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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심상공간의 그와 만나다(2)







(2)





담천우는 치욕에 몸을 떨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담천우가.

현생의 고금 제일마가 될 내가 한낱 여자 앞에서 두 손을 모으다니.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죄, 죄송합니다. 방금 전의 행동은 제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빌어먹을! 제엔장!’

담천우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내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게다가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서 나오기까지 했다.

‘너, 죽여 버릴 테다!’

주군을 지키지 못한 무사의 한(恨)? 그딴 거 다 필요 없다.

순정을 품은 사내의 진심? 흥! 닭살 돋아서 못 봐줄 지경이다.

담천우는 마음 같아서는 당장 도사를 불러다가 저 놈의 영혼을 사멸 시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에?”

송린은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해가 안 되겠지.

내가 생각해도 그러니까. 갑자기 이랬다가 저랬다가.

순간, 담천우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 빌어먹을 녀석! 썩 꺼지거라!’

천마후.

심상공간이었지만 그게 통했다.

천마의 강력한 의지를 담은 영력인 만큼,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몸을 지배하고 있던 충현의 통제를 흩뜨려놓기에는 충분했다.

담천우는 충현을 향해 으르렁 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녀석, 감히 어린 여자 따위에게 두 손을 모은 채 사죄하게 만들어? 내가 너를 반드시 사멸 시키고 말테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말이야.’

[공주님을 지… 켜 줘라…….]

담천우는 흠칫했다.

남자의 눈에서 눈물을 본다는 것이 이렇게도 꺼림칙한 기분일 줄이야.

심상공간이라 흐릿하게 보이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무슨 개소리야!’

[눈앞에 계신 분은 공주님의 환생이시다. 분명해.]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믿어주지.’

[지켜줘… 제발.]

‘미치겠네.’

말도 안통하고, 귀로 듣는 것도 아니니 귀를 막아봤자 소용이 없었다.

담천우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래서 뭐? 어떻게 지켜주라는 건데?’

[지켜줄 거냐?]

‘빌어먹을, 일단 말이나 해보라고.’

내가 미쳤냐! 담천우가 충현의 말 같지도 않은 말에 대꾸를 해준 건 답답해서였다.

뭔 말이 통해야지.

들어주는 척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도사말코놈 하나를 데려다가 영혼을 소멸 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일단은 이 위기부터 넘기고 보자고.

[공주님께서 안온히 생을 마칠 수 있도록 지켜다오. 그게 내 소원이자 바람이다.]

‘안온? 부와 영화를 누리면서 사는 걸 말하는 거냐?’

[그런 것보다는 즐거우면 웃고 슬프면 울고,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게 해드리고 싶다. 그리고 내일은 어떤 기쁜 일이 있을까 기대하면서 잠이 들도록 해주고 싶다. 그게 내가 해주고 싶었던 일이다.]

‘……뭐야, 그게?’

담천우는 순간 멍해졌다.

그로서는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그런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돌이켜 보면 담천우의 삶은 항상 피와 죽음만이 가득한 투쟁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멍청한 삶이라니. 상상조차도 해본 적 없고, 하기도 싫었다.

‘너… 진짜 바보구나?’

[그게, 보통 사람이 누리는 삶이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누리지 못했지.]

담천우는 할 말을 잃었다.

아, 미치겠네.

이제는 확신이 들었다.

이 몸 안에 든 이놈은… 그래, 표리부동한 정파인보다도 오염되었고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냥, 아무런 대책도 없는 바보 그 자체였다.

담천우는 신랄하게 그 얄팍한 동정을 비난해 주었다.

‘대가리에 공자맹자만 쑤셔 넣은 학사가 하는 말보다도 멍청하구나.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사니까, 네가 그녀의 생을 그렇게 좌지우지 하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어떻게 살지를 결정하는 건 스스로가 선택하는 거잖아.’

[그, 그건…….]

‘네 말대로 공주가 비참한 생을 살았고, 또 그렇게 죽었다고 치자. 하지만 그건 그녀 스스로가 선택한 거잖아. 그걸 과연 불행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

‘멍청한 놈!’

아마 이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했겠지.

대가리에 똥만 찬 놈!

한참 후에야 충현의 풀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만 지켜주고 싶다.]

담천우는 고민에 잠겼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젠장, 그런데 내가 왜 이걸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좋다. 이렇게 해보자.’

[어떻게 말이냐?]

담천우는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반쯤은 넘어왔다는 것이니까.

‘그녀를 위협하는 어떠한 물리적인 위험도 없도록 해주겠다.’

[위험… 이 없도록?]

‘그래. 그리고 그 안전함 속에서 어찌 살지는 그녀 스스로 선택하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그게 맞는 거라고.’

[스스로?]

‘본인의 삶은 스스로 결정하고 사는 게 맞는 거니까.’

[…….]

충현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물론 담천우는 쾌재를 부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넘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충현을 너무나도 우습게 본 것이었다.



[십 년…….]

‘뭐어?’

[미래의 불안요소를 모두 없애주고, 그녀의 옆에서 십 년 동안 지켜줘.]

‘뭔 개똥같은 소리야! 절대 안 돼.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러고 있는 동안 내 원수들은 모두 자연사할 거라고.’

[그런가……. 하는 수 없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충현은 또다시 몸의 통제권을 되찾으려고 했다.

물론 이러한 그의 행동은 불행하게도 담천우의 급소를 제대로 찌른 것이었다.

‘너, 너. 손 그대로 두지 못해?’

어린 소녀 앞에서 두 손을 모으는 짓을 두 번이나 하는 것은, 담천우보고 혀를 깨물고 죽으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십 년.]

‘절대 안 돼.’

[그럼 하는 수 없지.]

‘제, 제길. 알았어, 알았다고. 삼 년은 어떻게 생각해 보지.’

[십 년!]

‘십 년은 절대 안 돼! 그렇게 되면 원수들이 다 죽어버릴 지도 몰라.’

담천우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가장 경악했던 것은, 자신이 죽은 지 벌써 칠 년이나 흘렀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팔 년.]

‘젠장할, 많이도 줄였다. 빌어먹을 놈. 줄이는 김에 더 줄여. 그녀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내가 다 없애 놓을 거야. 그리고 그 후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지. 어때?’

[흐음…….]

충현은 처음보다 기세가 많이 수그러들어 있었다.

[오 년!]

‘빌어먹을.’

담천우는 본능적으로 충현이 더 이상은 양보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좋다. 오 년.”

“네에?”

송린은 갑자기 담천우가 오 년이라는 말을 내뱉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두 손을 모으고 사과를 하지 않나, 뜬금없이 오 년이라는 말을 하지 않나.

“오 년 동안 지켜주겠다고.”

“지켜주겠다고요?”

송린은 멍한 시선으로 담천우를 바라보았다.

저런 앙상한 몸으로 누가 누구를 지켜주겠다고 하는 건지.

과거에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본인 몸이나 건사하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오 년 동안 지켜주기로 하셨어요?”

[공주님께는 경어를 쓸 것!]

“무보수로 위험요소를 모두 제거해… 드리지요. 흥!”

담천우는 죽었다 깨어나도 어린 여자에게 존댓말을 쓰기는 싫었지만, 쓰지 않았다가는 또다시 두 손을 모으게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송린은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손뼉을 쳤다.

“아!”

“뭐, 뭡니까? 그 측은하다는 눈빛은?”

“가엾게도… 갈 데가 없으시군요?”

“뭐, 뭐라고요? 하아, 정말이지 어이가 없네. 감히 본좌가 누구인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 십니까?”

“누구신데요?”

“잘 들어봐… 세요. 당대 제일을 넘어 역대급 무인이라고 불렸던 사람이 바로 이 몸이십니다.”

“이런… 머리까지 다치셨나 보군요. 당대 제일은 소림의 불성이신 광적대사시잖아요.”

“……빌어먹을.”

담천우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너무 일찍 죽은 것 같았다.

진작 불성하고 결판을 냈으면, 이런 평은 절대 안 들었을 텐데 말이다.

“좋아요. 갈 곳이 없다면 당분간 여기서 지내는 것은 상관없어요.”

그녀가 이렇게 결정한 것에는 괜찮을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 때문이었다.

물론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서 쓰는 조금 이상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고 스스로 납득해 버렸다.

“……제기랄.”

담천우는 시큰해지는 눈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려 천마인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어린 소녀라니.

자신을 이런 처지로 만든 충현에게 담천우는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그냥… 천우라고 불러 주십시오.”

담천우라고 말하려다가 꺼림칙한 느낌에 그는 성을 떼고 이름만 말했다.



* * *



“어이, 천 씨. 쉬엄쉬엄해.”

“끄응…….”

“하하하. 천 씨는 말이 좀 없기는 해도 일을 잘해서 좋아. 내 처음에는 말투만 듣고 사람을 오해했지 뭔가?”

담천우는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괜스레 친한 척을 하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송가상단에서 잡일을 도맡아 하는 쟁자수, 송형욱이라고 소개했다.

담천우는 이 녀석이 자신만 보면 이렇게 좋아 죽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맨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다.

대행수를 따라 군식구인 담천우가 왔을 때는 주걱턱을 내밀며 싫은 티를 팍팍 냈었다.

이 초보자 녀석 어쩌고 하면서 군기도 잡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담천우의 어깨와 손에 들려 있는 한 가득이나 되는 짐이 이 녀석이 푸근하게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보통사람은 엄두도 못 낼 어마어마한 양.

담천우는 이걸 한꺼번에 날라주었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일을 안 해도 노임을 따박따박 받아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아직도 대행수가 못살게 구는가?”

“뭐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습니다.”

그새 담천우의 존댓말은 꽤나 많이 늘어 있었다.

아마도 생각보다도 쉽사리 이렇게 입에서 존댓말이 튀어나오는 것은, 충현의 영혼과 섞여서 혼탁해졌기 때문일 터였다.

“허허, 거참. 대행수님도 이제는 그만 해도 될 것 같은데 말일세.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이제부터 잘하면 되지. 안 그런가? 내 언제 한번 만나게 되면 언질을 해주겠네. 이래봬도 나하고 송찬 대행수는 먼 친척뻘이야, 친척뻘.”

송형욱은 짐짓 가슴을 탕탕 치면서 호언장담을 했다.

물론 담천우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뒤통수를 거하게 맞고 나서부터 담천우는 사람의 눈을 보기 시작했는데, 이 녀석은 느낌이 쎄한 것이 별로였기 때문이었다.

담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툭툭 털어냈다.

“뭐 이해는 합니다. 제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약값이 많이 들었다고 하더라구요.”

“나도 소문은 들었네. 지금 모습을 보면 도무지 상상이 안 되기는 하지만 말이야.”

“네, 그래서 제가 그냥 넘어가 주는 겁니다. 안 그랬으면…….”

송형욱은 순간 빙굴에라도 들어간 듯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네는 그렇게 좀 웃지 말게. 눈은 안 웃는데 입만 웃는 게 어쩐지 서늘하단 말이지. 보기에는 서생같이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요?”

담천우 또한 지금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척하기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분위기 있는 얼굴.

하지만 눈을 좀 크게 뜨면…….

그런 대로 무인다웠다.

눈은 그나마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하하하. 난 하루라도 자네 얼굴로 살아봤으면 좋겠네. 아, 눈만 빼고 말이지.”

“…….”

누런 이를 뽐내면서 너스레를 떠는 송형욱의 말에 담천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저놈 하고는 안 맞아.



* * *



깨어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담천우의 일상은 극히 단조로웠다.

오전에는 출고할 물품을 창고에서 내놓고, 오후에는 입고할 물품을 정리하는 일.

대행수 송찬은 억하심정에서인지 상단의 일꾼이나 하는 잡무를 담천우에게 시켰다.

송린 몰래 시키는 것이 분명했지만, 담천우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더럽게 평화롭네.’

지금 담천우의 입에 담겨 있는 건, 자신도 믿을 수가 없었지만 분명 미소였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부뚜막 연기와 함께 고즈넉하게 물들어 있는 저녁노을.

이런 것을 보면서 살심을 품고 살 수는 없었다.

지루하지만 평화롭다. 그리고 뭔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전생에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기분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즐길 마음도 있었다.

하루하루 누군가를 밥 먹듯이 죽이고 다녔고, 천마의 자리에 오른 뒤로는 직접 손을 쓰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입에서 가볍게 나온 말로도 누군가는 반드시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누구도 죽일 필요가 없었다.

제기랄, 따분하네.

담천우는 확실히 자신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했다.

경어도 쓸 줄 알고, 평화도 누릴 줄 알게 되었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마도천하를 이뤄내야 하는데…….

‘제기랄.’

나태하게 누워있던 담천우의 눈에 한가롭게 저녁 하늘에 떠있는 적운이 보였다.

그런 와중에도 천일령원기공은 도도히 흘러가고 있었다.



* * *



천마도는 내 팔십 평생에 가장 힘든 상대였다.

기껏 파훼법을 생각해 두면, 그는 전날과는 전혀 다른 수법을 들고서 나타났다.

아예 어제까지의 그는 없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천마도 담천우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내일이 아닌 어제의 그를 만나는 방법뿐이다.



-무림열전 천마도 담천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