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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무언가에 홀린 느낌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화목한 가족이 다시 만난 것처럼 나도 모르게 정체 모를 기간트의 부름에 끌려 서서히 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 소대장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동공이 풀린 채 미확인 기간트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의 모습에 소대원들이 말을 걸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그 누구도 나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일까.

마치 정지한 시공간 속에서 오직 나와 정체불명의 기간트만이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기간트 앞으로 걸어가자, 기간트 주위에 있던 본부중대 정비반과 연대 군수장교들이 일제히 길을 열어 줬다.

내가 한 발자국 나아가자, 기간트가 무릎을 꿇고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못해도 5배 이상은 차이가 나는 크기.

기간트의 손은 내 키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그의 손가락 끝과 내 오른손이 맞잡아졌다.



[스캔 완료. 전투력 측정 완료. 보유 스킬 확인 완료. 적합성 검사 결과, 불합격. 자격 미달.]



…예?

기간트의 불합격 선언과 함께 몽환적이던 분위기가 확 깨지고, 순식간에 모두가 다 현실로 돌아왔다.



[아멜 루겐바인. 현 레벨로는 본 기체를 조종할 수 없음. 조건 충족 후 다시 불러 주기 바람.]



부우우우웅—

정체불명 기간트의 양 견갑이 광대뼈가 있는 높이보다 더 위로 상승하더니, 거기서 입자로 구성된 은청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고는 은청색의 빛을 내뿜으며 그대로 하늘로 솟아올라 비행을 시작하는 기간트.

기간트는 하늘 높이 뜨자마자 사람으로 치면 척추기립근에 해당하는 부위에서 척추 대신 세 쌍의 날개가 나오더니 이내 서쪽 하늘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뭐, 뭐야?! 저거 A급이야? 아니, 아니지. S급?!”

“와! 코어에 부유 마법 새겨진 기간트 처음 봤어. 근데 부유 마법 맞겠지?”

“저런 게 적이면 어떻게 이기냐? 하늘을 날아다니는 걸 어떻게 이겨.”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일제히 기간트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다름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확실히 저 기간트는 일반적이지 않은 기간트임이 분명했다.

아니, 획득 등급으로 따지면 저건 레어(Rare)도, 유니크(Unique)도, 레전드(Legend)일 게 분명했다.

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냐고?

그거야 내가 저 기체를 아니까.

이건 아멜의 기억이 아니었다.

바로 나, 송창수가 알고 있는 기체였다.

“샨달폰…….”

월드챔피언쉽 우승자들에 한해 주어진다는 한정 기체 중 하나인 샨달폰.

우승 기념 기체답게 압도적인 스펙을 자랑하는 이 기체는 실제로 이벤트전에서 전년도 우승자가 들고 나와 현년도 우승팀을 혼자서 다섯 명 전원을 발라 버리는 위엄을 보여 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의아함이 들었다.

내가 비록 베타 시절 때부터 <하르마 로얄>을 플레이 해 온 고인물이기는 해도 프로씬에 데뷔한 적도 없는 사람이다.

당연히 월드챔피언쉽에 나가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우승 기념 기체가 나를 사용자로 등록한 걸까.

의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세계…….

<하르마 로얄>이랑 정말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왜 게임상에 등장하는 기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거지?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의문점이 생겼지만, 거기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3소대장!”

갑자기 뒤쪽에서 마치 여성 록커의 샤우팅처럼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쫙 돋게 하는 고함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보니, 인상을 잔뜩 쓴 마리안느 중대장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



녹음인 만연한 숲.

간간히 지저귀는 새들.

그야말로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일상으로 인해 지친 마음이 치료될 것 같은 장소지만, 내 입에서는 욕이 나오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아… 씨이, 후우… 하아… 하아…….”

제아무리 좋은 장소라고 해도, 그곳이 군장을 메고 구보하는 장소라면 누구나 다 욕이 나오지 않을까?

“됐어. 10분간 휴식.”

다행인 점은 새로 전입 온 신임 소위가 볼썽사납게 군장을 메고 구보하는 모습을 보는 이가 중대장 하나뿐이라는 점이었다.

오늘 완전군장구보를 통해 알아낸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아멜 루겐바인.

이 새끼, 완전 ‘근’수저였다.

근육 하나 없어 보이는 마른 몸 어디에서 그리 힘이 나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몸뚱아리는 생애 처음 들어 봤을 게 분명한 완전군장을 그리 어렵지 않게 들었고, (현대인 기준)일반이라면 벌써 퍼졌을 구보 횟수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머리에서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점심 식사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시작된 구보였기 때문이다.

구보가 끝난 것은 점심이 끝나고도 한참 뒤.

심지어 더럽게 맛없고 딱딱하기만 한 군용빵을 점심으로 대체해 구보하면서 먹기까지 했다.

체감상 몇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장교수첩을 꺼낼 여력이 되지 않아 미처 확인을 못 했다.

미칠듯이 흐르는 땀을 군용수건으로 닦으며 커다란 나무 아래로 가 휴식을 취하려고 했다.

“어서 와.”

“…….”

나무 아래를 본 순간, 혹시 내가 너무 지쳐서 헛것이라도 보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하지만 그런다고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중대장님?”

“자자, 힘들지? 우리 자기,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해. 누나 무릎이라도 베고 잠깐 쉬어.”

나무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마치 소풍이라도 온 것마냥 바닥에 펼친 보자기 위에 각종 음식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는 중대장이었다.

중대장의 머리는 전반적으로 긴 생머리였지만, 군데군데 땋아져 있는 게 누가 봐도 가꿨다는 느낌을 확 주고 있었다.

“어우, 땀 좀 봐. 우선 군장부터 내려놓자.”

중대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친절하게 내 어깨에서 군장을 벗겨 냈다.

그러더니 그 무거운 군장을 한 손으로 든 채 나무그늘 뒷편에 내려놓는 중대장.

분명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은 두 손으로도 낑낑거리던 무게인데, 그걸 한 손으로 드는 중대장을 보니 알 수 없는 공포감이 확 밀려왔다.

“그럼 쉴까?”

방금까지 보여 준 장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시금 아양을 떠는 중대장.

여자는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지만, 그걸 실물로 목격하니 공포가 내 몸을 지배했다.

“예, 예…….”

왜인지 모르겠지만, 거절하면 육골이 분리될 것 같은 느낌에 나도 모르게 잔뜩 긴장한 채 풀 위에 앉았다.

“피곤할 테니까, 한숨 잘래?”

중대장이 자신의 허벅지 위를 톡톡 치며 말했다.

분명 상황 자체는 러블리하지만, 어째서인지 러블리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괘, 괜찮습니다.”

“아잉,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자신의 허벅지 위를 톡톡 치는 중대장.

연약해 보이는 손을 보고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카트린만 해도 그렇게 손 힘이 셌는데, 중대장은 더하겠지?

“그, 그러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구보를 뛸 때보다 더 식은땀을 흘리며 내 머리통을 슬며시 중대장 허벅지 위로 약 3㎝가량을 띄운 채로 누웠다.

“아이잉, 자기, 그게 뭐야. 좀 더 머리를 기대도 돼.”

그렇게 말하면서 살며시 내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 위로 누르는 중대장.

이상하다…….

분명 힘을 주고 있는데도 난생 겪어 본 적이 없는 강한 압력이 머리를 눌러 어쩔 수 없이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성인 여성의 자극적인 살내음과 함께 부드러운 살결이, 아니, 부드러운 군복의 감촉이 느껴졌다.

으음, 거기에 운동으로 단련되었는지 중대장의 허벅지는 제법 단단했다.

예상했던 부드럽고 말랑한 느낌은 어디에도 없었다.

긴장은 했어도 나름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무릎베개가 아니었다.

“저, 중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머, 자기, 너무 빠르다.”

갑자기 중대장이 얼굴을 붉히며 양손으로 볼을 감쌌다.

“……예?”

“그래도 뭐, 자기 생각이 그렇다면야… 아이는 몇 명 정도가 좋아? 난 셋이 좋은데. 아들 둘에 막내는 여자아이로.”

“네?! 잘못 들었습니다?!”

중대장의 말에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강한 압력’이 그런 나를 속박했다.

“응? 왜?”

“중대장님,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할 말이 있다며? 고백하려던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예쁘면 무슨 말이든 해도 되는 거냐!

아니, 물론 나야 환영이지만, 지금 내 몸은 나 송창수가 아니라 아멜이라고.

아니, 그보다 29년간 모태솔로였던 나라도 조금 오해했다고 해도 단숨에 결혼 생각에 아이를 낳을 생각까지는 하지 않는데, 도대체 중대장은…….

“당연히 아닙니다! 큰 소동이 될 수도 있는 사건을 먼저 나서서 조치해 줘서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흐음, 난 자기한테 벌을 준 일밖에 없는데?”

그 말대로 중대장이 먼저 나서서 아멜에게 징계를 내렸다.

“자칫 잘못하면 연대장님 선까지 올라갈 뻔한 징계를 중대장님께서 먼저 징계를 내려 주신 덕분에 그나마 약하게 혼이 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우리 자기, 소문과는 다르게 눈치가 상당히 빠르네. 아니면 역시 여자들을 많이 울리고 다녀서 눈치가 빠른 건가?”

“…….”

아니, 여기서 아멜의 망나니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다니.

하지만 딱히 반박할 수 없는 팩트였기에 뭐라 반론할 수 없었다.

“농담이야. 그래도 눈치가 빠르다는 말은 진심이었어. 맞아. 자기가 생각한 대로야. 내가 어제오늘 보기에 자기는 아무래도 자기 위치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

“제 위치… 말입니까?”

“그래. 자기는 자기 위치가 어떻다고 생각해?”

중대장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냥 후작가 출신의 신임 소위 아닙니까?”

“그 후작가라는 게 문제야.”

낙하산이라는 게 문제인 건가?

“물론 제가 낙하산이지만…….”

하지만 중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낙하산 같은 건 문제가 아니야. 순회순찰대 내에서도 자기를 임관시키는 문제에 있어 꽤 많이 갑론을박이 오고 갔지만, 결국은 영입을 하기로 결정이 났어. 그래서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 문제가 되는 건 자기가 루겐바인 후작가 사람이라는 거야.”

보통 후작이라 하면 오등작에서 두 번째에 위치한 강력한 작위.

공작급은 보통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가문이니, 후작은 연이 없는 가문이 받을 수 있는 최상위 작위라 봐도 좋을 터였다.

“제 뒷배경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순회순찰대는 관군이고, 이미 입대를 한 이상 뒷배경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내 말에 중대장이 살짝 미소를 지은 후 피크닉 바구니에서 사과를 하나 꺼내 베어 물었다.

여성성이 물씬 뿜어져 나오는 글래머스한 몸매와 미인으로 분류되는 얼굴로 과일을 먹는 중대장의 모습은 묘한 색기가 느껴졌다.

“아까 3부소대장한테 들었어. 자기는 진짜 여자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구나?”

“예? 아, 예…….”

“잘 들어. 우리가 관군 중에 하필이면 순회순찰대고, 자기가 제국 서부지방 귀족들 중에 하필이면 루겐바인 후작가 사람이라는 게 문제야.”

“예?”

“우리 리바크르 제국에는 총 다섯 개의 군이 존재해. 뭔지 알아?”

중대장의 질문에 급히 기억을 떠올려 봤다.

분명 내가 여기에 오고 나서 알게 된 부대는 총 다섯 개였다.

대답을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틀려도 대답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회순찰대, 국토방위군, 제도상비군, 금위병, 영방군 아닙니까?”

“틀렸어. 답은 순회순찰대, 국토방위군, 제도상비군, 금위병, 그리고 언실리워커야.”

“그 다섯 개가 다 군이란 말씀이십니까? 국토방위군과 제도상비군을 빼고, 나머지 세 개는 부대명에 군이라는 단어조차 안 들어갑니다만.”

솔직히 나는 국토방위군 안에 순회순찰대가 들어가고, 제도상비군 안에 금위병이 들어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니.

“금위병, 순회순찰대, 언실리워커는 군 창설 계기 때문에 부대명에 군이 안 들어가는 거지, 엄연히 그 삼군도 제국 정규 오군체계에 포함되는 군이야. 각자가 개별적인 군으로 인정을 받고, 행정상으로도 그리 되니, 서로가 서로에게 간섭을 할 수가 없지.”

말하자면 육군, 해군, 공군 이런 식의 분류법이라는 건가.

“중대장님, 그러면 영방군은 뭡니까?”

“자기, 영방군이 뭐의 약자인지는 알지?”

“예. 영지방위군의 약자 아닙니까?”

“맞아. 영방군은 각 귀족의 영지를 수호하는 사병 집단이야.”

“예?”

중대장의 말에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지를 수호하는 군대인데, 관군이 아니라 사병이라니요. 그러면 지방을 지키는 관군은 뭡니까?”

“없어.”

“…….”

“리바크르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관군을 배치할 수 있는 곳은 마깅법국, 룬드래곤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제국 북동부 지역과 제도 블랙오리온이 다야. 그 외의 지역은 어디까지나 각 지방 영주들이 개별적으로 영지를 지키도록 되어 있지.”

…뭐야.

여기 진짜 신성 로마 제국이잖아.

강한 황권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중앙집권국이 아닌, 명분뿐인 황제와 실질적인 권력을 지니고 있는 제후들로 구성이 된, 그런 지방 분권 제국 말이다.

“중대장님, 관군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 주시면 안 됩니까?”

내가 생각했던 일반적인 정치 구조와 많이 다른 제국의 실상에 급격하게 호기심이 일었다.

“제도상비군, 금위병, 언실리워커는 다 제도에 주둔하고 있지. 이 중 제도상비군은 말 그대로 제도 블랙오리온을 지키는 일반 병력, 금위병은 황가를 지키는 친위군, 그리고 언실리워커는 첩보 부대야.”

“그러면 국토방위군은 말이 국토방위군이지, 실제로는 그냥 제국 북동부만 지키는 군대로군요.”

“그렇지. 우리 제국만큼은 아니지만, 마깅법국과 룬드래곤 왕국 역시 대륙 강대국 중 하나니까. 흔히들 우리 제국을 포함해서 삼대강국이라고 부르기도 하니까 말이지.”

흐음, 그러면 이 대륙의 화약고 같은 곳이란 말인가.

확실히 그런 요충지면 정식으로 대군을 배치시켜야겠지.

어? 잠깐. 그러면…….

“중대장님, 아까 관군은 북동부 국경 지역과 제도에만 배치된다고 했는데, 저희는 제국 서부에 있잖습니까? 저희 순회순찰대는 대체 뭡니까?”

“우리는…….”

뜸을 들이는 중대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이 관능적으로 느껴질 만도 하건만, 그런 것보다 중대장의 다음 말이 더 궁금했다.

“…회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