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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남자는 좀 전과 다른 태도로 이재를 쳐다보고 있었다. 흥미로워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매서운 눈길만 남은 채였다. 그의 눈초리에 주변의 공기마저 위축되는 것 같았다.

“당신 뭡니까, 남의 일에 상관 말고 빠지시죠.”

동제가 나섰지만 목소리에서부터 진 게임이었다. 동제는 애써 센 척했지만, 남자의 기세에 눌린 게 느껴졌다.

“동제 씨.”

“어? 어, 그래 이재야.”

아이를 달래듯 다정하고 부드러운 속삭임에 동제의 마음이 녹았다.

“일단 좀 놓고 말해요.”

“아, 미안.”

이재의 마음이 풀어졌다고 생각한 동제가 손을 놓았다. 이재가 동제에게 벗어났다고 느끼는 찰나, 이재의 몸이 한쪽으로 확 기울었다.

불쑥 뻗어 온 손아귀에 이재의 몸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이재는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던 남자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동시에 남자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모든 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진 일이었다.

“어? 어! 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동제가 소리쳤지만, 엘리베이터에 탄 두 사람에겐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하 2층 버튼을 눌렀다. 좀 전까지의 소란은 없었던 양 단정했다.

완벽하게 차단되어 버린 공간에 둘뿐이었다. 이재가 퍼뜩 남자의 곁에서 떨어졌다. 맥박이 정신없이 뛰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재가 자세를 바로 하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제야 삐딱하게 돌아간 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이재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괜찮습니다.”

남자는 정말 아무 일 아니었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곤 말 걸지 말라는 듯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닌 동작에도 묘한 나른함과 색기가 흘렀다.

이재도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며 섰다. 엘리베이터에 비친 남자는 키가 컸다. 힐을 신은 이재보다 한 뼘은 더 컸고, 스치며 봤을 뿐인데도 자꾸만 쳐다보고 싶어지는 외모였다.

슬쩍 훔쳐봐도 대놓고 봐도. 분명 처음 보는 사람 같은데. 왜 도와준 거지?

그는 상황을 즐겁게 관람하는 듯 보였는데 불쑥 도와주고. 그래 놓고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고.

이재의 머릿속은 조금 전 상황을 재연하느라 바빠졌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혼란스럽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와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어디서 만난 적 있는 사람일까? 이재가 다시금 그를 힐끔거렸다. 순간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재가 흠칫거렸다.

―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 안내 음이 정적을 깼다. 이재는 내리기 전에 다시 한번 진심을 건넸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남자는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문이 열리자 이재가 차분하게 내렸다. 마음 같아선 한걸음에 달아나고 싶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신경 쓰이게.

“서이재 씨.”

그가 친근하게 이재를 불러 세웠다. 놀란 이재가 돌아보자,

“덕분에 재밌는 구경 했습니다.”

남자의 입꼬리가 보란 듯이 올라가며 문이 닫혔다. 순간 일시 정지 버튼이 눌린 것처럼 이재가 굳었다.

“……뭐야, 저 돌아이는.”

이재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뒤늦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 * *



주차장에서 내린 윤조는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자꾸만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셨던 일은 잘되셨습니까.”

박중원 실장의 물음에 윤조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나의 즐거움을 너와 함께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표정이 사라졌다.

“네.”

귀찮게 맞선을 왜 봐야 하는 건지. 윤조의 얼굴에 평소처럼 무료함이 내려앉았다.

“회장님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귀찮은데.”

윤조의 낮은 중얼거림에 박 실장이 긴장했다. 괜한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하나 없는 사람이 이윤조였다. 이씨 집안을 위해 자그마치 20년을 바친 박 실장에게도 윤조의 비위만큼은 맞춰 주기 어려웠다.

“도련님.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냥 실장님이 보고해 주세요. 아니다, 지금쯤이면 아버지 귀에도 들어갔을 텐데.”

굳이 번거롭게 보고라니. 남 일처럼 무심하게 내뱉는 윤조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박 실장의 심금을 울렸다. 아주. 불안하게.

“일단 출발하겠습니다.”

박 실장이 운전석을 향해 눈짓했다. 다행히 윤조가 토 달지 않아 안심되었지만 방심하긴 일렀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에 합류할 즈음이었다. 박 실장의 재킷 안쪽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바라본 박 실장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박 실장님.]

문자는 바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 윤조가 보낸 거였다. 도대체 이건 무슨 뚱딴지같은 상황인지. 박 실장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거두며 몸을 틀어 윤조를 바라보았다.

“쉿.”

윤조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윙크했다. 그러곤 검지를 내려 핸드폰을 가리켰다.

박 실장은 어이없는 웃음이 샐 거 같아 빠르게 가족을 떠올렸다. 전우애로 뭉친 아내와 돈을 먹고 자라는 자식들을 생각하며 급히 웃음을 삼켰다.

[도련님. 말씀하십시오.]

박 실장이 빠르게 답을 입력했다.

[서이재란 여자에 대해 알아 오세요.]

박 실장이 힐끔 정 기사를 쳐다보았다. 정 기사가 이씨 집안에 일한 지 10년 차지만. 여전히 사람을 쉽게 믿지 않은 윤조다웠다.

[서이재가 누굽니까.]

[직업이 비서라는군요.]

알아 오라는 것치곤 턱없이 부족한 정보였다. 비서라면 하다못해 회사 이름이라도 알려 주든가.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박 실장은 문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없는 걸 알아 오는 게 당신 일 아니냐.’며 생략된 뒷말이 보이는 것 같았다.

[3월 15일생.]

뒤늦게 생각난 모양인지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3월 15일이면 윤조의 생일이었다. 뜬금없이 본인 생일을 말했을 리는 없고. 서이재란 사람의 생일이란 얘긴가.

박 실장은 생일의 정확한 의미를 묻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입력했다.

[알겠습니다.]

[비밀 엄수 잊지 마시고.]

윤조는 핸드폰을 도어 포켓에 넣고는 시트에 등을 기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윤조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 * *



윤조는 귀국하자마자 이어지는 맞선에 심드렁했다.

앞에 앉은 여자 또한 이보다 먼저 있었던 맞선 상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외모와 재력이었다. 조금 다르다면 너무 말이 많다는 정도랄까.

윤조의 무심한 태도에도 여자는 쉼 없이 재잘거렸다. 흥미가 없던 윤조는 급기야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런 윤조를 향한 맞선녀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여자는 상대가 로진 그룹의 아들이란 이유로 잔뜩 힘주고 나온 자리였다. 재산 좀 있는 집안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게 이윤조의 아내란 자리였다.

이미 몇몇 자제가 퇴짜 맞았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맞선녀는 자신 있었다. 외모와 지성 그리고 집안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으니까.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눈앞의 남자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 자신의 3종 세트였다.

“이럴 거면 맞선은 왜 나오신 거예요?”

여자의 신경질 섞인 목소리가 귀를 따갑게 했다. 윤조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가 펴며 여자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제게 꽂힌 강한 시선에 여자의 눈동자가 크게 동요했다. 그가 주는 압도감과 카리스마에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조각 같은 얼굴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까. 여자의 기대에 찬 눈빛이 윤조를 향했다.

“엄마가 나가라고 해서요. 제가 좀 많이, 효자거든요.”

무심한 대답을 끝내며 윤조가 해맑게 웃었다. 무표정과 웃을 때 찾아오는 간극에 놀라고 내용에 놀라, 할 말 잘하던 여자의 입술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마마보이 코스프레를 할 걸 그랬군. 여자의 반응에 윤조가 만족스러워하며 의자에 몸을 기댈 때였다.

“이재야, 우리 결혼하자.”

정적이 내려앉은 테이블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윤조의 눈길이 본능적으로 앞 테이블로 향했다.

남자의 들떠 보이는 뒷모습을 지나치자 청혼받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니 단정하고 청아한 느낌을 주는 미인이었다.

어딘가 낯익은 느낌인데. 윤조는 잠시 잠깐 여자가 누군지 고민했다. 그러나 떠오르지 않았다. 혼자 착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찬찬히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얼굴엔 기쁜 기색이라곤 없었다. 청혼이 반갑기보단 난감해 보였다. 윤조는 자신의 맞선보다 남의 청혼 결과에 더 흥미가 일었다.

“이봐요. 이윤조 씨.”

“쉿.”

맞선녀의 부름에 윤조가 제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눈은 여전히 청혼받은 여자에게 향한 채였다. 맞선녀 또한 윤조의 눈길을 따라 몸을 살짝 틀었다.

“헤어져요.”

뭐야, 지금. 남의 이별 장면 구경하고 있는 거였니? 맞선녀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날렸다.

여자가 몸을 바로 하자, 윤조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 게 보였다. 그것도 헤어짐을 막 고한 앞 테이블 여자를 보며.

“이것 보세요. 이윤조 씨!”

“제가 차인 거로 하죠.”

여태 묻는 말에 미적거리며 대답을 회피하던 남자는 어디 가고, 재빠르게 대답이 돌아왔다.

“뭐라고요? 지금 장난해요?”

앙칼진 물음에 윤조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우리 대화 끝난 거 같은데?”

낮게 깔린 중저음에 불쾌함이 실렸다. 맞선녀가 뭐라고 더 반박하려 하자, 윤조가 먼저 덧붙였다.

“조용히 가 주시겠습니까. 방해하지 말고. 당신도 구경거리가 될 작정이라면 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