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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조사를 마무리하고 돌아갔음에도 다시 나타난 강태식의 모습에 김춘아가 경계를 드러냈다.

“왜 또?”

“선배님,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마음만 급해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김춘아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강태식.

이현성의 능력이 F등급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고 싶었고, 급한 마음에 그는 김춘아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김춘아.

그는 헌터 협회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퇴역을 하겠다고 했을 때, 협회장을 비롯하여 중요 협회 간부들은 결사반대했다.

하지만 김춘아는 그들의 반대들을 물리치고 결국 퇴역을 선택했고,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중한 사과에 김춘아 역시 그에게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 퇴역 헌터 주제에 조사단의 팀장에게 협박한 내가 더 잘못이 크겠지.”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고작 퇴역 헌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젊었고 충분히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선배님, 아직까지도 선배님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배님의 능력은 이렇게 사용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춘아의 눈빛이 아련하게 변했다.

“태식아, 난 말이다. 헌터 협회라는 조직이 싫지만은 않다. 하지만 헌터라는 직업이 너무 고단했고 힘들었어. 매일 같이 보던 동료들이 어느 날 사라졌고, 매달 동료의 장례식을 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헌터들은 항상 위험에 노출된다.

몬스터라는 위험한 존재로 매일같이 전투를 펼쳐야 하는 직업이었고, 그렇기에 헌터들은 항상 자잘한 정신병에 시달렸다.

그와 생사를 함께한 동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을 때, 강건하던 그도 무너질 정도였다.

“한 선배님의 일은 어쩔 수 없던 사고였습니다. 선배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가 가장 떠올리기 싫어하는 사건을 끄집어낸 강태식이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내 잘못이었다. 재식이가 아닌 내가 죽었어야 했을 일이었다.”

그 사건은 말 그대로 사고였을 뿐이었다.

김춘아의 힘으로도 어찌하지 못한 사고였을 뿐.

점점 얼굴이 일그러지는 김춘아의 모습에 강태식이 급하게 말을 돌렸다.

과거의 그 기억으로 그를 괴롭히고자 이 말을 꺼낸 게 아니었다.

“…선배님을 돕는 분이 협회장님이십니까?”

헌터 협회장 노건희는 조사단에게 김춘아의 행방을 알아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지난 2년 동안 제대로 된 조사도 진행이 되지 않았다.

그 요청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음에도 협회장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려 했다.

“부정은 하고 싶지 않다. 협회장님께서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다고 생각하냐?”

“…선배님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도 압니다.”

김춘아는 헌터 협회에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비록 등급은 A등급 헌터였으나, 그가 가진 재능은 헌터 협회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현역 헌터들을 훈련시키는 교관이었으며 헌터 협회와 적대 관계인 이들을 응징하는 집행부의 수장이었다.

그리고 많은 헌터에게 존경을 받던 사람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협회장님이 아니었으면 새로운 삶을 살기가 힘들었겠지. 매일같이 길드 사람들이 찾아와 날 설득하려 했을 테니까.”

협회장 노건희가 조사단에 보여 주기식 요청을 한 이유는 하나였다.

길드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김춘아 같은 사람을 길드에서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실제로도 퇴역하고 1년 동안은 길드 사람들이 지겹도록 찾아왔다.

겨우 찾은 새로운 일상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었고, 그의 결정에 노건희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협회장님께선 선배님을 차기 협회장으로 지정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솔직히 선배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헌터들이 많으니까요. 지금도 선배님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헌터들도 있습니다.”

강태식이 왜 또 찾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이런 소리를 하기 위해 다시 찾아온 건 아닐 거라는 것도.

김춘아는 그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쓸데없는 말 빙빙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해라.”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강태식은 진심이었다.

이현성에게 관심을 둔 것도 사실이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김춘아를 설득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런 말 할 거면 가라.”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강태식 역시 이대로 이현성이 운반꾼으로 무시받고 사는 것은 원치 않았다.

재능이 있다면 운반꾼을 할 시간에 제대로 헌터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능이 있음에도 그 재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막아야 한다.

그게 선배 헌터가 후배 헌터에게 해 줄 수 있는 호의라고 김춘아가 종종 하던 말이었다.

얼굴이 보이진 않은 영상이지만, 영상 속에서 에이션트 놀을 상대하던 존재는 상상을 뛰어넘는 능력을 사용했다.

그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운반꾼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걸 막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왜 김춘아가 이현성을 도와주려 하는 지도 예상할 수 있었다.

“의무 기간 때문입니까?”

허를 찌르는 그의 말에 김춘아가 애써 부정을 하며 모르는 척 연기를 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김춘아의 표정에 강태식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면 어떤 습관을 하나 드러내니까.

진한 눈썹을 치켜올리는 행동.

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이들은 그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본인만 모를 뿐,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이러한 습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맞군요.”

“…….”

그를 만나고 차에서 왜 이현성을 그렇게 보호하려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서 누군가를 핍박하거나 협박하는 걸 매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이현성을 건드리자 자신의 자리를 내세우며 협박하려 했다.

김춘아가 마력을 전신에 방출하는 모습에 강태식은 확신했다.

김춘아는 헌터 협회라는 조직을 잘 알고 있고, 어떤 규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싸우려고 온 게 아닙니다, 선배님.”

금방이라도 공격을 할 것 같은 모습에 강태식이 다급하게 손을 내밀었다.

“의도가 뭐냐?”

강태식이 딱딱한 말투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시간 동안 강태식은 협회장 노건희에게 하나의 계획을 수립하겠다고 말했고, 모든 계획을 말한 후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선배님이 헌터 협회에 돌아오신다면, 이현성 헌터에게 주어진 의무 기간이 면제될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그리고 재심사도 빠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지금 강태식은 수를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바로 쫓아내진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혹하는 조건이었고, 이현성이 운반꾼으로 시간을 소비하는 건 그도 원치 않은 일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확인한 강태식이 쐐기를 박았다.

“협회장님의 추천이 있으면 의무 기간이 면제되는 제도. 선배님도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1년에 딱 한 번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권한이고, 올해는 그 권한을 협회장님께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노건희는 그런 권한이 있으면서도 잘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20년이라는 기간 동안 협회장을 지키면서 면제 권한을 행한 건 딱 두 번뿐이었다.

비리를 싫어하고 학연, 혈연, 지연을 이용하여 혜택을 받는 자들을 극도로 경계하는 노건희의 성격상 그 권한은 계륵이나 다름없었다.

강태식의 제안에 김춘아가 기세를 갈무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지.”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이현성 헌터의 조사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일 중으로 종결 처리를 할 예정이니.”



***



김인석과 약속대로 이현성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은아가 그에게 선물한 단검을 집에 놓고 다녀야 했다.

일반인이 총기류를 소유하는 것도 불법이지만, 검이나 사람을 해할 수 있는 도구는 국가에서 철저하게 통제했다.

아직 이현성은 헌터가 아니라 운반꾼이기에 헌터 라이센스가 있음에도 무기를 소지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던전을 돌고 트레이닝실로 향하는 동안 그는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의무 기간이라는 제한만 없었더라면…….’

그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트레이닝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오는 그를 김춘아가 자리에 앉혔다.

“관장님.”

“왜 이렇게 힘이 없냐?”

그의 물음에 이현성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이런 생각이 들어서요. 의무 기간만 아니었다면, 굳이 제 힘을 숨길 이유도 없잖아요. 조사단의 진행이 되면서 왜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능력을 숨겨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느끼는 상실감이 무엇인지 김춘아는 이해할 수 있었고, 미래와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한 좌절감이 들 거라는 것도 알았다.

“내가 어떻게 운반꾼에서 헌터가 된 줄 아냐?”

김춘아는 헌터를 퇴역하고 처음으로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지금 이현성에게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야기가 바로 김춘아 본인의 과거 이야기일 테니까.

“몰라요.”

김인석은 김춘아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감추려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운반꾼에서 헌터가 된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운이 좋았지. 어떤 사람에 눈에 들어갔으니까. 나도 의무 기간을 채우기 위해서 일반 운반꾼으로 생활해야 했지. 그렇다고 내가 부양해야 할 가족은 없었지만, 재심사를 과정이 워낙 길었으니까. 운반꾼에서 재심사 신청을 넣어서 재심사가 빠르게 통과되는 것도 곤란하던 상황이었다.”

김춘아는 이현성과 거의 같은 길을 걸어왔다.

어쩔 수 없이 운반꾼이 되었지만, 그가 가진 마력은 절대 F등급이라 할 수 없었으니까.

왜 심사에서 F등급이 나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문제가 생긴 거라고 여겼다.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발생되지 않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심사를 봤을 때 마력의 구슬에서 오류가 일어났다고 하더군. 심사관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피하기 위해 그 사실을 감추었고.”

오류를 미리 감지하지 못하고 하필이면 김춘아 차례에서 오류가 일어났다.

김춘아의 심사가 끝났을 때, 심사관들이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책임을 두려워했고, 김춘아의 등급을 그대로 확정시켰다.

오류로 인해 F등급이 되어 버린 김춘아는 그렇게 4개월이라는 시간을 운반꾼으로 살았다.

이현성은 김춘아의 과거를 들으며 아무런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피해를 입게 된 수습 헌터에겐 보상이 주어졌지만, 솔직히 나는 그 보상이 불행으로 느껴졌지. 기껏 힘들게 채운 의무 기간이 삭제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때 그런 내 상황을 파악하고 도움을 준 분이 아니었다면, 다시 1년이라는 시간을 새롭게 채워야 했겠지.”

“그랬군요.”

이현성보다 더 억울한 상황에 몰린 사람.

하지만 이현성은 재능대로 등급을 판정받았고 심사에 관해선 불만이 없었다.

다만 ‘심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회귀를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불만을 가진 적은 있었다.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현성에게 김춘아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헌터 협회 협회장에겐 한 가지 권한이 주어진다. 일 년에 한 번, 의무 기간을 삭제시켜 줄 수 있는 권한이지.”

김춘아의 말을 들은 이현성의 눈이 커졌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을 터.

다만 협회장이라는 사람과 이현성은 연관점이 없었다.

그건 회귀 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왜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지 들어 보고 싶었다.

“헌터 선배로서 후배가 능력이 있음에도 그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불상사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고.”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전하는 그의 말에 이현성이 고개를 저으며 애써 담담한 척을 하려 했다.

자신을 도와줌으로서 그가 곤란해 질 상황이 올 수도 있었으니까.

“전 관장님이 저 때문에 피해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비록 관장님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친형처럼 절 챙겨 주셨잖아요.”

처음 보는 이현성을 위해 김춘아는 그가 성장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비싼 마정석을 구입하고 시뮬레이션의 구현이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왔으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네 능력을 보면서 나도 자극을 받았으니까. 이미 내려놓은 자리였지만, 그 자리에 미련이 생기기도 했다.”

이미 김춘아는 결단을 내린 상태지만, 이현성의 뜻도 들어 봐야 했기에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관장님.”

“형이 동생한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해.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네가 성장하고 강해졌으면 하는 바람은 진짜였다. 네가 조금 더 잘난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마음에서 널 도와주고 지지한 거라는 것만 알아줘라.”

헌터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 김춘아는 이현성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고 그 선물이 유용하게 사용했으면 했다.

확고한 눈빛을 드러낸 그의 모습에 이현성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관장님, 죄송해요.”

김춘아는 이현성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빚을 지울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가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다.

“관장님이 아니라 이젠 형이라 불러. 관장은 때려칠 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