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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이건… 생각치도 못한 기체로군.”

파일럿 테스트용 기체는 이제는 나에게 익숙한 기체 D급 기간트 치리공공이었다.

“D급이라 실망하셨나 봅니다? 고작 테스트를 하는데 B급을 쓸 수는 없지 말입니다. C급은 실전 기체라 테스트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타시죠.”

정비반장이 빈정거리며 설명했다.

잠깐, C급이 실전 기체라고?

“D급은 실전에 투입하지 않는 건가?”

“투입하기는 합니다만, 얘는 좀… 그래서 저희가 놀란 겁니다. 설마 치리공공을 타고 현장에 오는 파일럿이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게 소대장님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내 물음에 네드 분대장이 대답했다.

그때, 정비병 하나가 사다리를 가지고 와 치리공공에 갖다 대었다.

다만, 전에 탈 때와는 다르게 정비병이 치리공공 옆에다가 암벽 등반용 볼트마냥 뭔가 생소한 구조물을 달았다.

그런데 그 구조물이 이따금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정비반장님, 저게 뭡니까?”

한창 패널을 조작중이던 정비반장을 부르자, 그는 고개를 한 번 젓고는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올려다봤다.

“아, 저거요? 마력 감응 능력이 뛰어난 변종 슬라임입니다. 영방군에서 사용하는 마도구들보다는 못하기 해도, 가성비만큼은 훌륭한 놈입니다. 거칠게 움직여도 잘 떨어지지 않으니까, 어떤 면에서 ‘영방군’에서 쓰는 장비보다 더 좋은 부분도 있죠.”

정비반장은 영방군이라는 단어를 굳이 강조해서 말했다.

아무래도 보급이 안 좋은 관군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장비가 좋은 영방군을 질투하나 보다.

더군다나 그 영방군 중 가장 세력이 강력한 루겐바인가 사람이 나이니, 뭐, 이해는 된다.

나를 싫어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영방군인 것보다 중대장 때문이겠지만.

아무튼 슬라임이 꿈틀거리는 게 상당히 찝찝하기는 했지만, 테스트에 사용해야 하다니 어쩔 수 없었다.

애써 슬라임을 무시한 채 사다리를 타고 콕핏 안으로 들어갔다.

“음?”

안에 들어가자마자 강한 위화감이 내 몸을 지배했다.

점막질로 된 무언가가 내 몸을 흝고 지나가는 듯한 기분.

본능적으로 치리공공의 헤드파츠를 돌려 어깨에 달린 마력 감응용 슬라임을 쳐다봤다.

[정비반장님, 이거 괜찮은 겁니까?]

붙어 있는 슬라임의 색이 무광의 검정색에서 보라색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 잠시만 기다리시지 말입니다.”

정비반장이 손을 들어 구석에서 쉬고 있던 정비병들을 불러들였다.

정비병들과 함께 정비반장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야 치리공공에 타고 있어서 별 상관은 없었지만, 네드 분대장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렇게 뻘줌해하는 네드 분대장을 즐겁게 구경하고 있을 때, 이야기가 다 끝난 듯 정비반장이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나에게 신호를 주었다.

이쪽으로 오라는 듯한 제스처.

우웅—

정비반장의 유도에 따라 치리공공의 발을 들어 올려 움직이려고 했다.

“아닙니다! 나오십시오!”

[예?]

“테스트 기체를 바꿀 겁니다. 나오십시오.”

방금 올라탔는데, 바로 내리라니…….

마력 감응용 슬라임의 색상이 보라빛으로 변했던 게 떠올랐다.

기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채 치리공공에서 내려왔다.

“그러면 어떤 걸 타면 되겠습니까?”

내 질문에 정비반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치리공공으로는 테스트를 못 할 것 같습니다.”

“예?”

“영방군은 치리공공이 썩어날 정도로 많아서 부셔지든 말든 상관 안 하겠지만, 순회순찰대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게 무슨…….”

정비반장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더니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3소대장님, 기사면 기사라고 말씀을 하셨어야지 말입니다. 마력 감응 없이 바로 다른 테스트를 했으면 치리공공이 터질 뻔했잖습니까.”

툴툴대며 말하는 정비반장.

“기사?”

정비반장의 말에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 기사.

└ 기간트 전문 교육 과정과 꾸준한 기간트 조종술 및 마나연공법을 연마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 기사들은 각 군의 핵심 병기라 할 수 있는 A급 기간트를 다루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



이것이 장교수첩에 적혀 있는 기사에 대한 정의였다.

분명 내가 뛰어난 기간트 조종술을 보유하고는 있으나, 그거는 어디까지나 내가 송창수로서 게임에서 갈고 닦은 실력이었다.

아멜도 그런 실력자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천하의 난봉꾼이 꾸준히 수련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에 환장해서 황녀까지 건드리는 미친 녀석인데, 기간트에 눈길을 돌렸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멜이 기사일 가능성이 제로라고 판단을 내렸다.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검술명가인 루게바인가의 출신에 제국제일검 검성님의 장남이신데, 기사가 아니란 말입니까? 임관 초기라 실력을 감추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납득이 가는 선에서 하십시오.”

정비반장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멜의 아버지가 검성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제국제일검이라니.

제국에서 제일가는 기사를 아버지로 두고도 난봉꾼이 된 아멜이 이해가 안 됐다.

“그건 아닙니다만.”

그러는 동안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결.”

정비반 인원들이 일제히 정비반장의 구호에 맞춰 새로 난입한 인물들에게 경례를 올렸다.

“단결. 오전에는 죄송했습니다, 정보과장님.”

난입한 인물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정보과장이었다.

정보과장은 정비반장과 정비반의 경례는 받아 주었지만, 나와 네드 분대장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그대로 지나갔다.

아이씨, 군생활 제대로 꼬였네.

“이봐, 카시우스. 아무리 기분이 좋지 않아도 그렇지, 인사는 받아 줘야지. 그래, 단결. 나와 만나는 건 처음이지?”

정보과장 옆에 있던 또 다른 소령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사람도 오전에 연대장의 옆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과장급일 가능성이 높았다.

“인사과장님이십니다.”

네드 분대장이 귓속말로 상대의 정체를 알려 왔다.

“아,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껄껄껄, 잘 부탁하기는 뭘. 우리가 너한테 많이 부탁해야지. 엄청 굴릴 건데.”

등골이 싸늘해지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인사과장.

웃상인 얼굴과 다르게 속은 매서운 인물처럼 보였다.

“임관할 때 낸 지원서에도 아멜 소위는 기사가 아니라고 적혀 있었네. 루겐바인가에서도 그렇다고 했고. 검성님께서 거짓을… 말했을 리도 없고. 지금 현재로서는 아멜 소위는 기사가 아니라고 보는 게 맞네.”

인사과장의 말에 정비반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뭐가 그럴 리가 없어?”

“보십시오. 슬라임이 보라색으로 변했습니다.”

정비반장이 정비반이 회수해 옮기려고 하던 마력 감응용 슬라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인가?”

정보과장과 인사과장 역시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며 슬라임을 쳐다봤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참다못한 내가 그 이유를 물었다.

내 질문에 정보과장이 귀찮다는 듯 나를 한 번 쳐다본 후 고개를 돌려 인사과장의 눈치를 살폈다.

인사과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보과장이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이 변종 슬라임은 마력의 순도에 깊게 반응을 하지. 자연마나 상태에서는 무색을 유지하지만, 가공이 되면 될수록 거기에 반응해 변색하지. 특히나 변색된 색에 따라 그 성질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마력 감응용으로는 딱이지.”

딱딱한 말투로 설명을 하는 정보과장.

“붉은색은 주화입마, 파란색은 평온, 주황색은 흥분 상태, 노란색은 집중불가 상태 등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 그중에서도 보라색은…….”

잠시 말을 끊고 혀를 차는 정보과장.

“…측정불가일세.”

“예?”

“슬라임이 마력 감응을 할 수 없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가 있어. 첫째, 뛰어난 마나 컨트롤로 기력을 감추는 경우. 둘째, 마나 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 그리고 마지막이 슬라임이 감응하기에 너무 순도가 높은 경우. 이 세 가지 경우에서만 슬라임이 보라색으로 변색되지.”

정보과장의 말을 다 듣고 나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설렜다.

흔히 판타지 창작물에서 보면 주인공의 너무 세서 길드 테스트기에서 측정 불가가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혹시 내가 그런 경우가 아닐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면 슬라임이 보라색으로 변색된 이유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답변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어진 정보과장의 말은 내 희망을 짓밟기에 충분했다.

“2번일 가능성이 크지. 아무리 검성님의 자제라지만, 그러한 소문도 있고… 다른 경우라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지. 정비반장, 마나 갈무리가 잘 안 된 파일럿을 태웠을 경우 기간트가 어찌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 테지?”

“예. 기간트 조종에 필요한 마압의 영향을 평소보다 세게 받아 급격한 탈진 증상과 마나를 기간트의 코어에 뺏기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역시 훌륭하군. 오랜 시간 같이 일해 온 건 아니지만, 자네는 정말 믿음직스러워.”

“하하, 과찬이십니다, 과장님.”

머쓱해하는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정보과장의 말에 좋아하는 정비반장.

“그런데 두 분은 무슨 일로 정비고에 오신 겁니까?”

“그냥 한 번 들렀네. 부대이동 첫 주에는 인사과에서 할 게 없거든. 그래서 카시우스를 꼬셔서 친목을 다지는 중이었달까.”

“흠흠, 인사과장님, 그거 농땡이를 피우고 있다는 말씀 아니십니까?”

“쉬잇, 작전과장님 들으면 큰일 날 소리일세. 아무튼 저어기쯤에 조용히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부르게.”

인사과장이 그렇게 말한 후, 정보과장을 억지로 끌고 정비반 구석에 위치한 휴식공간으로 들어갔다.

“…….”

“…….”

병장이 어디 짱박혀 몰래 쉬는 건 봤어도, 장교, 그것도 과장급이 숨어서 쉬는 건 살다 살다 처음 본다.

아무래도 주둔지 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야영지 생활을 하는 방랑 부대다 보니, 사적인 공간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아서 저러는 게 아닐까.

“3소대장님, 정보과장님은 저리 말하셨지만, 절차상 이럴 경우에는 상위 등급의 기간트로 다시 테스트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오시죠.”



정비반장의 안내를 따라 D급 기간트 격납고를 빠져나와 더 큰 크기를 자랑하는 격납고로 이동했다.

“…크군.”

아파트 2층 높이 정도 되는 치리공공과는 달리, 확실히 고개를 올려다봐야 머리를 볼 수 있는 4∼5층 높이의 기간트들이 주차되어 있는 격납고로 들어왔다.

동일한 기종이 잔뜩 주차되어 있던 D급 기간트 격납고와 달리, B급 기간트 격납고는 매우 각양각색의 다양한 기간트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파생형과 기본형으로 추정되는 기체들도 있었다.

그리고 정비반장이 우리를 데리고 안내한 기체는 나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기체였다.

“이건… 카트린 하사가 타던 기체…….”

“예. 뭐… 맞을 겁니다. 카트린 하사가 개인 기체를 반입한 기록이 없으니, 아마도 범용기체 썼겠죠.”

“범용기체?”

“아, 3소대장님은 ‘영방군 출신’이라 모르시겠구나. 그러면 소개하겠습니다. 리바크르 제국 오대관군 제식 B급 기간트 LSA—3 ‘실버하운드’입니다.”



은색으로 도색된 장갑.

길게 솟아난 금색의 뿔.

어깨를 덮어 관절부를 보호하는 견갑.

내가 이 세계로 와 처음으로 마주했고, 내 심장을 요동치게 했던 그 기간트가 지금 내 앞에 서 있었다.

내가 타기를 기다리며, 나의 손길을 기다리며, 내가 움직여 주기를 기다리며 말이다.

날림제작, 그 자체인 치리공공과 달리, 누가 봐도 ‘이건 로봇이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녀석이었다.

이걸 이제 곧 탄다는 생각을 하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3소대장님, 페어리 클로 사용하실 줄 아십니까?”

실버하운드에게 잔뜩 반해 넋놓고 녀석을 감상하고 있자니, 정비반장이 재촉하듯이 말했다.

“아, 네.”

정비반장의 말에 정신을 차린 후, 벨트와 연결된 포켓백에서 페어리 클로를 꺼내 왼손에 장착했다.

그러고는 침착하게 클로를 발사했다.

피융―

빠른 속도로 날아가 실버하운드의 콕핏 부근에 박히는 페어리 클로.

오른손으로 페어리 클로를 다시 한번 조작하자, 클로가 회수되면서 그 반동으로 내 몸이 끌어올려졌다.

“흣차!”

콕핏부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공중제비를 돈 후, 마치 실버하운드에게 집어삼켜지듯 내 몸이 콕핏 안으로 쑤욱 들어갔다.



[아아. 3소대장님, 들리십니까? 들리시면 실버하운드 기동시키십시오.]

정비반장의 통신을 듣고 실버하운드를 기동시키려고 했지만, 치리공공과는 전혀 다른 조작계에 당황했다.

실버하운드의 콕핏은 마치 오토바이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앞뒤로 긴 좌석과 그 끝 부분에 위치한 두 개의 수정구, 그리고 상반신을 기대어 누우라는 의도로 보이는 받침대 등이 있었다.

일단 느낌이 가는 대로 상체를 앞으로 눕힌 후, 핸들 잡듯이 두 수정구 위에 양손을 포개 얹었다.



[신규 파일럿 마나 감지.]

[적합성 검사중.]

[불합격.]

[구동가능여부 판단중.]

[적합.]

[신규 파일럿에 대해 제한적 권한 허용.]

[파일럿 등록 완료.]



우웅—

마침내 터빈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실버하운드에 전원이 들어오며 닫혀 있던 시야가 열렸다.

“우와! 개쩐다!”

시야가 개방되자마자 함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직접 육안으로 모든 걸 확인해야 했던 치리공공과 달리, 실버하운드의 시야는 마치 내가 가상현실에 온 것마냥 내 주위에 필드가 쫘악 깔리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본 테스트,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