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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 백 번이라도 고개를 숙일 수 있어




회식을 한 다음 날.
이시우는 숙취를 느끼며 일어났다.

‘오늘은 퇴근 후에 고철 생성을 해야겠어. 괜히 술기운에 포크레인에 올라갔다가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항상 안전에 유념해야 했다.
하루에 한 번씩 고철 생성 능력을 써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전을 뒤로할 수는 없었다.
이시우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찾았다.
현재 시각은 아침 7시.
직원들이 출근하는 시간은 9시 고정이었다.
그는 쓰린 속을 부여잡고 라면을 끓였다.
대충 아침을 먹고 뒷정리까지 마쳤지만, 시간은 그렇게 빨리 흘러가지 않았다.

‘8시도 안 됐네. 으으… 머리 아파.’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무시하며 그는 작업복을 갈아입고 멍하니 사무실 앞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홀가분한 표정의 강필중이 한 시간 더 빨리 출근했다.

“역시 나와 계셨군요, 사장님.”

비록 일은 시작하지 않았으나 고물상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시우는 그의 사장이었다.

“일찍 오셨네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지만, 할 말이 있어서 일찍 출근했습니다.”

강필중은 결정했다.
일주일이나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시우에게 도움이 된다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할 제안이었다.

“결정하셨어요?”
“네. 제 능력이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한 번 해 보고 싶습니다.”

어제의 술자리는 강필중에게 힘을 주었다.
비록 모든 것을 새롭게 개척해 나가야 할 업무일 게 분명하지만, 처음부터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고마워요, 강 기사님… 아니, 강 부장님.”
“앞으로 최선을 다해 영업을 해 오겠습니다. 절 믿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파이팅이 넘치는 목소리.
자신감이 가득한 그의 모습에 이시우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감사하죠. 저도 부족하고 강 부장님도 부족하겠지만, 우리 같이 최선을 다해 봐요.”

이시우가 기쁜 듯이 환하게 웃자, 강필중이 그를 따라 웃었다.
그때, 때마침 문재신이 고물상으로 들어오는 게 CCTV에 잡혔다.
이시우는 서둘러 그를 마중 나갔다.
다급하게 뛰어나오는 이시우를 향해 문재신이 고개를 숙였다.

“아침 일찍부터 절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놀랐습니다, 대표님.”
“강 부장님, 인사드리세요.”

어제 이미 인사를 나누었지만, 오늘의 강필중은 새로운 사람이었다.
강필중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앞으로 누리 리싸이클링의 영업 부장을 맡게 될 강필중이라고 합니다, 대표님.”
“하하, 명산철제의 대표 문재신입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하자, 이시우가 문재신에게 말을 걸었다.
그에게 다시 한번 부탁할 일이 생겼다.

“대표님,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릴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흐음,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사무실로 들어가자는 문재신의 말에 이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필중이 함께 사무실로 들어가려 하자, 이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강 부장님은 잠시 마당을 봐 주세요.”
“네? 아, 알겠습니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강필중이 마당 중앙으로 걸어갔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시우가 문재신을 향해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 이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탁을 하는 입장에서 정중해야 한다고 아버지께 배웠습니다.”

강필중이 비록 경험이 많더라도 영업에 관련된 일은 어려울 게 분명했다.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하는 입장.
하지만 이시우도 영업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제게 무슨 부탁을 하고 싶으십니까?”
“저희 영업부장님을 명산철제로 파견시키고 싶습니다.”

여기서 배울 수 없다면,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으로 그를 보내면 그만이었다.
이시우는 강필중이 문재신의 곁에서 다양한 것을 배웠으면 했다.

“흐음, 역시 젊은 대표님이라 그런지 마인드 자체가 특이하십니다.”
“전 경험이 압도적으로 부족합니다. 비록 고철이나 비철에 대해서는 얄팍하게라도 지식이 있지만, 영업에 관한 건 완전히 무지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순순히 인정하는 자세에 문재신이 이시우 모르게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렇겠죠.”
“강 부장님은 명산철제를 위해 최선을 다하실 분입니다. 월급은 누리 측에서 지불할 테니, 그 문제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영업이란 고물상에게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어설프게 배우게 된다면 누리 리싸이클링을 위하겠다던 강필중의 선택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었다.

“강 부장님을 명산에서 데려간다면, 저희의 거래처가 모두 노출이 될 텐데…….”
“절 한 번만 더 믿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약속드리겠습니다. 명산과 관련된 거래처는 절대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런 일은 무척이나 예민한 일이었다.
거래처가 노출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손해로 직결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믿어 달라라…….”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받은 도움을 꼭 갚겠습니다.”
“흐음, 이 문제는 저 혼자 결정할 게 아닌 것 같군요.”

아무리 대표라지만, 이런 중대한 사안을 혼자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없었다.
업체를 혼자 꾸려 나가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재신의 말에 이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겠습니다.”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다른 직원들을 데려와 대표님께 고개를 숙여 달라고 한다면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문재신은 문득 궁금해졌다.
대표가 대표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더 큰 업체의 대표라면 자존심을 세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대표가 아닌 직원이라면.
젊은 혈기의 이시우가 과연 그들에게도 고개를 숙일 수 있을지, 문재신은 궁금했다.

“열 번이든, 백 번이든 고개를 숙일 수 있습니다. 그 행동으로 직원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수하겠습니다, 대표님.”

자존심?
이시우는 가족처럼 여기는 직원의 성장을 위해서 고개를 숙이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숙여야 할 때와 그러지 않아야 할 때를 잘 구분해야 한다.
이번 경우에는 전자에 속했다.
강필중이 이번 일로 성장하고, 그로 인해 누리 리싸이클링이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이깟 고개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약속했습니다. 직원들에게 대표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문재신은 곤란했다.
괜한 호기심에 물어봤지만, 흐뭇함을 참지 못해 웃음이 계속해서 입을 비집고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어쩜 젊은 청년이 이렇게도 잘 자랐는지.
그저 대견할 따름이었다.

“흐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대표님.”

이시우에게 무안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그의 각오를 확인해 보고 싶을 뿐.
어디론가 전화를 건 문재신이 고물상의 주소를 알려 주었다.
전화를 끊은 그는 팔짱을 낀 채 이시우를 바라보았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건지, 진심인지는 확인해야겠지. 그래야 나도 아무런 의심 없이 이시우 대표를 전적으로 믿어 줄 수 있을 테니.’

30분 정도가 지나자, 누리 리싸이클링의 직원들이 모두 출근했다.
그리고 그 후, 고물상 안으로 세 명의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문재신의 부름에 바로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명산철제의 영업을 담당하는 직원들이었다.
그중에는 진준식 이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을 마중 나온 이시우와 문재신에게 셋이 다가와 인사했다.

“대표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이시우 대표님이 부탁을 할 게 있다고 하셔서 말이야.”
“네?”

세 사람은 자세한 내막도 모른 채 달려왔기에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셋 중에 직위가 가장 높은 진준식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런 그들을 뒤로한 채 문재신이 이시우에게 말했다.

“이시우 대표님.”
“네.”
“영업에 관련된 사항은 진준식 이사가 모든 것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부탁은 제가 아니라 진 이사에게 하셔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하시겠습니까?”

마당에 나와 있던 강필중, 그리고 작업복을 갈아입고 나온 최문식과 박태문은 모여 있는 다섯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까운 곳에 있던 지라 세 사람은 문재신과 이시우의 대화 내용을 그대로 들을 수 있었다.

“가능합니다. 진 이사님.”

이시우가 나지막하게 진준식을 불렀다.
그의 말에 진준식이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대표님.”
“강 부장님을 명산철제의 영업 사원으로 한 달만 파견하고 싶습니다. 아니, 저희 부장님이 제대로 영업이라는 것을 배울 때까지 명산에 상주하는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네? 그건… 예민한 문제입니다, 대표님.”

진준식이 당황해하며 대답을 머뭇거렸다.
문재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이시우를 바라보았다.
어쩌다 보니 다른 직원들이 보고 있게 되었지만,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꾸벅―
이시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사, 사장님?”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근처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던 강필중이었다.
이어서 박태문이 분노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시우는 이제 단순히 전 대표의 아들이 아니라 누리 리싸이클링의 자존심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당황해했지만, 강필중과 최문식도 어느새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괜찮습니다. 제 진심을 보여 드린 것뿐입니다.”

박태문의 역정에도 이시우는 침착하게 그를 말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멍한 표정의 진준식에게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번의 부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안에 들어가서 다시 이야기를…….”
“그만하셔도 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대표님.”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문재신이 이시우를 말렸다.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설마 진짜로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고개를 숙일 줄은 몰랐다.
적어도 사무실 안에 들어가서 고개를 숙일 거라 생각했지만, 이처럼 당당하게 할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다.

“대표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우선 대표님께도, 그리고 직원부들께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절대 대표님께 무안을 드리고자 한 행동이 아님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한 업체의 대표인지라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성격을 지녀서.”
“이해합니다, 대표님.”

중요한 일이었다.
남들이 보면 ‘왜 영업 문제로 이렇게까지 할까’라고 의아해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물상에게 있어 거래처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은 무조건 피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시우의 부탁을 들어주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단순히 문재신이 이시우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로 부탁을 들어주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 일은 이시우의 각오를 확인할 겸, 대표가 머리까지 숙이며 부탁을 해 왔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함이었다.
아직까지 누리 리싸이클링과 명산철제는 아무런 신뢰를 쌓지 못했다.
그동안 베푼 호의는 신우철를 믿고 결정한 사항들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나와 이시우 대표와의 관계가 되었지.’

문재신은 이시우가 어리다 해서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굽히는 유연함과 말한 바를 곧이곧대로 지키는 굳건함까지.
정말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한 인물은 오랜만이라 생각했다.

“진 이사, 부탁을 받았으니 답을 해야지.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문재신은 이시우에게 진준식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진준식은 여전히 복잡한 눈빛으로 고민하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이 정도로까지 부탁하시는데, 거절하고 싶지는 않구나. 그리고… 대표님은 이미 결정을 하신 상태에서 이 대표님을 시험하신 것 같고.’

진준식은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문재신과 지내 온 시간이 적지 않다 보니,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던 것이다.

“대표님의 부탁 받아들이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무례를 저지르게 되어 송구합니다.”

진준식은 이시우가 한 것처럼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의 양옆에 선 이들도 고개를 함께 숙였다.
이시우의 진심을 느낀 것은 진준식뿐만이 아닌 듯싶었다.

“감사합니다.”

이시우는 그제야 안심이 된 듯 환하게 웃었다.
그는 강필중에게 제대로 된 기회를 안겨 주고 싶었다.
그가 용기 내서 선택을 한 만큼 제대로 밀어주고 싶었다.

“사장님…….”
“강 부장님, 영업을 완벽하게 배울 때까지 명산으로 출근하세요. 잘 하시리라 믿어요.”

강필중은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이시우에게 감사하고 미안했다.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자신을 챙겨 주고, 그런 챙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이시우가 열어 준 이 길을 결코 헛되이 만들지 않겠다며 그는 스스로 다짐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장님.”
“비록 떨어져 있지만, 강 부장님이 돌아올 곳은 누리라는 것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배우겠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하지만 당장 명산철제의 대표가 눈앞에 있으니 말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명산이 가지고 있는 모든 노하우를 가져올게. 네가 고개를 숙인 게 무의미하지 않도록 악착같이 견디마. 고맙다, 시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