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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진짜 강하면 안 참아도 된다(3)







(3)





‘봐라, 내말이 맞지.’

날카로운 금속성이 사위를 울렸다.

이 순간만큼은 평소 진중하던 마전은 없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시퍼런 장검이 들려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마전을 따르던 몇몇 무사들의 손에도 장검이 들려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열 명 내외로, 전체 무사가 이십 명이 넘는다고 보면 채 절반이 되지 않는 셈이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꺼져라.”

마전의 음성은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살짝 기가 질린 흑도사내.

“천한 백제 놈들 주제에 감히 우리 흑사방을 무시하다니,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흑도사내는 그대로 줄행랑을 치면서도 끝내 망발을 던져 놓고 갔다.

덕분에 상단의 분위기는 벽력탄이라도 터진 듯이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변했다.

그런데… 충현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분명히 죽이라는 둥 난리를 칠 것 같았는데 왜 이렇게 조용하냐고.

담천우가 송린 쪽을 보니 참담한 분위기를 최대한 수습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쟤도 참 어지간하네.’

아직 어리다면 어린 나이인데, 꾹 참고 버텨내는 것을 보면 용했다.

“죄송해요. 제가 부족해서 이런 꼴을 보게 했네요.”

“상단주님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제대로 지켜드리지 못하는 저희들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마전과 송린 사이의 대화만 보면 참 훈훈한데, 반대쪽을 보면 아니란 말이지.

기환과 무사들은 마치 남의 일인 양 외면하고 있었다.

저런 걸 보면 왜 호위무사로 데리고 있는 지가 의문이었다.

[……공주님. 정녕 공주님이셨습니까?]

얘는 또 왜 이래.

정례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심했다.

분명 송린이 선랑공주의 환생체가 아니라는 걸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을 텐데도 저렇게 미련을 못 버리니…….

‘왜 또 그러는데. 왜 또 지랄인데. 아까 걔 안 죽여서 그래? 쫓아가서 죽여줄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분명히 너도 들었잖아. 백제라고. 아까 그놈이 공주님 쪽을 향해서 백제라고 했어. 그동안 한어만 써서 몰랐는데…….]

‘백제가 뭔데?’

[백제는 고구려의 형제국이다.]

‘뭐야, 같은 나라도 아니잖아.’

[같은 핏줄이다. 같은 언어를 쓰고.]

‘충현 네 마음은 알겠는데, 달라지는 건 없어. 엄연히 다른 사람이라고. 시기적으로도 안 맞고.’

[아아, 선랑공주님.]

제기랄, 한동안은 좀 갈 것 같은데.

그런데 생각해보면 희한한 일이기는 했다. 저 녀석 말대로라면 같은 핏줄이라는 건데, 이 이역만리에서 이렇게 인연이 이어지는 게 어디 흔하단 말인가.

담천우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줄 적당한 인사를 찾아냈다.

충현 이 녀석아, 제대로 좀 알고 흥분을 해도 하자.

“저기요, 대행수.”

“아, 자네.”

송찬의 얼굴은 붉게 상기 되어 있었다.

다행히 현제라고 부르는 건 집어치운 듯했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죠?”

“그게 말을 하자면 좀 길어지는데…….”

웬일인지 저 떠벌이 양반이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 걸 보면 밝히기가 꽤나 싫은 내용인 것 같았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요. 우리 사이가 뭐 그렇죠.”

“아닐세. 자네와 나 사이인데, 우리가 남도 아니고.”

송찬은 아니라는 듯 극구 손사래를 쳤다. 청을 들어준 다음부터는 껌벅 죽는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가 원행 준비로 바쁘지 않은가?”

“예, 그렇죠.”

“헌데 그 원행의 의뢰처가 사실은 절강도호부일세.”

“절강도호부요?”

담천우는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아. 그때 그 미곡.”

“맞아. 군량미 납품 건이지.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그만한 군량미를 살 자금이 없었다는 것이네. 이게 황명이다 보니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상단인데 돈이 그렇게나 없어요?”

“전에도 얘기를 했지만, 상황이 점점 안 좋아져서……. 해서 어쩔 수 없이 모자라는 금액은 빌릴 수밖에 없었네. 그 중에 흑사방의 자금이 섞여 들어간 게지.”

“그래도 흑도 놈들 돈은 쓰는 게 아닌데요.”

질책하는 듯한 담천우의 눈빛에 송찬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다.

“워낙에 많은 자금이 필요해 여러 군데서 빌리다 보니… 몰랐네. 건너 건너서 들어온 거라.”

그럼 뭐 할 말 없고.

“더 물어볼 게 있는가?”

“아까 그 백제 얘기는 뭐예요?”

“아… 사실 비밀은 아니었네만, 우리 상단은 몇 백 년 전에 이곳으로 건너온 백제인에 의해 설립된 상단일세.”

“아, 그래서 백제인이라고 한 거군요.”

“수많은 세월이 흘러서 잊어버릴 법도 한데, 아직도 한인들에게 오랑캐 내지는 외인이라며 경시를 받고 있지. 물론 우리도 백제인이라는 것을 잊지는 않고 있네. 비록 한어를 쓰고는 있지만 말이야. 그래도 백제가 존재할 때는 당과 백제 사이의 중계무역으로 쏠쏠했는데, 망하고 나니 상황이 더욱 어려워졌어.”

백제도 고구려와 같은 망국이라……. 상황이 참 애매하기는 했다.

회한에 찬 송찬의 표정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담천우는 왠지 기분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충현 그 녀석 역시도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기랄. 아까 그 녀석, 죽여 버릴 걸 그랬네.”

기분이 괜스레 이상해졌다.

옆에서 송린의 얼굴을 보니 음영이 더욱 두드러졌다.

……저 여자, 저렇게 지쳐 있었나.

그전에는 그저 예쁘고 착한 여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두근.

그때, 담천우의 가슴이 뛰었다.

두근. 두근.

왜 뛰지?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내가 왜 이럴까?

알 수 없는 분노.

깨달았다.

그것은 담천우인 그의 혼과 합쳐진 충현의 감정이었다.

“감히…….”

입에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

누가 감히 그녀를 울리는가!

담천우로서는 무척이나 낯선 감정이었다.

하지만 애써 배격하고 싶지는 않았다.

충현… 그리고 담천우.

부정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그 둘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잘생긴 혀아…….”

혀가 짧아진 채로 울고 있는 이 녀석.

“……율.”

“저, 무공 배우고 싶어요. 힘이 있으면 안 참아도 되는 거잖아요.”

스으으.

담천우는 율이의 머리를 무심코 쓰다듬으려다가 손을 움츠렸다.

“아저씨, 어디가요?”

“잊어버린 게 있어서.”

그래, 잊어버린 게 있었다.

이건 송린을 위해서도 아니고, 충현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기분이 더러워졌을 뿐이었다.

“꼬마야, 세상의 이치를 하나 알려주지. 진짜로 강하면 참을 필요가 없다.”



* * *



빛바랜 화월루의 외각기둥을 돌아 후미진 뒷골목 어귀.

한 사내가 취기에 비틀거리면서도 바지춤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이씨, 딸꾹. 뭐가 이렇게 많이 나와. 니미.”

화월루.

이곳만큼 산동의 흥망성쇠를 잘 나타내주고 있는 곳이 있을까.

한때 중원 물류의 중심이라고 불렸던 산동.

그 화려한 만개를 묵묵히 지켜보던 화월루.

한때는 천하화월루라고 불렸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지금은 한낱 파락호의 소변을 받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흑사방의 행동대장을 맡고 있던 추일첨은 히죽 웃었다.

“아, 고년. 맛있게 생겼던데 진짜 아쉽네.”

아까 보았던 송가상단의 송린이 환상처럼 아른 거렸다.

만약 방주가 욕심을 낸 것만 아니었어도 어땠을까.

추일첨의 입에서 어흐흐하고 가는 신음성이 절로 새워 나왔다.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그년을 가랑이에 끼고 희롱할 수 있는 기회가 한번쯤은 오지 않았을까.

그런 천하절색을 품는다면 세상 부러울 게 뭐가 있을까.

“에잉, 그거에 비하면…….”

비록 욕정 때문에 품기는 했지만, 자신이 방금 전에 품은 앵앵이는 젊음을 한참이나 지나 퇴기에 가까웠다.

물론, 만약에 자신이 흑사방도가 아니었다면 이마저도 품지 못했을 터였다.

왜냐하면 이 주루는 한때나마 천하화월루로 불렸을 만큼 대단한 곳이었으니까. 뭐 지금은 흑사방이 관리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에이, 방주에게 넘기기 전에 한 번 하고 줘버릴까?”

“까고 있네.”

“누구냐!”

추일첨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얼른 허리춤을 추슬렀다.

그런 다음 눈에 힘을 주다 보니, 어스름한 어둠 속에 남자의 형체가 보였다.

추일첨은 살짝 긴장해서 반문했다.

“뭐야, 형씨. 지금 나한테 그런 거야?”

“그럼 너 말고 여기 다른 사람이 또 있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한 남자.

그를 보고 추일첨은 긴장이 탁 풀어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매가리 없이 생긴 게, 백면서생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안 보이는 놈이었다.

“얌마. 야야, 너 딱 기다리고 있어. 내가 이거만 털고 당장 죽여줄게.”

“아니, 죽이는 건 나지. 넌 그냥 죽어.”

예상치 못한 대답에 추일첨은 놀란 듯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뒤늦게야 깨달았다.

저 눈빛. 백면서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무심했으며, 냉막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타협안을 제시하려던 그 순간, 그에게 날아온 것은 맹렬한 기세의 주먹이었다.

퍼엉!

추일첨은 그대로 터져나간 북처럼 튕겨져 나갔다.

“쿠, 쿨럭. 도대체 왜…….”

중얼거리던 그의 눈빛에는 죽음을 암시하는 잿빛의 암울함이 깃들어 있었다.

배에 수박만 한 구멍이 뚫려 있으니, 이건 대라신선이 와도 살리지 못하리라.

담천우는 경멸하듯 차갑게 웃었다.

“그냥. 기분이 그지 같아서. 그런데 죽이니까 기분이 좋군.”

퍼석.

단호하게 밟은 발에 눌려 추일첨의 머리는 단숨에 으깨져 버렸다.

담천우는 한결 후련해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화월루의 처마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이, 거기 있는 쥐새끼. 위에다가 전하고 싶으면 전해도 좋아. 하지만, 생각을 잘해야 할 거야.”



그렇게 다시 골목이 적막에 휩싸인 후, 화월루의 처마에서 암흑 그 자체라고 여겨질 만한 흑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로 저렇게 먼 거리에서 위치를 파악했다고? 이걸 진짜 믿어야 할까?”

흑빛 복면 사내는 멀어져 가던 쟁자수복을 입은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흑사방을 밀어버리자. 뭐? 송린이 살인을 싫어할 거라고? 에라, 쫌생이 같은 놈아.”

혼자서 무슨 말을 그리 하는지, 두런두런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쟁자수였다.



* * *



다음날 아침.

“우리 상단에서 행패를 부렸던 그 불량배가 어젯밤에 죽었대요.”

“나도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어.”

추일첨의 죽음을 알게 된 흑사방 쪽이 송가상단에서 저지른 짓이 아니냐며 난리를 피웠으니까.

그리고 담천우는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온 꼬마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아, 피곤한 녀석.

“잘생긴 형아가 한 거 아니에요?”

마율은 무슨 검시관이라도 된 듯이, 세모꼴이 된 눈으로 수상해라는 의문을 잔뜩 뿌리고 있었다.

되바라진 녀석. 날카롭기는…….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냐. 나는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은 안 해.”

담천우는 마율의 이마를 툭하고 밀어 쳤다.

“그리고 누가 죽었느니 마느니 하는 아름다운 말을 입에 담는 거, 좀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냐?”

“에이, 저도 알 건 다 알아요.”

알기는 개뿔.

담천우는 이 애늙은이를 다시 애로 돌려놓기 위해 마구 머리를 헝클었다.

“에에헤헤.”

그제야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는지 마율은 기묘한 소리를 냈다.

그런 것을 보고 담천우도 누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까,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때 마율이 엄청난 비밀을 털어 놓는 것처럼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흑사방이 결국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갔대요.”

그랬겠지.

그럴 만한 게, 아무리 흑사방에서 난리를 친다 해도, 송가상단의 무사들은 죄다 검을 쓰고 있었다.

반면, 시체에는 가슴에 수박만 한 구멍이 뚫렸으니, 누가 봐도 검을 쓰는 자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쯤은 금방 알 터였다.

결국 자연스럽게 혐의점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어제 본 그놈의 기운, 익숙한데……. 아, 하오문인가?’

그렇다면 화월루는 사실 하오문의 비밀분타일 가능성이 컸다.

결과적으로 어제 본 그놈은 자신을 쫓아왔다기보다는 비밀분타의 호위였을 테고.

어제 그 장면도 우연찮게 봤던 거겠지.

“어어? 방금 전에 미소를 지었는데.”

이런 영악한 것. 담천우는 일부러 더욱 마율의 머리를 헝클어 버렸다.

“에헤헤헤.”

애는 아직 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