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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회색…….”

중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회색, 박쥐, 노을녘 등등 우리를 부르는 이름은 많지만,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하나야.”

“…이쪽도 저쪽도 아니라는 겁니까?”

이제는 일어나도 되겠지 싶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를 들 수는 없었다.

“…….”

사자가 우글거리는 곳에 토끼가 산다면, 그 토끼를 의심해 보라는 말이 있었지.

중대장은 헬창이 가득한 이 순회순찰대에서 당당히 위관급 지휘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였다.

자꾸 이유 모를 흑심을 표출해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이 여자 역시 스펙이 장난 아닐 거란 말이지.

중대장이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마치 반려견이 된 듯한 기분.

그렇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느 쪽이냐 하면 오히려 좋은 편.

부드러운 촉감과 섬세한 손길이 괜사리 내 마음을 콩닥콩닥 뛰게 만들었다.

“관군이지만 활동 지역은 귀족들의 영지고, 귀족들을 감찰하고 민정을 시찰하는 게 주업무지만 그러기 위해 그 지역 대귀족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관군이면서 오히려 다른 관군인 언실리워커의 감시를 받는 부대. 우리는 귀족파인가 황제파인가.”

마치 시를 낭독하듯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중대장의 목소리.

흡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만큼 그녀가 낸 목소리에는 사람들을 매혹하는 강한 울림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중대장은 진로를 잘못 선택한 것 같았다.

가수를 했으면 대박을 냈을 여자인데.

아, 여기는 현대가 아니니까, 바드라고 해야 하나?

뭐, 가수든 바드든 노래를 부르는 직업이라 해서 이 세상에서 각광을 받을지는 모르니까.

어찌되었든 깊게 생각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지방 귀족들을 감시하고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어 주는 거야. 혹시라도 탐관오리가 있다면 처벌을 하고 백성들을 구제해 주는 거지. 반란이나 역모와 같은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면 사전에 차단하기도 하고 말이야.”

“오…….”

말하자면 조선시대의 암행어사와 같은 부대인가?

멋있잖아.

이런 군대라면 군생활을 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듣고 나자, 왜 우리 가문에서 기간트를 보내온 것이 문제가 됐는지, 그 이유를 예상할 수가 있었다.

순회순찰대는 공명정대함이 중요한 일종의 감찰부대.

그런 부대에 뒷돈은 아닐지언정 멋대로 사제 물품을 반입해 왔으니, 문제가 될 수밖에.

아무래도 내가 전생하기 전에 아멜 이 녀석이 멋대로 반입을 신청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중대장님.”

그렇게 말하며 몸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어림도 없었다.

그제야 나는 무슨 수를 써도 이 여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못 이긴다.

분명 중대장과 진지하게 싸워도 내가 질 것이다.

아니, 무슨 힘이 이렇게 세냐고.

그렇게 내 작은 시도들은 허투루 돌아갔다.

“청렴결백하고 공명정대함이 원칙인 부대에 멋대로 사제물품을 반입시키려고 하다니… 난처하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중대장님.”

“자기야, 무슨 소리야. 사제 물품 반입을 금지할 리가 없잖아. 보급만으로 부대를 운영할 수도 없고.”

“아닙니까?”

“보급 1년에 딱 한 번, 섣달에 활동 보고를 할 때만 받을 수 있는데, 고작 그때 받는 걸로 부대를 운영하라니. 룬드래곤 왕국 전설의 대재상 길리아스도 그렇게는 운영은 못 하겠다.”

“보급이 1년에 딱 한 번 옵니까?”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관군이라지만, 보급 횟수가 너무 적은 거 아닌가?”

“우리는 관군이지만, 공식적인 지원은 사실상 포기해야 하는 부대야. 지원은 오히려 왕 취급을 받는 사대귀족들에게 기대야지. 그리고 자기가 그 사대귀족 중 하나인 루겐바인 후작가 사람이라는 게 문제인 거고.”

…뭐야?

우리 집, 사대귀족 중 하나였어?

후작가인데?

“중대장님 말씀에 모순이 있으신 게 아닙니까? 사대귀족의 지원에 기대야 한다면서 제가 사대귀족 중 한 가문 출신인 게 문제라니요?”

“실무와 행정의 문제야. 우리가 실질적으로 사대귀족의 도움을 받기는 해도 엄연히 관군이야. 영방군처럼 귀족의 사병 집단이 아니라고.”

“흐음…….”

거기까지 듣고 나자, 내가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가 있었다.

아무리 사대귀족이라고 해도 엄연히 황족이 아닌 귀족이었다.

황족도 아닌 주제에 관군을 마치 사병 다루듯이 취급을 해 버렸으니, 부대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꼴.

“자칫 잘못하면… 황권에 대한 도전으로도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군요.”

“그렇지. 그래도 그게 루겐바인가라 그런 의도였다고 아무도 생각 안 하는 게 다행이야. 검성님은 현재 황제 폐하이신 몬스트로 3세 폐하의 후견인이시니까. 루겐바인가 자체도 꽤 오랜 세월 황제파로 지내온 가문이고.”

휴우, 천만다행이다.

하마터면 이 세계로 오자마자 난리 날 뻔했네.

“게다가…….”

중대장이 고개를 내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자기가 저지른 죄에 비하면, 이 정도는 황가에 대한 도전도 아니지.”

…예?

관군을 사병 취급한 것보다 제가 저지른 죄가 더 황가에 대한 도전이었다고요?

아니, 대체 아멜 이 녀석은 무슨 죄를 저지른 거야!

“중대장님, 제가 제 죄를 잊은 건 아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그렇게 넘어가기보다 확실하게 되짚어 주는 게 맞다고 봅니다.”

최대한 머리를 굴려 중대장이 내가 군대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죄를 말하게 유도했다.

“어휴…….”

갑자기 내 머리에 주먹을 콩 치는 중대장.

분명 제딴에는 살짝 혼내 준다는 느낌으로 하는 거였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마치 큰 돌로 두개골을 두드리는 누낌이었다.

“…….”

고통을 참느라 이빨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그러게 자기야, 아무리 여자가 좋아도 그렇지. 그…….”

“그……?”

“황녀님을 왜 건드렸어…….”

중대장의 주먹이 주먹만한 돌이라면, 방금 그녀가 한 말은 거대한 운석과도 같았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황녀님이요?”

“응… 황녀님…….”

아멜, 이 미친 새끼야!

그 잘난 검성의 장남이라지만, 너무 나대는 거 아니냐!

황녀를 건드리는 귀족이 어디 있어!

아멜의 상상도 못한 행적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와아, 씨이…….

그러니까, 내가 황실모독죄라는 어마어마한 빅똥을 치워야 한다는 거야?

진짜 돌아 버리겠네.

땀이 식어서인지, 아니면 너무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온몸에는 닭살이 돋아 있었다.

중대장과의 로맨틱한 분위기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뭐 하십니까?”

한참이나 두통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나를 깨운 것은 어떤 남성의 목소리였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원 잠시 놓은 정신줄을 되잡고 현실로 돌아와 앞을 쳐다보니, 언짢은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는 벨퍼트 중사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네드 분대장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만…….

그 순간, 현재 내가 어떤 자세로 있는지 떠올랐다.

지금 나는 중대장의 무릎베개를 받고 있는 상태.

그리고 우리 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은 피크닉 바구니.

누가 봐도 데이트 현장이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오해, 오해입니다, 이건.”

너무 당황한 나머지, 후작가 장남을 연기하는 것도 잊고 송창수이던 시절의 말투 그대로 변명하고 말았다.

황급히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중대장은 얼굴을 붉힌 채 두 볼을 양손으로 잡은 채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아니, 그쪽이 그런 행동하면 더 오해받는다고!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중대장은 얼굴을 붉히고 있지.

네드 분대장은 놀림감 잡았다는 표정이지.

정비반장은 화가 잔뜩 난 채로 노려보고 있지.

…응?

정비반장… 그러니까 벨퍼트 중사는 왜 화를 내고 있는 거야?

“하, 징계를 받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두 분이서 데이트 중이셨던 겁니까? 3소대장님, 그렇게 한가하시면 저번에 말씀드린 파일럿 테스트나 보시지 말입니다?”

정비반장은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살벌한 목소리였다.

그는 중대장과 내 앞으로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내려놓았다.

“연본에 배정된 기간트들 정비 현황입니다.”

정비반장이 중대장에게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나한테 말할 때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정비반장의 말투.

어? 혹시…….

“그건 그렇고 중대장님, 아무리 봐도 징계는… 크흠, 징계는 다 받은 것 같은데, 3소대장님도 파일럿 테스트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징계? 아, 오해할 수도 있겠구나. 내 정신 좀 봐. 자기… 그러니까 3소대장은 지금까지 계속 완전군장구보 하다가 잠깐 쉰 거야. 좀 더 쉬게 하고 내가 알아서 보낼게. 군장 다시 들면 얘 퍼져.”

“자기……?”

정비반장이 인상을 구기며 나를 노려봤다.

아, 이거는 모태솔로인 나도 확실히 알겠다.

중대장의 말을 듣자마자 정비반장은 나무 뒷편에 놓여져 있던 내 군장을 한 손으로 번쩍 든 후 왼쪽 어깨에 멨다.

와아… 저거 내가 메고 구보해 봐서 아는데, 한 손으로 저렇게 들 만한 무게가 아니던데……..

진짜 여기는 완전 헬창들만 모인 부대구나.

“제가 들고 갈 테니 그냥 3소대장님은 걷기만 하면 됩니다. 아니면 마차라도 불러 드립니까?”

원래라면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아멜이 황녀마저 건드릴 정도로 미친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뭐라 할 말이 없어졌다.

“아닙니다. 같이 가죠. 중대장님, 그러면 저는 정비반장과 네드 분대장과 함께 복귀하겠습니다.”

“그래. 먼저들 가. 나는 잠깐 들릴 데가 있어서 늦게 갈게.”

“알겠습니다.”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는 중대장에게 우리 셋은 경례를 한 후 야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약 300m 정도 걸었을 무렵, 정비반장이 내 옆으로 접근했다.

이 정도는 들어 줬으니 이제 나보고 들라고 하려나.

다른 사람군장도 아니고, 내 군장이니 내가 드는 게 맞긴 하지.

그렇게 생각하면 군장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정비반장이 갑자기 귓속말을 했다.

“3소대장님, 제가 다른 건 다 참아도 중대장님 건드리는 건 못 참습니다. 제가 눈깔이 돌아가서 후작가든 뭐든 신경 안 쓰고 미친 짓거리 하는 것을 보고 싶으시면 해 보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여이가 루겐바인 영지가 아니라 순회순찰대라는 것을 명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연애 방해할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름 협박이라고 소곤거리는 정비반장의 모습이 기분 나쁘기는커녕, 미안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정비반장은 그 말을 끝으로 군장은 넘겨주지 않은 채 그대로 속도를 올려 먼저 야영지로 향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네드 분대장이 다가왔다.

“소대장님!”

나를 부르고는 쌍따봉을 날리는 네드 분대장.

“캬아, 같은 남자로서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전입 온 지 이틀 만에 설마 중대장님을 꼬셔 버리시다니… 아, 이런 말을 한 건 중대님께는 비밀입니다. 아무튼 차기 후작답게 사나이다우십니다.”

뭐야, 얘.

차기 후작이라니, 지금 라인 타려고 아부하는 거야?

너무 노골적인 네드 분대장의 모습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런 거 아니다.”

“걱정 마십시오.”

네드 분대장이 그렇게 말한 후 자신의 입을 엄지와 검지를 모아 지퍼를 잠그듯 수평으로 그었다.

“제가 본 건 절대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도록 함구하겠습니다.”

네드가 그렇게 말한 후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눈동자를 가리켰다.

“다시 생각해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 아름다우신 중대장님의 무릎에 누워 있는 소대장님의 모습이란… 부소대장님도 그렇고 중대장님도 그렇고, 역시 소대장님은 대단하십니다. 저는 땀내 나는 군생활인데, 소대장님은 다른 냄새가 나는 군생활이겠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래도.”

“아무튼 전 먼저 가서 준비해 놓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래뵈도 소대 내 체력검정 상위권이지 말입니다.”

“이봐, 분대장! 그런 거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네드 분대장은 듣는 둥 마는 둥, 속도를 올려 야영지를 향해 뛰어갔다.

아, 좀!

말 좀 들으라고!

이대로는 이상한 오해가 네드 분대장의 안에 각인될 것이 분명했다.

오해는 그때그때 바로 풀어야 하는 법.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네드 분대장을 쫓아갔다.

“…….”

우리 둘이 앞으로 달려가는 것을 본 정비반장은 이를 악물더니 갑자기 그도 속도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뭐야?

벨퍼트 중사는 또 왜 저래?

설마… 괜히 지기 싫어서 같이 뛰는 거야?



***



기간트가 잔뜩 주차되어 있는 격납고 앞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세 명의 남자.

“하아… 하아… 와아, 설마 제가 꼴지를 할 거라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숨을 고르고 있는 네드 분대장.

“후우… 후우… 군장을 들고 있었으니 제가 진 게 아닙니다.”

억울해 하는 말투로 호흡을 조절하고 있는 정비반장.

“…….”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는 나.

정비반장으로부터 시작된 달리기는 의외로 진지하게 이루어졌다.

괜히 정비반장을 의식하니 나도 지기 싫어 속도를 올렸고, 따라잡힌 네드 분대장 역시 오기가 생겼는지 진심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달리기의 승자는 놀랍게도 나였다.

그렇게 약간은 예상치 못한 승부와 그 결과에 당황해하며 호흡을 다 가다듬고 나니, 정비반장이 패널과 비슷한 나무판을 가져와 두들겼다.

…설마 저거 터치 스크린이야?

“분대장, 저게 뭔지 설명해 봐라.”

“넵. 기간트 정비에 사용되는 마도구입니다.”

네드의 설명에 단번에 납득이 갔다.

마도구면 인정이지.

정비반장이 패널을 터치할 때마다 동공에 불이 들어왔다 꺼지는 기간트들.

그렇게 주차되어 있던 모든 기간트들을 다 건드려 본 정비반장이 고개를 끄덕인 후, 어떤 기간트 앞에 선 뒤 나를 불렀다.

“소대장님, 파일럿 테스트는 이 기간트로 하겠습니다.”

나는 정비반장의 말에 잔뜩 긴장하며 기체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 기체를 보자 마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