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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전하. 그 도깨비에게 해코지를 당할 확률이 줄었다고 하여 안전을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고비스의 산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십니까? 여기에 서식하는 짐승들은 여간한 맹수들과 급이 다르다고요!”

쉴로스는 포기하지 않고 그를 회유하는 길을 택했다. 대륙의 산맥을 통틀어 보아도 아고비스는 꽤나 위험한 수준에 있는 산이었다. 가장 최북단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엄청난 추위와 꽁꽁 얼어붙은 얼음들, 그리고 극지방의 동물들은 웬만한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몸집이 컸다.

한데 그런 곳에 저가…… 아니, 이게 아니지! 귀중하고 존엄하신 국왕께서 괴물의 점심 도시락이 되기 위해 행차하신다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하지만 그의 애절한 회유는 통하지 않았다. 벽에 대고 말해도 이보다는 대화가 통하리라! 적어도 옆방의 누군가는 시끄럽다 한마디라도 대답해 줄 것이 아닌가?

쉴로스는 몇 번을 시도해도 안 되었을 때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축 늘어져 걷는 그를 흘끔 내려다본 소아즈가 양모 코트 안쪽으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 쉴로스에게 던져 주었다. 별안간 떨어지는 가죽 주머니를 얼떨결에 낚아챈 그의 표정이 어리둥절했다.

“기분이다. 그거 내가 아끼는 건데 경에게 하사할게.”

칼바람에 붉게 상기된 뺨을 한 소아즈가 그의 손바닥 안에 잡힌 가죽 주머니를 가리켰다. 그러자 쉴로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하! 하고 숨을 내뱉었다.

“이 렝겔랑느산 육포로 절 달래고, 꼬드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천만의 말씀, 완전 크나큰 오산이십니다! 물론 이 육포가 최고급 소고기로 만들어진 건 알지요. 완전 맛있다는 것도요. 그러나 저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왜냐고요? 그깟 소고기보다 제 목숨값이 훨씬 더 중하니까요!”

열변을 토하는 그의 입에서 입김이 쏟아져 나왔다. 소아즈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제 부하는 의외로 끈질긴 구석이 있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두 사람의 공방에 주위 사냥꾼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신분을 망각한 쉴로스가 방방 날뛰자 소아즈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육포 귀신이 육포를 마다할 정도라면…….”

“제발 깨달음을 얻으시지요. 전하께선 지금 스스로를 괴물의 점심 도시락으로 던져 주려고 하십니다!”

“점심 도시락이라니. 말이 심하잖아.”

“걱정 마시지요! 전하! 전하께서는 딱 봐도 맛없는 도시락일 게 분명하니까요!”

가느냐 마느냐, 두 사람의 언쟁은 계속되었다. 멀찍이 지켜보던 이들은 대체 누가 더 위고 누가 더 아래인지 모르겠다며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 와중에 웃긴 건 괴물 울음소리 한번 들었다고 덜덜 떨던 그 기사가 자신의 주군, 그러니까 국왕에겐 한없이 강하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따져 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보다는 기실 저희들의 세계에서 꼭대기에 군림하는 저 소년이 가장 두려운 존재이거늘, 뒤바뀌어 버린 상황에 사냥꾼들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한참을 다투다 결국 감봉이라는 말에 항기를 든 쉴로스가 산을 오르는 것으로 언쟁은 일단락되었다.

“저기 보이는 나무를 지나면 저희들이 사용하는 임시 야영지가 나옵니다.”

스벤이 작은 언덕 위에 선 고목을 가리켰다. 그에 몰던 말을 우뚝 멈춘 소아즈가 고개를 들어 고목보다 좀 더 먼 뒤편을 올려다보았다.

산 정상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아마 중턱부터는 눅은 진눈깨비들이 오기 시작할 터. 쉴로스에게는 장난 삼아 흰 도깨비를 구경하자 하였지만 사실 얼마간 오른 뒤에 하산할 생각이었다. 눈이 오면 당해 낼 재간이 없었으므로 더 이상의 탐색은 무리였다. 쉴로스의 위치를 곁눈질한 소아즈가 바로 뒤편에서 쫓아오는 스벤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예정대로 야영지에 도착하면 잠시 쉬었다가 하산한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쉴로스 경에게 비밀로 해 줘.”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댄 소아즈가 싱긋 웃었다. 사냥꾼을 모으긴 했으나 처음부터 흰 도깨비를 잡을 무모한 생각은 없었다. 그저 오늘은 백성들을 안심시킬 겸, 탐색차 산을 오른 것뿐이었는데 생각보다 쉴로스의 겁먹은 모습이 재밌어 그에게 계획을 말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비밀로 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스벤이 뒤를 흘끔 돌았다. 왕의 계략에 빠진 기사는 대놓고 귀찮아하는 사냥꾼들을 붙잡고 제 신세를 한탄 중이었다. 안타깝게도 쉴로스는 그들 모두가 아는 사실을 저 혼자 끝까지 모를 예정이었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뿌연 구름들이 산허리에 걸려 있었다. 바라본 하늘이 컴컴했다. 아직 오후조차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날씨에 조금은 불안한 기운이 그들의 야영지를 감싸고 돌았다.

소아즈는 차갑게 떨어지는 눈덩이에도 하늘을 향해 뒤로 젖힌 고개를 바로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할까, 조금 소란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니, 어수선하다고 말하는 게 좋겠다.

“저 새 이름이 뭐지?”

줄곧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아즈는 결국 지나가던 사냥꾼 하나를 붙잡고 질문을 던졌다. 도구를 재정비 후 하산 준비로 분주했던 애꾸눈의 볼프스가 활시위를 당기다 말고 소아즈의 시선이 닿은 곳을 향해 머릴 들었다. 흐린 구름 아래 새들 몇 마리가 날고 있었다.

“저건…… 바다오리 같습니다요.”

“바다오리? 이 근처에 바다가 있어?”

“아고비스를 넘으면 북해가 가깝습죠.”

그가 바짝 긴장하고 있음을 눈치챈 소아즈가 고맙다 인사를 건넨 뒤 붙잡았던 팔을 놓아 주자 볼프스는 재빨리 어딘가로 도망쳤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덩치 큰 사냥꾼을 멀거니 주시하던 소아즈가 진눈깨비로 축축해진 얼굴을 한번 거칠게 닦아 냈다. 그러고는 다시금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 잠깐 사이 새들의 머릿수가 늘어나 있었다.

“바다오리라…….”

그는 또다시 지나가던 사냥꾼을 붙잡았다. 흰 도깨비의 목격자 중 하나인 아랫마을 사냥꾼 멜번이었다.

“혹시 바다오리들은 한 장소의 하늘을 꾸준히 오랫동안 날아다니는 습성이라도 있나?”

볼프스와 마찬가지로 긴장이 역력한 멜번이 딸기코를 문질렀다.

“어…… 아니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보통 맹금류 외에는 그리 한곳을 오래 맴돌지 않습니다만…….”

소아즈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손가락을 펼쳤다.

“그럼 저 바다오리들은? 우리가 도착한 이후부터 쭉 저런 식인데.”

그의 말에 멜번이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제대로 확인했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슴츠레 눈을 모으고 한참을 하늘만 바라보던 멜번은 아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소아즈의 말대로 확실히 이상한 움직임을 발견했다. 한 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가 주둔지의 하늘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위치를 알려 주는 것처럼.

멜번은 짙은 눈썹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처음 보는 광경이긴 하옵니다만 소인이 사냥꾼이라 하여 모든 동물들에 대해 능통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벤에게 가서…….”

“아아악!”

사냥꾼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날 선 쉴로스의 비명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모두의 눈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기를 바투 쥔 사냥꾼들이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쉴로스가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큰일이라도 났나 싶어 힘을 줬던 사냥꾼들이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맥 빠진 한숨을 내쉬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에 소아즈가 괜히 미안해졌다.

“경. 제발 얌전히 좀 있어.”

“전하! 그런 게 아닙니다!”

자초지종은 듣지도 않고 타박부터 하는 왕에게 울상으로 달려온 쉴로스가 억울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그의 부산스러움에 미간을 찡그린 소아즈가 문득 쉴로스의 손에 시선을 두게 되었다. 그곳에는 저가 하사한 가죽 주머니는 어디 가고 겨우 육포 한 조각만이 달랑 주먹 사이에 들려 있을 뿐이었다.

“과연 육포 귀신…… 그새 그걸 다 먹었어?”

“전하. 맹세코! 결단코! 아니옵니다!”

그는 소아즈가 이 이상 자신을 질책하기 전에 재빨리 팔을 뻗어 올려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저놈! 저거 보이시지요? 저게 뭔 놈의 새인지는 모르겠어도 저놈의 요물 같은 새가 제 육포를 훔쳐 달아났사옵니다!”

방방 날뛰는 쉴로스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정말로 육포 주머니를 움켜쥔 바다오리 한 마리가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쉴로스를 놀리는 것처럼 한참을 그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다 이내 무리 사이로 섞여 들었다.

“저, 저, 나쁜 놈들! 감히 이 쉴로스 폰 로던의 육포를 가져가다니!”

콧김을 씩씩거리는 쉴로스와는 달리 소아즈는 무리 지어 맴돌던 바다오리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내심 안도했다. 그저 겨우내 굶주렸던 새들이 식량을 노리고 야영지 주위를 날아다닌 것뿐이었다. 뒷목을 감쌌던 꺼림칙함은 흰 도깨비 이야기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탓이리라. 눈을 내린 소아즈가 피식 웃었다.

“경. 새들이 배가 고파 그런 것뿐이야.”

“배가 고프다고 남의 것을 훔쳐도 되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잣대를 동물에게까지 들이민 밴댕이 소갈딱지 기사는 도둑놈을 혼내 주겠다며 가장 가까이 있던 사냥꾼에게서 활을 빌렸다. 활 통까지 메고 선 육포 도둑을 쫓아 뛰어가는 쉴로스의 뒷모습을 딱하게 쳐다본 소아즈가 활을 빼앗긴 사냥꾼에게 말했다.

“어차피 궁술에는 젬병이니까 금방 돌아올 거야.”

그래도 활과 화살 값은 꼭 청구해 두라며 싱긋 눈웃음 친 소아즈가 야영지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공터로부터 숲이 시작되는 부근은 나무가 제법 우거지기 시작해 섣불리 들어갔다간 길을 잃기 딱 좋을 것 같았다.

빽빽한 나무들과 해가 들지 않아 겹겹이 쌓인 눈들. 거기다 맹수라도 만나면 이런 산속에서 도망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노련한 사냥꾼들조차 함부로 얕잡아 볼 수 없다던 아고비스는 태곳적부터 대륙에 자리 잡은 거대한 산맥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이의 침엽수림을 눈으로 훑었을 때야 소아즈는 그 기분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고작 이런 부츠로 산의 눈밭을 헤쳐 나가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슬슬 하산을 시작하란 명을 내리기 위해 소아즈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스벤을 찾았다. 그는 야영지의 언덕 아래에서 몇몇의 사냥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리가 제법 있었기에 본인이 내려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소아즈는 옷을 단단히 여미고 크게 한 발자국을 뗐다. 쉴로스의 비명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으, 으아악!!”

조금 전의 소란이 마무리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사고를 치는 부하의 행동은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볼 만하게 했다. 심지어 작금의 상황이 펼쳐진 거리조차 가까웠다.

대체 이번에는 무슨 일로 난리 법석일까. 엉덩방아까지 찧고 바닥에 엎어진 그는 무언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덤불이 우거진 하얀 수풀. 바람이 사부작대는 소리인지, 혹은 그곳에 무언가가 숨어 있기라도 한 건지 매우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냥꾼들의 불안한 시선도 일제히 그곳을 향했다.

제법 가까운 나무와 나무 사이에 언뜻 보아도 푸르게 빛나는 안광 한 쌍이 있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모습이라 생각했을 때 쉴로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숲의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진눈깨비가 좀 더 거세졌다. 선명하지 못한 시야로 멀거니 바라보던 멜번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열어 중얼댔다.

“연옥색…… 흰 도깨비…….”

그것은 어두운 그늘에 숨어 인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그것들은 무수했다. 차가운 연옥빛 안광의 뒤로 셀 수 없이 많은 눈들이 낮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늑대다! 정면에 늑대 무리가……!”

“아니, 이쪽에도! 오른쪽도!!”

“사방이다! 늑대가, 으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