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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제7장 수산업 진흥(2)
지밀 해협―예전의 소야 혹은 라페루즈 해협으로, 사할린과 북해도 사이에 있는 바다―을 빠져나온 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래만 해역으로 진입했다. 이 바다의 원래 이름은 아니바 만[亞庭湾]인데, 사할린 남단의 육지 지형이 마치 날개를 편 것처럼 두 갈래로 뻗은 모양이라 ‘나래만’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나래만 해역이 들어선 지 네 시간 정도가 되자 드디어 목적지의 외관이 눈에 들어왔다.
“오, 항구 뒤쪽은 다 산지인데? 이런 곳에 큰 항구 마을이 들어서있다고?”
“듣기로 사할린 남쪽에 저기 말고 이렇다 할 항구가 없는 모양이오. 그러니 이 도시가 커질 수밖에 없지요.”
“서부 해안에 있는 항구도 죄다 저렇게 생겼지 않소? 방포도, 광흥진도……. 여기 사할린 포구들은 대개 그렇게 생긴 모양이오.”
중늙은이로 보이는 세 인물이 뱃전에 나와 멀리 보이는 항구 모습에 대해 품평회를 열고 있다. 다들 두루마기를 걸쳐 입었지만, 단발을 했는지 갓 대신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배는 곧 예진항(禮津港)으로 들어섰다. 예진항은 일본식 지명으로 오도마리[大泊], 러시아의 경우 코르사코프라 불리는 곳이다. 나래만의 동쪽 해안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항구인데, 남사할린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 교통로의 거점이 되는 곳이었다.
각자 수행한 일행과 더불어 하선한 이들은 유람하듯 천천히 걸어가며 도시를 살폈다.
“소문대로요. 차림새를 보니 온갖 인종들이 다 모인 것 같소.”
조합원에 의해 대표로 뽑힌 웅기수산의 신치용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에 먼저 눈이 간 모양이었다.
“그렇구려. 아라사 사람도 간혹 보이고, 저 털이 많은 자들은 아이누 사람들인가? 음, 저자들은 왜인이네?”
그의 말에 ‘성진어업사’의 김말룡이 답했다.
“역시 왜인이 가장 많소. 그러고 보니 우리 한인은 그다지 많지 않네요?”
‘어랑수산’의 박진홍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들이 보기에 한인이 많지 않다는 건 그리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인구가 이렇게 많은 곳이라면 더욱 그랬다.
이들 세 사람이 대표로 있는 회사들은 모두 같은 형태로 설립되었다. 정부의 의중에 따른 결과였다. 그리고 회사 명칭은 이들이 근거지로 삼고 있는 포구에서 따왔다. 웅기수산은 경원군 웅기항, 성진어업사는 성진항 남쪽의 어항 구역, 어랑수산은 경성군 어랑항이 본거지였다.
이들은 현재 대한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수산업 업체들로 성장했다. 정부가 일찌감치 동력선과 신흥 어구를 보급해 준 후 생긴 변화였다. 회사가 다루고 있는 업종도 다양했다. 당연히 어로가 주업이지만, 수산 식품 가공업, 수산 제품 유통업에도 손을 뻗쳤다.
이런 회사들은 합명회사 혹은 합자회사처럼 초기에 조합원들이 공동으로 출자해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회사 규모가 커지자 타 지역에 지사를 만들어 진출하기 시작했다. 즉, 어업 전진기지로 성장할 만한 곳에 지사를 열고 조합원을 보내 해당 지역 연안의 어로권을 선점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경향은 정부의 적극적인 주민 이주 정책과 잘 어우러졌다. 지사로 파견 나간 회사 구성원도 개별 이주 어민처럼 현지에서 어선을 불하받을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정식 이주민과 달리 이들에게 토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아울러 수년 내에 원양에서 조업을 할 수 있는 큰 어선을 만들어 판매할 것이라는 정부 측의 약속도 이런 경향을 부추기는 데 한몫했다.
대충 항구를 둘러본 이들은 숙소로 들어가기에 앞서 군청 역할을 맡고 있는 사할린 군정청 산하 예진 지청 건물로 들어갔다.
미리 약속되었는지, 군정청에서 이들이 도착하길 기다리던 총독부 농수산과 담당 장교가 손님맞이에 나섰다. 그는 손님들을 제12사단 산하 제39연대장 남상덕(南相悳) 정령에게 데리고 갔다. 인구가 많아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곳이라 제39연대 본부를 예진에 둔 모양이다.
“허허, 잘 오셨습니다. 와 보니 어떻습니까?”
“항구로 보면 아주 그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민족 비중이 너무 높은 것 같소이다.”
그 문제가 내내 걸렸는지, 어랑수산의 박진홍이 먼저 이 얘기를 꺼냈다.
“차차 나아질 겁니다. 지금 이곳 인구가 일만 명 정도 되긴 하지만.”
“헉! 그렇게 많아요?”
“그럴 수밖에 없죠. 역사가 꽤 오래된 포구니까요. 처음 북사할린을 거쳐 남사할린 지역으로 들어온 우리 육군 원정군 병력이 중심지인 풍주를 점령하고 나서 겨우 한숨을 돌렸죠. 그런데 정찰병을 이곳에 보내고 나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풍주가 아니라 여기가 실제적인 중심지였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거죠.”
예진은 1600년대부터 일찌감치 일본인 어민들이 드나들었고, 러시아도 1853년에 이곳을 점령하며 발을 들여놓았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도시였다.
일본 치하일 때는 행정 중심지가 풍주―그 당시에 토요하라[豊原]라 불림―로 옮겨갔지만, 인구는 이곳이 여전히 많았다. 또한 대한제국이 점령한 후에도 소수의 러시아인만 아무르 공화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인구수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본토에서 꽤 먼 곳까지 이주해 와서 그런지, 일본인들 중 상당수가 대한제국에 귀화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섬에서 나간 이들은 타지에도 재산이 많이 있는 사람들 정도였다.
“정말 그랬겠네요.”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었지요. 대대 병력만 보내도 충분했습니다. 그 정도에도 일본군 수비대가 바로 항복했으니까요.”
“그럼 사할린의 전체 사람 수는 얼마나 되오이까?”
웅기수산의 신치용도 지금 주어진 기회를 활용해 궁금증을 최대한 많이 해소하려 했다.
“우리 한국인을 제외하면 4만에서 4만 5천 사이? 그 정도로 보고 있어요.”
실제 통계로 보면 1910년대 사할린 인구 총수는 약 74,000명인데, 러시아령 북사할린 인구가 32,000, 일본의 남사할린은 약 42,000명이었다.
그러나 1905년 이후 변화된 역사로 인해 섬 전체가 일본 소유가 된 다음에 다시 대한제국이 점령하면서 인구 구성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사할린에 거주하던 러시아인 대부분은 일본에 의해 쫓겨나 소수만 남고, 인구비의 대다수를 일본인이 점유하게 되었다.
그 외에 아이누, 오로크, 니브흐 등의 원주민과 청국인,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한국인도 꽤 오래전에 바다를 건너온 모양인지, 러시아 측 자료를 보면 1880년대에 이미 조선인이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훗날 사할린 동포라 불리는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강제 징용되어 간 이들이라, 그 러시아 기록에 나온 이들과 다른 부류였다.
결과적으로 군정청 정부가 대충 파악한 현재의 사할린 인구수는 4만 5천 이하였다. 물론 점령 후 들어온 한국인 인구는 제외한 수였다.
“음, 생각보다 많네요. 그럼 다른 도회지는 어떻게 되오?”
“총독부가 있는 풍주에 대략 오천, 광흥진도 오천 가까이 되지요.”
“아, 그 말이 맞는 것 같소. 광흥진이 그 정도될 겁니다. 거기 가 보니 이미 발전소나 벽돌 공장 같은 것도 있더라고요. 일본이 세운 소학교도 있고.”
광흥진(홀름스크)은 동해에 연해 있는, 서부 연안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웅기수산은 이곳에 지사를 두고 있어 신치용의 광흥진에 대한 지식은 꽤 풍부했다.
“하하, 잘 아시는군요. 그밖에 방포도 한 이천 정도 되고, 풍주 북쪽의 나이바에도 한 천 명 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정부는 사할린을 크게 남도, 중도, 북도, 이렇게 세 개 도로 나눴다. 사할린 남도는 남상덕 연대장이 언급한 나이바(Nayba, 후세의 돌린스크)와 그 북쪽의 오호츠크해 해안에 자리한 두부키(Dubuki, 후세의 스타로두브스코예) 지역까지 그 영역으로 삼았다. 북도와 중도의 경계는 죄수들에 의해 탄광으로 개발되고 있는 형안군 지역이었다. 즉, 그곳 이북 지역부터 북도였다.
“그럼 혹시 이 고을 주민을 흩어 놓을 계획이 있는지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아니, 벌써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개발되고 있는 여러 광산과 벌목장에서 사람을 뽑아 가고 있어요. 앞으로 다른 곳에 공장이 생겨나면 더 많이 옮겨 가겠죠.”
“오, 그렇습니까? 광산이나 목재 회사도 진출하기 시작했나 보네요.”
어랑수산 박진홍 대표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무래도 그는 이곳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이미 광흥진에 지사를 개설한 웅기수산의 신대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성진어업사의 김말룡은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두 회사에 비해 비교적 사세가 약한데다 벌써 연해주의 나호포와 북해도의 하늬나루, 이렇게 두 곳에 진출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제 회사 형편에서 남은 여력이라고 해 봐야 겨우 한 곳 정도가 가능한 상황인데, 앞으로 둘러볼 곳이 많이 남아 쉽게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이들 세 업체 이외에 한반도 남부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어민조합 단체도 여럿 있지만, 출발이 늦다 보니 보유한 어선 수도 적고, 새로운 어로 기술에 아직 온전히 적응하지 못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 * *
열차는 나래만의 동부 해안 지대를 따라 신나게 북쪽으로 달려갔다. 거의 10㎞ 정도를 달리는 동안 사람들의 눈에 비쳐진 차창 밖 풍경은 대동소이했다. 객차의 오른편, 즉 동쪽은 산악 지대고, 왼편은 바다였다.
“이 북방의 한갓진 섬에도 벌써 이처럼 철도가 놓여 있다니, 참으로 세상 돌아가는 게 빠르지 않소?”
“그러게 말이오.”
“그런데 이거, 우리가 부설한 게 아닙니다. 왜인들이 한 거죠. 군사 목적으로.”
수산 회사 사람들을 안내하기 위해 따라붙은 군정청 수산과장 장교가 이 철도 노선에 대한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에 일본이 서둘러 건설한 모양이더라고요. 듣기로 가라후토 동선이라고 하던데, 우린 이 노선을 풍예선이라 부르죠.”
가라후토[樺太]는 사할린의 일본식 이름이니 가라후토 동선은 ‘사할린 동선’이 되는 셈이다. 대한제국 측은 이 철도를 풍주(유즈노사할린스크)와 예진의 머리글자를 따서 풍예선이라 이름했다.
“우리가 사할린을 점령한 직후에 이 철도를 활용할 여지가 별로 없었는데, 이제 북해도까지 점령하고 보니 아주 귀중한 철길이 되었죠.”
“그럼 그들이 만든 다른 철도 노선도 있어요?”
“없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부설한 노선이 있죠.”
“아, 그건 알고 있소. 청향까지 연결되었다고. 일본군 포로들을 써서 만든.”
확실히 신치용은 이 섬에 대해 꽤나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거기까지만 연결되어 있는데, 모든 구간이 개통되면 풍광선이란 이름이 붙을 겁니다.”
풍주와 서부 해안의 광흥진을 연결하는 이 철도 노선은 현재 공군 비행장이 있는 청향까지 부설되었는데, 이제 청연강(류토가 강)을 따라 북상해 광흥진 동남쪽 계곡 지대―후세의 퍄티레쳬(Pyatirechye)―까지 나아간 뒤, 서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약 20㎞의 다소 험한 산지 구간을 통과해야 한다.
청연강 구간도 산악 지대에 속해 있지만, 청연강이 만든 계곡 지형이 꽤 평탄해 공사를 진행하기에 수월한 편이었다. 건설 당국은 공기를 단축하기 위해 역으로 광흥진 쪽에서도 공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즉, 양방향으로 부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풍주에서 북쪽으로 항구가 들어설 두부키에 이르는 구간도 손대고 있죠. 지금은 절반 정도 진행된 상황입니다.”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열차는 나래만 해안 지역 구간을 완전히 벗어났다. 이제 동쪽은 변함없이 산지지만, 서쪽은 바다에서 바다같이 너른 벌판으로 바뀌었다.
“음, 저긴 별로 쓸모없는 땅인 것 같소. 꽤 질척거리는 늪지대인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도 그래요. 개간해서 쓸 수도 있겠지만, 어느 세월에 그걸 할 수 있을지.”
신치용과 김말룡의 견해가 일치했다.
“수수강 하구 지역이라 그렇습니다.”
“음, 저 강이 수수강이라고?”
기억에 각인시키고자 김말룡은 강 이름을 되뇌었다.
이제 별다른 감흥 없이 들판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차창 밖으로 나타난 어느 마을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지밀 해협―예전의 소야 혹은 라페루즈 해협으로, 사할린과 북해도 사이에 있는 바다―을 빠져나온 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래만 해역으로 진입했다. 이 바다의 원래 이름은 아니바 만[亞庭湾]인데, 사할린 남단의 육지 지형이 마치 날개를 편 것처럼 두 갈래로 뻗은 모양이라 ‘나래만’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나래만 해역이 들어선 지 네 시간 정도가 되자 드디어 목적지의 외관이 눈에 들어왔다.
“오, 항구 뒤쪽은 다 산지인데? 이런 곳에 큰 항구 마을이 들어서있다고?”
“듣기로 사할린 남쪽에 저기 말고 이렇다 할 항구가 없는 모양이오. 그러니 이 도시가 커질 수밖에 없지요.”
“서부 해안에 있는 항구도 죄다 저렇게 생겼지 않소? 방포도, 광흥진도……. 여기 사할린 포구들은 대개 그렇게 생긴 모양이오.”
중늙은이로 보이는 세 인물이 뱃전에 나와 멀리 보이는 항구 모습에 대해 품평회를 열고 있다. 다들 두루마기를 걸쳐 입었지만, 단발을 했는지 갓 대신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배는 곧 예진항(禮津港)으로 들어섰다. 예진항은 일본식 지명으로 오도마리[大泊], 러시아의 경우 코르사코프라 불리는 곳이다. 나래만의 동쪽 해안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항구인데, 남사할린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 교통로의 거점이 되는 곳이었다.
각자 수행한 일행과 더불어 하선한 이들은 유람하듯 천천히 걸어가며 도시를 살폈다.
“소문대로요. 차림새를 보니 온갖 인종들이 다 모인 것 같소.”
조합원에 의해 대표로 뽑힌 웅기수산의 신치용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에 먼저 눈이 간 모양이었다.
“그렇구려. 아라사 사람도 간혹 보이고, 저 털이 많은 자들은 아이누 사람들인가? 음, 저자들은 왜인이네?”
그의 말에 ‘성진어업사’의 김말룡이 답했다.
“역시 왜인이 가장 많소. 그러고 보니 우리 한인은 그다지 많지 않네요?”
‘어랑수산’의 박진홍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들이 보기에 한인이 많지 않다는 건 그리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인구가 이렇게 많은 곳이라면 더욱 그랬다.
이들 세 사람이 대표로 있는 회사들은 모두 같은 형태로 설립되었다. 정부의 의중에 따른 결과였다. 그리고 회사 명칭은 이들이 근거지로 삼고 있는 포구에서 따왔다. 웅기수산은 경원군 웅기항, 성진어업사는 성진항 남쪽의 어항 구역, 어랑수산은 경성군 어랑항이 본거지였다.
이들은 현재 대한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수산업 업체들로 성장했다. 정부가 일찌감치 동력선과 신흥 어구를 보급해 준 후 생긴 변화였다. 회사가 다루고 있는 업종도 다양했다. 당연히 어로가 주업이지만, 수산 식품 가공업, 수산 제품 유통업에도 손을 뻗쳤다.
이런 회사들은 합명회사 혹은 합자회사처럼 초기에 조합원들이 공동으로 출자해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회사 규모가 커지자 타 지역에 지사를 만들어 진출하기 시작했다. 즉, 어업 전진기지로 성장할 만한 곳에 지사를 열고 조합원을 보내 해당 지역 연안의 어로권을 선점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경향은 정부의 적극적인 주민 이주 정책과 잘 어우러졌다. 지사로 파견 나간 회사 구성원도 개별 이주 어민처럼 현지에서 어선을 불하받을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정식 이주민과 달리 이들에게 토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아울러 수년 내에 원양에서 조업을 할 수 있는 큰 어선을 만들어 판매할 것이라는 정부 측의 약속도 이런 경향을 부추기는 데 한몫했다.
대충 항구를 둘러본 이들은 숙소로 들어가기에 앞서 군청 역할을 맡고 있는 사할린 군정청 산하 예진 지청 건물로 들어갔다.
미리 약속되었는지, 군정청에서 이들이 도착하길 기다리던 총독부 농수산과 담당 장교가 손님맞이에 나섰다. 그는 손님들을 제12사단 산하 제39연대장 남상덕(南相悳) 정령에게 데리고 갔다. 인구가 많아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곳이라 제39연대 본부를 예진에 둔 모양이다.
“허허, 잘 오셨습니다. 와 보니 어떻습니까?”
“항구로 보면 아주 그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민족 비중이 너무 높은 것 같소이다.”
그 문제가 내내 걸렸는지, 어랑수산의 박진홍이 먼저 이 얘기를 꺼냈다.
“차차 나아질 겁니다. 지금 이곳 인구가 일만 명 정도 되긴 하지만.”
“헉! 그렇게 많아요?”
“그럴 수밖에 없죠. 역사가 꽤 오래된 포구니까요. 처음 북사할린을 거쳐 남사할린 지역으로 들어온 우리 육군 원정군 병력이 중심지인 풍주를 점령하고 나서 겨우 한숨을 돌렸죠. 그런데 정찰병을 이곳에 보내고 나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풍주가 아니라 여기가 실제적인 중심지였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거죠.”
예진은 1600년대부터 일찌감치 일본인 어민들이 드나들었고, 러시아도 1853년에 이곳을 점령하며 발을 들여놓았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도시였다.
일본 치하일 때는 행정 중심지가 풍주―그 당시에 토요하라[豊原]라 불림―로 옮겨갔지만, 인구는 이곳이 여전히 많았다. 또한 대한제국이 점령한 후에도 소수의 러시아인만 아무르 공화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인구수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본토에서 꽤 먼 곳까지 이주해 와서 그런지, 일본인들 중 상당수가 대한제국에 귀화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섬에서 나간 이들은 타지에도 재산이 많이 있는 사람들 정도였다.
“정말 그랬겠네요.”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었지요. 대대 병력만 보내도 충분했습니다. 그 정도에도 일본군 수비대가 바로 항복했으니까요.”
“그럼 사할린의 전체 사람 수는 얼마나 되오이까?”
웅기수산의 신치용도 지금 주어진 기회를 활용해 궁금증을 최대한 많이 해소하려 했다.
“우리 한국인을 제외하면 4만에서 4만 5천 사이? 그 정도로 보고 있어요.”
실제 통계로 보면 1910년대 사할린 인구 총수는 약 74,000명인데, 러시아령 북사할린 인구가 32,000, 일본의 남사할린은 약 42,000명이었다.
그러나 1905년 이후 변화된 역사로 인해 섬 전체가 일본 소유가 된 다음에 다시 대한제국이 점령하면서 인구 구성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사할린에 거주하던 러시아인 대부분은 일본에 의해 쫓겨나 소수만 남고, 인구비의 대다수를 일본인이 점유하게 되었다.
그 외에 아이누, 오로크, 니브흐 등의 원주민과 청국인,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한국인도 꽤 오래전에 바다를 건너온 모양인지, 러시아 측 자료를 보면 1880년대에 이미 조선인이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훗날 사할린 동포라 불리는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강제 징용되어 간 이들이라, 그 러시아 기록에 나온 이들과 다른 부류였다.
결과적으로 군정청 정부가 대충 파악한 현재의 사할린 인구수는 4만 5천 이하였다. 물론 점령 후 들어온 한국인 인구는 제외한 수였다.
“음, 생각보다 많네요. 그럼 다른 도회지는 어떻게 되오?”
“총독부가 있는 풍주에 대략 오천, 광흥진도 오천 가까이 되지요.”
“아, 그 말이 맞는 것 같소. 광흥진이 그 정도될 겁니다. 거기 가 보니 이미 발전소나 벽돌 공장 같은 것도 있더라고요. 일본이 세운 소학교도 있고.”
광흥진(홀름스크)은 동해에 연해 있는, 서부 연안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웅기수산은 이곳에 지사를 두고 있어 신치용의 광흥진에 대한 지식은 꽤 풍부했다.
“하하, 잘 아시는군요. 그밖에 방포도 한 이천 정도 되고, 풍주 북쪽의 나이바에도 한 천 명 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정부는 사할린을 크게 남도, 중도, 북도, 이렇게 세 개 도로 나눴다. 사할린 남도는 남상덕 연대장이 언급한 나이바(Nayba, 후세의 돌린스크)와 그 북쪽의 오호츠크해 해안에 자리한 두부키(Dubuki, 후세의 스타로두브스코예) 지역까지 그 영역으로 삼았다. 북도와 중도의 경계는 죄수들에 의해 탄광으로 개발되고 있는 형안군 지역이었다. 즉, 그곳 이북 지역부터 북도였다.
“그럼 혹시 이 고을 주민을 흩어 놓을 계획이 있는지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아니, 벌써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개발되고 있는 여러 광산과 벌목장에서 사람을 뽑아 가고 있어요. 앞으로 다른 곳에 공장이 생겨나면 더 많이 옮겨 가겠죠.”
“오, 그렇습니까? 광산이나 목재 회사도 진출하기 시작했나 보네요.”
어랑수산 박진홍 대표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무래도 그는 이곳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이미 광흥진에 지사를 개설한 웅기수산의 신대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성진어업사의 김말룡은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두 회사에 비해 비교적 사세가 약한데다 벌써 연해주의 나호포와 북해도의 하늬나루, 이렇게 두 곳에 진출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제 회사 형편에서 남은 여력이라고 해 봐야 겨우 한 곳 정도가 가능한 상황인데, 앞으로 둘러볼 곳이 많이 남아 쉽게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이들 세 업체 이외에 한반도 남부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어민조합 단체도 여럿 있지만, 출발이 늦다 보니 보유한 어선 수도 적고, 새로운 어로 기술에 아직 온전히 적응하지 못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 * *
열차는 나래만의 동부 해안 지대를 따라 신나게 북쪽으로 달려갔다. 거의 10㎞ 정도를 달리는 동안 사람들의 눈에 비쳐진 차창 밖 풍경은 대동소이했다. 객차의 오른편, 즉 동쪽은 산악 지대고, 왼편은 바다였다.
“이 북방의 한갓진 섬에도 벌써 이처럼 철도가 놓여 있다니, 참으로 세상 돌아가는 게 빠르지 않소?”
“그러게 말이오.”
“그런데 이거, 우리가 부설한 게 아닙니다. 왜인들이 한 거죠. 군사 목적으로.”
수산 회사 사람들을 안내하기 위해 따라붙은 군정청 수산과장 장교가 이 철도 노선에 대한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에 일본이 서둘러 건설한 모양이더라고요. 듣기로 가라후토 동선이라고 하던데, 우린 이 노선을 풍예선이라 부르죠.”
가라후토[樺太]는 사할린의 일본식 이름이니 가라후토 동선은 ‘사할린 동선’이 되는 셈이다. 대한제국 측은 이 철도를 풍주(유즈노사할린스크)와 예진의 머리글자를 따서 풍예선이라 이름했다.
“우리가 사할린을 점령한 직후에 이 철도를 활용할 여지가 별로 없었는데, 이제 북해도까지 점령하고 보니 아주 귀중한 철길이 되었죠.”
“그럼 그들이 만든 다른 철도 노선도 있어요?”
“없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부설한 노선이 있죠.”
“아, 그건 알고 있소. 청향까지 연결되었다고. 일본군 포로들을 써서 만든.”
확실히 신치용은 이 섬에 대해 꽤나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거기까지만 연결되어 있는데, 모든 구간이 개통되면 풍광선이란 이름이 붙을 겁니다.”
풍주와 서부 해안의 광흥진을 연결하는 이 철도 노선은 현재 공군 비행장이 있는 청향까지 부설되었는데, 이제 청연강(류토가 강)을 따라 북상해 광흥진 동남쪽 계곡 지대―후세의 퍄티레쳬(Pyatirechye)―까지 나아간 뒤, 서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약 20㎞의 다소 험한 산지 구간을 통과해야 한다.
청연강 구간도 산악 지대에 속해 있지만, 청연강이 만든 계곡 지형이 꽤 평탄해 공사를 진행하기에 수월한 편이었다. 건설 당국은 공기를 단축하기 위해 역으로 광흥진 쪽에서도 공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즉, 양방향으로 부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풍주에서 북쪽으로 항구가 들어설 두부키에 이르는 구간도 손대고 있죠. 지금은 절반 정도 진행된 상황입니다.”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열차는 나래만 해안 지역 구간을 완전히 벗어났다. 이제 동쪽은 변함없이 산지지만, 서쪽은 바다에서 바다같이 너른 벌판으로 바뀌었다.
“음, 저긴 별로 쓸모없는 땅인 것 같소. 꽤 질척거리는 늪지대인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도 그래요. 개간해서 쓸 수도 있겠지만, 어느 세월에 그걸 할 수 있을지.”
신치용과 김말룡의 견해가 일치했다.
“수수강 하구 지역이라 그렇습니다.”
“음, 저 강이 수수강이라고?”
기억에 각인시키고자 김말룡은 강 이름을 되뇌었다.
이제 별다른 감흥 없이 들판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차창 밖으로 나타난 어느 마을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