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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나는 오늘 살인 면허를 가졌다(2)
(2)
“토룡, 지룡. 이 지렁이 새끼들,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한거야?”
중년 사내의 눈에서 분노의 열꽃이 피어올랐다.
흑사방 이인자인 초비는 타고난 흑도답게 음흉한 수법을 좋아했다.
오늘의 행사 역시, 압도적인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간자를 두 명이나 투입시켜 미혼약을 풀도록 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실패한 게 분명했다.
성공했다면 상단 무사들이 이리도 멀쩡히 일어나지는 못할 테니까.
“대인! 죄송합니다.”
초비는 불안함을 숨기지 못한 채 대인이라고 불리는 사내에게 깊이 읍을 해보였다.
단단한 체격을 가진 사내는, 그러나 초비의 생각과는 달리 꽤나 담담한, 아니 만족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잘되었구나. 사냥감을 덫에 잡아놓고 사냥하는 건 내 성미에는 안 맞는다. 아무래도 사냥은 직접 하는 게 제 맛이지.”
“역시 대인께서는 뭐가 다르셔도 다르십니다.”
아부야말로 약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이었고, 그래서 초비는 사내를 향해 아부를 아끼지 않았다.
자존심 같은 건 있을 리 없었다.
비록 삼류흑도보다 더 파락호 같아 보였지만, 자신 따위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초일류 고수인 흑산비상검 혼원이 바로 그였으니까.
“후후, 그럼 가볼까.”
흑의사내가 하는 말에 초비를 비롯한 흑사방도들은 눈빛을 빛내며 따라붙었다.
* * *
“어쩐 일로 영웅께서 이 야심한 시각에 납시었소?”
내자불선 선자불래(來者不善 善者不來).
이것보다 지금의 상황을 더 잘 표현해 주는 말이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큰 변고가 일어나기 전에 무사들이 잠에서 깼다는 것이었다.
마전의 눈빛에는 전에 없던 진한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때마침 흑운 아래 감춰져 있던 달빛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근방에 계시는 녹림영웅들은 아니신 듯 하오만.”
마전은 침음성을 감추지 못했다.
은은한 월광 아래 모습을 드러낸 적들은 아무리 봐도 산적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야행복으로 갖춰 입은 수십의 무리.
검은색 두건은 눈 아래까지 덮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보는 사람들은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는 답답하고 숨 막히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저 놈인가 보군.”
담천우는 흑의로 꽁꽁 싸맨 놈들 중에서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자를 딱 집어 골라냈다.
그 자 역시도 똑같이 흑두건을 쓰고 있었고 체격 또한 다른 자와 엇비슷했지만, 도드라지게 구별되는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내공.
무의 정점에 올랐었던 담천우에게는 마치 백일하에 드러나듯 적나라하게 보였다.
절정. 그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조금 못 미치는 경지.
“쯧, 고작해야 저 정도인가?”
조금 더 높은 경지의 강자를 기대했던 담천우로서는 실망스럽다는 말이 입 밖으로 불쑥 튀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인지는 모르겠으나, 성의표시를 할 터이니 이만 물러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흑의인에게 대표로 말을 건네고 있던 마전의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그만큼 긴장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적어도 반수정도는 차이가 난다.’
마전이 처음 겪어볼 만큼, 흑의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불길하고도 음침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전이 상황을 오판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크크크크.”
음침한 괴소를 흘리고 있는 흑의인은 마전의 생각과는 달리 그 차이가 확연했다.
한편, 기묘한 분위기가 흘러갈수록 마전을 비롯한 상단사람들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전 조장님, 대행수님. 웬만한 건 들어줘요. 무조건 협상으로 가야해요.”
다행히 송린은 영민한 축에 속했으며, 상황이 어찌 굴러가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있었다.
적들이 살인멸구를 염두에 둘 만큼 안 좋은 상황이라는 걸 눈치 챈 것이었다.
송린의 속삭임에 마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산동의 송가상단으로서, 일찍부터 녹림의 영웅들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정성스레 마련한 선물을 진상할 기회를 주시면 삼생의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송린은 정중하고도 간곡하게 청했다.
하지만 이러한 간청에도, 한밤의 불청객들은 일언반구도 없었고, 간간히 들리는 불편한 비웃음만이 침묵의 간극을 메웠다.
[차마 보고 있기가 어렵군.]
심상공간의 충현은 이 안타까운 사태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담천우 역시도 혀를 찰 뿐이었다.
사실 원행은 가당치도 않다는 기환의 평은 과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원행을 떠나온 지 불과 삼 일 만에 상단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위기에 봉착했다.
물론 그건 자신과 동행을 안 했을 때의 얘기지만.
그렇다 해도, 담천우를 제외한 상단의 힘은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 사실이었다.
“크크크.”
어둠에 깔린 불편한 침묵이 사라지는 순간.
나지막하고 음산한 웃음소리가 대신 그 간극을 채웠다.
그 불길한 비소에 송린과 사람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둠과 더없이 어울리는 흑의를 뒤집어 쓴 사내가 입을 열었다.
“거절하지. 전부를 가질 수 있는데 협상을 할 바보는 없으니까.”
“그, 그런! 녹림이 언제부터 그렇게 막 나가게 되었소? 정녕 무림맹이 두렵지 않은 것이오?”
“흐음… 무림맹? 중원 무림에 무림맹의 세력이 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전부는 아니다.”
꽤나 폐부를 찌르는 말에 송린과 상단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확실히 그랬다.
무림맹이 정의를 부르짖고는 있었지만, 전부를 아우른다고 보기에는 다소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 중심으로만 싸고돌았기에, ‘그들만의 무림맹’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다.
게다가 흑도 쪽에는 무림맹의 앙숙이자 대척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사흑련이 있었다.
“그리고 너희 같은 변방의 상단이 사라진다 해도, 무림맹은 눈 하나 깜빡할 것 같지가 않군.”
‘어떻게 해서든 이번 상행에 표국을 끌어들였어야 했어.’
상단들이 괜히 표국에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다.
표국은 보통 구대문파와 육대세가의 방계나 속가가 차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림맹의 힘을 등에 업게 된다.
송린과 마전 등은 빠르게 눈짓으로 뜻을 교환했다.
‘어떡하죠?’
‘하는 수 없습니다. 싸우는 수밖에.’
‘죄송해요. 저 때문에.’
‘어찌 그게 상단주님의 잘못이겠습니까.’
마전은 송린의 사과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표국들이 작정하고 송가상단의 의뢰를 받아주지 않은 게 어찌 그녀의 탓이란 말인가.
“……우리는 생각보다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오.”
결전을 각오한 마전의 눈에는 어느새 투지가 불타고 있었다.
그의 말에 흑의인은 가소롭다는 듯이 광소를 터트렸다.
“가소롭기가 이를 데 없군. 아하하하하!”
여력을 해소치 못하고 비칠비칠 뒤로 물러선 마전의 눈빛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 아니…….”
어디를 봐도 흑의인은 마전 혼자 오롯이 감당해낼 존재가 아니었다.
“후후후, 이제야 주제를 깨달았나?”
“의, 의형살의 경지라니…….”
마전의 얼굴에는 보고도 믿기가 힘들다는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 * *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담천우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미소는 갈수록 진해졌는데, 그건 혈향이 주는 특유의 익숙함 때문이었다.
“저런 게 의형살일리가 없지.”
그러기에는 너무 조잡했으니까. 허나 노출되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담천우는 송린의 앞을 슬쩍 막아섰다.
“……아!”
살기에서 멀어진 탓에 정신이 돌아온 송린은 담천우를 발견하자마자 화들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천, 천 공자? 아직 도망 안 갔었어요?”
“도망요?”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에 담천우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천마에게 도망이라니.
“제가 제일 못하는 게 도망가는 건데요.”
“……천 공자,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전에 제가 얘기한 거 있잖아요. 위험해질 것 같으면 도망치라고.”
송린의 말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담천우는 영 불안해하는 그녀를 위해 살짝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지금 상단주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요. 상대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아요.”
“강하지 않다고요?”
“네, 맞아요. 사실 저런 건 의형살이 아니라고요. 자, 보세요.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고 그런가요?”
“아… 지금은 괜찮아요. 희한하네요.”
“거봐요. 생각보다 상대는 강하지 않다니까요. 마전 조장이 생각보다 의뭉스럽고 강하니까,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을 거예요.”
“이상하게 천 공자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해지네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담천우의 말이 그녀에게 적잖은 위안이 되었는지, 송린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물론 이 대화를 복면인이 들었다면 분기탱천할 일이었지만, 그는 마전과 말을 나누는 중이었다.
“귀하께서는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운반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고서 기다린 것 같소만.”
“물론. 알고 있었고, 기다리고 있었다.”
흑의인은 마전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대인!”
그것이 내부적으로는 조율이 안 된 돌출발언이었는지, 복면인 중에 하나가 해연히 놀라며 고함을 쳤다.
‘대인?’
그 말이 담천우에게는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확실히 녹림은 아니다. 그렇다면 대인이라는 말을 할 턱이 없을 테니까.
“어차피 상단주 빼고는 다 죽일 거잖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
그들의 대화에 마전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국은 어찌해도 저들이 모두를 죽일 생각이라는 걸 확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대들은 이게 황실의 군량미라는 걸 알고 있나요? 진정 황군의 응징이 두렵지 않나요!”
송린은 분노로 얼굴이 온통 시뻘게져 있었다.
그 돌발발언이 한밤의 습격자들에게도 커다란 동요를 일게 했다.
그만큼 황실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송린은 그것에 작은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황군이라……. 황군은 실로 무섭지. 하지만 말이네, 난 그대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죽일 자신이 있네. 그걸 살인멸구라고 하지.”
명백히 비꼬는 말투로 흑의인은 결론을 내렸다.
송린은 피가 나올 만큼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시종일관 흑의인은 구석에 몰린 쥐를 놀리듯, 그리 했을 뿐이었다.
흑의인은 거만한 자세로 손을 까닥해 보였다.
“내가 손을 쓸 값어치도 없는 놈들이다. 쳐라!”
느슨했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왔다.
그에 따라 상단 쪽 분위기는 급격하게 암울해졌다.
숫자는 암습자에 비해 열넷 정도는 더 많지만, 이쪽은 태반이 행수들과 쟁자수였다.
이것을 빼면 온전한 무사는 겨우 열.
“죽여라!”
“쟁자수와 행수들은 호위물을 지켜라. 무사들은 나를 따라라.”
마전은 적들의 암습에 맞서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드디어 시작된 한밤의 격전.
언제나 그렇듯 전장은 미친 광기가 지배한다.
그 미친 광풍의 끝은 누가 죽고 누가 사느냐는 것.
‘네 말대로는 하겠다만…….’
담천우는 이 상황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라면 단번에 윗대가리인 두목을 제압하고 끝냈을 터였다. 하지만 충현은 반대의 입장이었다.
실력 향상을 위해서 송가상단의 무사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물론 담천우는 회의적이었다.
여기서 그나마 실력이 향상될 만한 떡잎은 마전 정도였다. 그것도 간신히. 나머지는 재능이 그냥 그랬다.
언제 키워서 언제 강해질까. 오 년은 짧은 시간이었다.
[약하다고 해서 언제까지 약하지는 않다. 나와 동료들이 그랬듯.]
충현의 강함은 담천우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담천우의 강함은 개인의 강함이지만, 충현은 군대의 경험 때문인지 모두가 강해지는 것을 지향했다. 물론 그 의견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었지만, 오 년 뒤에 떠난다는 것을 감안해 담천우도 시도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앞으로 피곤해질 수도 있다는 얘기지.’
누군가를 강하게 만든다는 건 분명 귀찮은 일이다. 스스로 강해졌던 담천우로서는 생소한 일이기도 했고.
생각에 잠긴 사이 혈투는 이미 벌어져 있었다. 다행히 암습자의 우두머리는 아직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장은 목불인견의 참상. 눈뜨고 못 볼 지경의 저열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상단의 무사들에게는 실전 훈련으로서 제격인 셈이었다. 숫자만 맞춰주면 대충 수준은 고만고만하니까. 생사를 넘나드는 실전을 경험하게 되겠지.
생각을 마친 담천우의 손끝에서 나뭇가지가 허공을 갈랐다.
파바바바밧.
어둠을 파고든 암격.
암천비도술.
나뭇가지기는 하지만 제 역할을 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암습을 받아내기에는 적들의 수준이 너무 떨어지기도 했고.
“크흑.”
암기를 날리자마자 곳곳에서 답답한 신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렇지만 그 반향이 크지는 않았다.
작은 나뭇가지에 실린 예기가 단번에 머리를 두부처럼 으깨놓기에 충분했으니까.
이게 원심력이 실려 있기 때문에, 한번 관통되면 나선형으로 회전하면서 그 후면은 엄청난 크기로 파열되었다.
“그래. 이것도 나름 죽이는 거지.”
담천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 건, 아직도 죽일 만한 대상이 이십 명은 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담천우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아끼듯이 적당히 암기로 적들을 살상해 나갔다.
“암습이다!”
“방수가 있다!”
예상보다 늦게 적들도 사태를 알아챘다. 하지만 경각성을 울렸을 때는 이미 그들로서도 어찌 할 수 없는 기호지세였다.
“안다고 해도 막을 수 있을까?”
이미 흥이 달아올라버린 담천우의 손끝은 거침없이 다음의 희생자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담천우는 암천비도술을 조금씩 손에 익혀 나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습격자는 그저 살아 움직이는 표적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역시 암기술이 다수살상에는 제격이군.’
차륜전에도 제격일 테고. 이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녹사평에서 진 것도 결국 차륜전 때문이니까.
실제로 담천우는 암천비도술을 미리 알았다면 조금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으리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를 벗어나면 복수를 할 생각이군.]
담천우의 내면에 들끓고 있는 복수심을 읽어냈는지, 충현이 질문을 던졌다.
물론 대답해줄 생각은 있었다.
‘솔직히 말할까? 지금의 생활에 나름 만족하고 있어. 나로서도 의외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복수를 포기하겠다는 건가?]
충현의 말이 꽤나 간곡했지만, 담천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역시나 안 되겠어. 나를 죽인 놈들이 편히 지낸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꼴려서.’
[복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나…….]
‘중요하다기보다는 못 참아내는 거지. 같은 하늘 아래 그런 쥐새끼들이 살고 있다는 걸.’
[나는 참아낼 수 있다.]
담천우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뭐 사람마다 생각은 조금씩 다른 법이니까.
‘이것만은 약속하지. 오 년 동안은 확실히 지켜주겠다는 것. 그리고 위험요소도 확실히 없애고.’
[그거야 당연하지.]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의 대화는 잦아들었다.
(2)
“토룡, 지룡. 이 지렁이 새끼들,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한거야?”
중년 사내의 눈에서 분노의 열꽃이 피어올랐다.
흑사방 이인자인 초비는 타고난 흑도답게 음흉한 수법을 좋아했다.
오늘의 행사 역시, 압도적인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간자를 두 명이나 투입시켜 미혼약을 풀도록 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실패한 게 분명했다.
성공했다면 상단 무사들이 이리도 멀쩡히 일어나지는 못할 테니까.
“대인! 죄송합니다.”
초비는 불안함을 숨기지 못한 채 대인이라고 불리는 사내에게 깊이 읍을 해보였다.
단단한 체격을 가진 사내는, 그러나 초비의 생각과는 달리 꽤나 담담한, 아니 만족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잘되었구나. 사냥감을 덫에 잡아놓고 사냥하는 건 내 성미에는 안 맞는다. 아무래도 사냥은 직접 하는 게 제 맛이지.”
“역시 대인께서는 뭐가 다르셔도 다르십니다.”
아부야말로 약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이었고, 그래서 초비는 사내를 향해 아부를 아끼지 않았다.
자존심 같은 건 있을 리 없었다.
비록 삼류흑도보다 더 파락호 같아 보였지만, 자신 따위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초일류 고수인 흑산비상검 혼원이 바로 그였으니까.
“후후, 그럼 가볼까.”
흑의사내가 하는 말에 초비를 비롯한 흑사방도들은 눈빛을 빛내며 따라붙었다.
* * *
“어쩐 일로 영웅께서 이 야심한 시각에 납시었소?”
내자불선 선자불래(來者不善 善者不來).
이것보다 지금의 상황을 더 잘 표현해 주는 말이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큰 변고가 일어나기 전에 무사들이 잠에서 깼다는 것이었다.
마전의 눈빛에는 전에 없던 진한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때마침 흑운 아래 감춰져 있던 달빛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근방에 계시는 녹림영웅들은 아니신 듯 하오만.”
마전은 침음성을 감추지 못했다.
은은한 월광 아래 모습을 드러낸 적들은 아무리 봐도 산적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야행복으로 갖춰 입은 수십의 무리.
검은색 두건은 눈 아래까지 덮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보는 사람들은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는 답답하고 숨 막히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저 놈인가 보군.”
담천우는 흑의로 꽁꽁 싸맨 놈들 중에서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자를 딱 집어 골라냈다.
그 자 역시도 똑같이 흑두건을 쓰고 있었고 체격 또한 다른 자와 엇비슷했지만, 도드라지게 구별되는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내공.
무의 정점에 올랐었던 담천우에게는 마치 백일하에 드러나듯 적나라하게 보였다.
절정. 그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조금 못 미치는 경지.
“쯧, 고작해야 저 정도인가?”
조금 더 높은 경지의 강자를 기대했던 담천우로서는 실망스럽다는 말이 입 밖으로 불쑥 튀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인지는 모르겠으나, 성의표시를 할 터이니 이만 물러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흑의인에게 대표로 말을 건네고 있던 마전의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그만큼 긴장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적어도 반수정도는 차이가 난다.’
마전이 처음 겪어볼 만큼, 흑의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불길하고도 음침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전이 상황을 오판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크크크크.”
음침한 괴소를 흘리고 있는 흑의인은 마전의 생각과는 달리 그 차이가 확연했다.
한편, 기묘한 분위기가 흘러갈수록 마전을 비롯한 상단사람들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전 조장님, 대행수님. 웬만한 건 들어줘요. 무조건 협상으로 가야해요.”
다행히 송린은 영민한 축에 속했으며, 상황이 어찌 굴러가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있었다.
적들이 살인멸구를 염두에 둘 만큼 안 좋은 상황이라는 걸 눈치 챈 것이었다.
송린의 속삭임에 마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산동의 송가상단으로서, 일찍부터 녹림의 영웅들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정성스레 마련한 선물을 진상할 기회를 주시면 삼생의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송린은 정중하고도 간곡하게 청했다.
하지만 이러한 간청에도, 한밤의 불청객들은 일언반구도 없었고, 간간히 들리는 불편한 비웃음만이 침묵의 간극을 메웠다.
[차마 보고 있기가 어렵군.]
심상공간의 충현은 이 안타까운 사태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담천우 역시도 혀를 찰 뿐이었다.
사실 원행은 가당치도 않다는 기환의 평은 과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원행을 떠나온 지 불과 삼 일 만에 상단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위기에 봉착했다.
물론 그건 자신과 동행을 안 했을 때의 얘기지만.
그렇다 해도, 담천우를 제외한 상단의 힘은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 사실이었다.
“크크크.”
어둠에 깔린 불편한 침묵이 사라지는 순간.
나지막하고 음산한 웃음소리가 대신 그 간극을 채웠다.
그 불길한 비소에 송린과 사람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둠과 더없이 어울리는 흑의를 뒤집어 쓴 사내가 입을 열었다.
“거절하지. 전부를 가질 수 있는데 협상을 할 바보는 없으니까.”
“그, 그런! 녹림이 언제부터 그렇게 막 나가게 되었소? 정녕 무림맹이 두렵지 않은 것이오?”
“흐음… 무림맹? 중원 무림에 무림맹의 세력이 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전부는 아니다.”
꽤나 폐부를 찌르는 말에 송린과 상단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확실히 그랬다.
무림맹이 정의를 부르짖고는 있었지만, 전부를 아우른다고 보기에는 다소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 중심으로만 싸고돌았기에, ‘그들만의 무림맹’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다.
게다가 흑도 쪽에는 무림맹의 앙숙이자 대척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사흑련이 있었다.
“그리고 너희 같은 변방의 상단이 사라진다 해도, 무림맹은 눈 하나 깜빡할 것 같지가 않군.”
‘어떻게 해서든 이번 상행에 표국을 끌어들였어야 했어.’
상단들이 괜히 표국에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다.
표국은 보통 구대문파와 육대세가의 방계나 속가가 차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림맹의 힘을 등에 업게 된다.
송린과 마전 등은 빠르게 눈짓으로 뜻을 교환했다.
‘어떡하죠?’
‘하는 수 없습니다. 싸우는 수밖에.’
‘죄송해요. 저 때문에.’
‘어찌 그게 상단주님의 잘못이겠습니까.’
마전은 송린의 사과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표국들이 작정하고 송가상단의 의뢰를 받아주지 않은 게 어찌 그녀의 탓이란 말인가.
“……우리는 생각보다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오.”
결전을 각오한 마전의 눈에는 어느새 투지가 불타고 있었다.
그의 말에 흑의인은 가소롭다는 듯이 광소를 터트렸다.
“가소롭기가 이를 데 없군. 아하하하하!”
여력을 해소치 못하고 비칠비칠 뒤로 물러선 마전의 눈빛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 아니…….”
어디를 봐도 흑의인은 마전 혼자 오롯이 감당해낼 존재가 아니었다.
“후후후, 이제야 주제를 깨달았나?”
“의, 의형살의 경지라니…….”
마전의 얼굴에는 보고도 믿기가 힘들다는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 * *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담천우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미소는 갈수록 진해졌는데, 그건 혈향이 주는 특유의 익숙함 때문이었다.
“저런 게 의형살일리가 없지.”
그러기에는 너무 조잡했으니까. 허나 노출되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담천우는 송린의 앞을 슬쩍 막아섰다.
“……아!”
살기에서 멀어진 탓에 정신이 돌아온 송린은 담천우를 발견하자마자 화들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천, 천 공자? 아직 도망 안 갔었어요?”
“도망요?”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에 담천우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천마에게 도망이라니.
“제가 제일 못하는 게 도망가는 건데요.”
“……천 공자,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전에 제가 얘기한 거 있잖아요. 위험해질 것 같으면 도망치라고.”
송린의 말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담천우는 영 불안해하는 그녀를 위해 살짝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지금 상단주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요. 상대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아요.”
“강하지 않다고요?”
“네, 맞아요. 사실 저런 건 의형살이 아니라고요. 자, 보세요.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고 그런가요?”
“아… 지금은 괜찮아요. 희한하네요.”
“거봐요. 생각보다 상대는 강하지 않다니까요. 마전 조장이 생각보다 의뭉스럽고 강하니까,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을 거예요.”
“이상하게 천 공자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해지네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담천우의 말이 그녀에게 적잖은 위안이 되었는지, 송린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물론 이 대화를 복면인이 들었다면 분기탱천할 일이었지만, 그는 마전과 말을 나누는 중이었다.
“귀하께서는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운반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고서 기다린 것 같소만.”
“물론. 알고 있었고, 기다리고 있었다.”
흑의인은 마전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대인!”
그것이 내부적으로는 조율이 안 된 돌출발언이었는지, 복면인 중에 하나가 해연히 놀라며 고함을 쳤다.
‘대인?’
그 말이 담천우에게는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확실히 녹림은 아니다. 그렇다면 대인이라는 말을 할 턱이 없을 테니까.
“어차피 상단주 빼고는 다 죽일 거잖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
그들의 대화에 마전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국은 어찌해도 저들이 모두를 죽일 생각이라는 걸 확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대들은 이게 황실의 군량미라는 걸 알고 있나요? 진정 황군의 응징이 두렵지 않나요!”
송린은 분노로 얼굴이 온통 시뻘게져 있었다.
그 돌발발언이 한밤의 습격자들에게도 커다란 동요를 일게 했다.
그만큼 황실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송린은 그것에 작은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황군이라……. 황군은 실로 무섭지. 하지만 말이네, 난 그대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죽일 자신이 있네. 그걸 살인멸구라고 하지.”
명백히 비꼬는 말투로 흑의인은 결론을 내렸다.
송린은 피가 나올 만큼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시종일관 흑의인은 구석에 몰린 쥐를 놀리듯, 그리 했을 뿐이었다.
흑의인은 거만한 자세로 손을 까닥해 보였다.
“내가 손을 쓸 값어치도 없는 놈들이다. 쳐라!”
느슨했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왔다.
그에 따라 상단 쪽 분위기는 급격하게 암울해졌다.
숫자는 암습자에 비해 열넷 정도는 더 많지만, 이쪽은 태반이 행수들과 쟁자수였다.
이것을 빼면 온전한 무사는 겨우 열.
“죽여라!”
“쟁자수와 행수들은 호위물을 지켜라. 무사들은 나를 따라라.”
마전은 적들의 암습에 맞서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드디어 시작된 한밤의 격전.
언제나 그렇듯 전장은 미친 광기가 지배한다.
그 미친 광풍의 끝은 누가 죽고 누가 사느냐는 것.
‘네 말대로는 하겠다만…….’
담천우는 이 상황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라면 단번에 윗대가리인 두목을 제압하고 끝냈을 터였다. 하지만 충현은 반대의 입장이었다.
실력 향상을 위해서 송가상단의 무사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물론 담천우는 회의적이었다.
여기서 그나마 실력이 향상될 만한 떡잎은 마전 정도였다. 그것도 간신히. 나머지는 재능이 그냥 그랬다.
언제 키워서 언제 강해질까. 오 년은 짧은 시간이었다.
[약하다고 해서 언제까지 약하지는 않다. 나와 동료들이 그랬듯.]
충현의 강함은 담천우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담천우의 강함은 개인의 강함이지만, 충현은 군대의 경험 때문인지 모두가 강해지는 것을 지향했다. 물론 그 의견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었지만, 오 년 뒤에 떠난다는 것을 감안해 담천우도 시도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앞으로 피곤해질 수도 있다는 얘기지.’
누군가를 강하게 만든다는 건 분명 귀찮은 일이다. 스스로 강해졌던 담천우로서는 생소한 일이기도 했고.
생각에 잠긴 사이 혈투는 이미 벌어져 있었다. 다행히 암습자의 우두머리는 아직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장은 목불인견의 참상. 눈뜨고 못 볼 지경의 저열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상단의 무사들에게는 실전 훈련으로서 제격인 셈이었다. 숫자만 맞춰주면 대충 수준은 고만고만하니까. 생사를 넘나드는 실전을 경험하게 되겠지.
생각을 마친 담천우의 손끝에서 나뭇가지가 허공을 갈랐다.
파바바바밧.
어둠을 파고든 암격.
암천비도술.
나뭇가지기는 하지만 제 역할을 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암습을 받아내기에는 적들의 수준이 너무 떨어지기도 했고.
“크흑.”
암기를 날리자마자 곳곳에서 답답한 신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렇지만 그 반향이 크지는 않았다.
작은 나뭇가지에 실린 예기가 단번에 머리를 두부처럼 으깨놓기에 충분했으니까.
이게 원심력이 실려 있기 때문에, 한번 관통되면 나선형으로 회전하면서 그 후면은 엄청난 크기로 파열되었다.
“그래. 이것도 나름 죽이는 거지.”
담천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 건, 아직도 죽일 만한 대상이 이십 명은 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담천우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아끼듯이 적당히 암기로 적들을 살상해 나갔다.
“암습이다!”
“방수가 있다!”
예상보다 늦게 적들도 사태를 알아챘다. 하지만 경각성을 울렸을 때는 이미 그들로서도 어찌 할 수 없는 기호지세였다.
“안다고 해도 막을 수 있을까?”
이미 흥이 달아올라버린 담천우의 손끝은 거침없이 다음의 희생자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담천우는 암천비도술을 조금씩 손에 익혀 나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습격자는 그저 살아 움직이는 표적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역시 암기술이 다수살상에는 제격이군.’
차륜전에도 제격일 테고. 이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녹사평에서 진 것도 결국 차륜전 때문이니까.
실제로 담천우는 암천비도술을 미리 알았다면 조금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으리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를 벗어나면 복수를 할 생각이군.]
담천우의 내면에 들끓고 있는 복수심을 읽어냈는지, 충현이 질문을 던졌다.
물론 대답해줄 생각은 있었다.
‘솔직히 말할까? 지금의 생활에 나름 만족하고 있어. 나로서도 의외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복수를 포기하겠다는 건가?]
충현의 말이 꽤나 간곡했지만, 담천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역시나 안 되겠어. 나를 죽인 놈들이 편히 지낸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꼴려서.’
[복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나…….]
‘중요하다기보다는 못 참아내는 거지. 같은 하늘 아래 그런 쥐새끼들이 살고 있다는 걸.’
[나는 참아낼 수 있다.]
담천우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뭐 사람마다 생각은 조금씩 다른 법이니까.
‘이것만은 약속하지. 오 년 동안은 확실히 지켜주겠다는 것. 그리고 위험요소도 확실히 없애고.’
[그거야 당연하지.]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의 대화는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