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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전망 좋은 호텔 레스토랑엔 빈자리가 없었다.

밸런타인데이라 그런지 테이블마다 사진을 찍고 마주 웃으며 기념하는 연인들로 넘쳤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한 동제가 테이블 위로 무언가를 올렸다.

“이재야. 우리 결혼하자.”

기대 찬 동제의 목소리에 스테이크를 썰던 이재의 손짓이 멈췄다. 접시에 머물던 시선을 들어 올리자, 반짝이는 물건이 동제로 향하던 이재의 시선을 가로챘다.

테이블엔 다양한 빛을 뽐내는 다이아 반지가 케이스에 담긴 채 놓여 있었다. 물끄러미 반지를 보던 이재가 쥐고 있던 커트러리를 내렸다.

동제는 별거 아닌 이재의 동작조차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이재의 대답을 재촉하고 싶고 다그치고 싶지만. 무엇보다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재를 위해 어떤 프러포즈를 할까. 여러 날 고민했지만 지극히 평범한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벤트 업체를 섭외하기엔 이재가 싫어할 것 같았다.

이재는 요란한 걸 싫어하니까. 평소 바쁜 이재라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차에, 이벤트까지 화려하게 하면 더 도망갈 거 같았다.

동제는 고심 끝에 다이아 반지와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을 준비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전망 좋은 위치로 예약해 두었다. 이재의 승낙만 떨어진다면 완벽한 순간이 될 게 확실했다.

“동제 씨.”

감격해야 할 목소리가 어째선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동제는 이재가 너무 놀란 탓이라 여기며 서둘러 대답했다.

“그래, 이재야. 내 프러포즈 받아들일 거지?”

동제는 기대를 숨기지 못한 채 테이블 앞으로 몸을 당겨 왔다. 동제가 다가올수록 이재의 몸은 뒤로 물러났다. 동제를 향한 이재의 눈동자에 온기가 사라져 갔다.

“헤어져요.”

“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깔끔한 요구에 동제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잔잔하게 흐르던 재즈 선율을 단박에 끊어 낼 만큼 강력했다. 아닌 척하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재의 테이블로 쏠렸다.

“소리 좀 낮춰요.”

이재가 주변을 힐끔거리며 동제를 쳐다보았다. 동제는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굳었고 미스터리한 일을 마주한 사람처럼 혼란스러워했다.

동제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굳어 버린 눈동자가 이재에게 붙박이처럼 고정되었다. 헤어지자는 말은 이재에게서 도저히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도 안 되는 대답이었다.

동제는 정신을 추스르며 침착하게 말문을 열려고 했다. 분명 그랬는데.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뾰족하게 날 선 음성이 튀어나왔다.

“헤어지자고요.”

그에 반해 이재는 덤덤하게 대답을 되풀이했다.

“왜? 대체 왜!”

곱씹을수록 어처구니가 없는지 동제의 물음에 감히 거절해? 라는 뉘앙스가 섞여 들었다.

“기억 안 나요? 우리가 연애 시작할 때 내걸었던 조건.”

“조건?”

그런 게 있었던가. 동제가 처음 듣는 말 같다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런 동제를 바라보며 이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전혀 놀랍지 않았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던 부분이었으니까. 이재는 냅킨을 들어 입가를 정리했다.

“김동제 씨. 당신이 나한테 사귀자고 했을 때, 내가 내건 조건은 딱 하나였어요.”

물론 당신은 기억 못 하겠지만. 이재가 감정 없이 또박또박 내뱉는 말들에 동제의 심장이 조금씩 굳어 갔다.

“그걸 기억 못 한다는 건 나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거겠죠. 안 그래요?”

“무슨 배려? 나만큼 널 배려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동제가 억울하단 듯 중얼거렸다. 바쁘다는 이재에게 모든 스케줄을 맞춰 주었고, 잠자리 역시 이재가 원하지 않아 키스만으로 간신히 참고 버텼는데. 자기만큼 참고 배려해 주는 게 쉬운 줄 아나.

“너 비서라서 상사가 낮이고 밤이고 불러내도 군말 없이 나갔잖아. 상사 비위 맞추고, 스케줄 배려해 주면서, 언제 내 스케줄 맞춘 적 있어? 나 그래도 아무 말 안 했다.”

쏘아 대는 동제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와아. 생각하니까 짜증 나네. 내가 너한테 배려 안 한 건 또 뭔데? 네가 싫다 해서 잠자리도 참았어. 여태 키스 말고 한 것도 없잖아!”

이건 마치 너랑 자고 싶으니까 결혼하자고 하는 사람 같았다.

“김동제 씨!”

이재가 서둘러 동제를 제지했다.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흐르는 건데! 이재는 힐끔거리는 시선들에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았다.

“왜? 뭐? 내가 어디 거짓말했어?”

동제의 당당함에 이재는 고개를 틀며 한숨 쉬었다.

동제는 거래처 관계자였다. 업무상 방문한 회사에서 첫눈에 반했다며 이재를 따라다녔다.

이재는 몇 번 거절했지만 동제는 포기를 몰랐다. 그의 끈질김과 이재의 외로움이 맞물린 시기에 그와 연애를 시작했다.

외롭다고 아무나 만난 게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이야. 이재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스몄다.

열 달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도대체 무얼 보고 있었던 건지. 자신이 만났던 김동제와 눈앞에 앉아 있는 김동제. 서로 다른 사람 같았다.

“길게 말하지 않을게요. 내가 당신에게 말했던 조건은 단 하나였어요. 결혼하자고 하지 말 것.”

이재에게 결혼은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 같았다. 사랑이 식은 후 찾아오는 버림받은 삶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결혼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뭐?”

동제는 잊었던 조건이 떠올랐는지 표정이 굳었다. 입만 뻥긋거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결혼하자는 말은 곧, 나와 헤어지고 싶다는 말로 여기겠다는 말. 기억나죠?”

“하― 아!”

동제의 탄식이 테이블로 떨어졌다. 뒤늦게 이재의 조건이 떠올랐다.

연애에 관심 없다던 이재를 따라다닐 땐, 애인만 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막상 연애하게 되니 이것저것 욕심이 생겼다. 어느 것 하나 욕심대로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헤어져요.”

이재는 곁에 둔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해외 출장 간 상사 덕에 모처럼 정시 퇴근이라 기뻤는데. 이런 식으로 저녁을 망칠 줄이야.

“잠깐만 이재야!”

동제가 벌떡 일어나 이재의 손목을 낚아챘다. 다시 한번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놓고 말해요.”

이재가 낮고 빠르게 쏘아붙였다.

“서이재. 너 정말 이러기야?”

“전 분명 시작 전에 말했어요. 제게 있어 결혼 얘기는 곧 헤어지자는 말이라고.”

차갑게 내뿜는 냉정함에 동제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이재를 붙잡을 수 있는지 머릿속을 굴렸지만, 잡고 있던 손에서 힘만 빠져나갔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마지막 계산은 내가 하죠.”

망설임 없는 이재의 하이힐 소리가 레스토랑에 울렸다. 재밌는 구경이 끝났다고 여겼는지 두 사람을 향했던 시선이 뿔뿔이 흩어졌다.

동제만 아직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 *



“미쳤어. 계산을 왜 한다고 해서.”

이재가 영수증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괜한 자존심을 세우느라 빚만 늘렸다.

잘 사는 동제에겐 하룻밤 술값도 안 될 돈이지만. 이재에게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2인분 식사비는 자신의 한 달 치 식비였다.

“짜증 나.”

손끝에 신경질을 담아 백에 카드와 영수증을 대충 쑤셔 넣었다. 불쑥 낮은 웃음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재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엘리베이터 문에 낯선 남자가 비쳤다.

‘뭐야. 설마 들은 거야?’

이재가 살짝 입술을 눌렀다. 레스토랑 안에 있던 사람이라면 이미 다 봤을 테지. 뒤늦게 창피해 봤자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일 뿐. 괜찮아. 서이재.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몸과 마음은 따로 놀았다.

이재가 슬쩍 걸음을 떼 남자와 반걸음 정도 떨어져 섰다. 남자의 시선도 떨어진 거리만큼 따라붙었다.

남자는 엘리베이터의 거울 같은 문을 통해 이재를 쳐다보고 있었다. 슬슬 남자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서이재! 기다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재의 목덜미가 곤두섰다. 이재의 눈길이 층수 표시판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는 아직 올라오는 중이었다.

빨리, 빨리. 엘리베이터를 향한 이재의 눈동자가 초조했다. 불안정한 손끝이 핸드백 끈을 톡톡 두드렸다. 두드리는 간격이 점점 빨라지며 이재는 엘리베이터와 복도 끝에 있는 비상구를 번갈아 힐끔거렸지만, 늦었다.

“서이재. 이렇게 가면 어떡해!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동제가 이재의 팔을 낚아채며 돌려세웠다. 이재의 몸이 휘청거림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거 놔요.”

이재가 몸을 바로 하며 동제를 뿌리쳤다. 열린 엘리베이터로 몸을 돌렸다. 먼저 올라탄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남자의 흥미 가득한 눈동자가 보였다. 마치 재미난 구경이라도 된다는 듯 입꼬리까지 올라갈 것 같았다.

“결혼하자고 안 할게. 아까 했던 말 취소할게. 그러니까, 이재야. 너도 헤어지자는 말 취소해.”

이재는 동제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창피해서 여길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재가 고개를 돌려 비상구 표시를 찾을 때였다.

“서이재 씨.”

묵직하게 떨어지는 부름이었다. 함부로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실린 음색이었다. 비상구로 향하려던 이재가 멈칫했다.

“이재야, 아는 사람이야?”

눈치 없는 동제가 물었다.

당연히 모르는 사람이다. 아는 사람이라면 창피해서라도 진작 도망쳤지. 이젠 모르는 사람이라도 낯부끄러워 피하고 싶어질 뿐.

“동제 씨. 잠깐 나 좀 봐요.”

이재가 대답 대신 비상구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서이재 씨, 안 타고 뭐 합니까.”

저 아세요?

경악한 이재가 그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