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미필적 고의

5화








특수부의 업무를 익히느라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첫 출근의 막이 내리고 있었다.

부장 검사를 필두로 부부장 검사 아래 오늘 막내가 된 다현까지 총 일곱 명의 평검사가 있는 특수 1부는 정, 재계의 굵직한 사건들을 수사해 왔다.

일례로 지난 한 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최경진 전 국무총리의 로비 리스트 파문 당시 여당, 야당 할 거 없이 정계 의원들을 줄줄이 구속하고 실형을 선고받아 지검 내 입지를 굳혀 버렸다.

그 수사의 담당 검사가 이헌이었다는 사실을 왜 잊고 있었을까.

특수 1부에 문이헌 검사가 있다는 사실을 완벽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다현은 기록문을 덮으며 한숨을 내 쉬었다.

권다현의 흑역사를 장식한 문이헌 검사.

4년 전, 마지막 실습 날 먹지도 않는 내장 국밥을 뒤적거리며 고백을 하려 했다가 먼저 선수 친 이헌에게 대차게 까였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뜸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려고 하니, 얘가 미쳤나 싶었을 남자가 보였을 반응치고는 담담했고 잔잔했다.



“연애 같은 거 안 해.”



후배의 쪽팔림을 대신 생각해 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그는 정중하게 저를 거절했다.

……는 개뿔! 여지조차 주지 않고 거절당했다. 그래서 더 창피했고 숨고 싶었다.

애써 그 일을 잊고 지냈다.

일이 바쁘고 야근에 치이고 만날 피의자, 피해자 가릴 것 없이 하소연을 들어 주느라 귀에 딱지가 앉아 머리는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잊고 살았는데 첫 출근에 이헌을 맞닥뜨려 쪽팔림은 혼자만의 몫이 된 듯했다.

“검사님. 가시죠.”

수사관이 들어와 다현을 재촉했다.

“이게 얼마만의 회식인지 모르겠어요!”

박수까지 쳐대며 실무관이 회식을 반겼다.

인사이동으로 빠진 인원 없이 다현만 충원된 특수 1부는 그녀의 중앙 지검 입성과 특수부 첫날을 기념하며 올해도 잘 해 보자는 의미로 부장 검사가 회식을 제안했다.

그렇게 수사관과 실무관과 함께 검찰청 건물을 빠져나왔다.

“우리 부장 검사님 삼겹살 밖에 안 사 주시는데, 오늘 무려 한우랍니다!”

“권 검사님 덕분입니다.”

단골 회식 장소인 삼겹살집이 아니라 회식 메뉴로 한우가 언급된 이후로 줄곧 두 사람은 이런 반응이었다.

의아했다. 한우가 아니라 한우 할애비라도 먹을 수 있을 만한 성과를 보여 온 특수 1부에서 부장님이 삼겹살만 사 줬다니.

거기다 회식도 오랜만이라는 말은 공감이 가지 않았다.

검사에게 회식은 일의 연장선이었다. 동료 검사들은 물론 선배, 후배 검사들과 자리를 종종 갖고 서로 정보도 교환하고 좁은 검사실이 행동 반경 전부인 이들에게 활력이 되기도 하는 일이었다.

동부 지검에서도 하루가 멀다고 회식의 탈을 쓴 술자리와 식사 자리를 가졌었다. 부장님은 물론 얼굴 뵙기도 어려운 차장 검사와 함께 하는 자리도 수두룩했다.

“우리 부가 워낙 바빠서 회식할 시간이 없어요.”

“아…….”

“다들 일벌레들만 있는지 검사실에 틀어박혀서 잘 안 나와요. 부장 검사님도 만날 여기저기 불려 다니시느라 바쁘시고.”

“네?”

“워낙 덩치 큰 사건들만 만지다 보니까 위에서 난리예요.”

아, 하며 다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무관의 설명에 그제야 모든 말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특수 1부 검사들의 사적인 평판까지 들어가며 회식 장소에 도착하자 몇몇 선배 검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얼마 만에 불어온 풋풋한 바람인지 몰라.”

“권다현 검사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이헌이 축하한다. 막내 탈출이네.”

“자자, 한 잔씩들 받으시고.”

자리에 앉자마자 정신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치고 들어오는 말들에 어디를 쳐다봐야 할지 모르다가 시선이 마주친 사람이 하필 이헌이었다.

어쩌다 보니 마주 앉게 된 바람에 시도 때도 없이 시선이 마주쳤다.

술잔을 받다가도 술을 따르다가도 고기를 씹다가도 물을 마시다가도 술을 마시다가도 시시때때로.

“권 검이 이헌이 뛰어넘는 수재라는 말이 벌써 지검에 파다해.”

술을 한두 잔 마시다 보니 특수통으로 뼈가 굵은 남경주 검사가 술을 건네며 다현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멋쩍은 듯 웃으며 술을 받아들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이헌과 비교를 하는 게 불편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동부 지검에 박영수가 나랑 연수원 동기야. 권 검사 칭찬이 자자하던데?”

거기에 이정우 검사까지 보태고 들었다.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면서 또다시 따라 주는 술을 넙죽 받아 마신 다현은 빈 술잔을 내려놓다가 맞은편에 앉은 이헌과 시선이 마주치고 만다.

저 눈빛은 볼 때마다 간담이 서늘하다.

피의자를 신문할 때 나 보이면 될 눈빛을 왜 제게 보이는 건지.

그의 눈빛에 등골이 오싹했다.

당장 잡아먹혀 버릴 거 같았다. 뒤늦게 쪽팔리고 얼굴도 못 들게 창피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냥 혼자 참고 말 것을.

그땐 알지 못했다.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걸.

그것도 한 부서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민망한 건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권 검사님 연수원 실무 실습 나왔을 때, 문 검사님이 지도 검사였답니다.”

그때 저 멀리 부부장 검사의 수사관이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내던졌다.

순식간에 물결이 파도를 치며 회식 자리의 이들에게 퍼져 갔다.

“오, 그 스승에 그 제자인가?”

“수재들은 역시 달라.”

부담스러운 칭찬이 계속돼 몸 둘 바를 모르는 다현과 달리 그녀의 눈에 이헌은 덤덤하다 못해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저 물컵을 비워 대기만 했다. 그 모습에 괜한 반발심만 드는 건 왜일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 속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남자다.

“문이헌, 긴장해야겠는데?”

마지막 부장 검사의 홈런이 좌불안석하게 했다.

물론 성적만 놓고 보면 우수하다 못해 인재 중의 인재였지만 신의 농간으로 중앙 지검에 이제야 발을 들여놓아 다현은 내심 못마땅한 판국이었다.

거기다 자타가 공인하는 인재인 동시에 수재인 이헌과 비교를 하니 민망한 건 덤이었다.

“그만 봐. 닳아.”

그때였다. 시끌벅적 하다못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이헌의 목소리가 또렷하고 정확하게 그녀의 귓전에 들려온 것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또 봤다.

주위 사람들은 조금도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모양인지 저마다 술잔을 기울이며 시끌벅적한 담소들을 나눴다.

좁디좁은 검사실을 나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이들의 회포는 생각보다 짙었다.

“밥이나 먹어.”

맙소사. 제대로 들은 게 맞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식겁 잔치할 만한 그런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다현의 밥 위에 잘 익은 소고기 한 점을 집게로 집어 올려놓았다.

“먹어, 어서.”

회식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선배 검사들의 놀림에도 한마디도 하지 않던 이헌이 대수롭지 않게 툭툭 내뱉는 말들에 다현은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왜 소고기를 챙겨 주고 그러냔 말이다. 그냥 계속 투덜거리고 모른 척하라고!

“문 검.”

멀리 떨어져 있던 선배 검사가 이헌에게 다가와 등 뒤에서 그를 부르며 어깨를 툭툭 쳤다.

빤히 다현을 보고 있던 이헌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이를 확인했다. 선배 검사는 담배 피우러 가자며 손을 움직였고 당연하다는 듯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담배를 피웠었던가?

두 달간 함께 검사실을 쓰면서 단 한 번도 이헌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본 적 없었던 다현은 선배 검사를 따라 나가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편 이헌은 선배인 정상엽 검사와 함께 음식점 입구로 나와 바람을 쐬며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끊었던 담배를 이따금 다시 피우게 된 건 공안부에서 일하게 된 후부터였다.

선배 검사들과 함께하다 보니 한 번씩 담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입에서 짙은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때 정 검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담배 연기를 뚫고 흘러나왔다.

“요즘 약 만지고 있다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애들 중에 K그룹 있어?”

넌지시 물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듯 아무렇지 않게.

이헌이 고개를 돌려 선배를 쳐다봤다. 그의 눈가엔 이미 주름이 패기 시작했다.

“사건 병합해야 할 거 같다.”

그때 정 검사는 만지작거리던 자신의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

이헌은 자못 심각해진 표정으로 정 검사의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내일 회의 때 보고 해야 할 거 같지?”

휴대폰 속 문서를 들여다보던 그는 난감한 듯 이마를 긁적이다 물고 있던 담배를 피워 대며 입을 뗐다.

“제주도 리조트 단지 건설 허가 건도 병합해야 할 거 같습니다.”

사건이 밑도 끝도 없이 몸집을 키워 가는 소식이었다.

“이 검사가 만지고 있는 거?”

이헌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엽 검사가 만지고 있던 사건과 이정우 검사가 만지고 있는 사건, 그리고 이헌이 만지고 있는 마약 사건까지 모두 한곳을 가리키고 있다는 말이었다.

“마약부터 시작해 보면 전부 아귀가 맞아떨어집니다.”

“후우……. 이거 난리 나겠는데?”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던 정 검사가 진득한 연기를 내뱉으며 반색했다. 얼핏 미소가 엿보이는 듯도 했다.

“당분간 집엔 못 가겠습니다.”

“네 형수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 같은데.”

“형수님 좋아하시는 꽃 많이 사다 주세요.”

순식간에 몸집이 커진 사건에 집에 가긴 글렀다며 정 검사의 입에선 탄식이 쏟아졌다.

집에 있는 아내의 잔소리가 벌써 두려워진다.

“막내 새로 오자마자 큰 거 하나 터지네. 권 검사가 일복이 많은 건가?”

일복이 많은지 아니면 일을 죽 쒀서 개나 줘 버릴지 두고 봐야 알 일.

이헌은 말을 아끼며 애꿎은 땅을 발로 차댔다.

“어, 권 검사.”

그때 식당을 나온 다현이 정 검사의 눈에 띄었다. 그녀는 선배 검사와 이헌을 확인하고 나서야 고개를 숙였다.

“난 먼저 들어간다. 빨리 들어와 춥다.”

늦겨울의 밤공기는 차가웠다. 정 검사가 담배를 구둣발로 비벼 끄고 이헌과 다현을 지나쳐 식당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찬바람과 달빛과 함께 둘만 남았다.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더니, 취했어?”

그가 물어 왔다.

“저 술 셉니다.”

소주 3병은 거뜬하다는 말은 고이 넣어 뒀다.

선배 검사들과 동기, 후배들과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자연스레 주량이 늘어나다 못해 술고래가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빈속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넙죽넙죽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다 보니 조금 알딸딸해졌지만, 아직은 멀쩡하다고 생각한 다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권다현의 말간 두 뺨은 붉게 물들어 초점도 온전치 못해 보였다.

그저 어린 검사의 치기 어린 반항쯤으로 보였다.

“자랑이다.”

이헌은 담배를 길쭉한 재떨이 통에 비벼 끄고는 다현에게 훅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