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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필적 고의

4화








하늘이 맑던 어느 날, 다현은 드디어 서초동으로 입성하게 됐다.

연수원 수료 성적도 단연 톱이었기에 당연히 초임지는 서울 중앙 지검이 될 거라 안일하게 생각했던 탓이었을까.

권 검사의 초임지는 동부 지검이었다.

그녀의 초임지를 본 연수원 동기들은 하나같이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다현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중앙 지검이 아니면 어떻고, 동부 지검이면 또 어때.

그저 검사가 됐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드디어 세 번째 인사이동에서 모든 평검사가 가고 싶어 하는 서울 중앙 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주위를 훑으며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복도를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걸었다.

다현의 발길은 이윽고 굳게 닫힌 문 앞에 멈췄다.



특별수사 제1부 부장 검사 고종석



정기 인사이동이 뜨자마자 이름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기껏해야 형사부 정도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특수부라니.

이건 신의 농간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똑똑.

심호흡하며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린 순간 문을 열고 부장 검사실 안으로 들어선 다현은 고개를 숙였다.

“권다현 검사?”

뭐라 인사를 꺼내기도 전에 부장 검사가 먼저 알은척을 해 오자 다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특수 1부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초임지였던 동부 지검 형사 3부 시절 부부장 검사와 함께 식사 자리를 가진 적 있었다. 그 뒤로 2년만인 듯했다.

고종석 부장 검사는 여전히 단단한 인상으로 강직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가 반갑다며 손을 뻗어 왔다. 다현은 부장 검사의 손을 맞잡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전성철 부장 검사한테 자네 얘기를 자주 들어. 요즘 애들 같지 않다고 칭찬이 얼마나 자자하던지.”

초임지의 부부장 검사였던 전성철 검사는 지난해 정기 인사이동 때 중앙 지검 형사 2부의 부장 검사로 자리를 이동해 왔다.

어딜 가나 이 학연, 지연, 혈연이 문제다.

검찰이라고 별수 없었다. 심지어 동료나 선배, 후배 검사가 하는 평판까지 인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집단이라 어디서나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이쯤 되면 특수부 발령에 선배 검사의 입김이 조금 작동했다는 걸 기민하게 알아차릴 시간이었다.

“권 검사 발령에 전 부장이 입 댄 건 없으니까 넘겨짚지는 말고.”

부장 검사가 너털웃음을 뱉으며 후배 검사를 단속했다.

그의 말을 온전히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닥이 잡히지 않은 다현은 그저 멋쩍은 듯 웃으며 상황을 넘겼다.

똑똑.

또 한 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부장 검사가 당연하다는 듯 들어오라고 말을 내뱉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고 까만 슈트 차림의 남자가 검사실 안으로 들어왔다.

“축하한다. 막내 탈출이야, 문이헌.”

부장 검사를 쳐다보고 있던 다현이 고개를 휙 돌려 등 뒤로 다가선 남자를 바라봤다.

부장 검사에게 가볍게 묵례를 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자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헐……!

그 순간 다현은 그야말로 쥐구멍이 있다면 딱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특수부 처음이니까 문 검이 지도 좀 해. 권 검사 연수원 실습 때 지도 검사였다며.”

검찰청 내에선 검사들의 비밀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토록 모르는 게 없을 줄이야.

다현은 울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멋쩍게 웃었다.

“가 보겠습니다.”

숨이 막힐 거 같은 목소리였다. 여전히 그를 둘러싼 검은 오라가 사람의 기를 팍 죽여 댔다.

이헌은 부장 검사실에 들어온 후 줄곧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현에게 반갑다는 말은커녕 부장 검사의 말만 듣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볼일이 끝났으니 가겠다는 의미가 다분한 말을 툭 내던지며 검사실 문고리를 붙잡았다.

“권 검사도 나가 봐. 문 검이 잘 가르쳐 줄 거야.”

악마의 소굴에 연약한 어린양을 내던진 사람이 할 말은 아닌 듯했다.

그것도 세상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다현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검사실을 나오자마자 복도 벽에 기대 서 있던 이헌과 맞닥뜨렸다.

세상 끔찍한 재회였다.

“여기 왜 있어.”

반갑다, 혹은 잘 지냈냐는 그런 인사는 당연하다는 듯 생략이었다.

그 대신 다소 무겁고 살벌한 물음이 그의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부장 검사실 문이 닫히자마자 들려온 황당한 물음에 다현은 곧바로 받아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며 입을 뗐다.

“그게 무슨……?”

질문의 요지를 조금도 파악하지 못한 그녀의 물음이었다. 이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뱉어 냈다.

“네 기수에 특수부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

거참. 말 한 번 재수 없게 하는 데 뭐 있는 양반일세.

“그 말,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는 인사죠?”

다현은 대답 대신 해사하게 웃으며 능청스럽게 굴었다.

생글생글 웃는 그녀를 이헌은 빤히 쳐다봤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이헌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현은 웃는 얼굴로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휙 하니 돌아섰다.

그러고는 뒷모습을 보이며 잰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갔다.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꽁무니를 빼 버린 다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헌은 실소를 터트렸다.

“하, 못 보던 사이에 더 뻔뻔해졌네.”

어수룩해 보이면서 당돌한 것도 여전하고 말간 얼굴도 여전했다.

3년인가, 4년인가?

지도 검사를 맡은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형사 4부 시절 만난 검사 직무 대리 실습생이었던 다현이 어엿한 검사가 돼서 나타났다.

그렇게 만난 인연이 아니었다면 타인을 자신의 머릿속에 남겨 둘 이유가 조금도 없었지만 이헌은 다현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랑 아예 안 볼 생각이야?”

“연애 같은 거 안 해.”




술에 취해 발그레해진 얼굴로 우물거리던 그 작은 입이 설마, 하는 말을 꺼낼까 봐 미리 선을 그었다.

지도 검사의 커피 취향을 아는 실무 실습생이 몇이나 될까.

하물며 몇 년씩 손발을 맞추고 있던 수사관과 실무관도 자신의 커피 취향을 알지 못했다.

그런 사소한 관심은 지도 검사에게 잘 보여 뭐 하나라도 배워 가려고 나오는 아부성 짙은 행동이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눈빛.

다현이 이따금씩 저를 바라보던 눈빛에서 이헌은 그녀의 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 거 하나 알아채지 못하면 검사 때려치워야지.



“저 까인 거죠?”



그렇게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고 시무룩해져서 국밥만 뒤적이던 얼굴은 기록문이 산처럼 쌓일 때마다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실무 실습생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다 자리를 비웠다.

지도 검사로서 그녀에게 넘긴 배당 사건들이 제법 됐었다.

덕분에 지도 검사를 했던 두 달 동안은 미제가 현저히 줄어들어 차장 검사에게 점심 대접을 받기도 했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완벽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이헌은 벽에 붙은 등을 떼고 발길을 옮겼다.

다현의 발자취를 따라가듯 복도를 걷던 그는 한 검사실 앞에 멈춰 섰다.



1027호 특별수사 제1부 권다현 검사



오늘부로 특수 1부의 막내 검사가 된 다현의 검사실.

검찰청이 생긴 이래 최연소 특수부 검사라고 봐도 무방했다.

자신만 하더라도 특수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하게 된 게 30대 중반의 나이였다.

그마저도 연수원 동기 중 유일하게 중앙 지검 특수부에 발령이 나 항간에 말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권다현의 특수부 발령은 검찰청에 두고두고 회자될 이슈가 될 게 자명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다현의 이름이 적힌 명판을 보고 있던 이헌은 안주머니에서 울려 대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시선을 돌려 수신인을 확인한 그는 곧장 통화 버튼을 누르며 자신의 검사실로 향했다.

“알아봤습니까.”

-예. 골드서클 명단 확보했습니다.

“확실한 겁니까.”

-그럼요. 제보자한테 확인 마쳤습니다.

“빨리 보내세요.”

-보시고 놀라지 마십쇼. 화려합니다.

사무적인 통화가 끝나자마자 이헌은 익숙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골드서클 명단 확보했습니다. 대조해 보세요.”

검사실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수사관과 실무관에게 업무를 지시했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널브러진 사건 기록을 집어 들었다.

초임지였던 서울 중앙 지검 강력부에서 마약 수사를 선배 검사와 함께할 때였다.

강남 경찰서 형사과 마약 수사팀 팀장과 가까워졌던 이헌은 오랜만에 그를 만나 가볍게 술자리를 가졌다.

그때 팀장에게 뜻밖의 사건 청탁이 훅 들어왔다.



“검사님. 내가 검사님 술은 평생 사 줄 테니까 사건 수사 하나만 해 줘요.”



특수부 검사에게 마약 수사팀 형사가 부탁할 사건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이헌은 일단 사건의 기록을 넘기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이헌의 검사실로 무단 복사가 된 기록이 넘어왔다.

일명 ‘골드서클 마약 파티’, 재벌가 2, 3세들의 문란한 사교계 모임을 저격한 수사였다.

위에서 충분히 압박을 가했을 법한 덩치였다.

평생 술을 담보로 사건 청탁을 할 만했다. 경찰 수사로 겉으로만 파악된 이가 제법 거물급이라 이름을 보자마자 이헌은 혀를 내둘렀다.

그 길로 마약 수사팀 팀장과 함께 정보원들을 가동해 암암리에 사건을 파헤치고 있던 그는 오늘 골드서클 모임의 핵심 멤버의 정보를 파악했다는 팀장의 연락을 받은 참이었다.

“검사님. 명단 여기 있습니다.”

가벼운 노크와 함께 수사관이 들어와 이헌에게 출력된 명단을 건넸다.

“검사님이 파악하신 명단이랑 완벽히 일치합니다.”

사적인 경로를 통해 골드서클을 파헤치고 있던 이헌은 마약 수사팀 형사가 보내온 명단과 일치한다는 수사관의 말에 턱을 문지르며 문서를 훑기 시작했다.

처음 명단을 봤다면 마약 수사팀 팀장의 말대로 놀라 기절할 만큼 그 면면이 화려했다.

굴지의 기업 회장의 차남부터 시작해 그룹 회장의 손녀, 건설사 딸, 은행장 아들, 현 여당 대표의 아들까지.

마약 파티를 일삼는 핵심 멤버들이라는 표시와 함께 그 아래로는 골드서클의 일반 회원이라 칭하는 이들의 이름까지 거론된 명단 속은 별천지였다.

“이 정도 덩치면…… 쉽지 않겠는데요.”

수사관이 슬쩍 걱정을 내뱉는다. 명단을 살피던 이헌은 고개를 들었다.

“전부 조사하세요. 마약 소굴에서 손에도 안 댔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한 번이라도 스쳤을 테니까 자세히 조사하세요.”

“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죠.”

“웬만해선 안 됩니다. 빼도 박도 못 할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혐의를 입증하기 어렵습니다. 강남서에서 먹은 물 우리라고 먹지 말란 법 없습니다.”

명단을 챙겨 든 수사관은 묵직하게 묵례를 하고는 곧장 자리로 돌아가 실무관에게 명단을 넘겼다.

이로써 특별수사 1부 1024호 검사실은 ‘골드서클 마약 파티’ 수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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