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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로디는 살아남은 여우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는지 두려움에 떨었다. 눈을 찡그린 레오노엘 역시 가엾은 여우들의 죽음을 떠올리고 낮게 욕을 읊조렸다. 천 년 전에는 저도 인간이었으니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인간들이 먹이사슬의 정점에 놓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었고 흰 족제비가 된 지금은 그들이 동물을 사냥하는 것을 어느 정도 감내하는 중이었다. 인간들도 다 먹고살고자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무자비한 대량 학살은 도가 지나쳤다. 백 마리가 넘는 붉은여우들이 산에서 자취를 감췄고 그마저 남은 여우들은 어미 잃은 새끼들이라 대략 파악된 수만 칠십여 마리 정도. 최상급 모피의 재료인 붉은여우가 이곳에 서식한다는 걸 안 인간들이 점점 깊은 곳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은붙이를 고이 내려놓은 레오노엘은 입구로 다가섰다. 공포에 사로잡혀 그녀가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던 로디가 걸어 나오는 흰 족제비를 보고 울먹였다.

‘왕녀님…… 저 너무 무섭습니다. 이대로 여우들처럼 죽게 되면 어떡하나요?’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으니 지레 겁먹을 필요 없어. 로디.’

그녀는 꽤나 평온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인간들을 쫓아 나갈 것처럼 눈을 형형히 뜬 안나가 물었다.

‘무슨 좋은 수가 있으십니까?’

‘음. 있기야 있지.’

레오노엘은 몸을 세우고 짧은 앞발로 팔짱을 끼려 애썼다. 인간일 적의 버릇이 남아서일까, 아님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인 걸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안나의 눈빛이 애처로웠다.

‘아무래도 산의 늑대들을 모두 모아야겠구나. 지난번처럼 넋 놓고 당할 수는 없지 않겠니?’

안나는 대답 대신 파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옛날의 일들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그녀가 얼마나 강한 인간이었는지 그거 하나만은 익히 들어 기억했다.

자신의 어머니는 자주 동화라도 되는 양 레오노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그 바람결 같던 목소리를 떠올리자 그녀의 속을 덮었던 분노가 사라지고 냉정함이 차분하게 피어올랐다.

‘놈들의 위치는 어디라고 하더냐?’

‘산 아래 진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지금쯤 오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럼 일단 새끼 여우들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주렴. 놈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우들은 대피시키는 것이 낫겠지. 로디, 네가 여우들에게 언질을 해 주겠니?’

‘예! 왕녀님께선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승산이 생겼다고 보는지 바짝 힘이 들어간 로디의 질문에 흰 족제비가 동그란 귀를 쫑긋 세웠다. 흑요석같이 까만 눈이 뭘 그런 걸 묻느냐는 시선이다.

‘늑대들을 불러야지. 너희가 일일이 찾으러 다니기엔 시간이 얼마 없어.’

레오노엘은 안나에게 발할라의 유물 조각을 잠시 맡아 달라 이른 뒤 폴짝폴짝 뛰어 굴 밖으로 나갔다. 분명 이 부근에서 가장 많은 무리를 지어 사는 늑대 무리가 케드릭을 포함한 셋. 그 외에 작은 무리가 다섯 정도 있었다.

조각을 굴 깊숙한 곳에 둔 안나 역시 그녀를 쫓아 밖으로 나왔다. 소란스레 달려온 로디 덕에 몇몇 늑대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레오노엘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감지해 냈다.

맑았던 하늘에는 어느새 희뿌연 눈구름들이 심상찮게 모여들었다. 그들의 시선 속에서 레오노엘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비록 사용은 하지 못하나 몸에 밴 마법의 힘은 불멸을 선사할 만큼 강했고 바로 이렇게,

‘케드리―익!’

거대한 목청을 낼 만큼 굉장한 뱃심을 주었다.



*



“바, 방금 저 소리는 뭐, 뭐, 뭐, 뭡니까?”

겁이 많기로 유명한 왕의 호위 기사 쉴로스 폰 로던이 눈을 왕방울 만하게 뜨고 다급히 물었다. 손을 달달 떨며 제 옆에서 가장 가까운 사냥꾼에게 다시 한 번 안전에 대해 묻는 그를 본 사냥꾼들이 작게 수군거렸다.

“진짜 왕의 기사 맞아……?”

“덩치는 불곰 같은 양반이…….”

1미터 90이라는 거대한 신장을 가진 기사 쉴로스는 다시 한 번 들려오는 거대한 맹수의 포효에 두꺼운 어깨를 움츠렸다. 겁에 질린 그에게 사냥꾼들의 수군거림은 당연지사 들릴 리가 없었다. 근처에서 행렬의 길잡이를 하던 사냥꾼의 우두머리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저것이 바로 문제의 흰 도깨비입니다.”

“희, 흰 도깨비!”

쉴로스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머리를 두 팔로 감싼 채 비명을 내질렀다. 겉모습만 보면 호랑이라도 때려잡을 체격인 남자가 어찌 이리도 겁이 많은지 대답을 했던 사냥꾼이 외려 민망해 헛기침을 했다.

국왕의 호위를 제비뽑기 같은 것으로라도 선발하는 걸까 미심쩍게 바라보면 그 뒤로 심드렁한 얼굴의 소년이 있었다.

파릴로드 왕국의 국왕 소아즈가 언뜻 졸려 보이는 금빛 눈동자로 나른하게 웃었다.

“듣던 대로 목청이 대단한 괴물이네.”

“예. 녀석의 포효가 보통 큰 것이 아닙니다.”

“으음. 조금 무섭긴 하다.”

하나도 안 무서워 보이는 얼굴로 그리 대답하면 할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왕의 눈치를 보며 사냥꾼의 우두머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소아즈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반은 농담으로 듣고 온 건데 말이야…….”

“저, 전하…… 헛소리 따위가 아닙니다…… 이건, 이건 괴물이에요……!”

뒤쪽 열에서 따라 걷던 쉴로스가 어느새 앞을 치고 나와 호들갑을 떨었다. 이러한 모습이 한두 번도 아닌 터라, 익숙하게 고개를 끄덕인 소아즈가 낮게 내뱉었다.

“그래…… 뭐, 일단 곰은 아닌 것 같네.”

왕의 하얀 말은 그가 고삐를 쥐고 있지 않음에도 다각다각 제 갈 길을 나아갔다. 사냥꾼들은 왕의 위태로운 뒷모습에 심장을 졸였다.

“그러니까 그냥 다시 돌아가시지요. 네? 돌아가서 토벌대를 좀 정비하고, 아니지 이참에 왕국군을 불러서……!”

“난 이분들로도 괜찮을 것 같은데?”

소아즈가 그 상태에서 상체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왕의 시선이 꽂히자 긴장한 사냥꾼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다들 이 근방의 전문 사냥꾼이잖아. 산에 대한 정보나 사냥감을 사로잡는 법 같은 건 아무래도 성안의 병사들보다는 백배 더 도움이 되겠지.”

싱긋 웃는 소년의 얼굴은 꼭 눈밭 위에 피어난 겨울 꽃 같았다. 이번 생에서 그 그림자라도 한번 뵐 수 있을까 싶었던 왕을 만난 사냥꾼들의 마음은 혼란과 감격으로 뒤숭숭했다.

올해로 재위 오 년이 된 열아홉 살의 소아즈 폰 라말리엘은 매우 귀한 은발을 가진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아래 강아지 같은 눈매와 금빛 눈동자, 도톰한 붉은 입술, 그리고 아미와 코끝으로 이어지는 우아한 선은 꼭 한 폭의 명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찬 바람이 스쳐 두 뺨이 장미 꽃잎처럼 물든 왕은 그 나이답게 청량하고 맑은 분위기가 이곳의 계절과 매우 잘 어울렸다. 게다가 키는 훤칠하게 큰 것이 골격이 좋아 희고 길쭉길쭉했는데 북부인다운 청초한 분위기가 사람을 홀리는 그런 묘한 신비함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말의 요지는, 이런 산에선 영 맥을 못 출 그런 체격인 데다 혹여 눈산을 걷다 큰일이라도 날까 싶어 불안하다는 얘기였다. 사냥꾼의 우두머리가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 봐주시어 황송하옵니다만…….”

“지, 지리를 잘 안다고 하여 그것이 괴물을 물리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소아즈가 사냥꾼들의 편에 서자 쉴로스는 잔뜩 울상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도깨비에게로 향하는 전력이 달랑 요 삼십 명의 민간 사냥꾼들뿐이라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하의 성화에 소아즈가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것도 웃기잖아.”

“소득이요? 소득 말입니까? 전하…… 제 말 잘 들으세요. 지금 여기 붙어 있는 이 목숨이 바로 소득 그 자체입니다!”

쉴로스는 본인의 가슴에 주먹을 퍽퍽 내리쳤다. 물론 방금 계곡을 울린 짐승의 소리는 겁을 지레 먹게 할 만큼 굉음이긴 했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이만큼이나 산을 오른 것이 아까웠고 토벌대를 꾸리는 것 또한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주민들은 밤마다 두려움에 떨며 언제 올지 모를 국왕 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릴 것이다.

“쉴로스 경. 내가 고작 도깨비의 울음소리를 듣고 하산했다고 하면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

“예? 거야 실망하겠지요. 전하께서 언제쯤 흰 도깨비를 잡아 오시려나 잔뜩 기대하고 있을 텐데.”

“그래. 알면 그 입 좀 다물고 있어.”

천사 같은 얼굴에 거친 말이―그의 얼굴에 비해 충분히 거칠었다―흘러나오자 그제야 스스로 무덤을 판 쉴로스의 입이 일자를 그렸다. 이제야 좀 조용히 가려나 싶었던 그때 다시 한 번 짐승의 거대한 포효가 별안간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번에는 좀 더 얇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울림에 사냥꾼들이 당혹스러운 듯 제각기 무기를 바투 쥐었다. 긴장이 역력한 표정들이었다. 그 울음에 어딘가에서 산사태가 일어난 모양인지 멀리서 눈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그들의 머리 위로 한 무리의 검은 새 떼가 도망치듯이 푸드덕대며 날아갔다. 검은 점들이 모여 만든 그림자는 마치 경고처럼 불길함을 띠고 있었다. 역시나 질겁한 쉴로스가 소아즈에게로 후다닥 뛰어왔다.

“전하……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주청드리겠사옵니다. 하산하시지요.”

애걸하는 쉴로스의 얼굴에 결국 마음이 움직인 것인지 금색 눈동자가 연민의 빛을 띠었다. 소아즈가 그를 딱하게 불렀다.

“경…….”

“예……! 전하……!”

자애롭게 웃은 그가 부하의 입 속에 간식으로 챙겼던 육포를 쑤셔 넣었다. 쉴로스는 갑자기 제 입 안으로 들어온 쇠고기를 영문 모를 얼굴로 일단 우적우적 씹었다. 간이 환상적으로 잘 밴 쇠고기였다. 목표를 잊어버린 그가 만족스럽게 평을 내놓았다.

“맛있네요! 렝겔랑느산 육포이옵니까?”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 삼키는 쉴로스를 무시하고 소아즈가 사냥꾼의 우두머리에게 물었다.

“직접 본 적 있나? 그 흰 도깨비라는 거.”

“그게, 소인은 아니옵고 동료들의 목격담을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사냥꾼은 그때의 이야기가 떠올랐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헛소리라고 치부할 법하나 그렇다고 하기에 흰 도깨비의 울음은 너무도 크고 기괴했다. 이 짓으로 먹고산 지 벌써 사십 년째지만 저렇게 거대하게 울부짖는 동물은 본 적이 없었다.

“생김새가 어떤데?”

슬쩍 눈치를 살피니 도깨비의 울음을 듣고도 왕은 별달리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차분하게 묻는 얼굴이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것 같아 그게 더 당황스러웠다.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자 차분해진 쉴로스의 모습도 그의 당혹감에 한몫을 거들었다.

“듣기로…… 그것은 온몸이 눈처럼 새하얀 털로 덮여 있어 주변과 잘 구분되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조용히 다가와 동료들의 등 뒤를 노려보고 있는데 그 섬뜩함이 말로 표현해 내기 힘들 정도라 하였습니다. 또 그 눈빛이 연옥색 안광을 내뿜고 있다고…….”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엿듣고 있던 다른 사냥꾼들이 흰 도깨비의 이야기에 몸을 움츠렸다. 산의 괴수를 직접 경험해 보았던 몇몇의 사냥꾼들은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흰 도깨비에게서 직접적인 해를 입진 않았지만 그 서늘한 공포와 기괴함은 오직 겪어 본 이들만이 알 수 있는 감각임에 틀림없었다. 그깟 돈에 홀려 또다시 미친 짓을 벌이다니, 아고비스 근처는 쳐다도 보지 않겠다 다짐했던 지난날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연옥색이라.”

정적이 감도는 분위기에 홀로 평온한 소아즈가 고개를 까딱였다. 연옥색. 그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었다. 어쩐지 그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진한 흥분감이 더해져 있었다.

“그대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소아즈는 사냥꾼의 우두머리를 보았다. 왕의 시선이 또다시 자신에게 옮겨지자 몸을 움찔거린 그가 조심스레 이름을 말했다.

“스벤 도프라고 하옵니다…….”

“좋아. 스벤. 그대가 흰 도깨비를 직접 본 적 없다 해도 이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을 거야.”

소아즈는 스벤이라 불린 사냥꾼의 뒤로 움츠러든 남자들을 훑었다. 저들은 흰 도깨비를 만난 경험이 있는 자들인가 본데 어디 하나 다치거나 이상한 구석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사실, 이 질문은 저 덩치 큰 겁쟁이를 꼬시기 위해 조금 더 일찍 물었어야 했을 질문이었다.

“혹시 주변에 실종된 동료나 사람들이 있어? 산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그건…….”

스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함께 한 이들 중에 흰 도깨비를 만났던 적이 있는 동료들은 오랜 지기인 토미와 볼프스, 그리고 아랫마을의 멜번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모두 저가 놀라 도망쳐 구른 상처 외엔 도깨비에게 해코지를 당했다는 이들은 없었다. 최근에 딱히 누군가 실종되었다는 소문도 들리지 않았고…….

곰곰이 정황을 따져 보던 스벤은 결국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옵니다. 그런 자들은 없습니다.”

“그럼 흰 도깨비에게 해를 입을 확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그게…… 딱히 그 괴수한테 죽을 위험은 적다고…….”

스벤이 말끝을 흐리자 소아즈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제 뒤편에 선 쉴로스에게 바칠 만개함이었다.

“경. 들었지?”

“아니요. 전 안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럴 순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좀 빨리 걸어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된 것 같아.”

소아즈가 생글생글 웃으며 앞서 나아가자 낭패로 물든 쉴로스의 눈이 스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별 도리는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 한숨을 내쉰 그가 혼자 척척 가 버리는 왕을 뒤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