원할게요.”
마전으로부터 파급된 긴장감은 전 무사에게 순식간에 전달되었다.
“실로 대단한 자신감이군. 내가 웬만한 상단과 표국은 알고 있는데, 송가상단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들은 건너오기에는 너무 큰 강을 건너버린 셈이 되어 버렸다.
산적 중에서도 제일 덩치가 큰 사내가 앞으로 나섰을 때.
“나, 용골채의 우협산이야.”
그리고 그가 정체를 밝히자마자 상단의 분위기는 엉망진창으로 바뀌었다.
* * *
“도, 도망가자!”
담천우는 귀를 의심했다.
‘이 정도도 이기지 못하는 놈들이었나.’ ‘진짜 판을 엎어버리고 다시 시작해야 하나.’
이런 만감이 마음속에서 교차했다.
그런데 말을 내뱉은 놈들을 확인하는 순간, 담천우의 얼굴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저 녀석들은……?’
토룡, 지룡이라는 흑사방의 조무래기들.
까마득히 잊고 있었네.
“성님, 저놈이 누군데 그러시오?”
“야, 너는 소문도 못 들어봤냐? 우협산은 척혈광부라고 불리는데, 살인광으로 강호에서는 아주 유명한 놈이야. 그 뿐인 줄 알아? 흐미… 저어기 저놈은 분명히 의동생인 소장충일 거다.”
“힉! 그 인간백정 말이우? 심심풀이로 사람을 죽인다는?”
“그래. 하필 걸려도 이런 놈들한테 걸려서는……. 어차피 튀려고 했던 거 아니냐. 지금이라도 도망가자.”
뭐 도망가도 별로 상관은 없다만. 담천우는 그리 하도록 놔두기가 싫었다.
그는 당장에 탄지로 그들의 마혈부터 점했다.
파바밧.
“컥! 왜 몸이 안 움직이지…….”
“혀, 형님. 몸이 이상하우. 움직이지를…….”
……시끄러우니까, 아혈까지 봉해놓자.
“읍읍.”
별안간 당한 봉변에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그들을 향해 담천우는 뒷짐을 지고 한량처럼 다가갔다.
“어딜 가시게요?”
“읍읍읍…….”
“그럼 곤란한데. 저는 배신하는 걸 정말 싫어해요.”
담천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남자의 얼굴은 흑빛으로 변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얼굴에는 땀이 한 가득이었다.
“흐음, 이거 어쩐다. 저번에 미혼약 탄 것도 봐드렸는데.”
부릅.
눈이 커지다 못해 찢어질까 걱정스러운 그 모습에, 담천우는 생글생글 웃어 보이며 그들의 옷에 묻은 먼지를 세심히 털어주었다.
“설마 모르셨어요? 에이, 눈치 채셨을 줄 알았는데.”
“읍읍읍.”
말은 못하지만,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로 봐서는 뭘 말하는지는 알겠다.
“그래요. 참회하고 싶으시겠죠.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걸 하려고 해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담천우는 토룡과 지룡의 옷을 매만지는 척하며 혈자리를 성심성의껏 눌러주었다.
우드드득. 뭔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돌아가는 눈동자.
“으으으읍.”
“저번에는 못 배운 탓에 몰라서라고 이해했어요. 그러나 다음은 없어요. 뭐 못 알아들으시면 할 수 없구요. 만약 그리 되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두 번째로 넘어갈 거예요.”
지룡과 토룡은 그 다음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가 아주 애절했으니까.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저는 더 좋은 구경거리를 봐야 하거든요.”
더 좋은 구경거리란 바로 싸움구경이었다.
그런데 방해자가 있었다.
“현… 아니 천 대협. 그 말이 사실인가? 삼 일 전의 부상으로 나설 수 없다는 게?”
“소문이 빠르네요.”
송찬은 담천우의 날카로운 시선에 현제라는 말을 목구멍 안으로 꿀꺽 집어삼켰다.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기에, 담천우는 그가 붙든 손을 마치 들러붙은 먼지를 털어내듯 털어냈다.
하지만 송찬은 마치 진드기라도 된 것처럼 다시 들러붙었다.
“거짓말이지? 진짜 거짓말일 거야. 그렇지?”
“에이, 제가 제일 못하는 게 거짓말이에요.”
사실 담천우의 말은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삼 일 전에 부상을 당했으니까.
‘암기 만드느라 나뭇가지를 꺾으면서 나뭇가지가 손바닥에 살짝 박혔지.’
[내 몸은 외신삼문을 연마하여 금강불괴에 가깝다.]
응. 쓸모없는 방해자는 저리 꺼지시고.
“자네가 갑자기 이리 나오면 우리는 어떡하란 말인가. 이보게, 우리는 자네만 믿고 있었다고.”
“그게 무슨…….”
담천우는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거참, 무슨 병아리들 같네.’
자신을 바라보는 행수들의 표정이 마치 먹이를 바라는 병아리들 같았다.
“그만하세요!”
“사, 상단주님!”
“지금 부상 중이시라잖아요. 그리고 천 공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어요.”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야죠. 안 그래요?”
송린의 준엄한 일갈에 행수와 무사들은 만면에 부끄러운 빛을 띠었다.
“천 공자님은… 저희를 버리고 가셔도 되어요. 저번에 제가 드렸던 말, 아직도 유효하니까요. 이건 진심이어요.”
그녀의 말에 담천우는 무릎에서 절로 힘이 빠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한팔 거들겠다면서 자기 몸보다 큰 검을 쥔 채 낑낑대는 모습을 보고, 어찌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괜한 짓을 했네.’
“하아… 다시 말하지만, 오 년 동안은 여기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나서지 않으려는 건, 마전 조장이 충분히 감당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구요. 그리고 괜히 도와줬다가 의타심만 생길 것 같아 그러는 것이기도 하고요.”
“저, 정말이에요?”
“정말입니다. 조금 더 상단의 무사들을 믿으세요.”
“그렇지만 이번에는 숫자도 월등히 적은데다가, 우협산이란 자는 아주 흉폭하고 강하다고 하던데…….”
담천우가 그녀에게 환히 웃어 보이며 말했다.
“세상에는 기적이 참 많아요. 그중에는 간절히 바라면 갑자기 도움의 손길이 뻗쳐오기도 하고요.”
“조금 전에는… 남한테 기대지 않는 게 좋다고 하셨잖아요.”
“그거 하고는 달라요. 이번에는 자발적인 도움이거든요.”
담천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산적과 상단무사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풀이 무성하게 나있던 수림 쪽을 향해 돌멩이를 튕겼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 * *
오비이락(烏飛梨落).
정말이지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담천우의 손끝에서 돌멩이가 떨어지기 무섭게 희뿌연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냣!”
덕분에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던 장내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이십대 초반 정도의 남자. 그는 영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제검문!”
정체를 알아본 누군가의 외침.
제검문이라고 불린 남자의 얼굴이 설핏 일그러졌다.
“제검문이라면… 그 오군성 중에 하나인 대정협의 제검문 아닌가?”
알아보는 누군가의 발언에, 긴장으로 살짝 구부러져 있던 남자의 어깨가 바르게 펴지기 시작했다.
제검문도라는 남자는 누가 봐도 꽤나 영준했다,
머리에는 영웅건을 푹 눌러쓰고 있었는데, 그 중앙에는 크게 제(劑) 자가 박혀 있었다. 거기다 검미는 짙고 팔과 다리는 쭉쭉 뻗은 것이, 흔히 볼 수 없는 기남아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처음의 살짝 당황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더없이 평온하고도 느긋한 미소만이 입가에 보기 좋게 걸려 있었다.
“제검문의 종회외다.”
“종회라면 대정협의 수제자가 아닌가.”
주변의 반응은 더없이 호의적이었다.
담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면 꽤나 괜찮은 전개인 것 같았다.
풀숲에 쥐새끼가 있는 것 같아서 건드려 봤을 뿐인데, 낚아보니 생각지도 않게 월척이랄까.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이게 바로 하늘의 도움인가 봅니다. 보아하니 명문정파인 듯싶은데, 이런 일을 간과하지는 않을 테지요.”
송린의 물음에도 담천우는 일단 모르는 척 의뭉을 떨어댔다.
그러자 그녀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천 공자님, 혹시 종회 소협이 저기 있다는 걸 미리 아셨나요?”
“에이, 그럴 리가요. 저는 쟁자수에 불과한데요.”
“하지만 수상한데…….”
얼굴에 잔뜩 수상한데라고 써 붙인 듯한 송린이었지만, 담천우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기에는 상황이 빠르게 급변하고 있었다.
‘진짜 정파스러운 놈이다.’
저놈은 아까부터 풀숲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담천우가 가만 보니,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아마도 생각보다 산적의 전력이 강했기 때문이겠지. 즉, 저놈은 누가 죽어나가고 말고는 신경 쓰지 않을 놈이었다.
그래서 담천우가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도록 살짝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우협산의 얼굴에 슬쩍 분기가 스쳐 지나갔다.
“소정협. 얼굴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로군. 그런데 진짜 우리를 방해할 심산인가?”
“그렇소.”
“과연 제검문답게 호기로운 발언이시군. 목이 떨어져 나가도 그렇게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 물러난다면 제검문의 문도라고 할 수 없소.”
“흥! 소정협의 협이 대단하구만.”
“과찬이시오.”
사실 이정도만 되어도 우협산으로서는 상당히 배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검문이라는 큰 배경이 아니었다면 당장에 죽여 버릴 위인이 우협산이니까.
종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이제 한껏 존경의 염이 담겨 있었다.
정파의 미래라는 둥, 대협의 기질이 있다는 둥.
“흥! 정파의 미래기는 하지. 저런 놈들이 꼭 한 자리씩 해먹거든.”
그 안에 숨겨진 본질을 제대로 알고 있던 담천우만은 냉소를 지을 뿐이었다.
한편, 녹림도 쪽은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종회의 처리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모양.
드디어 중지가 하나로 모였는지, 우협산이 대표로 종회에게 말을 건넸다.
“소정협이 개입한다하더라도 우리는 물러날 생각이 없소. 어찌 하시겠소?”
“나 또한 물러날 생각이 없소.”
“그럼 생사결로 결판을 냅시다.”
녹림도 답지 않게 정중히 제안하는 건, 나중에 뒷말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좋소이다.”
“남아일언.”
“중천금이오.”
그 말을 끝으로 거리를 벌리는 두 사람. 그게 신호인 듯 껄렁하게 서있던 산적들이 살기를 팍팍 피워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피할 수 없는 백척간두에 서있는 상황.
바로 그 순간 종회가 사뭇 진중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당신이 여기 책임자요?”
“그렇습니다, 종 대협.”
대답하던 마전의 눈에는 존경의 빛이 가득했다.
하지만 담천우는 종회가 내뱉은 말에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우협산을 맡아 주지 않겠소?”
(1)
싸움이 벌어질 것 같다는 담천우의 장담은 곧 사실로 밝혀졌다.
“표행은 제자리에서 멈춰라. 이 어르신께서 기다리신지 어언 삼천갑자시다.”
그로부터 딱 한 식경 뒤의 일이었다.
누가 봐도 녹림이라고 할 만한 복장을 갖춘 이들이 우후죽순 길목을 막아섰다.
담천우는 혀를 찼다.
전생에서도 몇 번 맞닥뜨린 적이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영 변한 게 없었다.
생전 다듬지 않은 듯한 거친 수염과 짐승 가죽을 얼기설기 엮은 옷은 십여 년 전과 비교해도 똑같았다.
“우린 산동의 송가상단이오. 녹림영웅께서 길을 가로막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대표로 나선 것은 마전이었다.
본래는 책임자인 송린이 나서야 했지만, 모습을 드러냈다가 놈들이 미색에 홀려 괜한 탐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주변의 만류에 마전이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나타난 산적들을 보고 담천우는 이상한 점 몇 가지를 발견했다.
우선은 녹림들의 분위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정도 호송 인원이면 경험 많은 산적이라도 조금은 긴장한 기색을 보이기 마련인데, 어딜 봐도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먹이를 가지고 노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통행세는 드리고 갈 요량이 있소이다. 부디 길을 터주시오.”
마전의 발언에 드디어 산적 쪽에서도 누군가가 나섰다. 꽤나 영활하게 눈알을 굴리는 왜소한 체구의 사내였는데, 그런 걸 보면 나름 산채에서는 머리를 쓰는 위치인 듯했다.
“산채에 기근이 들어 통행세만 가지고는 아니 될 것 같소. 송가상단은 우리와 거래했던 표국이 아니기도 하고…….”
“그럼 산채의 영웅들께서는 얼마를 원하시는 게요?”
“전부를 주시는 게 어떻겠소? 기왕이면 저기 이쁜이도 놓고 가시고.”
그의 무례한 발언에 발끈한 무사들이 검병으로 손을 가져갔다.
물론 여기서 칼부림을 하면 하책(下策)이다. 녹림에서 이정도 희롱이야 비일비재하고, 더욱이 상단을 운영하자면 항상 겪을 일이었다.
실제로 송린은 내심이야 어떻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죽여 버릴 테다.]
물론 충현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좀 걸리는 게 있는데.’
녹림이야 이쪽이 대형 표국도 아니고 무공이 강해보이는 놈도 없는 것 같으니, 이미 제단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전부 먹자, 뭐 이런.
그런데 담천우가 이상하다고 느낀 부분은 녹림 쪽이 아니었다.
‘저놈들, 설마…….’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산적들에게 야유를 날리는 무사들의 말끝에는 힘이 서려 있었고, 행수들의 안색은 더없이 밝았다.
그리고 마전은 방심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무기력했다. 마치 자신쯤은 어떻게 해도 된다는 식으로.
‘하아, 어이가 없네. 실력도 없는 것들이 벌써부터 기대려고 해?’
그런데 그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건, 현재 담천우는 쟁자수이며, 그가 지켜야 할 사람은 송린 하나뿐이라는 것이었다.
“산채 영웅들께서 그리 나오신다면 우리도 결사항쟁을 할 수밖에 없소. 부디 칼을 뽑지 말고 좋게 넘어가시는 것이 어떻겠소?”
“흥! 칼을 뽑으면 우리를 감당할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는군.”
이미 난전만 안 벌어졌지, 상황은 좋게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미안한데요, 마전 조장.”
“네, 하명하십시오.”
“……하명이라뇨?”
담천우는 표정이 묘해졌다.
마전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절대적 신뢰.
불 속으로 뛰어들라고 하면 곧장 뛰어들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나서지 못할 것 같네요.”
하늘이 무너진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게 맞을 것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아직 부상에서 회복이 덜 되어서요. 삼 일 전에 힘을 너무 많이 썼어요.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힘이 안 돌아오네요.”
느슨해졌던 실이 팽팽해지는 느낌.
마전의 무기력했던 눈에 번쩍하고 빛이 들어왔다.
“지,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네. 이번에는 마 조장님께 부탁드릴게요.”
“……이, 이건 실로 예상치 못한 큰일입니다.”
목소리를 한껏 낮춘 마전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다급함이 드러나 있었다. 그게 좀 과해서 담천우로서는 미안해질 정도였다
담천우는 마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뒤로 물러났다.
“제가 뒤에서 응원할게요.”
마전으로부터 파급된 긴장감은 전 무사에게 순식간에 전달되었다.
“실로 대단한 자신감이군. 내가 웬만한 상단과 표국은 알고 있는데, 송가상단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들은 건너오기에는 너무 큰 강을 건너버린 셈이 되어 버렸다.
산적 중에서도 제일 덩치가 큰 사내가 앞으로 나섰을 때.
“나, 용골채의 우협산이야.”
그리고 그가 정체를 밝히자마자 상단의 분위기는 엉망진창으로 바뀌었다.
* * *
“도, 도망가자!”
담천우는 귀를 의심했다.
‘이 정도도 이기지 못하는 놈들이었나.’ ‘진짜 판을 엎어버리고 다시 시작해야 하나.’
이런 만감이 마음속에서 교차했다.
그런데 말을 내뱉은 놈들을 확인하는 순간, 담천우의 얼굴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저 녀석들은……?’
토룡, 지룡이라는 흑사방의 조무래기들.
까마득히 잊고 있었네.
“성님, 저놈이 누군데 그러시오?”
“야, 너는 소문도 못 들어봤냐? 우협산은 척혈광부라고 불리는데, 살인광으로 강호에서는 아주 유명한 놈이야. 그 뿐인 줄 알아? 흐미… 저어기 저놈은 분명히 의동생인 소장충일 거다.”
“힉! 그 인간백정 말이우? 심심풀이로 사람을 죽인다는?”
“그래. 하필 걸려도 이런 놈들한테 걸려서는……. 어차피 튀려고 했던 거 아니냐. 지금이라도 도망가자.”
뭐 도망가도 별로 상관은 없다만. 담천우는 그리 하도록 놔두기가 싫었다.
그는 당장에 탄지로 그들의 마혈부터 점했다.
파바밧.
“컥! 왜 몸이 안 움직이지…….”
“혀, 형님. 몸이 이상하우. 움직이지를…….”
……시끄러우니까, 아혈까지 봉해놓자.
“읍읍.”
별안간 당한 봉변에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그들을 향해 담천우는 뒷짐을 지고 한량처럼 다가갔다.
“어딜 가시게요?”
“읍읍읍…….”
“그럼 곤란한데. 저는 배신하는 걸 정말 싫어해요.”
담천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남자의 얼굴은 흑빛으로 변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얼굴에는 땀이 한 가득이었다.
“흐음, 이거 어쩐다. 저번에 미혼약 탄 것도 봐드렸는데.”
부릅.
눈이 커지다 못해 찢어질까 걱정스러운 그 모습에, 담천우는 생글생글 웃어 보이며 그들의 옷에 묻은 먼지를 세심히 털어주었다.
“설마 모르셨어요? 에이, 눈치 채셨을 줄 알았는데.”
“읍읍읍.”
말은 못하지만,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로 봐서는 뭘 말하는지는 알겠다.
“그래요. 참회하고 싶으시겠죠.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걸 하려고 해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담천우는 토룡과 지룡의 옷을 매만지는 척하며 혈자리를 성심성의껏 눌러주었다.
우드드득. 뭔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돌아가는 눈동자.
“으으으읍.”
“저번에는 못 배운 탓에 몰라서라고 이해했어요. 그러나 다음은 없어요. 뭐 못 알아들으시면 할 수 없구요. 만약 그리 되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두 번째로 넘어갈 거예요.”
지룡과 토룡은 그 다음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가 아주 애절했으니까.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저는 더 좋은 구경거리를 봐야 하거든요.”
더 좋은 구경거리란 바로 싸움구경이었다.
그런데 방해자가 있었다.
“현… 아니 천 대협. 그 말이 사실인가? 삼 일 전의 부상으로 나설 수 없다는 게?”
“소문이 빠르네요.”
송찬은 담천우의 날카로운 시선에 현제라는 말을 목구멍 안으로 꿀꺽 집어삼켰다.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기에, 담천우는 그가 붙든 손을 마치 들러붙은 먼지를 털어내듯 털어냈다.
하지만 송찬은 마치 진드기라도 된 것처럼 다시 들러붙었다.
“거짓말이지? 진짜 거짓말일 거야. 그렇지?”
“에이, 제가 제일 못하는 게 거짓말이에요.”
사실 담천우의 말은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삼 일 전에 부상을 당했으니까.
‘암기 만드느라 나뭇가지를 꺾으면서 나뭇가지가 손바닥에 살짝 박혔지.’
[내 몸은 외신삼문을 연마하여 금강불괴에 가깝다.]
응. 쓸모없는 방해자는 저리 꺼지시고.
“자네가 갑자기 이리 나오면 우리는 어떡하란 말인가. 이보게, 우리는 자네만 믿고 있었다고.”
“그게 무슨…….”
담천우는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거참, 무슨 병아리들 같네.’
자신을 바라보는 행수들의 표정이 마치 먹이를 바라는 병아리들 같았다.
“그만하세요!”
“사, 상단주님!”
“지금 부상 중이시라잖아요. 그리고 천 공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어요.”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야죠. 안 그래요?”
송린의 준엄한 일갈에 행수와 무사들은 만면에 부끄러운 빛을 띠었다.
“천 공자님은… 저희를 버리고 가셔도 되어요. 저번에 제가 드렸던 말, 아직도 유효하니까요. 이건 진심이어요.”
그녀의 말에 담천우는 무릎에서 절로 힘이 빠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한팔 거들겠다면서 자기 몸보다 큰 검을 쥔 채 낑낑대는 모습을 보고, 어찌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괜한 짓을 했네.’
“하아… 다시 말하지만, 오 년 동안은 여기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나서지 않으려는 건, 마전 조장이 충분히 감당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구요. 그리고 괜히 도와줬다가 의타심만 생길 것 같아 그러는 것이기도 하고요.”
“저, 정말이에요?”
“정말입니다. 조금 더 상단의 무사들을 믿으세요.”
“그렇지만 이번에는 숫자도 월등히 적은데다가, 우협산이란 자는 아주 흉폭하고 강하다고 하던데…….”
담천우가 그녀에게 환히 웃어 보이며 말했다.
“세상에는 기적이 참 많아요. 그중에는 간절히 바라면 갑자기 도움의 손길이 뻗쳐오기도 하고요.”
“조금 전에는… 남한테 기대지 않는 게 좋다고 하셨잖아요.”
“그거 하고는 달라요. 이번에는 자발적인 도움이거든요.”
담천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산적과 상단무사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풀이 무성하게 나있던 수림 쪽을 향해 돌멩이를 튕겼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 * *
오비이락(烏飛梨落).
정말이지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담천우의 손끝에서 돌멩이가 떨어지기 무섭게 희뿌연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냣!”
덕분에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던 장내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이십대 초반 정도의 남자. 그는 영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제검문!”
정체를 알아본 누군가의 외침.
제검문이라고 불린 남자의 얼굴이 설핏 일그러졌다.
“제검문이라면… 그 오군성 중에 하나인 대정협의 제검문 아닌가?”
알아보는 누군가의 발언에, 긴장으로 살짝 구부러져 있던 남자의 어깨가 바르게 펴지기 시작했다.
제검문도라는 남자는 누가 봐도 꽤나 영준했다,
머리에는 영웅건을 푹 눌러쓰고 있었는데, 그 중앙에는 크게 제(劑) 자가 박혀 있었다. 거기다 검미는 짙고 팔과 다리는 쭉쭉 뻗은 것이, 흔히 볼 수 없는 기남아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처음의 살짝 당황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더없이 평온하고도 느긋한 미소만이 입가에 보기 좋게 걸려 있었다.
“제검문의 종회외다.”
“종회라면 대정협의 수제자가 아닌가.”
주변의 반응은 더없이 호의적이었다.
담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면 꽤나 괜찮은 전개인 것 같았다.
풀숲에 쥐새끼가 있는 것 같아서 건드려 봤을 뿐인데, 낚아보니 생각지도 않게 월척이랄까.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이게 바로 하늘의 도움인가 봅니다. 보아하니 명문정파인 듯싶은데, 이런 일을 간과하지는 않을 테지요.”
송린의 물음에도 담천우는 일단 모르는 척 의뭉을 떨어댔다.
그러자 그녀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천 공자님, 혹시 종회 소협이 저기 있다는 걸 미리 아셨나요?”
“에이, 그럴 리가요. 저는 쟁자수에 불과한데요.”
“하지만 수상한데…….”
얼굴에 잔뜩 수상한데라고 써 붙인 듯한 송린이었지만, 담천우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기에는 상황이 빠르게 급변하고 있었다.
‘진짜 정파스러운 놈이다.’
저놈은 아까부터 풀숲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담천우가 가만 보니,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아마도 생각보다 산적의 전력이 강했기 때문이겠지. 즉, 저놈은 누가 죽어나가고 말고는 신경 쓰지 않을 놈이었다.
그래서 담천우가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도록 살짝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우협산의 얼굴에 슬쩍 분기가 스쳐 지나갔다.
“소정협. 얼굴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로군. 그런데 진짜 우리를 방해할 심산인가?”
“그렇소.”
“과연 제검문답게 호기로운 발언이시군. 목이 떨어져 나가도 그렇게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 물러난다면 제검문의 문도라고 할 수 없소.”
“흥! 소정협의 협이 대단하구만.”
“과찬이시오.”
사실 이정도만 되어도 우협산으로서는 상당히 배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검문이라는 큰 배경이 아니었다면 당장에 죽여 버릴 위인이 우협산이니까.
종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이제 한껏 존경의 염이 담겨 있었다.
정파의 미래라는 둥, 대협의 기질이 있다는 둥.
“흥! 정파의 미래기는 하지. 저런 놈들이 꼭 한 자리씩 해먹거든.”
그 안에 숨겨진 본질을 제대로 알고 있던 담천우만은 냉소를 지을 뿐이었다.
한편, 녹림도 쪽은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종회의 처리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모양.
드디어 중지가 하나로 모였는지, 우협산이 대표로 종회에게 말을 건넸다.
“소정협이 개입한다하더라도 우리는 물러날 생각이 없소. 어찌 하시겠소?”
“나 또한 물러날 생각이 없소.”
“그럼 생사결로 결판을 냅시다.”
녹림도 답지 않게 정중히 제안하는 건, 나중에 뒷말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좋소이다.”
“남아일언.”
“중천금이오.”
그 말을 끝으로 거리를 벌리는 두 사람. 그게 신호인 듯 껄렁하게 서있던 산적들이 살기를 팍팍 피워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피할 수 없는 백척간두에 서있는 상황.
바로 그 순간 종회가 사뭇 진중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당신이 여기 책임자요?”
“그렇습니다, 종 대협.”
대답하던 마전의 눈에는 존경의 빛이 가득했다.
하지만 담천우는 종회가 내뱉은 말에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우협산을 맡아 주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