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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준영이 인형을 바라봤다. 그녀가 자신을 살리고 괴물들과 싸웠다. 그리고…….

‘그 검은 어디에 있지?’

‘누나는 왜 움직이지 못 하는 거지?’

‘누나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누나는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왜 누나랑 같이 있는 거지?’

“으으윽…….”

준영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파 오기 시작했다. 지금의 현실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자신만 이 세계에서 홀로 붕 떠 있는 괴리감을 느꼈다. 무언가 맞지가 않았다.

“오빠!”

“형님!”

갑작스러운 준영의 변화에 두 사람이 놀라 외쳤다.

“으으…….”

준영의 눈이 붉어지며 다시 광기로 물들어 갔다. 부들부들 떨며 맛이 가는 그를 보며 은용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미쳤지! 왜 인형 언니 얘기를 꺼내서! 저거 또 미쳐 가네!’

“오빠, 오빠! 다른 얘기해요! 그깟 검이 어디 있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람?”

은용이 준영의 팔을 잡고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특히 자신의 학창 시절 얘기가 주가 됐다.

그래도 준영의 경련은 멈출 줄을 몰랐다. 서원호까지 합세해서 자신이 멸망 전 여자들한테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얘기했다.

은용은 썩은 생강을 씹은 표정을 지으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서원호를 바라봤지만, 그는 뻔뻔스럽게 자신의 여성 편력에 대해 멈추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까 오빠, 그때 희숙이가 말이지…….”

“…듣고 싶지 않다.”

실컷 떠들고 희숙이 얘기가 나올 때쯤, 준영의 떨림이 멈추고 정상으로 돌아왔다. 옆에서 하도 떠들어 대니 둘의 의도대로 너무 시끄러워 생각이 멈춰 버린 것이었다.

‘휴, 겨우 발작 전에 멈췄네.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은용과 서원호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서원호도 같이 지내며 그녀에게 대충 얘기를 들었다. 준영이 살짝 맛이 갔으며 인형 얘기는 금물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자자, 이제 갑시다!”

은용이 힘차게 외치며 앞으로 나섰다. 어서 빨리 이동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게 일행은 다시 느릿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걷자 부산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은 자 중에 양승수에 대해 아는 자가 있나?”

준영의 물음에 서원호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그곳에서 권력 다툼에 밀려 쫓겨났다. 사정을 잘 알리는 없었다.

“음, 그런데 그곳을 차지한 놈이 양승수 대장님하고 각별히 친하긴 했지요. 재능도 괜찮아서 대장님이 꽤나 아꼈습니다.”

“만나 보면 알겠지.”

이제는 서원호가 길잡이를 했다. 자신이 있던 정착지까지 일행들을 이끈 것이었다.

“휘유, 여기 꽤나 좋아졌네요.”

서원호가 있던 곳은 부산의 도심지여서 파괴된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나름 정비된 건물 사이사이에 상당히 높은 벽이 세워져 있었다.

“멈춰, 누구야?”

그곳을 지키던 보초가 총을 겨누며 외쳤다. 서원호가 불쑥 얼굴을 내밀며 손을 흔든다.

“나야, 나. 당신, 아직 살아 있었네. 하핫.”

“얼라? 서원호 각성자님?”

보초가 알아보고 황당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쫓겨난 자가 여기에 왜 다시 나타났단 말인가.

“아니, 여기에 왜 다시 오신 겁니까? 대장님이 알면 큰일 납니다. 돌아가세요.”

“고놈의 대장이란 분 좀 만나러 왔어요. 들어갈게?”

서원호는 일행을 이끌고 휘적휘적 거침없이 들어갔다. 보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자 몇몇 사람들이 서원호를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찌됐든 이곳에서 지내던 사람이 무사히 살아 돌아오니 신기하기도 반갑기도 한 것이었다.

“유제권이 어디 있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서원호가 한 명을 잡고 묻는다.

“사냥 갔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가서요. 가까운 데 돌아본다 했으니 곧 올 겁니다.”

“그렇군. 그럼 여기서 기다립시다.”

대충 털썩 주저 앉아 기다리는데 몇 사람이 서원호의 앞에 찾아왔다.

“너 뭐야. 왜 다시 왔어. 죽고 싶어?”

“어? 오랜만에 봤는데 무섭게 왜 그래?”

나타난 자는 이곳의 대장인 유제권의 수하 각성자였다. 수는 세 명. 정착지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겁먹어서 바로 줄행랑을 쳤겠지만, 지금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준영이 같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권이 만나면 뭐 좀 물어보고 떠날 거니까 너무 겁주지 마라.”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말하는 서원호를 보고 각성자 중 한 명이 앞에 나서려 했다. 하지만 동료들의 제지로 일단 걸음을 멈춰야 했다.

“너 그때 겨우 도망갔어. 이번에 만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냥 가라.”

그래도 예전에 같이 지낸 정이 있어서 그런지 한 명이 생각해 주는 척 말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서원호는 귓등으로 흘렸다.

“죽어도 우린 모른다.”

세 명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래도 자신들의 손으로 공격하고 싶지는 않던 모양이다.

저녁이 될 때쯤, 사냥을 나간 유제권 일행이 돌아왔다. 하지만 생각보다 적은 수의 괴물들만 잡아왔을 뿐이다.

“젠장, 조금 더 멀리 나가야겠군. 요새 너무 많이 잡았어.”

“농사를 조금 더 지어 보면 어떨까요?”

“그거 뭐 제대로 할 줄 아는 놈이 있어야지. 그 정도 가지고는 턱도 없어.”

얼굴이 붉고 고약한 인상을 한 사내가 옆 사람과 얘기를 하며 들어왔다.

“여, 유제권이!”

서원호가 그런 그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얼라? 저 새끼, 저거…….”

유제권이 서원호를 발견하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뭐냐? 죽고 싶어서 왔냐?”

그는 바로 기세등등하게 마력을 뿜으며 서원호에게 다가왔다. 예전에 죽이려다 놓친 놈이 다시 나타났으니 그는 잘됐다 생각했다. 기분도 꿀꿀한데 저놈을 쥐어 패서 기분 전환을 하려 한 것이었다.

유제권의 뿜어지는 마력에 서원호가 움찔하며 준영의 뒤로 숨었다. 여유 있는 척 했지만, 무서워하던 자를 만나니 여유가 쏙 사라졌다.

“뭐야? 넌?”

서원호와 자신 사이에 가로막고 선 준영을 보고 유제권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양승수, 알고 있나?”

그러거나 말거나 준영은 자신이 묻고 싶은 말만 물었다.

“양…승수? 예전 대장님?”

“그래.”

“하, 이 새끼는 또 뭐야? 다짜고짜 찾아와서. 너도 죽고 싶냐?”

유제권이 으르렁거리며 준영과 코가 맞닿은 거리까지 얼굴을 붙였다.

“너, 뭐야? 죽고 싶어? 여기가 어딘지 알고 와?”

“냄새 난다. 떨어져라.”

무표정한 준영의 말에 유제권이 얼굴이 더욱 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새끼가!”

부웅!

바로 주먹이 준영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유제권은 C등급 상위 각성자였다. 나름 엘리트 축에 속하는 등급인 것이었다.

척.

“익, 이익!”

가볍게 그의 손목이 준영의 손에 잡혔다. 얼굴이 뻘개지도록 힘을 줘 보지만, 도무지 준영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뺄 수가 없었다.

“양승수, 어디에 있지?”

“모, 몰라!”

드득!

준영이 힘을 주자 유제권의 손목이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악! 으아악!”

“다시 묻는다. 양승수, 어디에 있지?”

“몰라! 진짜 몰라! 갑자기 떠났어!”

“다른 아는 내용은 없나?”

“으아아!”

비명 소리와 함께 유제권의 다른 한쪽 손이 준영의 머리를 노리고 다시 날아들었다.

척.

하지만 그 손도 잡히고 말았다. 준영이 양손에 힘을 주자 유제권의 무릎이 굽혀지기 시작했다.

“아악! 놔! 놔 줘!”

“아는 것 무엇이든 말해라. 양승수에 대해.”

“너, 뭐야! 다짜고짜 찾아와서! 말로 해! 말로!”

그 말에도 준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먼저 공격했으니 당연히 고통을 받아도 된다 생각한 것이었다.

톡톡.

그때, 은용이 준영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찌르며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오빠, 말로 해요. 말로.”

은용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잠시 그녀를 돌아본 준영이 유제권의 양손을 놓아주었다.

“양승수에 대해 아는 건 모두 말해라.”

바닥에 주저앉은 유제권은 함부로 다시 덤비지 못했다. 자신보다 윗줄의 각성자인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정착지의 다른 각성자들과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일행을 포위했다. 언제든 공격할 준비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제권은 고개를 흔들며 덤비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덤벼 봤자 다 죽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몰라. 어디로 갔는지. 하지만 나에게 B등급이 되면 서울 근방으로 올라오라고 했어.”

“서울?”

“올라오면 안다고, 할 일을 주겠다고 했어. 물론 난 갈 생각이 없어. 소문으로 듣기는 거기는 괴물 천지야. 나 같은 놈은 가면 바로 죽어.”

“무슨 소리지?”

“남부 쪽이 그나마 괴물을 잡으며 살 수 있는 건 서울 위쪽에서 다 막고 있기 때문이야. 엄청난 수의 괴물들이 다 그곳에 몰려들고 있어. 여기는 그냥 남은 괴물들이 번식을 하고 있는 거고 우리는 그거 잡으면서 사는 거야.”

“확실한가?”

“나도 소문으로 듣고 대장한테 들은 얘기야. 더 이상은 몰라. 대장도 그 이상은 얘기해 주지 않았어.”

준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서울로 가면 양승수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인가?”

유제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서울로 가도 만날 수는 없을 거야. 서울까지 갈 필요도 없어. 대장은 경상도 지역 어딘가에 있을 거다.”

“헐, 진짜? 넌 그거 어떻게 알아?”

서원호가 눈치 없이 끼어들며 물었다. 유제권이 그런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대장은 나보고 B등급이 되면 이곳을 다른 자에게 맡기고 올라오라고 했다. 인재들이 필요하다고. 그러면서 여러 얘기를 해 줬지.”

“참내, 네가 무슨 인재라고. 성질도 더럽고…….”

투덜대는 서원호의 말을 자르고 준영이 물었다.

“경상도 지역 어딘가라는 건 무슨 말이지?”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저 대장의 담당 구역이 경상도라고 했어. 계속 돌면서 우리처럼 각성자를 만들어 주고 정착지를 안정시킨다고. 그리고 재능 있는 자들은 서울로 올려 보내는 거 같아. 나에게만 한 얘기니 따로 선별해서 하는 거 같다.”

촤악.

준영이 바로 허공에서 지도를 꺼내 보았다. 경상도 지역은 걸어 다니기에는 생각보다 넓었다. 하지만 양승수의 행동반경이 특정되었으니 찾기는 이제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좋군.”

준영은 지도를 던져 버리고 쌀과 여러 식량들을 꺼내 주었다.

“우와…….”

그 이적에 사람들은 입만 벌리고 놀라고 있었다. 유제권도 화를 내는 것은 잊고 그것만 바라보았다.

서원호에게 듣기로는 욕심도 많고 성질도 더럽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 어쨌든 자신도 사람들이 있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으니까.

“사람들을 잘 보살펴라.”

그 말을 끝으로 준영은 걸음을 옮겼다. 은용과 서원호도 냅다 따라붙었다. 괜히 떨어지면 해코지당할까 봐 겁먹은 것이었다.

“잠깐, 당신 누구야? 대체 양승수 대장을 왜 찾는 거지?”

유제권은 준영을 불러 세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상당히 강하고 신비한 능력을 가진 자 같은데 예전 대장을 찾는다 하니 궁금해진 것이었다.

준영은 고개를 돌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내뱉었다.

“죽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