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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제1장 서울의 기억(2)
광무 18년, 서기 1914년 4월. 서울.
예전에 휘발성 지역에 속한 이 시골 마을은 이제 명실상부한 대한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기존 휘발성 구역도 거대 도시 서울의 동부 변두리로 행정구역에 포함되지만, 시내 중심부는 휘발하를 따라 서쪽으로 약 18㎞ 정도 떨어진, 미래의 휘남현(輝南縣) 조양진(朝陽鎭) 지역에 조성되었다.
그곳에 올해 초부터 화룡에 있던 중앙정부 기관들이 차례로 이전해 오면서 서울은 점차 수도로서 구색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그간 인구도 꽤 많이 불어났다. 시내 동쪽과 동남쪽 외곽 지역, 휘발하의 지류 중 하나로 나름 수량이 풍부해 공업용수 조달에 유리한 평안하(平安河)―대한제국 정부는 한동안 후세에 붙여진 삼통하(三通河)란 명칭을 사용하다 당대의 북평안천(北平安川)이란 원 이름에서 두 자를 따와 평안하로 개칭했다―강변 지역을 따라 입주한 여러 공장들이 노동자를 대거 모집해 인구를 부쩍 늘려 놓았다.
노동자들이 자리를 잡자 자연스레 소상인들도 따라 들어왔는데, 이들의 상당수는 남부의 한성 출신 주민들이었다.
여기에 더해 중앙정부 기관과 각종 기업체들이 속속 입주함에 따라 화룡 주민도 대거 이주해 오자, 이제 도시는 사람들로 복작거린다는 느낌마저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내 최북단 구릉지대에 자리한 황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아 황실은 몇 달 뒤에나 이전할 예정이고, 그 시기에 맞춰 정식으로 수도 이전을 선포하기로 했다.
나라의 상징인 만큼 정부 관계자들은 처음부터 심미성과 상징적인 면을 고려하여 궁을 건설했다. 구조는 황제의 뜻에 따라 경운궁과 비슷하게 설계됐다.
독일인 건축 기사를 고용해 르네상스 양식의 양관과 전통적인 팔작지붕 모양을 한 정전 두 채를 나란히 배치하고, 그 측면과 배후에 다른 크고 작은 전각을 들여세웠다. 이 전각들 또한 양식과 한식이 골고루 혼재되어 있었다.
정부는 황궁이 들어서고 있는 북쪽, 해발 400미터대의 나지막한 산지에 ‘홀한산(忽汗山)’이란 이름을 붙이고, 정문이자 남문인 ‘광무문(光武門)’을 기점으로 시원하게 뻗은 중앙 대로를 ‘홀한대로’라 호칭하기로 했다.
휘발하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길게 뻗어간 이 홀한대로를 따라 고층 건물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홀한대로가 지나는 다리 역시 홀한대교라 이름했다.
그래서 이 다리의 북쪽에 황궁과 중앙정부 청사들이, 남쪽에 각종 공기업과 민간기업체들이 자리를 잡았다.
독일에 ‘서울의 기억’이란 영화와 더불어 영화인들을 파견한 대한영화진흥공사도 다리 남쪽, 홀한대로 서편에 위치했다.
“우리 현정건 감독은 잘하고 있겠지?”
도래인 출신의 조건 사장이 회의 도중에 또다시 독일 팀에 대해 언급했다. 전신을 통해 무사히 베를린에 도착한다는 전갈만 받았을 뿐, 아직 현지 반응에 대한 건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래서 회의를 하는 와중에도 독일 일을 화제로 끌고 오곤 했다.
“장담하건대, 지금 독일은 난리가 났을 겁니다.”
김진황 제작국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영화학과를 나온 전문 영화인이었다. 그래서 국립 대한대학교 영화학과의 커리큘럼을 거의 도맡아 디자인하고, 이 시대 사정에 적당히 맞춰 내놓을 만한 제작 시스템도 직접 설계했다.
“난리? 하하하! 하기야 화룡에서도 그랬으니까, 거기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
조건 사장은 화룡의 국립 대극장에서 이 영화가 처음 시민을 상대로 상영되던 날을 떠올렸다. 소위 도래인들이 제공하기 시작한 영화란 기물에 대해 꽤나 익숙한 화룡시민이지만, 정식 극영화를 접해 보긴 처음이었다.
반응은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웠다. 그 당시 관객의 반응은 단순히 감동이란 두 글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숭고한 무언가가 배어 있는 것이었다.
영화 속의 배역들 중 상당수가 실존 인물이고, 스토리가 아픈 과거의 기억을 건드려서 그런지, 다들 깊게 영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말로만 들어 본 한성 봉기 사건이 스크린을 통해 펼쳐지자, 다들 넋을 잃은 채 영화에 몰입했고, 감정의 고삐도 쉬이 풀려 버렸다.
“상영 중인데도 목놓아 곡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 전사한 병사를 추모한다며…….”
“하하하, 저도 처음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나다가, 그분들의 진심이 느껴져서 그런지 나중에는 눈시울이 다 시큰거리더군요.”
“후후, 다들 그랬지. 우리야 영화를 그저 영화로 보지만, 이 시대 사람들은 현실과 동일시하는 내적인 기제가 강한 것 같아.”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걸 분리해 볼 수 있으려면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니까요.”
“아무튼 그 영화가 여러모로 많은 분야에 큰 충격을 준 것만은 분명해.”
중앙정부의 관료들의 반응 또한 매우 뜨거웠다. 그 사건의 주인공이던 박승환 소장과 같은 군부 인사들은 체통이고 뭐고 차릴 새도 없이 감정을 놓아 버렸다.
이들은 영화가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을 체감하고 나자, 영화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가 이런 좋은 영화의 제작에 힘을 쏟아야 한다며 한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문화부와 그 산하기관인 대한영화진흥공사는 이런 요구에 적극 호응해서 민간 상업 영화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일단 국가 주도로 영화 산업을 적극 육성하기로 했다.
“국내도 그렇지만, 해외 쪽도 반향이 클 겁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독일 사업이 무척 중요하죠.”
“그렇지. 이번이 첫 사업이니까.”
“또 후속작도 잘 만들어야죠.”
두 사람은 이 후속작 문제로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서양에서 춘향전이 먹힐까?”
조건 사장은 다소 회의적이었다. 그에 비해 김진황 국장은 꽤 확신하는 양이었다.
“스토리를 보다 극적으로 각색해야죠. 하지만 컬러필름으로 제작된다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것만으로도 충격을 주기엔 충분하죠. 반응 역시 어마어마할 겁니다.”
이 후속 작품이 이르면 내년, 즉 1915년에 개봉된다고 해도 세계 최초의 컬러 영화로 기록될 수는 없었다. 벌써 조악하게나마 키네마컬러 시스템(1906년 특허 획득)이 등장한 지 오래되었고, 곧 테크니컬러 기술(1916년)도 세상에 나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대한제국 측이 선보일 기술은 수십 년 뒤에나 나올 기술이었다. 그러므로 후속 작품은 실질적인 세계 최초의 장편 컬러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자연색에 가까운 컬러 영화니까…….”
“거기에 우리의 전통 색채를 듬뿍 담아내면 꽤 화제가 될 겁니다. 우아하고 예쁘게 담아낼 생각입니다. 풍경도 그렇고…….”
김진황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이 작품 속에 대한제국의 전통적인 멋과 아름다움을 멋들어지게 녹여 낼 심산이었다.
“세상이 깜짝 놀라겠군. 게다가 유럽인들이 보기에 매우 이국적일 테고.”
“그렇습니다. 컬러 영화는 일단 그거 하나만 선보이고, 세상이 잠잠해질 때까지 당분간 더 내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충격만 주는 거죠. 그러면 아마 세계 영화인들은 미칠 노릇일 겁니다. 따라 해 보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을 테니까요. 그 과정에서 대한제국의 문화적, 기술적 위상이 크게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겠지. 그러고 보니 문화를 전파하는 데 영화만큼 좋은 수단은 없는 것 같아. 특히 이 시대에 말이야. 영화 자체가 대중들에게 환상적인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으니.”
대한제국은 첨단 공산품과 군사력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그런데 이제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게 바로 문화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이고, 영화가 그 수단으로 떠오른 것이다.
조건은 더 이상 고민할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춘향전으로 가자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생각났다는 듯이 한마디 덧붙였다.
“근데, 군부에서 성진항으로 이번 주말까지 촬영 팀을 보내 달라던데? 그거 알아서 좀 챙겨 줘.”
“성진항이요?”
“응. 무슨 해군 행사가 있나 봐. 그걸 꼭 기록해 놓아야 한다네?”
“그래요? 그럼 준비해 놓을게요.”
김진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회의가 마무리되자, 직원 한 명이 회의실로 들어와 보고서를 조건 사장에게 건넸다.
“오, 역시!”
“뭐, 뭡니까? 혹시 독일에서?”
“응. 독일 사업단에 동행한 사업지원국의 심건업 과장이 보낸 보고선데… 대성공이라네. 베를린이 아주 발칵 뒤집힌 모양이야.”
“하하, 내 말이 맞죠?”
김진황은 보고서를 건네받아 읽더니,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아니, 무슨 보고서가 이래요? 심 과장이 꽤나 흥분한 모양인데요?”
“이해해 줘야지. 그 정도로 반응이 대단했던 게지.”
“그건 그렇죠. 크크.”
두 사람은 손을 들어 손바닥을 마주쳤다.
* * *
1906년, 현정건은 갓 스물이 되었을 때, 토왜작전이 한창인 군에 입대해 크고 작은 전투에 참전했다. 그 후, 남부 전선에서 한동안 군 생활을 이어 가며 부교로 막 진급할 무렵, 학업에 대한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군문을 나와 화룡으로 들어갔다.
그는 별천지나 다름없는 간도에서 새로운 문물과 신학문에 흠뻑 빠져들었다. 특히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영화란 기물이었다. 주민 교육 현장에서 영화를 처음 접한 이래 완전히 매료된 그는 대한대학교에서 영화학과를 개설하자 고민할 것도 없이 입학 원서를 냈다.
마침 육촌 형인 현상건의 권유로 자격시까지 차례로 통과해 놓은 상태였다.
결과는 당연히 합격이었다. 절대평가로 치러진 1차 필기시험에서 기준 점수를 가뿐하게 넘어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고, 어렵기로 소문난 면접시험의 벽도 쉬이 넘었다.
도래인으로 구성된 면접관들이 그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사실 시험에 이골이 나 있는 당대 지식인들에게 1차 필기시험은 그리 어려운 관문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지원자의 상당수는 면접에서 걸러졌다.
그로 인해 말들이 많아지자 대학 측은 올해부터 2차 시험으로 책문(策文) 과목, 즉 논술 시험을 끼워 넣어 관문을 하나 더 늘리기도 했다.
현정건은 대학에서 무성영화 제작 기법부터 익혔다. 그가 주민 교육 현장에서 본 영화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질이나 기술 수준이 떨어졌지만, 처음엔 이런 것부터 배우는 거려니 하며 지레 짐작했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과 측은 새로운 기술과 장비를 가져와 가르쳤다. 혁명적인 영화 기술의 발전 과정을 매년 한 단계씩 체험하는 셈이었다. 물론 백두산 연구소에서 영화 장비 또한 기술 재현 과정을 통해 계속 내놓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래인들로 구성된 교관, 즉 교수들도 아직 그 장비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그는 이 부분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 저들은 새로운 기법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오래된 기술을 새로 꺼내 놓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영화에 대해 알아 갈수록 그가 처음 접한 영화의 기술 수준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 실감했기 때문이다.
졸업과 동시에 그에게 대한제국 사상 첫 영화감독이 되는 행운이 찾아왔다. 동기들에 비해 연치가 많은 편인데다,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이 한몫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작년, 즉 광무 17년(서기 1913년)부터 한성으로 내려가 교관의 도움을 받아 가며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우리 스승들이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군.”
현정건은 마치 복잡한 퍼즐 중 한 부분을 풀어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형님. 이번에 우리가 들고 온 작품은 정말 너무 과분한 것이었습니다. 하늘과 땅 차이네요. 비교 불가예요.”
주연인 유동하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두 사람을 비롯한 한국의 영화인들은 독일에서 베게너를 유명인으로 만들어준 ‘프라하의 학생[Der Student von Prag]’이란 영화를 단체로 관람했다. 물론 베게너와 라이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현정건 일행은 일주일간 이어진 마모어하우스의 행사에 이어 베를린의 또 다른 대형 영화관인 모차르트 홀―놀렌도르프 광장[Nollendorfplatz]에 자리한 1천 석 규모의 극장―에서 개최된 상영회 행사도 마쳤다.
이렇게 공식 상영회 행사가 모두 끝나자, 대한제국 영화인들은 오늘처럼 번외 일정에 참여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도 비슷한 걸 느꼈는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도 있었다. 그들도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도 현정건은 속내를 숨기며 정중한 태도로 베게너에게 말했다.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군요.”
베게너 또한 점잖게 화답하지만, 그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현정건의 말은 그저 입 발린 소리에 불과하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서울의 기억’을 만든 대한제국 영화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높게 평가할 리가 없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네?”
베게너는 드디어 그간 속 깊이 꾹꾹 눌러 놓은 갈망을 현정건에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광무 18년, 서기 1914년 4월. 서울.
예전에 휘발성 지역에 속한 이 시골 마을은 이제 명실상부한 대한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기존 휘발성 구역도 거대 도시 서울의 동부 변두리로 행정구역에 포함되지만, 시내 중심부는 휘발하를 따라 서쪽으로 약 18㎞ 정도 떨어진, 미래의 휘남현(輝南縣) 조양진(朝陽鎭) 지역에 조성되었다.
그곳에 올해 초부터 화룡에 있던 중앙정부 기관들이 차례로 이전해 오면서 서울은 점차 수도로서 구색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그간 인구도 꽤 많이 불어났다. 시내 동쪽과 동남쪽 외곽 지역, 휘발하의 지류 중 하나로 나름 수량이 풍부해 공업용수 조달에 유리한 평안하(平安河)―대한제국 정부는 한동안 후세에 붙여진 삼통하(三通河)란 명칭을 사용하다 당대의 북평안천(北平安川)이란 원 이름에서 두 자를 따와 평안하로 개칭했다―강변 지역을 따라 입주한 여러 공장들이 노동자를 대거 모집해 인구를 부쩍 늘려 놓았다.
노동자들이 자리를 잡자 자연스레 소상인들도 따라 들어왔는데, 이들의 상당수는 남부의 한성 출신 주민들이었다.
여기에 더해 중앙정부 기관과 각종 기업체들이 속속 입주함에 따라 화룡 주민도 대거 이주해 오자, 이제 도시는 사람들로 복작거린다는 느낌마저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내 최북단 구릉지대에 자리한 황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아 황실은 몇 달 뒤에나 이전할 예정이고, 그 시기에 맞춰 정식으로 수도 이전을 선포하기로 했다.
나라의 상징인 만큼 정부 관계자들은 처음부터 심미성과 상징적인 면을 고려하여 궁을 건설했다. 구조는 황제의 뜻에 따라 경운궁과 비슷하게 설계됐다.
독일인 건축 기사를 고용해 르네상스 양식의 양관과 전통적인 팔작지붕 모양을 한 정전 두 채를 나란히 배치하고, 그 측면과 배후에 다른 크고 작은 전각을 들여세웠다. 이 전각들 또한 양식과 한식이 골고루 혼재되어 있었다.
정부는 황궁이 들어서고 있는 북쪽, 해발 400미터대의 나지막한 산지에 ‘홀한산(忽汗山)’이란 이름을 붙이고, 정문이자 남문인 ‘광무문(光武門)’을 기점으로 시원하게 뻗은 중앙 대로를 ‘홀한대로’라 호칭하기로 했다.
휘발하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길게 뻗어간 이 홀한대로를 따라 고층 건물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홀한대로가 지나는 다리 역시 홀한대교라 이름했다.
그래서 이 다리의 북쪽에 황궁과 중앙정부 청사들이, 남쪽에 각종 공기업과 민간기업체들이 자리를 잡았다.
독일에 ‘서울의 기억’이란 영화와 더불어 영화인들을 파견한 대한영화진흥공사도 다리 남쪽, 홀한대로 서편에 위치했다.
“우리 현정건 감독은 잘하고 있겠지?”
도래인 출신의 조건 사장이 회의 도중에 또다시 독일 팀에 대해 언급했다. 전신을 통해 무사히 베를린에 도착한다는 전갈만 받았을 뿐, 아직 현지 반응에 대한 건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래서 회의를 하는 와중에도 독일 일을 화제로 끌고 오곤 했다.
“장담하건대, 지금 독일은 난리가 났을 겁니다.”
김진황 제작국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영화학과를 나온 전문 영화인이었다. 그래서 국립 대한대학교 영화학과의 커리큘럼을 거의 도맡아 디자인하고, 이 시대 사정에 적당히 맞춰 내놓을 만한 제작 시스템도 직접 설계했다.
“난리? 하하하! 하기야 화룡에서도 그랬으니까, 거기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
조건 사장은 화룡의 국립 대극장에서 이 영화가 처음 시민을 상대로 상영되던 날을 떠올렸다. 소위 도래인들이 제공하기 시작한 영화란 기물에 대해 꽤나 익숙한 화룡시민이지만, 정식 극영화를 접해 보긴 처음이었다.
반응은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웠다. 그 당시 관객의 반응은 단순히 감동이란 두 글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숭고한 무언가가 배어 있는 것이었다.
영화 속의 배역들 중 상당수가 실존 인물이고, 스토리가 아픈 과거의 기억을 건드려서 그런지, 다들 깊게 영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말로만 들어 본 한성 봉기 사건이 스크린을 통해 펼쳐지자, 다들 넋을 잃은 채 영화에 몰입했고, 감정의 고삐도 쉬이 풀려 버렸다.
“상영 중인데도 목놓아 곡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 전사한 병사를 추모한다며…….”
“하하하, 저도 처음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나다가, 그분들의 진심이 느껴져서 그런지 나중에는 눈시울이 다 시큰거리더군요.”
“후후, 다들 그랬지. 우리야 영화를 그저 영화로 보지만, 이 시대 사람들은 현실과 동일시하는 내적인 기제가 강한 것 같아.”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걸 분리해 볼 수 있으려면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니까요.”
“아무튼 그 영화가 여러모로 많은 분야에 큰 충격을 준 것만은 분명해.”
중앙정부의 관료들의 반응 또한 매우 뜨거웠다. 그 사건의 주인공이던 박승환 소장과 같은 군부 인사들은 체통이고 뭐고 차릴 새도 없이 감정을 놓아 버렸다.
이들은 영화가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을 체감하고 나자, 영화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가 이런 좋은 영화의 제작에 힘을 쏟아야 한다며 한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문화부와 그 산하기관인 대한영화진흥공사는 이런 요구에 적극 호응해서 민간 상업 영화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일단 국가 주도로 영화 산업을 적극 육성하기로 했다.
“국내도 그렇지만, 해외 쪽도 반향이 클 겁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독일 사업이 무척 중요하죠.”
“그렇지. 이번이 첫 사업이니까.”
“또 후속작도 잘 만들어야죠.”
두 사람은 이 후속작 문제로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서양에서 춘향전이 먹힐까?”
조건 사장은 다소 회의적이었다. 그에 비해 김진황 국장은 꽤 확신하는 양이었다.
“스토리를 보다 극적으로 각색해야죠. 하지만 컬러필름으로 제작된다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것만으로도 충격을 주기엔 충분하죠. 반응 역시 어마어마할 겁니다.”
이 후속 작품이 이르면 내년, 즉 1915년에 개봉된다고 해도 세계 최초의 컬러 영화로 기록될 수는 없었다. 벌써 조악하게나마 키네마컬러 시스템(1906년 특허 획득)이 등장한 지 오래되었고, 곧 테크니컬러 기술(1916년)도 세상에 나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대한제국 측이 선보일 기술은 수십 년 뒤에나 나올 기술이었다. 그러므로 후속 작품은 실질적인 세계 최초의 장편 컬러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자연색에 가까운 컬러 영화니까…….”
“거기에 우리의 전통 색채를 듬뿍 담아내면 꽤 화제가 될 겁니다. 우아하고 예쁘게 담아낼 생각입니다. 풍경도 그렇고…….”
김진황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이 작품 속에 대한제국의 전통적인 멋과 아름다움을 멋들어지게 녹여 낼 심산이었다.
“세상이 깜짝 놀라겠군. 게다가 유럽인들이 보기에 매우 이국적일 테고.”
“그렇습니다. 컬러 영화는 일단 그거 하나만 선보이고, 세상이 잠잠해질 때까지 당분간 더 내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충격만 주는 거죠. 그러면 아마 세계 영화인들은 미칠 노릇일 겁니다. 따라 해 보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을 테니까요. 그 과정에서 대한제국의 문화적, 기술적 위상이 크게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겠지. 그러고 보니 문화를 전파하는 데 영화만큼 좋은 수단은 없는 것 같아. 특히 이 시대에 말이야. 영화 자체가 대중들에게 환상적인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으니.”
대한제국은 첨단 공산품과 군사력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그런데 이제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게 바로 문화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이고, 영화가 그 수단으로 떠오른 것이다.
조건은 더 이상 고민할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춘향전으로 가자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생각났다는 듯이 한마디 덧붙였다.
“근데, 군부에서 성진항으로 이번 주말까지 촬영 팀을 보내 달라던데? 그거 알아서 좀 챙겨 줘.”
“성진항이요?”
“응. 무슨 해군 행사가 있나 봐. 그걸 꼭 기록해 놓아야 한다네?”
“그래요? 그럼 준비해 놓을게요.”
김진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회의가 마무리되자, 직원 한 명이 회의실로 들어와 보고서를 조건 사장에게 건넸다.
“오, 역시!”
“뭐, 뭡니까? 혹시 독일에서?”
“응. 독일 사업단에 동행한 사업지원국의 심건업 과장이 보낸 보고선데… 대성공이라네. 베를린이 아주 발칵 뒤집힌 모양이야.”
“하하, 내 말이 맞죠?”
김진황은 보고서를 건네받아 읽더니,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아니, 무슨 보고서가 이래요? 심 과장이 꽤나 흥분한 모양인데요?”
“이해해 줘야지. 그 정도로 반응이 대단했던 게지.”
“그건 그렇죠. 크크.”
두 사람은 손을 들어 손바닥을 마주쳤다.
* * *
1906년, 현정건은 갓 스물이 되었을 때, 토왜작전이 한창인 군에 입대해 크고 작은 전투에 참전했다. 그 후, 남부 전선에서 한동안 군 생활을 이어 가며 부교로 막 진급할 무렵, 학업에 대한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군문을 나와 화룡으로 들어갔다.
그는 별천지나 다름없는 간도에서 새로운 문물과 신학문에 흠뻑 빠져들었다. 특히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영화란 기물이었다. 주민 교육 현장에서 영화를 처음 접한 이래 완전히 매료된 그는 대한대학교에서 영화학과를 개설하자 고민할 것도 없이 입학 원서를 냈다.
마침 육촌 형인 현상건의 권유로 자격시까지 차례로 통과해 놓은 상태였다.
결과는 당연히 합격이었다. 절대평가로 치러진 1차 필기시험에서 기준 점수를 가뿐하게 넘어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고, 어렵기로 소문난 면접시험의 벽도 쉬이 넘었다.
도래인으로 구성된 면접관들이 그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사실 시험에 이골이 나 있는 당대 지식인들에게 1차 필기시험은 그리 어려운 관문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지원자의 상당수는 면접에서 걸러졌다.
그로 인해 말들이 많아지자 대학 측은 올해부터 2차 시험으로 책문(策文) 과목, 즉 논술 시험을 끼워 넣어 관문을 하나 더 늘리기도 했다.
현정건은 대학에서 무성영화 제작 기법부터 익혔다. 그가 주민 교육 현장에서 본 영화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질이나 기술 수준이 떨어졌지만, 처음엔 이런 것부터 배우는 거려니 하며 지레 짐작했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과 측은 새로운 기술과 장비를 가져와 가르쳤다. 혁명적인 영화 기술의 발전 과정을 매년 한 단계씩 체험하는 셈이었다. 물론 백두산 연구소에서 영화 장비 또한 기술 재현 과정을 통해 계속 내놓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래인들로 구성된 교관, 즉 교수들도 아직 그 장비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그는 이 부분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 저들은 새로운 기법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오래된 기술을 새로 꺼내 놓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영화에 대해 알아 갈수록 그가 처음 접한 영화의 기술 수준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 실감했기 때문이다.
졸업과 동시에 그에게 대한제국 사상 첫 영화감독이 되는 행운이 찾아왔다. 동기들에 비해 연치가 많은 편인데다,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이 한몫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작년, 즉 광무 17년(서기 1913년)부터 한성으로 내려가 교관의 도움을 받아 가며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우리 스승들이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군.”
현정건은 마치 복잡한 퍼즐 중 한 부분을 풀어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형님. 이번에 우리가 들고 온 작품은 정말 너무 과분한 것이었습니다. 하늘과 땅 차이네요. 비교 불가예요.”
주연인 유동하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두 사람을 비롯한 한국의 영화인들은 독일에서 베게너를 유명인으로 만들어준 ‘프라하의 학생[Der Student von Prag]’이란 영화를 단체로 관람했다. 물론 베게너와 라이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현정건 일행은 일주일간 이어진 마모어하우스의 행사에 이어 베를린의 또 다른 대형 영화관인 모차르트 홀―놀렌도르프 광장[Nollendorfplatz]에 자리한 1천 석 규모의 극장―에서 개최된 상영회 행사도 마쳤다.
이렇게 공식 상영회 행사가 모두 끝나자, 대한제국 영화인들은 오늘처럼 번외 일정에 참여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도 비슷한 걸 느꼈는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도 있었다. 그들도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도 현정건은 속내를 숨기며 정중한 태도로 베게너에게 말했다.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군요.”
베게너 또한 점잖게 화답하지만, 그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현정건의 말은 그저 입 발린 소리에 불과하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서울의 기억’을 만든 대한제국 영화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높게 평가할 리가 없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네?”
베게너는 드디어 그간 속 깊이 꾹꾹 눌러 놓은 갈망을 현정건에게 풀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