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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에나·한우민 2년 6개월 만에 파경.]

[헤리트너 카프엔의 뮤즈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주에나가 아시아의 톱스타 배우 한우민과 이혼했다. 한국 유명 연예지에 따르면 두 사람은 6개월 전, 이미 모든 법적인 절차를 마친 상태라고 밝혔다.

친한 지인들조차 모를 정도로 조용히 이혼한 두 사람은 6개월간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3개월 전, 주에나는 헤리트너 카프엔의 브랜드 ‘헤리트너’의 속옷 화보 촬영을 위해 영국에 머물렀고 한우민은 바쁜 스케줄을 쪼개 그녀가 머무는 영국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이 알 수 없는 행보로 세간에서는 한우민의 집안인 ‘청림’의 반대로 두 사람이 억지로 이혼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한우민은 한국의 10대 재벌인 청림의 차남이다.

소문의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청림의 개입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본지는 전했다.]




「정말 헤리트너답네.」

포토 월을 지나 유람선에 승선한 아이라가 감탄을 터트렸다. 철통 보안 속에 오로지 초대장을 받은 사람과 파트너만 배에 오를 수 있는 파티. 화려함을 여실히 담은 파티장에는 헤리트너가 특별히 엄선한 몇몇 잡지사를 제외하면 기자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거 알아? 원래는 승선 기자가 더 많았는데 헤리트너가 에나 때문에 기자를 줄이고 또 줄였다고 하더라.」

아이라가 소곤거렸다.

「그래서 말이 더 많아. 헤리트너가 이제 뮤즈를 노리는 거 아니냐고. 그간 뮤즈를 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르잖아.」

50주년 파티에, 자신이 주인공이 돼도 모자랄 판에 온 매체의 관심은 간만에 모습을 드러낼 주에나에게 쏠리고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를 사랑하는 헤리트너가 매체를 제한하고 그녀를 배려하는 모습이 그간 다른 뮤즈를 대했던 것과 퍽 다르긴 했지만 렌은 고개를 저었다.

「헤리트너는 뮤즈를 동경하지 사랑하진 않아. 그건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 아무리 주에나가 매력적이라고 해도.」

「……그런가.」

미간에 주름을 잡고 생각에 빠진 렌을 향해 아이라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을 태운 유람선은 어느새 선착장을 떠나 물 위를 유영하기 시작했다. 1박 동안 집요한 파파라치에 시달릴 일 없는 파티가 시작된 것이다.

렌과 아이라는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사람들 틈에 섞였다. 사람들과 친근한 눈인사를 나눈 아이라가 핑거 푸드를 입 안에 쏙 넣고 오물거렸다. 그때 한 남자 배우가 그녀에게 찡긋 웃으며 잔을 건넸다. 아이라는 낯선 이의 호의를 영업적인 미소로 받았다.

친한 동료와 단순히 얼굴만 아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공간에 적당한 웃음과 부산스러운 대화가 퍼졌다. 그러나 렌의 머릿속에는 그와 반대로 멍한 두통이 찾아왔다.

「술도 골라 마셔야지. 파티는 길다고.」

껄끄러운 남자의 음성에 렌의 눈이 총기를 찾았다. 이름 모를 남자 배우가 아이라에게 건넨 잔을 하트너가 부드럽게 뺏어 들었다. 나긋한 음성 속에 이런 자식이 주는 술을 뭐 하러 마시느냔 비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휘어진 눈꼬리에 꺼지라는 기색이 역력하자 남자 배우의 얼굴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모델 데뷔 동기이자, 이제는 배우로서 잘나가는 스타인 하트너는 까탈스러운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남자 배우가 애써 불쾌한 기분을 감추고 자리를 떠났다.

「여기에 신사만 모인 건 아니야.」

하트너는 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아이라에게 새로운 잔을 건넸다. 렌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하트너를 응시했다. 그와의 관계가 처음부터 이런 급랭 물살을 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막역한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하트너의 일방적인 선 긋기에 몇 년 전부터 껄끄러운 사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유가 뭐냐고는 묻지 않았다. 사람 마음은, 인간관계는, 이 바닥에서 언제든 틀어질 수 있기에 괜한 물음으로 서로가 피곤해질 이유가 없었다.

「너 정말!」

뒤돌아 떠난 남자 배우를 울상으로 바라보던 아이라가 하트너의 팔을 찰싹 때렸다.

「넌 평판도 신경 안 써? 자꾸 이렇게 이미지 깎아 먹을래, 진짜?」

다분히 에이전시 소속 배우의 이미지를 걱정하는 어투에 하트너의 깊은 회색 눈이 느릿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 거 신경 썼으면 지금 이렇게 못 살지.」

아이라에게 향했던 눈이 슬쩍 렌에게로 옮겨 갔다. 하트너는 피식 한 번 웃고 다시 아이라를 바라봤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설핏 아이라의 눈에 긴장감이 스쳤다.

「맨정신에 지친다고 술에 의존하지 마. 술은 끝이 꼭 안 좋아. 특히 오늘 같은 날은 더.」

말에 뼈가 있는 느낌이었다.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아이라가 그만하라는 듯 부러 환히 웃었다.

「지치긴 누가 지쳤다고. 그리고 나 술 센 거 알잖아.」

「정신이 이성을 잃는 건 한순간이야. 파파라치도 없겠다, 끼리끼리들만 모였겠다. 말 새어 나갈 일 없이 즐기기 딱 좋은 오늘 같은 날은 사람을 쉽게 취하게 해. 너도 잘 알잖아? 분위기가 사람을 얼마나 현혹하는지.」

아이라가 별걱정 다 한다는 듯 싱긋 웃었다.

「뭐 그렇다 쳐. 그치만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해도 오늘 나는 책임져 줄 남자가 있잖아.」

그녀가 사방에서 끈적하게 바라보는 남자들에게 보란 듯이 말했다. 렌은 그런 퇴치 용도로 저를 방패 삼는 그녀에게 낮게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트너가 입꼬리를 올리며 그런 렌을 바라봤다.

「그래. 렌 로렌스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순수히 아주 건전하게만 지켜 주시는, 그런?」

심상치 않은 빈정거림에 아이라가 하트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야외 홀이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바빠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같은 곳으로 향했다. 막 홀에 발을 디딘 에나가 보였다.

진한 카키색 칵테일 드레스가 바람에 나풀거리며 그녀의 유려한 곡선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단아하고 우아한, 하지만 등은 여실히 드러나 농염하기까지 한 그 여자를.

누가 봐도 헤리트너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드레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앞은 단아하고 뒤는 도발적인 디자인을 추구했으니까.

저도 모르게 에나를 발끝에서부터 훑던 렌이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아득한 검은색 눈동자가 제게 향하고 있었다. 렌의 속눈썹이 동요하듯 파르르 떨렸다. 그렇지만 좀 더 확신이 필요했다. 정말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일순 그녀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에나는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렌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긴 시간, 그녀를 좇는 제 시선이 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눈이 마주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꿈속에서 언제나 저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여자는 이곳에 없다. 그녀는 렌 로렌스란 남자가 이곳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저런 여잔 어떤 남자를 만나려나.」

불쑥 그녀를 넋을 잃고 바라보던 모델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다른 동료들이 기다렸다는 듯 대화에 동참했다.

「전남편 같은 놈 만나겠지. 뭐든 다 잘난 놈.」

「그런 놈이 싫어서 이혼했는데 또 그런 놈 만나겠냐.」

「여하튼 이혼했으니까 오늘 달려드는 놈들 수두룩할 거다. 유부녀일 때도 추파 던지는 놈들 많았는데 오늘은 오죽하겠어?」

「기회지. 자고로 여자가 힘들 때 접근하는 게 정석이니.」

남자들끼리 숙덕이는 것을 듣고 있던 아이라가 미간을 구겼다.

「진짜 천박해서 못 들어 주겠네.」

나름 친분 있는 모델들이었기에 아이라가 정색하자 그들의 얼굴엔 약간의 겸연쩍음이 번졌다.

「힘든 일 겪은 사람 두고 그러고 싶니, 너희는?」

「뭐. 솔직히 여기 있는 남자들 다 그 생각 할걸? 안 그러냐, 렌?」

무리 중 한 남자가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렌에게 동조를 구했다. 렌은 느리게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깊은 파란색 눈이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미친 새끼.」

평소와 다른 렌의 날카로운 모습에 움찔한 남자들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트너는 의외의 재밌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 즐거운 듯 턱을 매만지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순식간에 냉랭해진 분위기에 아이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렌을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평소처럼 그냥 무시하지, 너답지 않게 왜 그래.」

그녀의 작은 타박에도 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꽉 다문 턱이 화를 참아 내려는 듯 굳게 맞물려 있었다. 그는 절대 공적인 자리에서 이런 얼굴을 하는 법이 없었으나, 오늘 유연하게 웃어넘기는 렌 로렌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이라의 눈꺼풀이 여리게 흔들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더 하려 입을 벙끗거리는 찰나 헤리트너가 단상에 등장했다.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함성과 박수갈채를 터트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소음에 두 사람은 단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50주년을 축하해 주러 온 귀빈들에게 전하는 인사를 시작으로 짧은 소감을 마친 그가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이윽고 렌과 아이라 앞에 선 헤리트너가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형식적인 인사와 대화의 시간이 오갔다.

렌은 눈으로 에나를 좇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헤리트너와 눈을 맞추었다.

「자네 덕분에 뮤즈가 더욱 풍성해졌더군. 화보는 기대 이상이었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입니까?」

헤리트너는 그날의 일 따위는 모를 텐데도 풍성이란 단어에 괜한 자격지심이 솟아났다. 아이라가 렌을 말리듯 옷깃을 슬쩍 잡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에 반해 헤리트너의 눈에는 묘한 즐거움이 번졌다.

「자네에게 관심이 생겼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네.」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말이었다. 제가 원한 답은 그런 인사치레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헤리트너는 답은 충분히 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날 제가 한 것이라곤 여왕 같은 그 여자에게 넋을 잃었던 게 전부였다. 모델로서, 남자로서 한 것이 전혀 없는 그날의 일로 제게 관심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또다시 수치심이 몰려온 렌이 입술을 미묘하게 우그러트렸다. 아이라는 그런 그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고 헤리트너의 찬사와도 같은 말에 아이처럼 방방 뛰었다.

「렌! 들었어? 저 까탈스러운 헤리트너가 너한테! 앗……!」

기쁨을 주체 못 한 그녀가 샴페인 잔의 내용물을 렌의 옷자락에 쏟아 냈다. 그의 가슴팍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아이라가 당황하며 젖은 셔츠를 손으로 털었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밀어 냈다.

「괜찮아.」

「미안해. 내가 흥분했나 봐.」

「잠깐 방에 갔다 올게. 혼자 있을 수 있지?」

「같이 가.」

「옷쯤은 혼자 갈아입을 수 있어.」

「너는 지금 장난이 나와?」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아이라가 뾰로통 입을 쭉 내밀었다. 렌이 안심하라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혼자 있을 수 있지?」

「내가 무슨 어린애야. 당연하지. 여기 만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번 굳이 방까지 따라오겠다는 그녀를 단호히 만류하고 그가 발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헤리트너에게 눈도장은 찍었고 주에나는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녀를 눈으로 하염없이 좇는 제가 더는 보기 싫었다.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이는 이 기분도.

에나를 두고 숙덕이던 그놈들에게 욕지거리한 것은 순전히 화풀이였다. 저 또한 분명 같은 생각을 하며 희망을 품던 수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괜히 화가 치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은 계속 주에나를 좇는다.

대체 왜.

반복적인 질문. 그렇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

제 감정이건만 그것을 도무지 통제할 수가 없다. 답답함을 애써 누르고 뚜벅뚜벅 걷던 그가 오픈 갤러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수많은 헤리트너의 작품들 중 그날의 그들이 보란 듯이 가장 중심에 걸려 있었다. 쓴웃음이 흘렀다. 수치스러웠던 그 순간을 아주 자랑스럽게도 사람들 앞에 내보이고 있다니. 입이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모델들에겐 헤리트너의 컬렉션에 들었단 자체만으로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다고 생각될 이 순간이 그에겐 전혀 그렇지 못했다.

렌의 짙은 벽안이 그날을 외면했다. 아니, 정확히는 도망쳤다.



3층에 있는 제 방에 들어선 그가 타이를 거칠게 풀어 재꼈다.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쪽팔림. 그럼에도 자꾸 끌리는 여자. 이 모든 게 그를 짜증스럽게 했다.

걸치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던진 렌이 샤워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이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 봤자 수치가 씻겨 내려가는 건 아니었지만 차가운 수온이 잠시나마 마음의 열을 잊으라 위안을 주고 있었다.

샤워를 모두 마치고 옷장에서 트레이닝 바지를 꺼내 입었다. 다시 나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그는 침대에 털썩 누워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그렇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길 잠시, 아이라로부터 걸려 온 전화에 그가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 괜찮아? 미안해, 나 때문에 정말.

「괜찮아. 지금 씻고 누웠어.」

― 다시 안 나오게?

「응. 좀 쉬고 싶네.」

― 아…….

「너 때문이 아니야. 요즘 통 잠을 못 자서 그래.」

아이라를 찾는 요란스러운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어차피 그녀의 옆에 있어 봤자 주에나와 마주칠 뿐이었다. 아이라는 그녀 때문에 이곳에 왔으니까.

「바쁜 것 같은데.」

― 이따 내가 네 방으로 갈게. 자지 말고 기다려. 잠깐 얼굴이라도 보게.

미안함이 담긴 아이라의 음성에 렌은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밖에선 현악 4중주가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아마도 클래식 타임으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렌은 옅게 들려오는 연주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 * *



깊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방에서 선잠이 들었던 렌이 미묘한 소리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들려오던 현악 4중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옆방에서 흘러든 여자의 신음이 귀를 파고들었다. 그 끝날 줄 모르는 신음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방에서도 터져 나왔다.

이곳엔 파파라치도 없고 매니저도 없다. 고작 있어 봐야 소수의 잡지 기자들뿐. 그들의 방은 셀럽들의 방과 반대 방향에 배정돼 있었기에 로비에서 얼쩡댈 순 있어도 대담히 들어올 순 없었다. 셀럽들은 그 자유를 놓칠 위인들이 아니었다. 각 방에서 그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짝짓기에 여념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렌은 아무리 화려한 유람선이라도 방음이 완전하지는 않다는 걸 이렇게 깨달아야만 했다.

그가 콘솔에 올려놓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밤 11시. 지금쯤이면 파티의 부산스러움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됐을 것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 봤자 얼마 되지 않겠지. 다들 저 짓을 하느라 바쁘실 테니.

침대에서 일어난 렌이 굳은 미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이곳에서 교성을 들을 바에야 나가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듣는 게 나은 선택지란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제 방문 앞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수히 카드 키 긁는 소리와 문손잡이를 잡고 거칠게 흔드는 소리가 다급하게 귀를 때렸다.

「아이라?」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문을 잡고 흔드는 소리가 너무도 급박하게 들려 덜컥 걱정이 몰려왔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제 몸에 매달리듯 풀썩 쓰러져 왔다.

주에나. 바로 그 여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