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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Chapter 1. 흰 족제비 양에게 굴러떨어진 왕



레오노엘은 회색늑대 무리가 살고 있는 자작나무 숲 근처로 총총 걸었다. 밤새 내린 눈이 적당히 얼어 발바닥 아래 바스락거렸고 가볍게 꺼지는 느낌이 포근했다. 이런 깊은 산속에도 봄은 온 건지 등허리에 닿는 볕이 제법 따스했다.

간만에 온기 가득한 날씨를 느끼자 그녀는 처음 이 아고비스 산맥에 정착했을 때를 떠올렸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우거진 나무들과 밤만 되면 휘몰아치는 눈보라. 이십사 년을 온화한 기후 속에 살아왔으니 갑자기 들이닥쳤다고 봐도 무방한 겨울이었다.

그 당시 레오노엘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꽤 애를 먹었다. 이제는 오히려 뜨거운 햇볕을 생각하면 절로 끔찍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쨌든 북쪽에 사는 동물이란 그런 것이다. 물론 그 부류에 속하는 자신도 마찬가지고.

레오노엘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짧은 앞발을 들어 올렸다. 희고 복슬복슬한 털로 뒤덮여 누가 봐도 ‘얘는 동물이구나.’라고 할 수밖에 없는 다리와 발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괜히 신경질이 나 바닥에 깔린 눈을 헤쳤다. 그래 봤자 나오는 것은 똑같은 눈이었지만 몇 번을 더 거기에 대고 화풀이를 했다.

‘왕녀님? 거기서 뭐 하십니까?’

그녀에게 오려던 참이었는지 쓰러진 전나무 뒤에서 누군가 폴짝 뛰어 내려왔다. 북쪽의 추운 땅 동물들이 으레 그렇듯 수북한 털이 멋진 회색늑대의 우두머리 케드릭이었다. 그에게 자신의 미숙한 행동을 들켜 부끄러웠던 레오노엘이 대답을 얼버무렸다.

‘아, 뭐 그냥 좀…… 그보다 어디 가는 길이니?’

‘아이들 사냥 연습 시키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케드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뒤편에서 꼬마 늑대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가장 먼저 태어나 덩치가 좋은 첫째 오덴이 전나무를 훌쩍 넘었고 그다음 둘째 미드갈, 셋째 펜릴이 차례차례 등장했다. 새끼 늑대들은 레오노엘을 발견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꼬리를 흔들며 뛰어왔다.

‘왕녀님이다!’

‘왕녀님 어디 가세요?’

‘같이 놀아요! 네?’

세 꼬마의 분별없는 애정에 작은 족제비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털 뭉치들 사이에 파묻혔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그녀가 불쌍해 보였는지 아들들에게 깔려 있는 그녀의 흰 목덜미를 케드릭이 물고 들어 올렸다. 침으로 범벅이 된 레오노엘이 인상을 구기며 불쑥 올라왔다. 그녀가 말했다.

‘막내는?’

‘저기 보이네요.’

케드릭은 그녀를 문 주둥이를 틀어 전나무를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 나무 뒤편에서 바스락대고 있었는데 슬쩍슬쩍 보이는 귀와 앞발로 미루어 보아 낑낑대며 울고 있었다. 오라버니들과는 달리 키가 작은 막내 프레아가 전나무를 넘지 못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가여운 프레아를 구해 주러 가자.’

케드릭은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막내딸을 도와주러 가는 케드릭의 주둥이에는 여전히 그녀가 대롱 매달려 있었다.

‘프레아. 안녕.’

레오노엘은 뻣뻣한 몸짓으로 앞발을 흔들며 프레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훌쩍…… 왕녀님? 우리 아빠하고 뭐 하세요?’

케드릭은 그녀를 나무 위에 내려 주었다. 레오노엘은 늑대들의 침으로 엉망이 된 털을 앞발로 고르며 말했다.

‘네 오라비들 극성에 파묻힌 나를 너희 아버지가 구해 주었어.’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그녀가 꼬마들을 노려보자 시선을 느낀 아이들이 발랄하게 뛰어왔다.

‘프레아는 아직 높이 뛰지 못해요!’

셋째 펜릴이 나무에 몸을 걸치며 말하자 레오노엘이 대꾸했다.

‘아직 아기라 그런 것 아니겠느냐.’

이번에는 둘째 미드갈이 말했다.

‘나는 아기 때도 나무를 넘었는걸요?’

‘흥. 이것보다 작은 나무였겠지.’

첫째 오덴이 전나무를 넘어 프레아에게로 갔다. 그러곤 그녀의 궁둥이를 얼굴로 밀어 올리려 끙끙댔다. 오덴은 키가 컸지만 동생을 들어 올릴 만큼의 힘은 없었는지 프레아는 좀처럼 나무를 넘지 못했다. 레오노엘도 제 꼬리를 아래로 내밀며 밧줄처럼 잡고 올라오라 응원했다. 물론 늑대들은 밧줄이 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결국 보다 못한 케드릭이 프레아의 목덜미를 물고 나무의 반대편에 내려놓자 프레아의 눈물 젖은 얼굴을 미드갈이 핥아 주었다. 한숨을 푹 내쉰 레오노엘이 말했다.

‘아이들을 키우는 건 참 힘든 일이야.’

‘그렇지 않아도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음? 뭔데?’

나무를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온 그녀가 케드릭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의 황갈색 눈동자가 바닥을 구르며 장난을 치고 있는 새끼 늑대들을 가리켰다.

‘일전에 계곡으로 사냥 연습을 갔을 때 아이들이 어떤 물건을 주워 왔습니다. 이런 깊은 산속에 인간들의 물건이 떨어져 있을 리가 없으니 아마 발할라의 물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케드릭의 말이 끝나자 새끼 늑대들이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맞아요! 내가 찾았어요!’

‘아녜요! 내가 발견했어요!’

‘무슨 소리야? 그건 내가 주웠어!’

새끼 늑대들이 날뛰자 곱게 깔려 있던 눈들이 이리저리 튀었다. 덕분에 온몸에다 눈가루를 맞은 레오노엘이 고개를 숙여 앞발로 얼굴을 가렸다. 방방 뛰는 아이들을 차례로 눌러 제지한 케드릭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자작나무 숲에 가면 굴에 아내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 알려 줘서 고맙구나.’

눈을 털어 낸 그녀가 자작나무 숲으로 몸을 돌리자 막내 프레아가 다가와 머리를 비볐다. 털이 마찰할 때마다 작은 새끼 늑대에게선 젖비린내가 났다.

아이들은 곧 케드릭을 따라 숲속으로 사라졌다. 힘차게 뛰어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오노엘이 열없는 숨을 뱉었다. 그녀 또한 그들 영역의 가운데인 무리의 둥지로 향했다.



케드릭과 헤어진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늑대들의 자작나무 숲이 있었다.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땅굴이 케드릭과 안나의 집이었다. 레오노엘은 짧은 다리를 재게 놀려 부부의 굴 앞에 섰다. 그러자 냄새를 맡고 걸어 나온 안나가 꼬리를 흔들었다.

‘어서 오세요. 왕녀님.’

‘안녕. 안나. 많이 수척해 보이는구나.’

‘후후. 아이들이 워낙에 활달하다 보니까 챙기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래도 네 몸이 더 중요한 법이야. 네가 건강을 잃으면 누가 그 꼬마들을 돌보겠니?’

‘명심하겠습니다.’

레오노엘은 눈을 흘겼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안나의 다리에 앞발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푸른빛의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나더니 안나의 몸을 휘감고 돌다 짧은 순간 사라졌다. 동시에 슬그머니 뜬 레오노엘의 동그란 눈이 연옥빛으로 빛났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안나가 발을 몇 번 굴렀다.

‘감사합니다. 힘이 샘솟는 것 같아요.’

‘육아라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천 년 동안 보아 와서 잘 알고 있어. 힘에 겨우면 종종 찾아와도 돼.’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알고 있다는 듯 굴 안쪽에서 어떤 물건을 하나 물고 나왔다. 바닥에 놓인 그것은 무언가의 부서진 파편이었는데 파랗게 빛나는 작은 보석들이 몇 개 정도 붙어 있었다. 어딘가의 장식으로 쓰인 은 세공품이었다.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레오노엘이 제법 감정가라도 되는 양 말했다.

‘이건 머리 장식에 쓰이던 보석이야. 당시 발할라에서 유행하던 물건이지.’

레오노엘은 작달막한 발로 은붙이를 집어 들었다. 아주 까마득히 오래전에 보았던 그림이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 속의 물건이었다. 고향의 상징을 정교하게 세공한 문양이 빛바래고 부서져 그녀의 가슴에 멍 하나를 그린다.

나의 도시. 찬란하던 마법왕국. 그리고 이제는 아득하니 먼지로 사라진 나의 고향 발할라.

‘나는 무도회를 싫어하는 편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되었을 땐 그나마 수수한 이 머리 장식 하나만을 꽂고 가곤 했어. 물론 어머니께서는 별로 탐탁지 않아 하셨지만 말이야.’

그리움으로 가득한 눈빛에 안나가 낑낑대며 귀를 내렸다. 눈앞의 작은 생물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이전의, 아마 이 자작나무 숲이 생겨나기도 전부터 아고비스 산맥을 떠돌던 흰 족제비였다.

처음 그녀의 존재를 알았을 때는 장난감인 줄 알았고 조금 더 커서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리의 어른 늑대들이 그녀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 조금 특이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때서야 그녀가 누구인지 듣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흰 족제비는 아니었던 존재.

이것은 날짜를 세기도 막막한 그런 시간이 흐르기 전의 이야기였다.

레오노엘은 어느 왕국의 왕녀였고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마법이라는 불가해한 힘을 쓰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어떤 모종의 사건으로 인하여 그녀의 나라가 멸망하고, 레오노엘은 천 년을 넘게 이곳 아고비스 산맥을 지키며 살아왔다.

인간이었으나 흰 족제비가 된 그녀는 죽지 않는 불멸의 생을 이으며 이곳 아고비스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은 이걸 머리에 장식할 일은 없겠지……. 그토록 싫었는데 오늘따라 무도회가 그립다니, 참으로 간사한 마음이야.’

장식의 보석을 감상하느라 안나가 어떤 생각에 빠져 있는지 알 리 없었던 레오노엘이 무심결에 혼잣말을 했다. 무도회의 종류는 또 어찌 그리 많았던가? 제발 공부 좀 그만하고 놀러 나가자던 벗들의 목소리가 환영처럼 들려왔다. 그 기억이 씁쓸하게 마음을 저몄다. 닳고 닳아 남아 있지도 않은 그 무형(無形)을.

레오노엘이 고향의 낡은 은붙이를 쓰다듬으며 옛 기억에 잠기자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바닥에 엎드린 안나가 다리 사이에 머리를 포갰다. 슬퍼 보이는 까만 눈동자를 바라본 그녀는 레오노엘이 다시금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결론에 도달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금의 레오노엘은 그 옛날의 왕녀가 아니었고 불가해한 힘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족제비가 된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라고는 딱 하나…….

‘……!’

작게 웅크린 흰 족제비를 주시하던 안나가 인기척에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들었다. 굴의 입구에 으슥한 그림자가 졌다.

‘안나 님! 안나 님 안에 계세요?’

‘무슨 일인가?’

호들갑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안나가 굴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녀의 굴로 올라온 늑대는 무리의 파수꾼인 로디였다.

‘인간들이 산에 들어왔습니다!’

‘또?’

‘예! 지난번 여우들을 모조리 붙잡아 간 이유와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불안해 보이는 로디와는 달리 안나는 즉각적으로 이를 드러내며 분노를 표출했다. 몇 개월 전 아고비스의 붉은여우들이 씨가 마를 정도로 인간들에게 떼죽음을 당했다. 겨우 몇몇의 새끼들만이 깊은 산속으로 피신해 살아남았던 그 끔찍한 일을 산맥의 모든 동물들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우리들의 가죽을 잡아 뜯기 위해 온 거라면 어떡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