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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은용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수레 안에는 끔찍한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준영은 아무 말 없이 수레를 이끌고 바쁘게 움직이는 각성자들 앞으로 다가갔다.

“오, 오셨습니까?”

각성자들은 준영이 다가오자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다. 괴물들을 잡을 때 보여 준 모습 때문에 그의 앞에 서면 더욱 더 긴장하게 되었다.

“확인해라.”

“네? 무엇을?”

준영은 수레를 뒤집었다. 그러자 우르르 하며 수레에 있던 것들이 모두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으허헉!”

각성자들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구경하던 모두들 헛숨을 들이키며 놀랐다. 수레에서 떨어진 것들은 조재도 일당의 머리들이었다.

“빠진 놈이 있는지 모두 확인해라.”

“네, 네!”

음산한 그의 말에 다들 허겁지겁 수급을 확인했다. 몸이 절로 덜덜 떨려 왔지만, 확인을 멈출 수는 없었다.

준영은 그들이 수급을 확인하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게 더 무서웠다.

“마, 맞습니다. 빠진 자는 없습니다.”

그제야 준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를 찾았다. 호명을 받은 자는 두 사람. 두 사람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준영의 앞에 섰다.

쉬각!

준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의 목을 날렸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아 말도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조재도의 부하들이다.”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은 이곳에 머물며 지속적으로 준영의 정보를 건네준 사람들인 것이었다. 그들 때문에 준영의 행동 패턴과 사냥 일정을 알고 움직일 수 있던 것이다.

“아, 아저씨…….”

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요 몇 달 준영은 정말 정상인 같았다. 그런데 오늘 하루 동안 너무나 잔혹한 모습을 보았다. 미친병이 다시 도진 거 같아 걱정이 된 것이었다.

“괜찮다.”

그 마음을 안 것일까. 준영은 이례적으로 괜찮다는 말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은용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준영의 옆에 앉아 같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을 모른 척 하였다. 지금까지 준영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거기에 두려움이 추가되었다. 자신들을 구해 줬지만, 광기에 빠져 있던 잔혹한 모습은 섣불리 다가가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사실 준영도 이곳이 좋았다. 요 몇 달 동안 사람들과 부대끼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도 알게 되었다. 티를 안 내었지만, 혼자 인형에게 떠들며 웃은 적도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혼자서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사람과의 교류, 만남, 그리고 자신이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좋았다.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이곳에서 같이 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떠나야 했다. 이곳에서 자신이 할 일은 끝났다는 것이 느껴졌다. 미뤄둔 일들을 하나하나 매듭지어야 했다. 도와준다는 핑계였지만, 사실 이곳에 계속 머물고 싶던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떠날 시간이군.”

일주일 정도 더 머문 그는 여러 물품들을 지원해 주고 주변의 위험 요소들을 정리하였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가 떠난다 하자 아쉬워하면서도 안도했다. 그들도 복잡한 마음이던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김종문이 준영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는 준영을 어려워했지만, 은혜를 잊을 만큼 파렴치한 자도 아니었다.

“정착지의 대표는 정했나?”

“아직… 어떻게 할지 투표로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준영이 있기에 함부로 누가 대표가 되니 마니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떠난다 하니 누가 됐든 결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크, 형님 제가 해야죠.’

서원호는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어쨌든 준영을 데리고 와서 조재도와 그 일당들을 내쫓았으니 자신이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내가 정해 주겠다.”

“네, 뜻에 따르겠습니다.”

‘오옷! 형님 저를 선택하려고 하는군요!’

김종문은 고개를 숙였고 서원호는 당연히 준영과 이곳에서 가장 친한 자신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곳의 대표는…….”

“형님! 감사합니다! 잘 이끌도록 하겠습니다!”

준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원호가 크게 외치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너무 상상만 하다 보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이 된 줄로 착각해 버렸다.

그 외침에 준영은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돌렸고 옆에서 구경하던 은용은 썩은 생강 씹은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응? 응? 저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서원호의 말을 무시하고 준영은 말을 이었다.

“이곳의 대표는 김종문, 당신이다.”

“아, 아니, 저는 부담스럽습니다.”

김종문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고 서원호는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다.

“누나가 당신으로 결정했다. 잘 이끌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준영의 단호한 말에 김종문은 고개를 숙이며 알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을 잘 이끌도록.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다.”

김종문은 이제 이 정착지의 대표가 되었다. 그보다 더 강한 각성자가 있었지만, 준영의 뜻이기에 아무도 반대하지는 못했다.

서원호는 내심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예전보다 이곳이 살 만해졌으니 자신도 유유자적하게 살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럼, 형님 살펴 가십쇼. 감사했습니다.”

떠나려는 준영에게 서원호가 정중히 인사했다. 그래도 준영과의 친분 덕분에 이곳에서 입지가 엄청나게 상승했으니 그리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사냥에 몇 번 참가해서 마력도 꽤 올랐다. 조금만 더 수련한다면 D등급이 될 것 같았다.

그야말로 자신에게는 여러모로 도움을 준 행운의 남자였다.

작별 인사를 하는 그를 보며 준영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입을 열었다.

“넌 나랑 같이 간다.”

“네, 네… 네? 제가요?! 왜요?!”

서원호가 놀라서 외쳤다. 이 정도면 됐다. 자신은 따라갈 생각도 없고 이곳에서 이제 그냥 편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따라오라니. 자신이 생각하기에 준영의 길은 피의 길이었다. 따라가 봤자 좋을 것 없었다. 안 봐도 고생길이 훤한 길이었다.

“양승수를 찾아갈 것이다. 길잡이를 해라.”

“아니, 형님 저는 진짜 어디 있는지 모른다니까요? 몰라요! 나는 몰라요!”

서원호가 앙탈을 부렸다. 준영이 양승수에 대한 분노를 터뜨릴 때, 그는 고막이 터지고 기절해서 어떤 관계인 줄도 몰랐다. 왜 찾는지도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따라와라.”

무표정한 그의 말에 서원호는 삽시간에 얼굴이 늙어 버렸다. 축 처진 것이 마치 바람 빠진 풍선 인형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은용이 낄낄거렸다.

“너는 어떻게 할 거지? 원한다면 이곳에 남아도 좋다.”

준영이 이번에는 은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애초에 약속은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기로 한 거였다. 이 정착지라면 그녀가 예쁨 받고 충분히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흐, 흥!”

은용의 표정이 뾰로통해졌다. 그 말에 괜히 서운하고 기분이 상했다. 당연히 자신하고 같이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남아도 된다니 열불이 올랐다.

“같이 갈 거거든요? 저 아직 각성자 안 됐잖아요!”

“이곳에 있는 자들이 모두 각성시켜 줄 것이다.”

“흥! 흥! 전 아저씨랑 약속했으니까 아저씨 따라갈 거예요. 그리고 언니한테도 내가 필요하다니까요? 휠체어, 아저씨가 끌 거예요?”

사실 그녀 입장에서도 여기 있는 게 더 편할 것이었다. 이곳에서 이제 입지도 높아졌고 사람들과도 친하니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것이었다. 게다가 식량도 충분하고 주변은 안전했다. 이런 정착지는 쉽게 찾을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준영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의 옆에 있다면 안전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야영을 하며 깨끗하고 안락한 생활도 할 수 있었다. 필요한 것은 모두 구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결정적으로…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알겠다.”

준영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구차한 인사들 없이 그냥 이대로 휙 떠나는 것이었다. 그게 어울리긴 했지만.

‘어맛, 웃었어?’

그의 옆에 가장 오래 있던 은용도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가끔 인형 언니랑 얘기할 때나 웃는데 자신 때문에 웃은 것은 처음 보는 거 같았다.

“같이 가욧!”

은용이 재빠르게 인형 언니의 휠체어를 끌며 쫓아갔다. 서원호는 영혼이 빠진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따라갔다.

남은 사람들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어찌됐든 자신들을 도와주고 챙겨 준 사람이었다. 그가 무서워 조금 더 살갑게 굴지 못한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그 마음을 마지막 인사로 건네는 것이었다.



“에, 이제 어디로 가나요?”

“부산으로 간다.”

서원호가 양승수를 만나 각성자가 된 곳이 부산이었다.

“그곳에는 지금 없을 텐데요?”

“그곳에서부터 정착지를 돌아볼 것이다.”

일단은 그 근방의 정착지들을 뒤져볼 생각이었다. 양승수의 행동으로 보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각성자들을 만드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한곳에 꽤 오래 머물러야 하니 수소문을 한다면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전라북도다. 부산 쪽으로 향하다 보면 정착지가 몇 있을 테고 어쩌면 그곳에 있거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은용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이동하던 일행은 밤이 되자 야영 준비를 했다.

은용과 서원호는 이제 준영을 따라다니는 야영에 익숙했다. 그리고 상당히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야영 준비를 한 뒤, 저녁을 먹고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서원호와 은용은 쉴 새 없이 떠들고 준영은 가만히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해요?”

서원호가 먼저 자러 텐트로 들어가자 은용이 준영에게 다가와 물었다.

“음…….”

잠시 뜸을 들이던 준영은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누나가 틀렸다. 그들을 살려 두면 안 됐다.”

조재도와 그 일당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을 처음에 살리자는 의견에 누나도 동의를 했다. 그녀는 틀린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그 결정이 틀린 것이었다.

“에이, 언니가 신인가? 어떻게 사람…이 매번 다 맞을 수가 있어요. 안 그래요?”

잠깐 멈칫했지만 어쨌든 은용은 그게 뭐 대수냐고 말했다. 하지만 준영에게 그것은 심각한 일이었다.

“누나는 틀린 적이 없었다.”

“에에이, 언니도 틀릴 수 있죠.”

“음…….”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때, 그녀의 결정 덕분에 자신은 여러 번 목숨을 건졌다. 그렇기에 그녀를 향한 믿음은 신앙에 가까울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지구로 돌아온 뒤부터 점점 그 믿음이 흔들렸다. 게다가… 중요한 순간에 그녀가 말을 해 주지 않는 경우도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그런 생각 말아요. 언니가 점쟁이인가, 뭐.”

은용은 그렇게 말하며 준영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봉두난발의 머리에 다듬지 않은 수염이 그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만 보면 훈남인 것 같은데 영 꾸미질 않으니 제대로 얼굴을 감상하기가 힘들었다.

“흠흠, 아저씨 혹시 가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