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심상공간의 그와 만나다(1)
(1)
“거 말하는 뽄새를 보니까 홍 의원이 삐진 것 같단 말이지. 그나저나 그 핑계로 우리 상단 사람들을 치료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아이, 깜짝이야!”
투덜대던 송찬은 장지문을 열다말고 혼비백산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담천우는 침상에 앉아서 그런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서생마냥 유건을 비스듬하게 눌러쓴 송찬은 마르지도 비대하지도 않은 오십대의 평범한 상인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악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자네… 진짜로 깨어난 거야? 그것도 석 달 만에? 허허, 진짜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만.”
“거참, 소란 떨기는. 조용히 좀 하지?”
일단 깨어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망설일 것은 없었다. 담천우는 지난 몇 개월간 자리를 지켜준 포단을 걷어치우고는 벌떡 일어났다.
“살짝 배가 고프기는 하지만, 본좌를 구해준 은인에게 감사인사부터 해야겠다. 앞장서… 아니다. 그 아이의 기운을 알고 있으니 내가 앞장서도록 하지.”
“뭐, 뭐야? 헌데 왜 다짜고짜 반말이야!”
딴에는 너무 주눅들어있었다 생각했는지, 송찬은 담천우의 등에다 대고 버럭 역정을 냈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담천우는 당연히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저만치 앞서 나갔다.
‘근골이 좋아.’
이렇게 걷고 나서야 재생(再生)한 놈의 몸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림짐작이기는 하지만 다소 체구가 작았던 자신에 비해 반 척은 커보였다.
물론 그간에 죽을 고비를 겪어서인지 몸이 삐쩍 말라서 건장하다는 느낌은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어이, 임마! 방향이나 알고 가는 거야? 같이 가야지!”
뒤에서 다시 송찬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려왔다.
하지만 담천우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젊어지니까 좋군.’
방 앞에 놓인 구리동경에는 바싹 말라는 있지만 아직은 앳돼 보이는 청년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 * *
삐그덕.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담천우는 저택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문의 경첩은 물론이고, 중문에다 장지문까지 죄다 삐걱거렸다.
고택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낡고 허름했다.
송가상단 상단주실.
장지문을 열고 들어가자 처음 담천우의 눈에 보인 것은, 의외로 내실 정면에 붙어있던 족자였다.
대의멸친(大義滅親).
서당에나 어울릴 법한 이런 말을 왜 써붙여 놨을까.
“무… 슨 일이시죠?”
“뭔 상단에 대의가 있다고, 쯧쯧.”
“어인 일이시기에 아녀자의 방에 이리도 불쑥 들어오셨습니까?”
아!
순간 담천우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한 가지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물끄러미 담천우를 바라보고 있는 묘령의 처녀.
‘예쁘군.’
사실상 이 정도의 말로는 부족한,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게 예뻤다.
‘아니, 이 정도 외모면 황궁에 들어가서 황제를 쥐락펴락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며 담천우가 유심히 쳐다보고 있자, 그녀는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의문 정도였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날카롭게 변하고 있었다.
담천우가 슬슬 본론을 꺼내놓으려는 그때.
“아휴, 죽다 살아난 놈의 발걸음이 어째 저리도 빠를까. 가랑이가 찢어지는 줄 알았네.”
송찬이 죽겠다는 표정으로 헐떡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짧지만 곤란했던 상황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아, 대행수님! 이분… 누구시죠?”
“상단주님께서 구해주시고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에? 그럼 이분이……?”
조용한 목소리와는 달리 한껏 크게 뜬 눈을 보니 무척이나 놀란 듯했다.
담천우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여색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 아이의 미모는 부동심을 흔들어 놓을 만큼 꽤나 대단한 것이었다.
담천우는 아직도 삐걱거리는 몸을 약간 숙이며 포권을 했다.
“구해줘서 고맙다.”
담천우의 말에 그녀의 토끼처럼 커다란 눈망울이 세차게 흔들렸다.
어떤 부분에서 이렇듯 놀란 것인지 담천우는 순간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십만대산을 다스렸던 내가 조그마한 상단의 주인에게 몸을 조아렸다는 것을 옛 부하 놈들이 안다면 얼마나 놀려댈까.
“이놈이! 은인이라면서 말투가 그게 뭐야!”
송찬의 고함에 담천우는 조금은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그로서는 최대한의 공경을 표시한 것이었다.
만약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몸을 숙일 일은 결단코 없었을 터였다.
그리고 단언컨대, 지금의 감사인사는 담천우의 일평생 가장 예의바른 말투였다.
“이럴 때는… 고맙습니다, 라고 해야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천우는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니 예전처럼은 행동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지금의 상황에 맞출 필요가 있었다.
“대행수님, 그만하셔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그나저나 몸은 좀 괜찮으신지……. 아직은 이리 돌아다니시면 안 될 텐데요.”
“그런대로 괜찮… 습니다.”
“그래도 안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아까처럼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크흠, 뭐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담천우가 슬쩍 곁눈질로 보니 송찬이 얼굴을 붉히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하지만 담천우는 짐짓 모르는 척 했다.
‘그나저나 저 아이는 어찌 저리 피곤해 보일까.’
관심이 가는 만큼 보인다고, 그제야 상단주라는 여자의 얼굴에서 미색 외에도 다른 부분이 담천우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 밑의 거무스름한 기운, 푸석푸석해진 피부.
사흘 밤낮을 못잔 사람마냥 피곤이 쌓여 있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본연의 미색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분을 처바른 어느 여인보다도 빛나고 있었으니까.
‘고집은 좀 셀 수도 있을 것 같고.’
오뚝한 코와 야무지게 다물어진 입술을 보고서 담천우가 나름 그런 판단을 내리고 있는데, 그녀의 청명한 음성이 귓가로 들려왔다.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제가 구한 분이 혹시 악인이면 어떡하나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아, 악인… 아하하.”
담천우는 심히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왜 그러세요?”
“저기 말이지. 내가 소싯적에 사람을 좀 많이 죽였거든.”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따가운 눈총이 담천우의 얼굴에 꽂혔다.
분위기가 극전인 반전을 한 것을 보니 괜히 얘기했나 싶었다.
한참 후에야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당신은… 악인인가요?”
“험험. 그게 그러니까, 그런대로 선량하다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하도 그녀의 반응이 안 좋다 보니, 순간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왠지 그녀에게서 미움을 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담천우의 말에 먹구름이 걷히듯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 그럼 악당을 처치하던 협객이셨나 보군요.”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뭐 어쩌다 보니 이래저래 사람을 많이 죽이기는 했지. 고의는 아니었고.”
솔직히 이 말도 거짓에 가까웠다. 천마신교의 교주가 악인이 아니라면 누가 악인이겠는가.
“그래서 말인데, 본좌가 가장 잘하는 게 사람을 죽이는 거거든. 그러니 그대도 혹시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면 말만 하라고. 내 친히 신경 써서 손을 쓰도록 하지.”
“당장… 나가줘요. 당장요!”
담천우는 귓가를 때리는 고함에 순간 움찔했다.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것일까.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를 내려다가, 담천우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대행수님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네요. 석 달이나 고생고생해서 살린 사람이 살인귀였다니…….”
“살인귀라니!”
담천우는 펄쩍 뛰었다.
아무리 내가 천마신교의 교주고, 사람도 많이 죽이고, 방화도… 많이 저질렀다지만…….
젠장. 객관적으로 열거하고 보니 별로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렇게 얘기하는 건 좀 아니지.
“그, 그렇게까지 악당은 아닌 것 같은데…….”
물론 변명이 당당하지는 못했기에 담천우는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저에게 굳이 변명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제 앞에서 사라져 주세요.”
“사라져… 달라고?”
왠지는 모르겠다.
고작 방년이나 됐을 법한 여아의 시답지 않은 말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담천우는 가슴 속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이 여자의 말은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맞아요. 변명 하지 마시고 그냥 갈길 가세요. 저는 사람 목숨을 업신여기는 분은 그리 좋아 하지 않습니다.”
“사람 목숨을 업신여긴다? 웃기는 소리!”
그녀만큼 담천우의 음성도 올라갔고, 그 탓에 갈라진 목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왔다.
담천우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그녀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모르나 본데, 강호에 몸을 담근 순간 반쯤은 죽음에 발을 걸친 것이다.”
“그건…….”
“무인에게 누굴 죽이지 말라고 하는 건, 그냥 눈감고 뒈지라는 것과 같은 논리다.”
“그, 그렇지만 그렇게 함부로…….”
“함부로? 사리분별을 다하면서 죽일 수 있다면, 강호라고 할 수 있을까?”
말을 하면서도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고작 방년이나 되었을 법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붙잡고 강호 운운하는 건 너무 닭살 돋는 얘기였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그럼에도 담천우는 스스로도 납득 못할 화를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태생이 거칠어서 해줄 수 있는 게 사람 죽여주는 것밖에는 없다.”
“그, 그런…….”
“그리고 너 또한 상계에 있으니 강호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너무 잔인했나?
그렇지만 저렇게 현실을 모르는 모습을 보니 한 번쯤은 밟아주고 싶었다.
“이 건방진 녀석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상단주님 앞에서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상단주님,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놈입니다.”
천하의 쌍놈이라도 본 것 마냥 송찬은 삿대질을 해댔다.
바로 그때.
“다행이에요.”
“다행……?”
“제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은연중에 저를 깨우쳐주시려고 하신 건데 그것도 모르고. 역시 당신은 좋은 분이셨어요.”
아!
담천우는 내심 탄성을 내질렀다.
이 여인이 유독 불편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순수함.
그것은 담천우가 가지고 있지 않은 무언가였고, 평생 가지지 못할 결핍이었다.
담천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도사의 득도와도 같은 깨달음이었다.
……이곳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왜 그러세요?”
“가겠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여기는 영 내 체질에 안 맞는 곳이다. 은혜를 갚는 건 추후로 미루도록 하지.”
원래 담천우가 세상에서 상종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부류는 딱 한 종류였다.
표리부동한 정파인.
그런데 지금 하나가 더 생겼다.
바로 눈앞의 이 여인.
“그 몸을 하시고 어딜 가시려고요?”
“몸보다도 마음이 불편해서 안 되겠다.”
“무슨 저런 막돼먹은 녀석이 다 있어! 석 달 내내 쌔가 빠지도록 돈까지 들여가면서 기껏 살려놓았더니. 뭐어? 그냥 가겠다고? 에라이. 이 천하에 경우 없는 녀석, 빌어먹을 녀석아!”
“제삼자는 빠지지. 본좌가 봐주는 것도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으니까.”
담천우의 말에 송찬의 얼굴이 움찔하고 얼어붙었다.
일반인이 무인의 살기가 담긴 음성을 그대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담천우는 고개를 돌리고 상단주 쪽을 보며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반드시 은혜를 열 배 이상으로 갚도록 하지. 본좌는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킨다.”
“진짜 이대로 가신다고요?”
애절한 목소리에 담천우는 살짝 마음이 흔들릴 뻔했다.
이 여인은 나를 언제 봤다고 이렇게 걱정을 하는 것이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것일까.
“제가 공자의 사정도 모르고 너무 막말을 했어요. 아녀자의 좁은 소견이라 생각하시고 넘어가주시면 안될까요? 설사 가시더라도 지금은 아니에요. 석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이제야 겨우 일어나셨는걸요.”
크윽.
이렇게도 내상을 입을 수가 있는 거였구나.
“……가겠다.”
이건 순전히 담천우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였다.
저 순백의 결정체에 더 크게 내상을 입기 전에 튀는 걸로 하자.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담천우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발인데,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를 않았다.
너무 몸을 안 움직이다가 움직여서 생겨난 경련인가 싶어 짐짓 힘을 줘봤지만, 아예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마치 남의 몸인 것처럼.
[못 간다, 이놈!]
순간 담천우는 귀를 의심했다.
송찬이 말한 것인가 싶어 그를 바라봤지만, 정작 그는 간다고 해놓고 왜 안가냐는 식으로 담천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두근.
심장이 급격히 빨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는 못 간다!]
담천우는 당황스러웠다.
너, 설마…….
충현이라는 놈의 잔존사념인 것인가?
* * *
담천우의 예상은 정확했다.
[그렇다.]
현생에서는 처음 들은 그 녀석의 음성은 생각보다는 침울하지 않았다. 죽으려고만 하던 녀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문제는 이 상황 자체가 담천우에게는 썩 반갑지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마치 원래의 주인을 알아보기라도 하듯, 몸의 신경 하나하나가 살아나는 듯한 야릇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담천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물론 속으로.
‘뭐야? 갑자기 안 그러던 놈이 말을 걸고. 그보다 너 지금 뭐하는 거냐? 네 몸이라고 지금 시위하는 거야, 뭐야. 그런다고 내가…….’
[그런 거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니? 몸을 돌려 달라고 이러는 거 아니었어?’
[그래. 돌려달라는 게 아니다.]
‘뭐 그럼 다행이고.’
생각보다는 담백하게 신체를 포기하는 잔존사념의 태도에 담천우는 한숨을 돌렸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했다.
아직도 발은 자철에라도 붙은 것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슬쩍 곁눈질로 보니, 상단주와 대행수는 그런 담천우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짜증이 난 목소리로 담천우가 충현에게 말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이대로는 못 간다.]
‘그래, 원하는 게 있었군. 뭘 해줄까? 아, 분명히 말하지만 죽어줄 수는 없어.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담천우는 충현이 뭘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충현에게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저분을 저리 놔두고는 갈 수 없다.]
‘저분? 저분이 누군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던지라, 무려 몇 달씩이나 다퉈온 존재라는 것도 잊은 채 담천우는 반문을 했다.
그런데.
[……공주마마시다. 너의 앞에 계신 분은.]
그 순간, 담천우는 인정해 버렸다.
이 새끼, 미친놈이다. 그것도 완전히 미친놈.
‘저어기… 앞을 제대로 보세요. 앞이 안 보이시나? 여기 공주가 어디 있어? 내 눈에는 세상물정 모르는 꼬맹이밖에는 안 보이거든?’
[선랑공주시다.]
‘……뭐?’
영문을 몰라서 멍해 있던 담천우의 앞으로 갑자기 충현의 기억들이 그림처럼 쭈르륵 펼쳐졌다.
아!
보는 순간 담천우는 이 녀석이 왜 이렇게 얘기하는지 알 것 같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뭔가 수많은 기억들이 담천우의 뇌리에 덧씌워졌다.
담천우는 좀 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상단주를 바라보았다.
‘닮긴 닮았네.’
충현의 말처럼 눈앞의 여인은 환상 속에서 보았던 선랑공주와 매우 닮아 있었다.
마치 쌍둥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담천우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건 그냥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닮았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놈이 보통 미친놈이 아니라는 거였다.
[선랑공주님이 분명하시다.]
담천우는 확신했다.
이놈이 폭혈공을 쓸 때 머리까지 다친 게 분명하다고.
‘저기요, 충현 선생? 너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해봐라. 공주가, 그것도 고구려 공주가 이런 곳에 있겠냐?’
[공주님…….]
듣지도 않네, 이거.
어쩌다가 이런 미친놈한테 걸려가지고.
아!
하지만 담천우는 쉽사리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냈다.
본인한테 직접 들으면 되잖아.
“거기 상단주, 혹시 그쪽 이름이 선랑인가? 아니면 그런 이름의 언니나 여동생이 있다거나.”
“제 이름은 송린이에요. 헌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그게 말야……. 에휴, 나도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거든. 그러니 있는지 없는지만 대답해줘.”
“당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전 무남독녀에요.”
부끄러움은 오로지 담천우의 몫이었다.
왜 내가 미친놈 취급을 당해야 하는데!
‘봤지? 들었지? 아니라잖아.’
“너 당장 나와! 이게 무슨 돼먹지 않은 짓이야!”
화가 단단히 났는지 송찬 대행수가 담천우의 손을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이놈이 만근추라도 익혔나. 왜 이렇게 안 움직여?”
송찬 대행수는 기가 막힌다는 듯 담천우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담천우는 계속해서 충현에게 말을 붙였다.
‘어이, 들었지? 저 여자는 선랑공주가 아니야. 본인도 인정했잖아. 어떤 식으로든 연관성이 없어.’
[공주님, 저 충현입니다! 공주님, 살아계셨군요. 다행입니다.]
‘빌어먹을 놈.’
담천우는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하필 환혼을 해도, 이런 노예근성을 가진 놈의 육체로 하게 된 것일까.
‘아주 꺼져 버려!’
담천우는 심상 공간 저 너머에 처박아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충현을 향해 일갈을 했다.
하지만 충현은 원념의 대상이라고 할 만한 이를 만났기 때문인지, 담천우에게 힘없이 발렸던 시절과는 기세 자체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비, 빌어먹을. 안 돼!’
그 순간! 담천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자기 스스로가 손을…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천마 담천우가 한낱 여자 따위 앞에서… 이런 제기랄!
(1)
“거 말하는 뽄새를 보니까 홍 의원이 삐진 것 같단 말이지. 그나저나 그 핑계로 우리 상단 사람들을 치료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아이, 깜짝이야!”
투덜대던 송찬은 장지문을 열다말고 혼비백산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담천우는 침상에 앉아서 그런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서생마냥 유건을 비스듬하게 눌러쓴 송찬은 마르지도 비대하지도 않은 오십대의 평범한 상인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악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자네… 진짜로 깨어난 거야? 그것도 석 달 만에? 허허, 진짜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만.”
“거참, 소란 떨기는. 조용히 좀 하지?”
일단 깨어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망설일 것은 없었다. 담천우는 지난 몇 개월간 자리를 지켜준 포단을 걷어치우고는 벌떡 일어났다.
“살짝 배가 고프기는 하지만, 본좌를 구해준 은인에게 감사인사부터 해야겠다. 앞장서… 아니다. 그 아이의 기운을 알고 있으니 내가 앞장서도록 하지.”
“뭐, 뭐야? 헌데 왜 다짜고짜 반말이야!”
딴에는 너무 주눅들어있었다 생각했는지, 송찬은 담천우의 등에다 대고 버럭 역정을 냈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담천우는 당연히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저만치 앞서 나갔다.
‘근골이 좋아.’
이렇게 걷고 나서야 재생(再生)한 놈의 몸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림짐작이기는 하지만 다소 체구가 작았던 자신에 비해 반 척은 커보였다.
물론 그간에 죽을 고비를 겪어서인지 몸이 삐쩍 말라서 건장하다는 느낌은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어이, 임마! 방향이나 알고 가는 거야? 같이 가야지!”
뒤에서 다시 송찬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려왔다.
하지만 담천우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젊어지니까 좋군.’
방 앞에 놓인 구리동경에는 바싹 말라는 있지만 아직은 앳돼 보이는 청년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 * *
삐그덕.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담천우는 저택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문의 경첩은 물론이고, 중문에다 장지문까지 죄다 삐걱거렸다.
고택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낡고 허름했다.
송가상단 상단주실.
장지문을 열고 들어가자 처음 담천우의 눈에 보인 것은, 의외로 내실 정면에 붙어있던 족자였다.
대의멸친(大義滅親).
서당에나 어울릴 법한 이런 말을 왜 써붙여 놨을까.
“무… 슨 일이시죠?”
“뭔 상단에 대의가 있다고, 쯧쯧.”
“어인 일이시기에 아녀자의 방에 이리도 불쑥 들어오셨습니까?”
아!
순간 담천우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한 가지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물끄러미 담천우를 바라보고 있는 묘령의 처녀.
‘예쁘군.’
사실상 이 정도의 말로는 부족한,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게 예뻤다.
‘아니, 이 정도 외모면 황궁에 들어가서 황제를 쥐락펴락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며 담천우가 유심히 쳐다보고 있자, 그녀는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의문 정도였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날카롭게 변하고 있었다.
담천우가 슬슬 본론을 꺼내놓으려는 그때.
“아휴, 죽다 살아난 놈의 발걸음이 어째 저리도 빠를까. 가랑이가 찢어지는 줄 알았네.”
송찬이 죽겠다는 표정으로 헐떡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짧지만 곤란했던 상황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아, 대행수님! 이분… 누구시죠?”
“상단주님께서 구해주시고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에? 그럼 이분이……?”
조용한 목소리와는 달리 한껏 크게 뜬 눈을 보니 무척이나 놀란 듯했다.
담천우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여색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 아이의 미모는 부동심을 흔들어 놓을 만큼 꽤나 대단한 것이었다.
담천우는 아직도 삐걱거리는 몸을 약간 숙이며 포권을 했다.
“구해줘서 고맙다.”
담천우의 말에 그녀의 토끼처럼 커다란 눈망울이 세차게 흔들렸다.
어떤 부분에서 이렇듯 놀란 것인지 담천우는 순간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십만대산을 다스렸던 내가 조그마한 상단의 주인에게 몸을 조아렸다는 것을 옛 부하 놈들이 안다면 얼마나 놀려댈까.
“이놈이! 은인이라면서 말투가 그게 뭐야!”
송찬의 고함에 담천우는 조금은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그로서는 최대한의 공경을 표시한 것이었다.
만약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몸을 숙일 일은 결단코 없었을 터였다.
그리고 단언컨대, 지금의 감사인사는 담천우의 일평생 가장 예의바른 말투였다.
“이럴 때는… 고맙습니다, 라고 해야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천우는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니 예전처럼은 행동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지금의 상황에 맞출 필요가 있었다.
“대행수님, 그만하셔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그나저나 몸은 좀 괜찮으신지……. 아직은 이리 돌아다니시면 안 될 텐데요.”
“그런대로 괜찮… 습니다.”
“그래도 안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아까처럼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크흠, 뭐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담천우가 슬쩍 곁눈질로 보니 송찬이 얼굴을 붉히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하지만 담천우는 짐짓 모르는 척 했다.
‘그나저나 저 아이는 어찌 저리 피곤해 보일까.’
관심이 가는 만큼 보인다고, 그제야 상단주라는 여자의 얼굴에서 미색 외에도 다른 부분이 담천우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 밑의 거무스름한 기운, 푸석푸석해진 피부.
사흘 밤낮을 못잔 사람마냥 피곤이 쌓여 있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본연의 미색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분을 처바른 어느 여인보다도 빛나고 있었으니까.
‘고집은 좀 셀 수도 있을 것 같고.’
오뚝한 코와 야무지게 다물어진 입술을 보고서 담천우가 나름 그런 판단을 내리고 있는데, 그녀의 청명한 음성이 귓가로 들려왔다.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제가 구한 분이 혹시 악인이면 어떡하나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아, 악인… 아하하.”
담천우는 심히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왜 그러세요?”
“저기 말이지. 내가 소싯적에 사람을 좀 많이 죽였거든.”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따가운 눈총이 담천우의 얼굴에 꽂혔다.
분위기가 극전인 반전을 한 것을 보니 괜히 얘기했나 싶었다.
한참 후에야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당신은… 악인인가요?”
“험험. 그게 그러니까, 그런대로 선량하다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하도 그녀의 반응이 안 좋다 보니, 순간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왠지 그녀에게서 미움을 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담천우의 말에 먹구름이 걷히듯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 그럼 악당을 처치하던 협객이셨나 보군요.”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뭐 어쩌다 보니 이래저래 사람을 많이 죽이기는 했지. 고의는 아니었고.”
솔직히 이 말도 거짓에 가까웠다. 천마신교의 교주가 악인이 아니라면 누가 악인이겠는가.
“그래서 말인데, 본좌가 가장 잘하는 게 사람을 죽이는 거거든. 그러니 그대도 혹시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면 말만 하라고. 내 친히 신경 써서 손을 쓰도록 하지.”
“당장… 나가줘요. 당장요!”
담천우는 귓가를 때리는 고함에 순간 움찔했다.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것일까.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를 내려다가, 담천우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대행수님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네요. 석 달이나 고생고생해서 살린 사람이 살인귀였다니…….”
“살인귀라니!”
담천우는 펄쩍 뛰었다.
아무리 내가 천마신교의 교주고, 사람도 많이 죽이고, 방화도… 많이 저질렀다지만…….
젠장. 객관적으로 열거하고 보니 별로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렇게 얘기하는 건 좀 아니지.
“그, 그렇게까지 악당은 아닌 것 같은데…….”
물론 변명이 당당하지는 못했기에 담천우는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저에게 굳이 변명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제 앞에서 사라져 주세요.”
“사라져… 달라고?”
왠지는 모르겠다.
고작 방년이나 됐을 법한 여아의 시답지 않은 말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담천우는 가슴 속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이 여자의 말은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맞아요. 변명 하지 마시고 그냥 갈길 가세요. 저는 사람 목숨을 업신여기는 분은 그리 좋아 하지 않습니다.”
“사람 목숨을 업신여긴다? 웃기는 소리!”
그녀만큼 담천우의 음성도 올라갔고, 그 탓에 갈라진 목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왔다.
담천우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그녀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모르나 본데, 강호에 몸을 담근 순간 반쯤은 죽음에 발을 걸친 것이다.”
“그건…….”
“무인에게 누굴 죽이지 말라고 하는 건, 그냥 눈감고 뒈지라는 것과 같은 논리다.”
“그, 그렇지만 그렇게 함부로…….”
“함부로? 사리분별을 다하면서 죽일 수 있다면, 강호라고 할 수 있을까?”
말을 하면서도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고작 방년이나 되었을 법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붙잡고 강호 운운하는 건 너무 닭살 돋는 얘기였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그럼에도 담천우는 스스로도 납득 못할 화를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태생이 거칠어서 해줄 수 있는 게 사람 죽여주는 것밖에는 없다.”
“그, 그런…….”
“그리고 너 또한 상계에 있으니 강호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너무 잔인했나?
그렇지만 저렇게 현실을 모르는 모습을 보니 한 번쯤은 밟아주고 싶었다.
“이 건방진 녀석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상단주님 앞에서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상단주님,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놈입니다.”
천하의 쌍놈이라도 본 것 마냥 송찬은 삿대질을 해댔다.
바로 그때.
“다행이에요.”
“다행……?”
“제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은연중에 저를 깨우쳐주시려고 하신 건데 그것도 모르고. 역시 당신은 좋은 분이셨어요.”
아!
담천우는 내심 탄성을 내질렀다.
이 여인이 유독 불편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순수함.
그것은 담천우가 가지고 있지 않은 무언가였고, 평생 가지지 못할 결핍이었다.
담천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도사의 득도와도 같은 깨달음이었다.
……이곳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왜 그러세요?”
“가겠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여기는 영 내 체질에 안 맞는 곳이다. 은혜를 갚는 건 추후로 미루도록 하지.”
원래 담천우가 세상에서 상종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부류는 딱 한 종류였다.
표리부동한 정파인.
그런데 지금 하나가 더 생겼다.
바로 눈앞의 이 여인.
“그 몸을 하시고 어딜 가시려고요?”
“몸보다도 마음이 불편해서 안 되겠다.”
“무슨 저런 막돼먹은 녀석이 다 있어! 석 달 내내 쌔가 빠지도록 돈까지 들여가면서 기껏 살려놓았더니. 뭐어? 그냥 가겠다고? 에라이. 이 천하에 경우 없는 녀석, 빌어먹을 녀석아!”
“제삼자는 빠지지. 본좌가 봐주는 것도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으니까.”
담천우의 말에 송찬의 얼굴이 움찔하고 얼어붙었다.
일반인이 무인의 살기가 담긴 음성을 그대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담천우는 고개를 돌리고 상단주 쪽을 보며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반드시 은혜를 열 배 이상으로 갚도록 하지. 본좌는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킨다.”
“진짜 이대로 가신다고요?”
애절한 목소리에 담천우는 살짝 마음이 흔들릴 뻔했다.
이 여인은 나를 언제 봤다고 이렇게 걱정을 하는 것이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것일까.
“제가 공자의 사정도 모르고 너무 막말을 했어요. 아녀자의 좁은 소견이라 생각하시고 넘어가주시면 안될까요? 설사 가시더라도 지금은 아니에요. 석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이제야 겨우 일어나셨는걸요.”
크윽.
이렇게도 내상을 입을 수가 있는 거였구나.
“……가겠다.”
이건 순전히 담천우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였다.
저 순백의 결정체에 더 크게 내상을 입기 전에 튀는 걸로 하자.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담천우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발인데,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를 않았다.
너무 몸을 안 움직이다가 움직여서 생겨난 경련인가 싶어 짐짓 힘을 줘봤지만, 아예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마치 남의 몸인 것처럼.
[못 간다, 이놈!]
순간 담천우는 귀를 의심했다.
송찬이 말한 것인가 싶어 그를 바라봤지만, 정작 그는 간다고 해놓고 왜 안가냐는 식으로 담천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두근.
심장이 급격히 빨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는 못 간다!]
담천우는 당황스러웠다.
너, 설마…….
충현이라는 놈의 잔존사념인 것인가?
* * *
담천우의 예상은 정확했다.
[그렇다.]
현생에서는 처음 들은 그 녀석의 음성은 생각보다는 침울하지 않았다. 죽으려고만 하던 녀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문제는 이 상황 자체가 담천우에게는 썩 반갑지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마치 원래의 주인을 알아보기라도 하듯, 몸의 신경 하나하나가 살아나는 듯한 야릇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담천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물론 속으로.
‘뭐야? 갑자기 안 그러던 놈이 말을 걸고. 그보다 너 지금 뭐하는 거냐? 네 몸이라고 지금 시위하는 거야, 뭐야. 그런다고 내가…….’
[그런 거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니? 몸을 돌려 달라고 이러는 거 아니었어?’
[그래. 돌려달라는 게 아니다.]
‘뭐 그럼 다행이고.’
생각보다는 담백하게 신체를 포기하는 잔존사념의 태도에 담천우는 한숨을 돌렸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했다.
아직도 발은 자철에라도 붙은 것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슬쩍 곁눈질로 보니, 상단주와 대행수는 그런 담천우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짜증이 난 목소리로 담천우가 충현에게 말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이대로는 못 간다.]
‘그래, 원하는 게 있었군. 뭘 해줄까? 아, 분명히 말하지만 죽어줄 수는 없어.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담천우는 충현이 뭘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충현에게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저분을 저리 놔두고는 갈 수 없다.]
‘저분? 저분이 누군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던지라, 무려 몇 달씩이나 다퉈온 존재라는 것도 잊은 채 담천우는 반문을 했다.
그런데.
[……공주마마시다. 너의 앞에 계신 분은.]
그 순간, 담천우는 인정해 버렸다.
이 새끼, 미친놈이다. 그것도 완전히 미친놈.
‘저어기… 앞을 제대로 보세요. 앞이 안 보이시나? 여기 공주가 어디 있어? 내 눈에는 세상물정 모르는 꼬맹이밖에는 안 보이거든?’
[선랑공주시다.]
‘……뭐?’
영문을 몰라서 멍해 있던 담천우의 앞으로 갑자기 충현의 기억들이 그림처럼 쭈르륵 펼쳐졌다.
아!
보는 순간 담천우는 이 녀석이 왜 이렇게 얘기하는지 알 것 같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뭔가 수많은 기억들이 담천우의 뇌리에 덧씌워졌다.
담천우는 좀 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상단주를 바라보았다.
‘닮긴 닮았네.’
충현의 말처럼 눈앞의 여인은 환상 속에서 보았던 선랑공주와 매우 닮아 있었다.
마치 쌍둥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담천우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건 그냥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닮았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놈이 보통 미친놈이 아니라는 거였다.
[선랑공주님이 분명하시다.]
담천우는 확신했다.
이놈이 폭혈공을 쓸 때 머리까지 다친 게 분명하다고.
‘저기요, 충현 선생? 너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해봐라. 공주가, 그것도 고구려 공주가 이런 곳에 있겠냐?’
[공주님…….]
듣지도 않네, 이거.
어쩌다가 이런 미친놈한테 걸려가지고.
아!
하지만 담천우는 쉽사리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냈다.
본인한테 직접 들으면 되잖아.
“거기 상단주, 혹시 그쪽 이름이 선랑인가? 아니면 그런 이름의 언니나 여동생이 있다거나.”
“제 이름은 송린이에요. 헌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그게 말야……. 에휴, 나도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거든. 그러니 있는지 없는지만 대답해줘.”
“당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전 무남독녀에요.”
부끄러움은 오로지 담천우의 몫이었다.
왜 내가 미친놈 취급을 당해야 하는데!
‘봤지? 들었지? 아니라잖아.’
“너 당장 나와! 이게 무슨 돼먹지 않은 짓이야!”
화가 단단히 났는지 송찬 대행수가 담천우의 손을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이놈이 만근추라도 익혔나. 왜 이렇게 안 움직여?”
송찬 대행수는 기가 막힌다는 듯 담천우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담천우는 계속해서 충현에게 말을 붙였다.
‘어이, 들었지? 저 여자는 선랑공주가 아니야. 본인도 인정했잖아. 어떤 식으로든 연관성이 없어.’
[공주님, 저 충현입니다! 공주님, 살아계셨군요. 다행입니다.]
‘빌어먹을 놈.’
담천우는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하필 환혼을 해도, 이런 노예근성을 가진 놈의 육체로 하게 된 것일까.
‘아주 꺼져 버려!’
담천우는 심상 공간 저 너머에 처박아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충현을 향해 일갈을 했다.
하지만 충현은 원념의 대상이라고 할 만한 이를 만났기 때문인지, 담천우에게 힘없이 발렸던 시절과는 기세 자체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비, 빌어먹을. 안 돼!’
그 순간! 담천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자기 스스로가 손을…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천마 담천우가 한낱 여자 따위 앞에서… 이런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