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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필적 고의

6화








“데려다줄 테니까 집에 가.”

오늘 귀가 이상한가?

몇 번이나 잘못 들을 리가 없는데도 청각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말들이 그의 입에서 쏟아졌다.

그는 다현의 대답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데려다준다더니 왜 자기 혼자 가고 난리래?

“지금 가면 어떡해요!”

아직 회식이 끝나지 않았다. 부장 검사까지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판국에 까마득한 기수의 검사 둘이서 자리를 내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현은 이헌의 등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다시 그녀에게 다가왔다.

“가도 뭐라고 하는 사람 없어.”

“그래도…….”

“다들 취해서 관심도 없어.”

원래가 특수 1부 회식은 알아서들 집에 가는 게 규칙이었다.

귀찮게 누굴 챙겨 줄 여력들이 없었다. 술이 떡이 되게 마시다 보니 각자 귀가는 알아서 하라고 부장 검사가 누누이 얘기했다.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다현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전임지에서 선배들의 술 시중과 수발드느라 개고생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식당으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안절부절.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그는 다현을 지나쳐 식당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에 또 한 번 당황한 그녀는 허겁지겁 뒤따라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이헌의 손에 손목이 붙들려 다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

“신경 안 쓴다니까.”

그때 이헌의 손에 들린 가방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빨리 가.”

그는 식당에 들어가 들고나온 다현의 가방을 그녀의 품에 툭 던져주며 발길을 재촉했다.

품에 덥석 안겨진 가방을 고쳐 든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그를 뒤따랐다.

“거, 검사님은요? 괜찮으세요?”

뒤따르던 다현은 어느새 이헌과 걸음이 같아졌다.

나란히 걷던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언제는 선배라더니 이젠 또 검사님이란다. 한 가지만 할 것이지, 어느 장단에 맞춰 줘야 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 또 술에 취했나 싶어 그는 다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너 데려다주고 지검 들어갈 거야.”

그 말인즉슨,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니. 다들 거나하게 취해 사람이 오는지도 가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됐는데 어째서 이 남자는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었지?

그러고 보니 그에게 술을 권하는 이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칠 수 있었다.

“일하러 가신다고요?”

그가 일하러 가는 걸 다른 선배 검사들이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건 말이 안 된다.

“검사의 기본은 야근이야.”

미쳤나 보다.

검사의 야근이 당연하다는 공식은 그녀가 검사로서 탈피하고 싶은 것 중 하나였다.

이헌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자 어처구니가 없어 그녀는 실소를 터트렸다.

문이헌도 별수 없는 검찰 조직의 일원인 듯하다.

“빨리 와.”

어느새 보폭이 벌어져 이헌이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빨리 오라는 그의 재촉에 다현은 뛰다시피 걸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 * *



이렇게 숨 막히는 분위기가 연출될 줄 알았더라면 그냥 술자리를 막내 검사로서 지켰거나 그도 아니면 택시를 타고 혼자 집에 간다고 했을 거다.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려 눈치를 살피기 일쑤.

“특수부엔 왜 왔어.”

빨간불 앞에 차가 멈추자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그의 나지막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시종일관 옆을 힐긋대며 이헌의 눈치를 보던 다현은 금붕어가 된 양 입을 끔뻑이기만 했다.

“누구한테 잘 보였다거나, 밀어 준 선배 있을 거 아니야.”

그제야 질문의 요지를 파악한 다현은 실소를 터트렸다. 명백히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현이었다.

“위에서 지시한 것만 하려고 하는 타입이긴 한데 아부 같은 거 못해요. 저, 누구한테 잘 보여서 특수부 온 거 아닙니다.”

능력 없는 네가 평판에 기대 높은 자리에 앉은 선배 검사의 추천으로 중앙 지검에 툭 떨어진 게 아니냐는 속뜻이 담긴 물음이 명백했다.

다현은 그의 물음에 가차 없이 말을 내뱉었다.

길지 않은 검사 생활 중에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잘 보여 자리를 보존하려거나 좋은 보직에 눈독 들인 적 없었다.

그저 위에서 내려온 배당을 처리하며 평범한 검사 생활을 보냈다.

간혹 부장 검사나 차장 검사와 함께 하는 회식 자리에서 주는 술 다 받아 마신 게 아부라고 본다면 그 정도는 검사 생활의 기본이었다.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면 저기 지방 변두리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겠지.

“그럼 도대체 어떻게 온 거야.”

“글쎄요.”

다현의 대답은 명쾌하지 않았다. 이헌은 여전히 의아한 듯 그녀를 힐긋거렸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인사이동을 줄곧 이해해 보려 이것저것 경우의 수를 생각해 봤지만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다현의 기수에 특수부라니.

괄목할만한 능력을 보여 준 게 아니라면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봐도 무방할 인사였다.

그것도 어린 여검사가 칼만 들지 않았지 전쟁터나 다름없는 특수부에서 살아남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윗분들이 모르지 않을 텐데.

대체 어느 부분에서 다현의 인사가 적합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전에 어디 지검에 있었어.”

뭐? 이 남자 봐라.

그렇게 시끌벅적하게 선배들이 떠들어 댔는데 뭘 듣고 있었던 거야.

거기다 왜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 걸 이 사람은 하나도 모르는 거야.

관심이라곤 개미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남자가 뭐가 좋았던 걸까.

정신 차려, 다현아.

시베리아 벌판보다 더 차고 시린 남자가 문이헌이다.

“동부 지검 형사 5부에 있었습니다.”

“초임지는.”

“쭉 동부 지검에 있었습니다.”

신호가 바뀌자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는 차 안에서 다현의 짙은 한숨과 이헌의 시큰둥한 반응이 한 데 어우러졌다.

“……어쩐지 안 보이더라니.”

“네?”

“너한테 한 말 아니야.”

고요한 차 안에서 혼잣말이 제법 컸다.

다현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물쩍 넘겨 버렸다.

검사 임용 이후 단 한 번도 서초동을 벗어난 적 없던 이헌은 다현의 초임지가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실습 기간 내내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알아먹던 쓸 만한 녀석이었다.

성적도 좋다더니 동부 지검이 웬 말? 이제야 서초동으로 발령 난 게 수상할 지경인데 하필 특수부로 발령이라니.

다현의 인사이동엔 그 어디 하나 수상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일 잘했어? 잘했겠지. 지도 검사가 누군데.”

“농담이시죠?”

“내가 농담이나 하는 놈으로 보여?”

아뇨. 문이헌은 농담과 거리가 먼 사람이죠. 세상만사 모든 게 진지한 남자.

다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적막강산도 끝나나 싶었는데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10여 분을 더 달려 오피스텔 앞에 차가 멈췄다.

“여기 살아?”

“네.”

“혼자?”

“네.”

“돈 많네, 권다현.”

“또 농담…….”

“농담 같은 거 안 한다니까.”

전세는 물론 월세까지 평검사 월급으로 감당이 되지 않을 강남 역삼동의 주상복합 오피스텔에 산다는 말에 절로 돈이 많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데려다주셔서 고맙습니다.”

차에서 내려 문을 닫으며 고개를 숙인 그녀가 말했다.

이헌은 대답 대신 빨리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오피스텔 앞에 비상등을 켠 채 서 있던 그의 차는 다현의 모습이 온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서초동으로 향했다.



* * *



청담동과 압구정이 맞닿은 곳.

이곳엔 강남의 랜드마크라고 불릴 만큼 밤이 되면 영롱한 황금빛이 반짝거리는 나선형 모양의 건물이 있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낮엔 인적조차 드문 건물은 달이 뜨는 밤이면 휘황찬란하게 변모했다.

온갖 외제차가 입구를 가득 채웠고 차에서 내린 이들은 자신이 타고 온 찻값을 온몸에 걸친 채 도도하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파라곤, 일명 상위 1%들의 파라다이스라고 불리며 회원제로 운영되는 VIP 클럽이었다.

“루프탑 세팅은 다 됐어?”

“싹 깔아 뒀습니다. 애들도 비워 놨고요.”

“5분 후 도착이다. 실수 없이 준비해.”

파라곤 루프탑의 주인이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 직원들은 서둘러 루프탑에 갖은 술들을 세팅하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서둘렀다.

클럽 입구로 검은 세단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들어와 섰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파라곤의 숨은 실세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슈트 단추를 여미며 긴 다리를 휘적여 클럽 내부로 들어온 남자는 허리를 숙이는 직원들을 지나쳐 곧장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텅 빈 루프탑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통유리창 너머의 마천루는 황홀할 만큼 찬란하고 빛났다.

“이 새끼 안 되겠네. 마카오가 뭐냐.”

“가볍게 하고 오기 좋잖아. 지난번에 걸려서 몸 사려야 한다니까.”

“조현석 이거 완전 파파보이 아니냐.”

“이번에 이 새낀 빼고 가자.”

밖에서부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한 문이 열리고 들어온 이들은 루프탑 출입이 유일하게 허락된 VVIP 회원으로 일명 골드 멤버들이었다.

남자 무리가 티격태격하며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여자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테이블에 세팅된 술을 빈 잔에 따르기 시작한 건 루프탑의 주인인 장민준이었다.

이윽고 그들의 사치스러운 대화 역시 이어졌다.

“내일 라스베이거스 갔다가 올래?”

짙은 호박색의 독주가 잔에 가득 채워졌다. 민준에게 넌지시 카지노에 가자고 묻던 조현석은 여당 대표의 장남이었다.

“내일 이사회 있어. 얌전한 척 자리 지켜야지.”

“오늘 이렇게 마시고 내일 회의가 되겠어?”

“내버려 둬. 이 자식은 약에 쩔어서도 장 회장님 말이라면 피까지 뽑아 내서 말끔하게 정신 차리니까.”

형들의 말에 민준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채 짙은 호박색 액체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매캐한 연기가 루프탑 안에 자욱이 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