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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

“가위요, 가위. 머리 자르는 가위.”

준영은 별말 없이 미용 가위를 하나 구매해 꺼내 주었다.

“면도 크림이랑 면도기도요. 헤헷.”

준영은 그것도 꺼내 주며 물었다.

“겨드랑이 털이라도 깎으려는 것인가? 누나도 가끔 나에게 면도기를 요구했다.”

“아니거든요!”

은용이 얼굴이 벌게져서 외쳤다. 이 남자는 정말 멸망 전이었으면 여자한테 인기가 1도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흠흠, 아저씨 이발 좀 하려고요. 면도도 하구요.”

은용이 다시 진정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필요 없다.”

“아니, 안 불편해요? 머리도 산발에 지저분하고 면도도 언제 했는지 수염도 제멋대로 자라 있고. 어머, 흰 수염도 있네?”

“불편하지 않다. 내가 알아서 대충 깎고 있다.”

준영은 수염이 너무 길거나 머리가 불편할 정도로 길어지면 대충 칼로 잘라 내곤 했다. 그러니 항상 삐뚤빼뚤 제멋대로 자란 머리칼과 수염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에헤이, 제가 깎아 드릴게요. 저 이런 거 잘해요. 손재주가 좋다니까요. 그래서 제 친구 희숙이가…….”

“듣고 싶지 않다.”

“아니, 들어 봐요. 언니한테 잘 보이고 싶지 않아요? 매일 이렇게 지저분하게 다니면 언니도 아저씨 얼굴 보기 지겨울 텐데. 호호호.”

“음.”

인형 언니를 팔자 준영이 잠깐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외모를 꾸며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에나 하던 것이었다. 시간이 지난 뒤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 역시 남자는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마련인가 보다.

‘역시, 인형 언니를 팔아먹어야 해.’

“자자, 오랜만에 깔끔하게 하고 언니한테 잘 보이는 건 어때요? 아저씨가 하면 대충해서 안 예쁠 테니 제가 한번 해 볼게요. 여자 마음은 여자가 안다고, 보는 눈도 비슷하다니까요?”

살짝 고민하는 태도를 보이자 은용이 밀어붙였다. 준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부탁하지.”

“헤헷!”

은용이 혀를 내밀고 웃으며 준영의 머리를 깎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실 미용 자격증을 가졌거나, 미용을 전문적으로 배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멸망 전, 그 또래 여자들이 그렇듯 꾸미는 데 관심이 많았고 생각보다 손재주가 좋아 혼자서 셀프 미용을 하기도 했다.

은용은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스타일로 준영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이렇게 봉두난발 스타일이 아닌, 눈썹 위까지 앞머리를 자르고 옆머리도 귀까지만 살짝 오는 깔끔한 스타일로. 물론 구레나룻도 살짝 남겨 두었다.

투블럭과 같은 멸망 전에 유행하던 머리 스타일을 해 주고 싶었지만, 이발기도 없고 그 정도의 전문적인 기술은 없었다. 그래서 가위로 할 수 있는, 가장 깔끔하고 마음에 드는 스타일로 결정한 것이다.

‘어머? 어머?’

머리를 단정하게 깎자 준영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핏얼핏 훈남인 줄은 알았는데 제대로 머리 정돈을 하자 생각 이상이었다.

“꿀꺽.”

은용은 침을 삼키고 내친김에 면도까지 바로 진행했다. 머리를 정리하니 수염 있는 것도 나름 분위기가 있고 멋있는데 아예 면도까지 한 얼굴을 보고 싶던 것이다.

‘어마마? 어머, 어머, 얼굴 뭐야?’

면도까지 한 준영의 얼굴은 정말 훈남, 그 자체였다. 조각 같은 선 굵은 미남은 아니지만, 보기만 해도 편안해지고, 풋풋하고, 싱그러운 느낌이었다. 멸망 전이었으면 여자들한테 인기가 1은 물론, 100도 부족할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꺄악!”

결국 은용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건 완전 대박이었다. 이 아저씨가 이렇게 멋진 오빠인 줄 몰랐다. 나이도 고작 20대 초중반으로 밖에 안 보였다. 지저분할 때는 한 40대는 되어 보였다. 역시 남자는 머리빨, 얼굴빨이다.

“오빠!”

“……?”

준영이 은용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오빠라고 해도 아저씨라고 꿋꿋하게 부르던 그녀가 이제는 얼굴까지 벌게져서 오빠 타령을 하고 있었다.

“옵빠, 나 죽어!”

“무슨 일이냐.”

준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예전에는 저 표정을 보면 민망했는데 지금은 그것마저도 시크하고 멋져 보였다. 눈에서 하트가 절로 생겨났다.

“흠흠, 오빠, 머리 자르니까 훨씬 낫다. 언니도 좋아할 거야. 언니, 그렇죠?”

정작 인형 언니보다 은용이 더 좋아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좋았다. 은용은 양손을 자신의 볼에 갖다 댄 채로 몸을 배배 꼬았다.

“다 됐으면 이제 자라.”

“네에, 옵빠아아아.”

코맹맹이 소리까지 나왔다. 절로 몸이 꼬아졌다. 그녀는 텐트로 들어가지도 않고 계속 몸을 꼬며 준영을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이미 고양이처럼 변했고 눈까지 반짝였다.

‘여자들은 알 수가 없군.’

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의 텐트로 들어가 버렸다. 오늘따라 그녀의 눈빛이 이상하게 부담스러웠다.

‘이 남자다!’

은용은 야무지게 주먹을 쥐며 다시 결심했다. 능력 있고 잘생기기까지 했다. 가끔 미치는 게 문제긴 하지만, 갱생 가능성은 있으니 시간을 들여 정상인으로 만들면 된다.

“오호호홍!”

은용은 미친년처럼 한껏 웃은 뒤 텐트로 들어갔다. 옆에 인형 언니를 눕힌 뒤, 소곤거렸다.

“언니, 언니. 오빠 완전 잘생겼지 뭐야? 저런 오빠를 혼자 독차지하고 있었네? 오호호홋.”

당연히 인형 언니는 누워서 아무런 말도 없었다.

“언니, 이건 미안한데 말이야. 언니는 매일 가만히 있으니까 오빠는 내가 좀 꼬셔 볼까? 호호홋.”

그 말을 하고 뒤돌아 누운 은용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

화들짝 놀라 인형을 바라보았지만, 인형 언니는 항상 그렇듯이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은용은 오늘따라 왠지 인형 언니의 미소가 좀 무서워 보였다.

“허, 내가… 요새 몸이 좀 허한가?”

그것도 잠시, 은용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모포를 머리까지 덮고 잠을 청했다. 몸을 꽁꽁 둘러싸야 잠이 올 것만 같았다.

“으으으… 잘못했어요.”

그날 밤, 은용은 꿈에서 무서운 인형 언니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다. 칼을 든 채 한쪽 발로 쿵쿵거리며 걷는 인형 언니가 미소 지으면서 쫓아오는 꿈이었다. 왠지 준영을 꼬신다고 했을 때부터 죄책감이 좀 느껴졌는데 그 영향인 모양이었다.

“으으! 알았어. 안 집적거릴 거라고!”

벌떡 일어난 은용이 인형 언니에게 삿대질을 하며 신경질을 냈다.

“어휴, 지 서방이라고 엄청 챙기네.”

투덜거리며 다시 모포를 뒤집어썼다. 인형 언니는 한 번에 용서해 줄 생각이 없는지 또다시 꿈속에 등장해서 은용을 쫓아왔다. 오늘 잠자기는 그른 것 같았다.

“으으, 죽겠네.”

결국 밤을 샌 은용이 퀭한 눈으로 손톱을 물어뜯는 동안, 서원호는 준영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헐, 뉘신지?”

깔끔해진 그의 모습을 보자 자괴감이 몰려왔다. 준영이 자신보다 어려 보인 것이었다.

“저기, 형님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모른다.”

정말 모른다. 대충 계산만 해도 수백 년은 살아온 거 같았다. 나중에는 시간이 너무 지나 나이를 세는 것도 그만두었다.

“하하, 괜찮다고? 누나 마음에 들면 됐어. 은영이 덕분이지, 뭐. 하하하.”

준영이 출발하기 전, 인형과 대화를 하며 웃었다. 은용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어휴, 다 좋은데 저 맛이 간 것만 어떻게 안 되나?’

“가자.”

실컷 인형과 떠든 준영이 이동하자, 은용과 서원호가 비치적거리며 쫓아갔다. 은용은 잠을 못 자 피곤하고, 서원호는 준영의 비주얼에 충격을 먹은 상태였다. 둘 다 오늘은 떠들지도 않고 묵묵히 따라갈 뿐이었다.



일행은 며칠 동안 천천히 이동했다. 은용과 서원호도 다시 힘이 났는지 쉬지 않고 재잘거리며 떠들어 댔다.

이동속도는 극도로 느렸지만, 준영은 별로 급해 하지 않았다. 양승수는 S등급이라고 했다. 그가 조심만 한다면 자신의 손에 죽기 전에 괴물들에게 먼저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양승수가 S등급에 올랐다면, 다른 자들도 분명 S등급에 이르렀을 것이다.

준영과 일행은 이동하는 동안 아주 작은 정착지를 몇 군데 발견했다. 준영은 그곳들을 들리며 양승수에 대한 정보를 물었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단지 선을 넘은 악인이 있다면 처리하고 그곳에 당분간 머물며 사람들을 챙겨 주었다. 적당히 제 욕심 정도만 챙기는 각정자는 내버려 두었다. 자신이 모든 이를 다 보살펴 줄 수는 없었으니까.

중간중간 괴물이 나타나면 은용과 서원호가 처리했다. 은용은 그렇게 매번 잡는데도 각성을 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흠, 너는 정말 오래 걸리는구나.”

준영이 보기에도 은용은 다른 자보다 한참은 오래 걸리는 거 같았다. 마력이 늘긴 늘었다. 다만, 그게 쥐꼬리만큼이라 문제였다. 이 상태로는 몇 달을 사냥해도 각성을 할까 말까였다. 지금까지 본 사람들과 비교하면 정말 수백 배는 느린 속도였다.

“에휴, 저는 정말 재능이 없나 봐요.”

그럴 때마다 그녀는 의기소침해졌다. 그녀는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을 준영이 각성시켜 준 것을 봐 왔다. 그런데 자신은 그 사람들의 몇 배나 되는 양의 괴물을 잡고도 각성하지 못하니 속이 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누님처럼 바닥인 재능은 저도 처음 봤습니다. 심해에 다다른 재능이에요.”

“됐거든요?”

서원호가 옆에서 깐족거렸다. 하지만 은용은 볼만 부풀리고 뾰로통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 근데 언니는 많이 강했어요?”

은용이 궁금해져서 준영에게 물었다. 준영은 이럴 때마다 툭하면 인형 언니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자랑을 하곤 했다. 단 한 마리만 잡고도 각성을 했다 하니 확실히 엄청난 재능을 가진 모양이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강했지. 우리들 중 누구보다 강했다.”

“우리들?”

“우리는 선발대였다. 동료들이 있었지.”

“그럼 양승수 대장님이 형님 동료였습니까?”

서원호가 끼어들며 묻자 준영이 잠시 멈칫했다.

“그래, 동료였지.”

은용과 서원호는 정확히 준영과 양승수의 관계를 몰랐다. 그나마 준영이 분노를 터트리며 그에 대해 말할 때도 둘 다 고막이 터졌었으니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준영의 대답에 옛 동료를 만나러 가는가 보다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S등급인 양승수와 동료였다니 역시 거물은 거물끼리 논다고 생각했다.

“그럼 언니는 얼마나 강했는데요? 오빠보다 강했어요?”

그 말에 준영이 인형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지금 움직일 수 있다면 얼마나 강해졌을까.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 나보다 강했다.”

그 말에 은용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인형 언니를 바라봤다. 하지만 인형 언니는 이제 말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아니, 저건 그냥 인형이었다.

‘저 말이 정말 사실일까? 그냥 미쳐서 망상을 하는 게 아닐까?’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도 전에 준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녀는 특별했다. 안내자도 말했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타난 구원자나 마찬가지라고.”

준영은 머릿속으로 전투 때 보여 주던 그녀의 위용을 떠올렸다.

그래. 만약 무사히 돌아왔다면, 그리고 시간을 들여 능력을 키워 나갔으면, 그녀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그녀는 대단했으니까.

“그녀는 다중 능력자였다. 다른 각성자들과 다르게 여러 능력들을 쓸 수 있었지. 그리고 신검 브륜힐트의 주인이었다.”

“브륜…힐트?”

“시스템에 속해 있지만, 시스템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검. 신의 영혼의 조각이 들어 있는 검. 오직 자신의 다른 영혼 조각을 가진 자만을 주인으로 택하는 검. 파괴신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신이 죽기 직전 스스로를 변화시켜 만든 검이라고 했다.”

은용은 허무맹랑한 준영의 말에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인형 언니 얘기를 해 보라 했더니 선을 세게 넘는다. 허무맹랑한 신화 같은 얘기에 은용이 코를 파며 물었다.

“그럼 그 검은 지금 어디 있어요?”

“그 검은…….”

당연히 누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나는 이곳에 있었다. 그 순간, 준영은 무언가 심한 괴리감을 느꼈다.

“그 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