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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 단단해져 가는 신뢰




김인식이 고물상을 떠났다.
사무실에 남아 있던 문재신이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왜 공 부장의 비리를 밝혔는지 궁금하십니까?”

그의 시선에 깃든 의아함은 뻔했다.
더 에스와 거래한 지 딱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었다.
돈이 급한 누리 리싸이클링의 입장에서는 공태식의 거래에 응하지 않아도, 적어도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시우는 그렇게 하기 싫었다.

“아마 동질감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이시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우는 공태식 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혐오했다.
마치 자신이 뭐라도 된 것마냥 남들을 부리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장성우 역시도 그랬다.
그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더니 이시우의 가치관에 싫어하는 사람이 어떤 유형인지 정확히 새겨졌다.

“그렇군요. 아무튼 더 에스가 이 대표님께 빚을 졌군요.”
“빚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업체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제 행동이 더 에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랄 뿐입다.”

한 번의 소동이 끝난 후, 진준식과 문재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결정은 하셨습니까?”

고철을 뺄 시기에 대해서 묻는 것이었다.
진준식이 고철 단가가 오르면 한 번 빼자는 말을 했다.
하지만 오를 단가를 알고 있는 이시우의 입장에선 굳이 뺄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오르면 그때 빼고 싶습니다.”
“흐음, 단가가 어느 정도 올라갈지는 모릅니다. 오히려 바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무조건 고철을 모아 놓아야 했다.
진준식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의 결정을 믿어 봐, 진 이사.”
“아, 저는 누리가 손해를 안 봤으면 해서…….”
“이 대표님도 진 이사의 그런 마음을 잘 아실 거야. 근데 매입을 한 단가가 있을 것 아닌가?”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 빼도 손해는 아니었다.
더 케이 베스틸과 명산철제의 고철 단가가 30원이나 차이가 나니까.
고철 단가가 340원이었을 때, 대량으로 고철을 구입했다고 장부에 기록되어 있었다.
20원의 단가가 올라 뺀다고 해도 손해는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고물상을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더 큰 게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

초조해할 필요는 없었다.
이시우의 확고한 눈동자를 본 문재신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문재신과 함께 고물상을 나온 진준식이 말했다.

“대표님, 고철 단가는 유동적입니다. 오를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는 게 고철인데…….”
“그래도 한 번 믿어 봐. 혹시 모르잖나? 이 대표님의 도박이 통할 수도.”
“흐음, 알겠습니다. 저희도 고철 단가가 오르면 고철들을 털어 내야 하지 않습니까?”
“대기해. 매달 보내는 양만 제철소로 보내고 나머지는 다 쌓아 놔.”
“예?”
“우리도 이제 승부를 봐야지.”

안전하게 간다면, 이번에 단가가 오를 때 빼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문재신은 이시우의 예측이 맞을 것만 같았다.

‘이 대표가 빼는 시기에 한 번에 뺀다.’

“한 달만 기다려 보자고. 조급하게 움직인다고 해서 수익을 낼 수 있는 게 아니야.”

명산철제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대상들이 치고 올라오는 중이었다.
고철을 가져올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었다.
단가 경쟁이 심각해지고 있는 지금, 라이벌 업체들과 간격을 벌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알겠습니다.”

***

두 사람이 돌아가자 사무실에 있던 이시우가 기지개를 폈다.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일이지만, 더 에스의 대표님과 거래를 이어 나가도 별다른 문제가 더 생기지는 않겠지. 문 대표님의 입장까지 고려하면 그대로 거래를 이어 가는 게 나아.’

이시우는 문재신의 체면을 세워 주고 싶었다.
도와준 만큼 은혜를 갚아야 한다.
아버지에게 배운 수많은 것들 중 하나였다.
정말로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이 진짜 인연이라는 아버지의 말.
그토록 귀찮게만 느껴지던 아버지의 잔소리가 지금 이시우에게는 하나하나 보물과도 같은 말들이었다.

“오늘은 손님들이 많이 와야 할 텐데…….”

***

괜한 우려였다.
단가가 높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손님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는 강현석의 도움이 컸다.
세 대가 동시에 고물상으로 들어왔다.

“이제 시작됐나 보다. 산소 접어! 손님들부터 우선적으로 받아야 한다.”

최문식은 산소를 잠그고 선을 정리했고, 박태문이 몰려오는 손님들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고철을 좀 가져왔는데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띠리링―
사무실에서 벨 소리가 들려왔다.
계근대에 올라간 1톤 차량을 빼기 위해 뒤에서 박태문이 수신호를 해 주었다.
차량이 빠지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차량이 계근대에 주차를 했다.
또 한 번의 벨 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차 앞으로 빼 주세요. 우선 앞차부터 내리고 내려 드릴게요.”

박태문이 산소를 정리하고 달려왔다.
그의 요청에 손님이 차를 사무실 앞으로 뺐다.
그리고 다음으로 들어온 차.
세 번째 계근까지 모두 마친 이시우가 목장갑을 착용하고 밖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내려 드릴 테니. 최 차장님, 공차 좀 적어 주세요!”

이시우는 사무실에서 나와 서둘러 굴삭기로 올라갔다.
그렇게 손님들의 물건을 모두 내려 준 이시우가 굴삭기의 시동을 껐다.
처음 보는 손님들.
이시우가 빠르게 사무실로 달려갔다.

‘첫 차는 경량, 두 번째 차도 경량, 세 번째 차는 중량. 차근차근 단가를 결정해 볼까?’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단가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을 단골로 만드는 법.
진심으로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했다.

“사장님, 대부분 판넬이더라고요.”
“네, 대신 안에 붙은 스티로폼을 깔끔하게 작업해서 가져 왔어요.”
“지금 경량의 단가는 210원이에요. 괜찮으시죠? 대신 감량은 없습니다.”

다른 고물상에서 180원 정도 받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30원이 더 높게 책정된 단가에 손님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머지 두 손님에게도 있는 그대로 설명을 해 준 이시우가 계좌번호를 적었다.

“지금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천천히 하세요. 오늘 중으로만 들어오면 되니까. 저어, 명함 한 장만 받아 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여기, 제 명함입니다.”

손님들은 이시우가 그저 직원이거나 아니면 대표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명함 속에 적혀 있는 직급은 대표이사.
이시우의 명함을 받은 세 명의 손님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손님들이 빠져나가고 장부를 정리하던 이시우가 고물상 마당 안으로 들어오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에게 박태문이 다가갔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저어, 혹시 철근도 판매하십니까?”
“몇 인치를 찾으시는데요?”
“어떤 철근이든 상관없습니다. 혹시 자제를 따로 빼놓으셨다면 좀 볼 수 있을까요?”
“저희는 따로 자제를 빼놓지는 않습니다.”

박태문의 말에 남자가 아쉽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이시우가 다가와 물었다.

“부장님,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아, 철근을 따로 사고 싶다고 오셨는데… 저희가 따로 자제로 빼놓지는 않아서요.”
“흐음, 잠시 사무실로 들어가시죠. 커피 한잔 드리겠습니다.”

이시우의 친절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우는 그를 데리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커피를 내줬다.
남자는 커피를 받아 들며 품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건넸다.

“전 중고 자제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사람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이시우는 그의 명함을 받아 이름과 업체명을 확인했다.
종종 주변 고물상에서 다른 고물상을 염탐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들의 눈에 불법적인 현장이 눈에 띄면 바로 민원이 들어왔다.

“사장님께 혹시 자제를 따로 뺄 의향이 있는지 여쭤봐 주셨으면 합니다.”

고물상에서 중고로 자제를 매입하는 업자.
그의 말에 이시우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제가 이곳의 대표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젊은 분이시라 생각도 못했군요.”
“아닙니다. 철근을 위주로 매입하시는 겁니까?”
“철근을 비롯한 철판 기타 등등의 자제를 매입합니다. H빔도 사들입니다.”
“흐음,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고철을 고철장에 보관하는 중입니다. 철근을 따로 정리하게 된다면 인건비도 상당해서요.”
“그렇겠죠. 저희 업체에서 사들이는 금액은 ㎏당 600원입니다. 아마 인건비를 조금 투자하시더라도 따로 빼놓는 게 고물상의 입장에서도 좋지 않습니까?”

㎏당 230∼240원에 사들여 600원에 넘긴다?
이건 두 배 이상 이득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흐음, 혹시 제가 나중에 따로 전화를 드려도 될까요?”

고철장에서 철근을 골라낸다고 해도 손해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처음부터 쌓는 게 나았다.

‘내겐 고철 생성 능력이 존재하니까. 다만 직원들 몰래 해야 한다는 게 흠이지만.’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제대로 준비해야 했다.
하루에 1톤.
㎏당 600원이라면 60만 원이라는 순이익을 볼 수도 있었다.
이시우의 정중한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물건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근데 철근의 길이는 어느 정도로……?”
“음, 2m 정도는 되었으면 합니다. 아, 1m 정도 되는 짧은 철근이더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1m에서 2m라… 알겠습니다.”

***

직원들을 보내고 홀로 사무실에 앉아 있던 이시우가 장부 정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강필중이 아직 명산철제에서 오지 않았기에 괜히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6시 30분쯤, 강필중이 고물상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늦었습니다, 사장님.”
“오늘 바쁘셨나 보네요?”
“아, 명산 일이 끝나고 현장 사람들을 보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내일 아마 7시쯤에 와서 집게차를 끌고 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일정이 바빠지겠네요. 아니면 박 부장님을 일찍 부르고 제가 집게차를 끌고 나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사장님께 전가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내일만 일찍 나오면 됩니다.”

강필중은 차 키를 반납하고 마지막으로 퇴근 도장을 찍었다.
고물상의 문을 잠고 고철장에 선 이시우.
그는 굴삭기로 적당한 길이의 철근을 하나 빼놓았다.

‘고철 생성.’

2m 정도 되어 보이는 철근.
철근에 손을 올린 이시우가 능력을 사용했다.

[고철을 스캔합니다.]
[아직 고철 생성 레벨에 미치지 못하여 생성이 불가능합니다.]

―――――――――――――――
<고철 생성>(lv. 1)
[무게와 부피에 제한이 있습니다.]
└ 1m 이상의 고철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 50㎏ 이상의 고철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

“아…….”

이시우는 그냥 아무 고철이나 생성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이시우의 고철 생성 레벨은 고작 1.
그저 고철 종류에 제한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이시우가 줄자를 가져왔다.
정확한 길이를 제고 1m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철근에 손을 가져다 댔다.
녹슨 부분이 없는 깨끗한 철근.

‘고철 생성.’

[고철을 스캔합니다.]
[생성 가능한 고철입니다. 1,000㎏를 생성하시겠습니까?]

‘생성한다.’

―――――――――――――――
<고철 생성>(lv. 1)
[생성한 고철] : 9,000㎏

승급 조건(21,00030,000)
└ 고철 생성으로 30,000㎏(30t)을 생성 시 lv. 2로 승급.
―――――――――――――――

사장이 된 지도 어느새 9일이나 흘렀다.
바쁘게 흘러간 시간을 잠시 생각하던 이시우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단 급한 대로 1m가 넘지 않는 철근을 생성했다.
차곡차곡 쌓여진 철근.
이시우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문제는… 이 철근들을 나 혼자 뺐다고 하면 박 부장님과 최 차장님이 믿어 주실까?’

오히려 나무랄지도 몰랐다.
직원들이 해야 할 일을 사장이 했다고 말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이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 물건이 들어왔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내일 강필중이 일찍 출근하면 자칫 거짓말이 들통날 수도 있었다.

‘휘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집어서 고철에 파묻어 놓자. 내가 위치만 잘 기억하면 그만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