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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제1장 서울의 기억(3)



베를린 마이네케 거리에 자리한 대한제국 공사관.

대한제국은 이제 공격적인 외교정책으로 방향을 전환,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관계를 복원하거나 새로 수교를 해 나갔다. 그 결과, 유럽 내의 대한제국 공사관 수는 제법 늘어나 있는 상태였다.

노르웨이와 스웨덴, 덴마크 같은 북유럽 국가, 전통적인 중립국인 스위스, 벨기에, 그리고 남유럽의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에 공사관이 차례로 들어섰다.

이로 인해 독일 주재 대한제국 공사관의 위상은 전에 비해 다소 하락한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유럽 대륙에서 중추 공관 역할을 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이제 마르크화 보유량을 대폭 줄여 나가기로 했대요. 어제 외부발 전문으로 들어온 소식입니다.”

이형섭 공사의 말에 제국익문사 전 유럽 총괄국장 정종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마르크화를 빨리 소진시키자는 거죠? 그럼 이제 우리도 본격적으로 대비 태세에 들어간다는 신호인가요?”

2년 전, 대한제국과 러시아 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유럽의 정세는 그 방향성이 더욱 또렷하게 흘러갔고, 그 흐름의 귀결점은 곧 전쟁이었다.

더 큰 문제는 실제 역사보다 분위기가 더 흉흉하다는 점이었다. 독일제국의 국력이 더 막강해진데다 그 반대편에서 균형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할 러시아가 대한제국과 전쟁을 치르며 약체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제 언제고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지만, 독일은 서두르지 않았다. 군사력에 자신감이 생기다 보니 오히려 실제 역사에서 보다 더 꼼꼼하고 차분하게 준비를 해 나갔다.

그럼에도 몸이 근질근질할 정도로 넘쳐 나는 힘을 갖고 있는 독일이다 보니, 그 인내심이 실 끊어진 연처럼 뚝 풀어져 버릴 날이 머지않았다는 건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대한제국 측도 이 흐름을 감지하고 주 독일 공사관에 이런 훈령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마르크화를 사용할 방법을 모색하라네요. 현 정세상 외화 대 외화로 바꾸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고, 또 갑자기 대거 황금으로 인출해 가면 아무래도 양국 관계가 불편해질 테니까, 아예 독일에서 쓰는 게 낫지 않겠냐는 거죠.”

“음, 러시아 루블화에 이어 마르크화까지 털어 낼 심산이군요.”

“영국 파운드화와 프랑스 프랑화도 그렇게 한답니다.”

“그럼 남는 건 미국 달러밖에 없겠네요?”

“맞아요. 달러는 당장 바꿀 필요가 없으니까.”

금본위제하에서 금 보유량은 곧 통화량과 직결되기 때문에 각국은 악착같이 금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겠네요.”

“역사의 흐름이 많이 바뀌었어요. 그래서 어떤 상황이 초래될지 예측하기 어려우니, 전쟁 당사국들의 화폐를 가급적 빨리 금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탁지부에서 계속 내놓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다들 전비 확충에 혈안이 되어 있어 금으로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파운드나 프랑은 보유량이 많지 않아 별 신경 쓸 게 없지만, 마르크화는 정말 큰 문제죠.”

대한제국은 대(對)독일 무역에서 대금을 현물인 황금으로 받기보다 편의상 금 태환 화폐로 받았다. 유일한 수교국이기 때문에 머나먼 수송로를 통해 금을 운송하는 위험성과 수고로움을 감소시켜 주고자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국고에 마르크화가 많이 쌓이게 되었다.

“정말 마르크 보유고가 엄청나긴 하죠. 그게 휴지 조각이 되면 우리도 타격이 크겠네요.”

“그럼요. 그간 독일과 거의 독점적으로 거래하다시피 했으니까.”

전쟁이 터지면 전쟁 당사국들은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화폐를 대량 발행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금본위제 질서도 무너지고, 화폐의 신뢰도는 물론 그 가치가 크게 추락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여기서 직접 현물로 구입할 품목으로 가장 좋은 건 중고 군함인데, 독일 측이 이제 더 이상 군함 거래를 할 의향이 없다고 했으니.”

정종한은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다. 1912년 이후, 대한제국에 또 한 번 1개 전대 규모의 구형 군함들을 수출한 독일 측은 그걸 마지막 거래라고 선언했다. 독일 황립 해군 측에서 이제 남은 구형 군함을 모두 새로 개조해 운용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럼 민간 상선이라도 확보해야죠.”

“그 수밖에 없네요. 해외 영토가 너무 많이 늘어나 군선이든 상선이든 그 수요가 폭증하고 있으니까.”

“그럼 세창양행에 도움을 요청해 최대한 많이 확보해 봅시다.”

이형섭은 이 과제에 대해 쉽게 결론을 냈다. 그의 말대로 그렇게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또 괴물 같은 히트 상품을 들고 들어왔으니, 사 갈 수 있는 선박 수가 더 늘어나겠는데요?”

정종한은 이형섭 공사가 잠시 잊고 있던 사안을 끌어왔다.

“아, 영화! 그렇지. 그게 또 있었지. 하하하!”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온 공사관 직원은 마침 현정건 감독과 대한영화진흥공사 대표단이 찾아왔다고 전해 주었다.

“후후,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형섭은 미소를 지으며 현정건 일행을 맞이했다.



* * *



현정건은 베게너와 라이에게 선언하듯 잘라 말했다.

“불가합니다.”

“모든 게 말입니까?”

“배급 관련 부문만 제외하고 모두.”

“배급?”

‘배급’이란 말에 베게너는 그래도 희망이 보이는지 반색을 했다.

“그렇습니다. 우린 배급을 도맡아 해 줄 업체를 구할 겁니다. 또 그들에게 일부 상영 장비를 대여할 계획이죠. 하지만 그것도 볼터 상사와 협의… 아니, 경쟁해야 합니다.”

볼터는 마이어(Mayer) 상사로부터 독립한 후, 독일에서 ‘볼터 상사[Wolter & Co.]’란 이름으로 영업을 했다. 물론 ‘세창양행’은 동양권에서 쓰는 업체 명칭이었다.

“헉! 볼터요?”

베게너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도 세창양행과 볼터 사장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성장한 이 기업은 어느새 독일에서 가장 유명하고 큰 업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베게너는 현정건에게 애원하듯 여러 가지 바람을 전했다. 그가 가장 강력하게 원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대한제국 영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요청을 현정건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현정건은 영화 산업이 대한제국의 전략산업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규제가 풀려야 외국과 기술 교류가 시작될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베게너는 그 외에도 이번에 들고 온 첨단 영화 시스템 전체를 팔아 달라고도 했고, 순회 강연회를 열어 달라느니, 이번 촬영에 사용된 필름을 수출해 달라는 부탁도 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노하우든,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얻길 바랐다. 결국 그 모든 요청은 기각되었고, 이번 영화의 배급 관련 부분에 대해서만 협의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부 상영 장비를 대여한다고요? 그게 뭡니까?”

베게너는 실망한 와중에도 현정건의 말속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 하나를 잡아챘다.

“음향 관련 장비죠. 확성기와 음향 재생기 정도? 이들 중에 이번에 특허가 신청되는 장비도 있습니다. 그걸 세창양행에서 맡아서 처리해 주고 있죠. 물론 영사기도 대여해 드릴 겁니다. 아무래도 동기화 기술이 필요할 테니.”

“동기화라면…….”

“영상과 음향을 일치시키는 기술이죠.”

“아…….”

베게너는 다시 솟구치는 욕망을 주체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 ‘동기화’ 기술만 구현해 낼 수 있다면, 아마 유럽의 영화 시장을 석권할 수 있으리라.

이번에 특허 신청이 들어간 기술은 1924년에나 나올 ‘동적 코일 원리’에 의해 개발된 스피커 시스템과 필름에 음향 정보를 기록하는 기술인 ‘포노필름(Phonofilm)’으로, 이 기술 또한 1920년대에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대한제국 측이 독일에 대여할 음향 장비는 보급형 장비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축음기형 음반 시스템인 ‘바이타폰(Vitaphone)’이었다. 최초의 유성영화라 평가받는 미국 워너 브라더스의 ‘재즈 싱어(Jazz Singer)’에 적용된 기술이고, 이 영화는 1927년에 개봉될 영화이다.

이렇듯 대한제국 측은 일단 10여 년 정도 앞선 기술을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현재 상영회에서 적용된 기술은 그보다 훨씬 진보한 것이고, 극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장비이기 때문에 다시 고스란히 가져가기로 했다.

한마디로 영화 자체를 화려하게 데뷔시키기 위해 잠깐 사용하고 만 셈이었다. 그 대신 보급형 장비를 대여해 줘 음질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영화 상영에 차질이 없게 한 것이다.



* * *



“하하, 잘 대처하셨어요.”

이형섭 공사의 칭찬에 현정건이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저야 뭐, 지시대로 실행했을 뿐인데요.”

“그것도 그렇지만, 우리가 우위에 있다는 걸 저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켜 줬다는 게 중요합니다. 저들은 아주 지독한 백인우월주의에 빠져 있거든요. 저도 여기로 부임한 뒤 새삼 많이 실감했지요.”

“그래요? 전 그런 걸 느낄 겨를이 없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크게 환대해 줘서. 그것도 그렇지만, 독일 영화를 보고 나니 역으로 우월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 정도로 앞서고 있는지 정말 몰랐어요.”

“아, 그래요? 영화는 제가 잘 모르는 분야라… 하하하!”

이형섭 공사 같은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나오면 빨리 다음 화제로 넘어가고 싶어 한다. 길게 이야기할수록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사업에 대한 이야기라 이형섭은 대한영화진흥공사 사업지원국의 심건업 과장에게 물었다.

“영화 배급 사업은 아무래도 베게너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도 영화인이니까요. 대신 세창양행에 감사 역할을 맡기고.”

“음, 그게 낫겠네요.”

“그런 의향을 비쳤더니 그 자리에서 자신의 계획을 좌르르 풀어놓더군요.”

“그래요?”

“벌써 관람료도 책정해 놓았어요. 무려 20마르크로 할 생각이라나? 물론 초기 상영 기간에 한한다는데, 그래도 너무 거액 아닙니까?”

“헐, 20마르크나?”

이형섭은 깜짝 놀랐다.

금년, 즉 1914년의 환율 자료를 보면, 미화 1달러의 가치는 4.2마르크로 환산되기 때문에, 20마르크는 약 5달러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다.

그간 대한제국의 임금 수준도 꽤 많이 올라 하급 관리의 초임이 15원, 즉 15달러에 달하므로 명목상 환율로 보면 월 급여액의 삼분지 일 정도 수준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물가가 훨씬 싸기 때문에 실제 구매력 기준 달러 가치로 보면 20에서 25달러 수준까지 올라간다. 그럼에도 영화 관람료 20마르크면 엄청 고가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받아도 꽉꽉 들어찰 거라 확신하더군요. 심지어 다른 나라에서도 이 영화를 보러 올 것 같다는 말도 했어요.”

“대단하네요. 그럼 우리한테 들어오는 수익도 늘어날 테니, 잘된 일이죠.”

이형섭은 말과 다르게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현정건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공사님은 이 배급 사업을 회의적으로 보시는지요?”

“아, 그런 게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정세 때문이죠. 지금 독일 경제가 호황을 맞고 있지 않습니까?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 영화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수익도 크게 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곧 전쟁이…….”

“음, 다들 그런 얘길 하더군요. 그러겠네요. 전쟁이 터지면 영화 산업이란 게 크게 위축될 테니.”

“그럼에도 이번 영화만큼은 크게 성공할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 현 감독님의 영화가 세계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는 게 더 중요하죠. 우리 정부는 영화 산업에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의 힘을 보여 주는 데 영화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요.”

“음, 알겠습니다. 저야말로 영광이죠.”

“그런데… 음악 영화는 어떻게 생각해요?”

“음악 영화요?”

“예, 음악 영화. 순수한 우리 음악은 아무래도 유럽에서 통하기 어려울 테니, 소위 화룡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소재로 하는…….”

“아, 그 신풍 음악이요.”

신풍 음악은 포크와 비슷한 장르의 음악이다. 장르 특성상 서정적인 곡이 많이 만들어졌지만, 전쟁 와중이다 보니 행진곡풍의 빠르고 비트가 강한 곡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음향 기술이라면 유럽인들을 충분히 매료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면 영화를 통해 우리 음악도 알릴 수 있으니까.”

이형섭은 미래에 나올 첫 유성영화인 ‘재즈 싱어’를 떠올리고 이 의견을 냈으리라.

“아, 좋은 의견입니다. 귀국해서 의논해 보겠습니다.”

“와! 듣고 보니 정말 사업 전망이 창창하겠네요.”

곁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종한 부장도 활짝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요. 영화 관련된 산업은 모두가 어마어마하게 큰 시장이죠. 음향 기기와 영상 기기는 물론, 상영작까지… 앞으로 모든 분야를 대한제국이 독점하다시피 할 겁니다. 미국 시장이 관건이긴 하겠지만요.”

이형섭 공사의 의견에 정종한도 한마디 더 덧붙였다.

“맞아요. 거긴 인구도 많고 발전 속도도 빠르죠. 게다가 우린 언어의 핸디캡도 안고 있으니.”

“그래도 해볼 만할 겁니다. 작품성이 더 뛰어나고 기술적으로 더 앞서있으니까요. 현 감독 작품 보세요. 대단하지 않나요? 하하하!”

“그러게요. 저도 첫 시사회 때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두 사람의 뜬금없는 칭찬을 듣게 되자, 무안한지 현정건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의 시선을 받은 이들도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워 더욱 그를 당황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