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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 한국어 대화는 “”로, 영어 대화는 「」로 표기했습니다.








#1





화려한 인생을 사는 여자처럼 보였다. 새하얀 샤워 가운에 검은색 힐을 또각거리며 내 앞에 섰을 땐, 보다 더 명확히. 세계적인 디자이너 ‘헤리트너’의 뮤즈인 주에나는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호기심을 부추기기 충분했다.

그녀는 나른한 미소에 묻어난 여유로움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듯 거리낌 없이 가운을 벗어 던졌다. 가운 속에 감추고 있던 여자의 뽀얀 속살이 조명을 받아 매끈하게 빛났다. 누드 컬러의 속옷이 가슴과 엉덩이의 곡선을 탐스럽게도 잡아, 살결 일부분인 것 같은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문득 그녀와 같은 컬러의 드로어즈를 입은 나를 보며 주에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진 않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스쳤다. 물론 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지만.

침대에 걸터앉은 내 다리 사이에 서서 그녀가 나를 내려 보는 순간, 망상과 현실의 경계에 있던 머릿속이 다시 빠르게 현실을 자각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미끄러질 듯 유연한 허리에 손을 얹고 가슴 아래에 머리를 기대었다.

착, 하고 감겨 오는 살결. 그와 동시에 퍼져 가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살 내음. 여체에 파고들고 싶게 만드는 살 내음이 주에나에게선 아찔할 정도로 풍겼다. 어떤 향과도 섞이지 않은 온전한 살 내음이 이렇게나 좋은 것이었나. 생각지도 못한 몽롱한 감각이 그녀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을 싣게 했다. 보드라운 살결이 내 몸과 더욱 밀착됐다.

여태껏 겪었던 파트너와는 전혀 다른 작고 가녀린 몸의 동양 여자. 허리는 끊어질 것같이 가늘면서 이질적이게도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가 빼곡히 들어찬 몸. 참으로 이상하리만치 완벽히 조화된 몸과 더불어 사람을 미치게 하는 살결과 살 내음이 정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문득 내 뒷머리를 파고들었던 그녀의 손이 목덜미를 스치듯 지나쳤다. 그리고 이내 오늘을 위해 면도하지 않은 나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따갑다. 가시 같네. 머리칼은 이렇게 부드러운데.”

낯설지 않은 그녀의 모국어가 잔잔하게 흘렀다. 그 별거 아니었을지 모를 중얼거림이 미묘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호수처럼 깊은 검은 눈이 오묘한 빛을 담고 오로지 나를 응시해 오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스치는 손길에 척추가 본능적으로 떨려 왔다. 그녀의 여린 몸과 더욱 바짝 밀착되고야 말았다. 여자의 깊은 눈이 서글픈 빛을 담고 여리게 휘었다.

그 순간 나에겐 알 수 없는 의문이 찾아왔다. 대체 왜 그런 표정인 거지. 콘셉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과 눈빛. 그 오묘한 얼굴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사생활을 훔쳐본 것만 같은 기분을 일게 했다.

공간을 메우고 있던 부산스러운 소음이 아득히 사라졌다. 요요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를 멍하게 쳐다보는 것 외에는 어떠한 반응도 할 수가 없다. 새하얗게 변질된 머릿속엔 그녀의 검은 잉크와도 같은 눈동자만이 번져 갔다.

「뭐 해? 벗겨 줘야지.」

허리를 감고 있던 나의 손을 여자가 브래지어 쪽으로 슬쩍 잡아 올렸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당혹감이 찾아왔다.

내가 대체 왜.

내 몫의 일을 놓치고 있는 이런 얼간이 같은 순간은 내 인생에, 내 커리어에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던 것이었다. 황급히 얼굴을 정비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지만, 일단 지금은 후크를 풀어야 했다.

가슴을 조이고 있던 밴드가 풀리자 그 반동으로 브래지어가 조금 들어 올려졌다. 당연하다는 듯 둥근 가슴이 절반쯤 드러났다. 선단이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그 모습에 심장은 동요했지만, 눈만은 동요하지 않았다는 듯 애써 고요히 떴다.

나는 심장이 터질 듯 진동하는 것을 외면하고 빨려 들어가듯 봉긋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속옷의 촉감과 맨살의 따스한 열감. 심장은 여전히 고장이 난 듯 뛰어 댔다.

진정을 찾으려, 하지만 이 모든 게 계획된 포즈인 것처럼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것이 패착의 지름길인 줄도 모르고.

내 머릿속은 말릴 새도 없이 아찔해졌다. 아까부터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던 살 내음이 더욱 진하게 폐부에 들어찼기 때문이었다. 원치 않는 야릇한 감각이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저리도록 퍼졌다. 예상치 못한 감각은 숨까지 떨리게 했다.

말라 가는 숨을 삼키며 묻고 있던 얼굴을 조심히 들어 올렸다. 새카만 눈이 여전히 나를 나른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 그럼에도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은 기분.

충동적인 무언가가 가슴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기다렸다는 듯이 입꼬리를 오만하게 올렸다.

「역시 프로네요. 렌 로렌스 씨.」

몽롱한 세계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음성에 번쩍 흔들리던 초점이 잡혔다. 당연하게도 홀로 느낀 이상한 감각은 수치심과 민망함을 몰고 왔다.

「Awesome! Perfect!」

일순 촬영 감독의 경탄에 찬 목소리가 터졌다. 새하얀 스튜디오에 스태프들의 박수갈채가 귀를 때릴 듯 울려 퍼졌다.

어느새 다가온 여성 매니저가 그녀의 어깨에 가운을 걸쳐 주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는 가운을 벗어 나의 몸에 걸쳤다. 보기에도 탐스러운 가슴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그 아슬한 움직임에 슬쩍 분홍색 선단이 보였다.

저절로 나의 눈이 커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매니저가 당황하며 얼른 후크를 채웠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검은 눈동자로 여전히 나를 응시해 왔다.

「나보단 지금 너한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작은 음성을 흘린 그녀가 내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제 다리를 슬쩍 눈짓하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눈을 내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온몸이 타 버릴 듯한 수치가 몰려왔다. 언제 부풀어 오른 것인지 드로어즈를 뚫을 듯 커져 버린 페니스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잘 리드해 줘서 고마워요. 렌 로렌스.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이 가운밖에 없네요.」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촬영 스태프들을 의식한 듯 싱그럽게 웃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그 훈훈한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수치심에 잠식된 내 기분 따위는 모르는 채로.

나도 모르게 찾아온 변화를 그녀는 대체 언제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것인가. 이것을 가려 주기 위해 허벅지 위에 다리를 굽혀 주고 있었던 것인가? 카메라에 잡히지 않기 위해? 아니면 나의 민망함을 감춰 주기 위해?

“……너처럼 반응해 주면 좋았을 텐데.”

혼란으로 머릿속이 번잡한 찰나 그녀가 또다시 한국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처연한 슬픔과 허무함 같은 것들이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대체 왜 이 여자는 그런 표정인 거지. 상식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나를 불쾌하게 느껴야 정상 아닌가. 멍한 생각에 빠져 있던 여자가 나의 시선을 느낀 듯 황급히 그 표정을 지웠다.

「그럼 또 봐요. 렌.」

가벼운 눈인사를 전한 주에나가 나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의 그 당당한 걸음으로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마치 내가 그녀에게서 느낀 감각을 그녀는 내게서 전혀 느낄 수 없다는 듯이.



* * *



렌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공원을 달리고 또 달렸다. 주에나와 헤리트너 속옷 촬영을 마친 지도 3개월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날은 여전히 그를 지독히도 괴롭게 했다.

빳빳하게 서 버린 페니스도 모자라 베이지색 드로어즈에 보란 듯이 쿠퍼액이 묻어 있던 그 수치스러웠던 기억이.



「나보단 지금 너한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또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선명하게 도드라진 그 진한 얼룩을 못 봤을 리가 없었다. 수치와 미안함이 뒤엉켜 렌은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그는 그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처럼 더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모델 12년 차. 프로의 정점에 선 제가 대체 왜 그날만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던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것보다 더한 촬영에도 흥분하는 일이 없었고,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파트너에게도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일은 오로지 일이어야만 했다. 그게 지금껏 지켜 온 방식이었고 그것을 넘어서는 일은 촬영장 밖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왜. 그날. 대체 그 여자한테 왜…….

「렌! 천, 천천히 좀 가!」

렌은 그를 부르는 숨찬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뒤를 돌아보니 더는 못 뛰겠다는 듯 긴 팔다리를 축 늘어트리고 헐떡거리는 아이라가 보였다. 렌은 실소하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적당한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은 두 사람이 사이좋게 물을 나눠 마셨다.

「언제부터 따라온 거야.」

「아까부터!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뛰는 거야. 뉴욕의 여름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냐?」

「그래서 새벽에 뛰고 있잖아.」

「너 새벽부터 뛴 거야? 세상에. 지금은 아침이라고. 저거 봐, 벌써 이글거리잖아.」

아이라가 하늘에 떠오른 태양을 자외선 덩어리 취급 하며 입을 떡하니 벌렸다.

「너 그러다 진짜 피부 상해.」

「라스피는 이것보다 더했어.」

렌이 별거 아니라는 듯 낮게 웃었다. 그의 고향인 애리조나주의 라스피는 작은 시골 마을로, 뉴욕보다 언제나 더 강렬한 햇빛을 쏟아 냈고, 그는 그 강렬한 빛을 받으며 자라 왔다.

「그놈의 라스피. 이번 휴가도 라스피로 갈 거야?」

「응. 한적하잖아. 부모님도 보고 싶고.」

「좋아. 스케줄 접수!」

아이라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랜 친구인 아이라는 란제리 모델로 데뷔했지만, 현재는 모델 일을 그만두고 렌이 소속된 ‘앨튼 에이전시’에서 매니지먼트 1팀장이란 직책을 맡고 있었다.

「아참. 나 어제 오너랑 에나 미팅 갔다 왔는데.」

「에나……? 주에나 말이야?」

「응. FA 대전에 우리도 참여한 거지.」

「계약, 하게?」

「하면 우리야 좋지.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배우라는 한계를 넘어선 사람이잖아. 한국 활동은 배제하고 이쪽 스케줄 관리만 해 줄 에이전시를 원한다고 하더라고. 근데 생각해 보겠다면서 영 미적지근하게 굴더라. 조건은 무조건 맞춰 주겠다고 했는데도.」

「…….」

「뭔가 좀 껄끄러워하는 분위기였는데 뭐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단 말이야.」

「아마 나 때문이겠지.」

렌이 자조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완전 변태로 낙인찍혔어도 할 말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제가 앨튼 소속인 것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왜 너 때문이래?」

「그냥. 그런 게 있어.」

적당히 얼버무리는 렌을 아이라가 가늘어진 눈초리로 응시했다.

「너 정말 수상해. 에나랑 촬영한 이후로 묘하게 힘도 없고……. 혹시 작업 걸다 차였니?」

「유부녀에게 그럴 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주에나는 유부녀였고 지금도 그녀는 유부녀였다. 그래서 마음이 더 복잡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매일이.

「동양인들은 대체로 동거 없이 늦게 결혼하던데. 에나는 참 빨리하긴 했어. 상대가 아시아 톱스타라서 그랬나? 거기다 그 남자 집안도 엄청 대단하다며. 같은 여자가 봐도 놓치기 싫은 조건이긴 하다.」

주에나의 이른 결혼에는 관심이 없었다. 렌은 오로지 왜 그날 그녀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고, 지금까지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오늘 아침 일이 또다시 짜증스럽게 떠올랐다. 비단 오늘 아침뿐만이 아닌 그 일이.

짙게 가라앉은 얼굴 위로 느른하게 불던 바람이 그의 검은 머리를 흐트러지게도 지나쳤다. 슬쩍 그를 살피던 아이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팅 때 네 이야기도 잠깐 나왔어.」

「내 이야기……?」

렌의 벽안이 가늘게 떨렸다. 아이라는 그의 눈에 스친 혼란스러운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좀처럼 고요하기만 하던 남자가 분명 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데?」

「에나가 먼저 한 건 아니고…… 내가 친근한 분위기 좀 만들려고 일전에 너랑 한 촬영은 괜찮았냐고 물었지.」

「그런 걸 뭐 하러.」

그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왜, 내가 너랑 친하다니까 렌 로렌스와의 촬영은 영광이었다고 전해 달라던데 뭐.」

「입발림 소리.」

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변태스러운 모습을 보였는데 영광은 무슨. 하지만 그날의 사정을 까마득히 모르는 아이라는 쌜룩한 표정을 지었다.

「에나는 진심이었어. 그 화보, 조만간 열릴 헤리트너 50주년 공로 파티에도 걸릴 거라며. 커플 샷이 걸리는 건 그 작품이 유일하대!」

「…….」

「그 깐깐한 헤리트너가 수많은 작품을 마다하고 왜 그 화보만 올리겠어? 세계 남자 모델 1위인 렌 로렌스와 뮤즈의 환상적인 커플 샷이 맘에 들었단 소리잖아. 경험 많은 네 리드로 에나를 그 정도까지 끌어올렸으니 당연히 입발림 소리가 아니지.」

실소가 절로 터졌다. 리드는 온전히 그녀가 했고 저는 멱살 잡혀 끌려가기 바빴다는 걸 아이라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다시금 상기된 기억에 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더는 주에나라는 여자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아이라도 그에 질세라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르 그를 따랐다.

「아직 말 안 끝났어. 에나가 너 한국말 할 줄 아는 거 몰랐더라.」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입가에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피의 절반이 한국인이란 것도 몰랐나. 적어도 이 바닥에서는 다 아는 그 사실을.

그 정도로 내게 관심 없는 여자한테 난 대체…….

「엄청나게 당황하던데? 얼굴까지 벌게져서는? 혹시 에나가 한국말로 욕이라도 한 거야?」

「욕은 무슨.」

호기심 가득한 그녀의 눈에 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이라는 좀 더 캐묻고 싶은 본심을 꾹 누르고 다른 본론을 꺼내 들었다.

「파티 갈 거지?」

「가기 싫어도 가야겠지. 그 위대하신 헤리트너 님이 부르시는데.」

그의 50주년 공로 파티는 단순한 파티가 아니었다. 그곳에 설 수 있느냐, 없느냐로 자신들의 위치를 패션계에 피력하는 그런 파티였다.

「파트너는 정했어?」

「아직.」

「그럼 나랑 가자! 분명 에나도 올 텐데 나는 초대장이 없잖아.」

의도적으로 시무룩한 표정을 한 아이라가 불쌍한 척을 해 댔다. 에이전시에 VIP 초대장을 받은 사람이 여럿일 텐데도 이러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파트너를 정한 모양이었다.

「마음대로 해. 난 상관없어.」

「역시! 너라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이번에 주에나 확 잡고 보너스 쏜다!」

열의로 불타는 아이라의 모습에 렌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

「같이 아침 먹을까?」

「아니. 카인 데리러 가야 해.」

그녀가 아쉬운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막 세 살이 된 레트리버종인 카인은 렌의 활력소나 다름없었다. 부드러운 황금색 털을 나부끼며 언제나 그를 반기는 카인은 외로운 타지 생활의 가장 큰 위안이었다. 치아 관리와 다른 검사차 며칠간 병원에 입원해 있던 카인을 데려온 렌은 사료를 불려 먹이고 때맞춰 약을 주며 돌봤다.

사흘 만에 집에 돌아온 카인과 온종일 시간을 보낸 그는 조금 이른 시간에 침대에 누웠다. 카인이 당연하다는 듯 옆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제발…….」

그가 부드러운 황금색 털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요즘 하루가 멀게 꿈에 나타나는 주에나 때문에 통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그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눈을 뜨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페니스가 저를 현실에서도 괴롭게 만들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아침에 부푼 성기가 아니었다. 흥분으로 아랫배에 저릴 듯한 통증이 오는, 그야말로 섹스를 위한 발기…….

「하아…….」

그날 이후, 아무 사이도 아닌 여자를 매일 꿈에서 탐했다. 렌은 그 거지 같은 상황을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몰랐다. 원해서 꿈을 꾼 것이 아니니 전적으로 내 잘못만은 아니다, 그렇게 자기방어로 세뇌하는데도 해일처럼 몰려오는 자괴감과 수치심은 언제나 방어벽을 깡그리 부쉈다.

거기다 더 감당할 수 없는 건, 꼭 샤워하며 자위를 해야지만 흥분을 삭일 수가 있단 거였다. 안 그러면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꿈에서 탐하던 주에나를 생각하며 샤워 부스에서 자위하는 아침. 정말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수치였다.

진저리가 난다는 듯 렌이 얼굴을 벅벅 쓸었다. 오늘은 제발 그녀가 나타나지 않길 기도하며 렌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신은 매몰차게도 그를 저버렸다.



라스피의 한적한 집에서 에나와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는 그녀와 할 일 없이 따스한 볕을 맞으며 걷고, 함께 요리하고, TV를 보다 침대에 누워서는 서로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경이로울 정도로 부드러운 살갗, 홀리고도 남는 살 내음을 온몸으로 탐하고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에나를 잡아먹을 듯이 또 몰아쳤다. 그녀의 온몸을 발갛게 물들인 제가 만든 흔적을 보며 몰아붙이는 게 그렇게 황홀할 수 없었다. 그럼 그녀는 헐떡이며 야릇한 눈빛을 흘리다가도 처연한 슬픔이 깃든 미소를 지었다.



……너처럼 반응해 주면 좋았을 텐데.’



렌이 번쩍 눈을 떴다. 아래가 바짝 당겨 왔다.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커졌겠지. 제기랄.

또 그 말이었다. 지긋지긋한 그 말. 꿈의 배경은 모두 달랐지만, 마지막은 언제나 그녀의 슬픔 어린 그 문장을 듣고서야 끝이 났다. 발기한 페니스를 보며 그녀가 촬영장에서 중얼거렸던 그 말. 나를 보며, 내 페니스를 보며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단 분명한 의사를 드러내던 말.

렌은 다른 무엇보다 그 말에 가장 큰 모멸감을 느꼈다. 그것은 꿈에서도 마찬가지의 기분을 선사했다. 그가 입술을 짓씹었다. 유부녀를 상대로 이딴 꿈을 꾸는 자신에게 짜증이 치솟아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사람처럼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짙은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고른 그가 메시지 알림 신호가 떠 있는 휴대 전화를 습관적으로 잡아 들었다. 그리고 이내 아이라가 보낸 링크를 누른 렌이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깊은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에나의 이혼 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