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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윤조의 경고는 앞에 앉은 맞선녀만 들을 수 있었다.

여자는 입술을 씰룩였다. 로진 그룹의 모든 자산이 이 남자에게 떨어질 터. 그 자산이 탐나는 마당에, 외모와 능력마저 특출나니 쇼윈도 부부라도 상관없을 거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마저도 원하지 않는 모양새라 자존심 상했다. 잠시 갈등하던 여자는 자존심을 택하며 벌떡 일어서 나가 버렸다.

“……당신이 나한테 사귀자고 했을 때, 내가 내건 조건은 딱 하나였어요.”

윤조는 맞선녀 때문에 앞 테이블의 대화를 놓친 게 아쉬웠다.

윤조는 느긋하게 와인을 음미하며 방금까지 맞선녀가 앉아 있던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앞 테이블에 둔 시선은 거뒀지만, 청력은 온통 앞 테이블을 향해 활짝 열었다.

“너 비서라서 상사가 낮이고 밤이고 불러내도 군말 없이 나갔잖아.”

비서라…….

윤조의 입꼬리 한쪽이 얄궂게 올라갔다. 곧이어 나오는 남자의 키스와 잠자리 운운에 윤조가 슬쩍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꾸만 여자의 반응이 궁금했다. 여자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더니 이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러곤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결혼하자는 말은 곧, 나와 헤어지고 싶다는 말로 여기겠다는 말. 기억나죠?”

‘결혼이 곧 헤어짐이라니.’

독특하네. 윤조가 피식 웃으며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슬슬 일어나 볼까.

“마지막 계산은 내가 하죠.”

비장함 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멀어지는 하이힐 소리에 윤조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조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시 만난 여자를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미쳤어. 계산을 왜 한다고 해서.”

비장했던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한순간의 자존심이 현실 앞에 무너지는 낮은 중얼거림만 들려올 뿐.

윤조는 여자의 목소리에 잊고 있던 아주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데려다줄게.’

윤조가 태어나 처음 베풀어 본 호의였다. 그런 호의를 여자는 큰 눈을 더 크게 뜨고선 물었었다.

‘그쪽이 왜요?’

그러게. 왜지. 이유를 찾느라 머뭇거리는 사이에 여자는 떠나고 없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인데. 어째서인지 윤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 * *



높디높은 담벼락이 길게 이어졌다. 담을 따라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었다.

담벼락은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보다 높았고, 안쪽을 넘보지 말라는 듯 견고했다.

윤조는 정원을 가로지르다 말고 멈춰 섰다. 성벽처럼 둘러싸인 높은 담장을 보자 자신의 세계에 돌아온 게 실감 났다.

결국 또 제자리군. 윤조의 비웃음이 찬 공기에 얼어붙었다.

어릴 땐 모두 자신처럼 사는 줄 알았다. 말 한마디면 다 이뤄지고, 때론 말하기도 전에 모든 게 준비되어 있는 삶.

등하교에 함께 할 수행 비서가 있고, 집안일을 해 주는 도우미 몇 명쯤은 있는 게 당연한 삶.

원하기도 전에 자신을 위해 모든 게 준비된 삶.

최신형 장난감과 물건들, 온갖 다양한 이유로 벌어진 파티, 합법적으로 증여받은 주식과 자산, 그리고 친구까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서서히 깨달았다. 아이들과 함께 등하교하는 사람은 수행 비서가 아니라 엄마라는걸.

삼대가 함께 살기 원했던 조부 탓에 집 근처 일반 초등학교로 입학했다. 유명 사립학교로 원거리 등교를 고려해 볼 만했지만, 차를 오래 타고 다녀 피곤하고 위험하다며 조부에 의해 차단당했다.

아이들이 시간에 맞춰 학원에 다니고 방과 후 수업을 할 동안, 윤조는 자신의 스케줄에 맞춘 과목별 선생님이 늘 집에서 대기 중이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했던 예체능과 교양 수업. 차곡차곡 밟아 간 후계자의 삶. 평범한 사람과 자신의 삶이 다르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특별함에 우쭐거렸던 삶은 차츰 숨통을 조여 왔으며, 입 뗄 필요도 없이 눈빛 하나로 이뤄지는 것들은 지루해져만 갔다. 모든 것에 흥미를 잃는 건 생각보다 빨랐다.

재미를 찾아 떠났지만 다시 돌아온 세계. 담장 안의 세상에 머물게 될 운명.

그게 내 삶이겠지.

윤조가 가볍게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현관으로 향했다.

“윤조야. 아버지 화나셨으니까, 그냥 잘못했다고 잘 말씀드려. 알겠지?”

현관을 들어서기 무섭게 모친 김민애가 윤조를 붙잡아 세웠다. 민애는 자신이 만든 완벽한 피조물을 바라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화 많이 나셨어요?”

“아버지 성격 알잖아. 그러게. 왜 차이고 와.”

기껏 좋은 자리 물색해서 보냈더니 보란 듯이 차이고 올 줄이야. 아니, 차고 왔어도 속상할 판에 차일 건 또 뭐야. 내 아들이 얼마나 훌륭한 남편감인데.

“우리 어머니는 아들이 차이고 온 게 속상하신 걸까? 아버지에게 혼날 게 걱정이신 걸까?”

해죽해죽 웃는 아들을 보며 민애가 따라 웃었다.

“이리 예쁜 아들, 차여 오니 속상하고. 아버지한테 혼날 거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지.”

서른한 살 먹은 아들을 향한 민애의 시선에 안쓰러움이 담겼다.

“우리 김 여사님이 저 대신 맞선도 보고, 아버지한테 혼나 주실래요?”

“그럴까?”

한술 더 뜬 민애가 손뼉까지 치며 맞장구쳤다. 윤조의 눈꼬리가 접히며 가볍게 도리질 쳤다.

“윤조야.”

민애가 다정하게 윤조를 불렀다. 이쯤에서 나올 말은 뻔했다.

“저 금방 가니까, 밥 차리지 마세요.”

윤조가 서재로 방향을 틀며 민애가 묻기도 전에 대답했다.

“왜? 겨우 얼굴 보는데 그새 가려고?”

윤조는 귀국해서 일주일 정도만 본가에 머물렀고 한 달째 호텔에 투숙 중이었다. 윤조가 독립을 위해 구매한 주택은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제가 엊그제 만난 김 여사님은 어디 사시는 누구셨더라.”

이틀 전에도 이미 만난 모자였다. 그런데도 민애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어이구. 아들, 엄마한테 좀 져 주면 안 되니?”

“알면서 그러신다.”

한 번에 고분고분한 법이 없는 아들을 보며 민애가 서운한 티를 냈다.

“난 누구한테 져 주는 거 못 해요.”

윤조가 가볍게 대꾸하며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 윤조입니다.”

“들어와!”

아버지 이한경의 노한 음성이 문밖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윤조가 표정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책상에 앉아 있던 한경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듯 살벌한 눈초리였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여자 쪽에서 우리 로진을 거부하는 게냐.”

윤조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본론이 흘러나왔다. 아들이 차인 게 자존심을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더 정확히는 로진 그룹이 까였다는 걸 용납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자가 보기보다 착실하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찼다고 사실대로 얘기하라고 할 걸 그랬네요.”

한경의 얼굴에 주름 하나가 슬며시 펴지며 아들을 향한 눈길이 누그러졌다.

“네 마음에 안 들더냐?”

“뻔히 아시면서. 굳이, 꼭, 확인하시면 마음이 좀 놓이세요?”

아들의 능글맞은 태도에 한경이 혀를 찼다.

“하긴. 언제 네놈 눈에 차는 사람이 있긴 하더냐. 쯧쯧.”

그러거나 말거나, 윤조는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남의 집 귀한 딸들 그만 괴롭히시고, 맞선 좀 그만 잡으세요.”

“그게 삼대독자인 네가 할 소리냐!”

대를 이어야 한다는 압박에 한경이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전 삼대독자가 되겠다고 한 적 없습니다만, 동생 하나 더 낳지 그러셨어요?”

“이 자식이!”

윤조가 소파에 기대며 남 일처럼 내뱉었다. 열이 오른 아버지를 보면서도 윤조는 그저 싱긋 웃었다. 그런 아들을 보는 한경은 원통함에 가슴을 쳤다. 삼대독자만 아니었어도, 이리 속 탈 일은 없을 텐데…….

이씨 집안은 손이 귀했다. 그 탓에 민애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으로 꽤 시달렸다.

첫째 딸 윤진이 태어났을 땐 초상집 분위기였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민애는 그 후로 임신이 잘 되지 않았다. 어렵게 임신이 되어도 쉽게 유산되었다. 손이 귀해도 바깥에서 씨를 얻어 오는 건 용납하지 못했기에 온갖 정성으로 어렵게 얻은 손이 윤조였다.

“네가 얼른 결혼하고 자리 잡아야, 후계자로서 네 자리를 굳건히 하지.”

“결혼 안 해도 제자리는 굳건할 겁니다.”

오냐오냐 키운 탓인지, 타고나길 멘탈이 강하게 태어난 건지. 윤조의 흔들림 없는 태도에 한경의 시름만 깊어졌다. 자신이 아직 현역으로 얼마든지 회사를 이끈다지만, 후계자 자리만큼은 단단히 해 두고 싶었다.

“좋다. 결혼은 일단 보류해 두마.”

“보류하시는 김에 폐기해도 좋고요.”

세상만사 자신과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어서 회사나 나와. 네놈 자리 언제까지 비워 둘 생각이냐.”

“아버지.”

진중한 부름에 한경이 살짝 굳었다. 차라리 능글맞은 게 나은 아들인데. 왜 무게 잡고 그러실까.

“제 꿈을 망가트리실 생각이십니까.”

어찌나 진지하게 묻는지 한경은 잠시 움찔거렸다. 이날 이때껏 아들 입에서 뭘 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는 걸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꿈이라니.

“꿈? 무슨 꿈 말이냐.”

“태어나 보니 재벌 3세에 삼대독자, 이윤조가 되어 있더군요. 이런 제가 꿀 수 있는 꿈은 하나죠.”

“그래서 그 꿈이 뭐냐고?”

한경은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뱅뱅 돌아가는 아들을 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