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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잊고 있었다.

자신이 저것들을 얼마나 증오했는지.

고통스러운 나날 동안 한시도 잊지 않고 증오를 불태웠다.

약할 때는 하나하나 분노를 담아 죽였고, 강해진 뒤에는 쉬지 않고 저것들을 학살했다.

어느 순간부터 학살이 담담해졌다. 너무나도 하찮아졌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번식을 조절했다.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저것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왔고 마음은 무뎌졌다. 동물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어졌다.

하지만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 저것들은 없어져야 할 존재였다. 식량이고 뭐고 없어져야 인간들이 살 수 있었다.

저것들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관리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아아악!”

“살려줘!”

주변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사람들의 고통에 찬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아픈 기억들이 뇌리에 파고들었다.

그 기억들이 몸을 잠식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이 생각났다. 그때도 저렇게 괴물들이 몰려왔다.

동료들에게 배신당한 그날이 생각났다.

그래.

자신의 삶은 증오와 분노가, 그리움과 약속이 뒤섞인 그런 삶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저 괴물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만들었다.

그녀를 죽인 것은 저것들이다.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것도 저것들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것에 대한 분노가 희석되었고 기억은 서서히 잊혀 갔다. 그저 자연재해처럼 받아들이고 만 것이다.

아니다.

저것은 반드시 멸절해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형님!”

“아저씨!”

서원호의 외침에 이어 은용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도착한 그녀는 현재 상황을 보고 큰 충격을 먹었다.

“아아아아아!”

은용의 입에서 절규가,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처음으로 도망 다니지 않고 사람들과 힘을 합쳐 만든 정착지였다.

다들 기뻐했고 드디어 살 만하다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좋았고 이렇게 계속 살고 싶었다. 이런 세상에서도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 준 준영과 힘을 모아 준 사람들이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했다.

정착지를 꾸리던 이 몇 달 동안은, 멸망 후 은용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크와아악!

옆쪽으로 몰려드는 괴물 중 하나가 은용을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앞의 충격적인 광경에 넋이 나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같이 돌아온 각성자들은 이미 앞쪽의 현장에 뛰어들어 은용 혼자 있는 상황이었다.

“누님!”

그것을 발견한 서원호가 크게 외치며 달려오지만, 괴물은 이미 그녀의 근처까지 다가왔다.

크와와와!

괴물이 입을 쩍 벌리며 그녀를 뜯어 먹으려 하는 그 순간.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은용에게 다가온 괴물의 머리와 상반신이 땅바닥에 박혀 버렸다.

“어?”

은용이 눈물을 흘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괴물은 몸 절반이 땅에 박힌 채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부들거리고 있었다.

“어, 어?”

그녀 앞에 준영이 나타났다. 그는 무서운 붉은 눈을 하고 있었다.

“누나와 함께 뒤로 빠져 있어라.”

가래 끓는 목소리로 말한 그는 바로 등을 돌렸다.

은용이 공격당하는 것을 보고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끝없는 분노와 증오가 다시 마음속에서 타올랐다.

자신의 삶과 힘의 원천은 바로 그것이다.

드드드드드!

준영의 주변 공기가 떨리며 땅바닥이 들썩인다. 바닥에 있는 것들이 모두 떠올랐다. 그의 마력이 개방되어 사방으로 퍼졌다.

크아아!

괴물들의 고개가 모두 한곳으로 돌아갔다. 모든 괴물들이 준영의 마력을 느낀 것이었다.

크오오오!

거대한 괴물마저 싸움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너무나도 맛있는 냄새. 괴물들은 마력을 가진 인간을 죽이고 먹고 싶어 했다. 그렇기에 더 높은 마력을 가진 인간일수록 그것에 집착했다.

크아아아아!

모든 괴물들이 학살을 멈추고 준영에게 달려들었다.

어서 빨리 저 인간을 뜯어먹고 싶은 것이다.

쿠웅! 쿠웅!

하지만 거대한 괴물은 쉽게 준영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남은 각성자들이 모두 힘을 모아 저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준영이 도착한 것을 알고 거대한 괴물을 막는 것에 집중했다. 나머지 괴물들을 그가 처리하고 합류한다면 승산이 있다 생각한 것이다.

수백의 괴물들 모두 준영 한 사람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괴물들의 몸이 하늘을 빽빽하게 가리자 금세 주변이 어두워졌다.

“크큭, 사람들 맛있었냐?”

준영이 손을 휘젓자 대형 전기톱이 나왔다. 이것은 정말 오랜만에 꺼내는 것이었다.

부아아아앙!

전기톱이 돌아가는 그 순간, 괴물들의 선두가 준영에게 달라붙었다.

크아아아!

가장 먼저 달라붙은 놈이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갈리며 반으로 쪼개졌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크아아악!

나머지 놈들도 접근한 순간, 팔과 다리가 모두 잘려서 바닥에 널브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크아아!

크아아아!

괴물들은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인지할 수가 없었다. 왜 사지가 잘리고 쓰러져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모든 괴물들이 순간적으로 주춤했다. 그것들도 왜 그런지 몰랐다. 그저 준영에게 뿜어져 나오는 살기와 마력에 본능적으로 멈춘 것이었다.

크와와!

하지만 그것도 잠시, 괴물들은 다시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다.

“그래, 그래야지.”

부아아아아앙! 드드드드드드!

준영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덤벼드는 모든 괴물들의 사지를 잘라 내었다. 대부분 팔과 다리, 날개만 잘라 내었다. 덕분에 괴물들은 죽지 않고 바닥에 떨어져 몸을 펄떡거렸다.

콰직!

팔과 다리가 없는데도 기어와 준영을 물어뜯으려 한 놈은 발에 밟혀 머리가 깨졌다.

크아아악!

괴물들이 점점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준영은 빠른 속도로 그것들을 무력화시켰다. 사람들은 도망가는 것도 잊어버린 채 넋 놓고 그것을 보고 있었다.

“형님? 왜 죽이지 않고…….”

서원호가 그것을 보며 말했지만, 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괴물들을 무력화시키는 것에만 집중했다.

털썩. 털썩.

모든 괴물들이 순식간에 팔과 다리가 잘려 땅바닥에서 꿈틀거렸다. 하얀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으니 그건 그것대로 징그러운 광경이었다.

“비켜라.”

괴물들이 모두 쓰러지자 준영은 바로 중급 천사인 거대한 괴물 앞에 섰다. 저지하고 있던 각성자들은 그의 말에 바로 옆으로 빠졌다.

크오오!

부웅!

거대한 괴물은 크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준영은 가볍게 피해 내었다.

크아아!

콰앙! 콰앙!

양손으로 땅이 파이도록 찍어 댔지만,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 괴물은 열이 받는지 쉬지 않고 쳐 댔지만, 준영을 맞출 수 없었다.

부아아아앙!

그때, 준영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전기톱을 들어 올렸다.

“크아아아!”

그가 가만히 서 있자, 괴물이 마치 기회라는 듯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내질렀다. 맞으면 뼈도 못 추리고 바닥에 찌부러진 채 박혀 버릴 힘이 느껴진다.

주먹이 다가오는 찰나의 순간, 양손으로 전기톱을 어깨 위로 당기며 자세를 낮추던 준영이 포탄처럼 튀어나갔다.

가가가가가각!

내려찍는 주먹을 향해 전기톱을 내밀며 솟구치자 괴물의 주먹을 가르고 팔을 가르고 결국에는 어깨까지 갈라 버렸다. 면적과 상관없이 폭발한 힘의 파동은 괴물의 팔을 완전히 반쪽으로 나눠 버렸다.

털썩.

크아아아아악!

괴물의 한쪽 팔의 반이 깨끗하게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괴물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도망갈 순 없다.”

공포에 젖은 눈동자. 공포를 모른다는 이 괴물도 준영의 압도적인 힘을 느꼈다. 중급 천사는 하급 천사보다 강하고 마력을 느끼는 감각도 더 뛰어났다.

그렇기에 준영의 강대한 힘 앞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크악!

강렬한 생존 본능이 파괴밖에 모르는 이 괴물의 등을 돌리게 했다.

가가가각!

하지만 괴물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도망가려 등을 돌리는 순간, 준영이 머리까지 단번에 뛰어올라 목을 갈라 버렸기 때문이다.

거대한 목의 둘레도 소용이 없었다.

투웅.

사람 몸통보다 더 큰 괴물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준영은 바로 괴물의 머리를 박살내었다. 이것들은 목이 잘려도 재생할 수 있으니까.

습격해 온 모든 괴물들이 쓰러졌다. 준영, 단 한사람에 의해서. 하지만 사람들은 승리의 환호를 지를 수가 없었다.

부아아아앙!

전기톱이 다시 맹렬하게 돌아간다. 준영은 죽지 않고 쓰러진 괴물들의 몸에 천천히 전기톱을 가져다 대었다.

부아아앙! 드드드드드!

크아아악!

괴물들도 당연히 고통을 느낀다. 재생력이 뛰어나니 쉽게 죽지도 않았다.

준영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깊은 허무감과 타오르는 분노를 이놈들의 피로 채워야 했다.

크아아아아!

크아아!

사람들은 숨죽여 그것을 지켜보았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괴물들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만이 계속 울려 퍼졌다.

준영은 마치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는 예술품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집중했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됐다.

이것은 그만의 의식이었다. 그곳에서 오랜 세월 혼자 살아 나갈 때, 그는 이렇게 마음을 달래곤 했다. 이 지긋지긋한 놈들에게 분노를 이렇게라도 풀었어야 했던 것이다.

크아아아!

한참 동안 괴물의 비명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아무도 준영을 제지하지 못했다. 그저 두렵고 착잡한 눈빛으로 그 행위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어찌 보던 준영은 묵묵하게 괴물들의 몸을 해체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크어어어…….

심장과 머리가 파괴되지 않았는데도 숨이 끊어지는 괴물들이 나왔다. 마력을 담은 전기톱이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니 고통을 더 견디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랜 세월 갈고 닦은 그만의 노하우이자 고문법이었다.

아직 많이 남았다. 준영은 죽어 버린 놈은 내버려 두고 다시 살아 있는 놈에게 다가가 전기톱을 밀어 넣었다.

덥썩.

그때, 누군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준영이 번들거리는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돌리자 은용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만… 이제 그만해요…….”

“…….”

스스로는 모르지만, 준영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붉은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를 노려만 보았다.

“아저씨… 그만… 아저씨도 아프잖아…….”

기어코 은용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준영이 아파하고 슬퍼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거 같았다.

마치 오랜 세월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 아무에게도 위로를 듣지 못한 채 홀로 처절하고 외롭게 살아온 사람처럼. 그래서 그 마음이 곪고 곪아서 너무나도 아파하고, 슬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저씨, 내가 있잖아. 원호 아저씨도 있고 아저씨를 존경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은용은 준영의 허리를 잡고 그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으며 힘껏 껴안았다. 준영의 옷은 이미 피로 절을 대로 절어 있어서 그녀의 얼굴과 온몸에도 피가 묻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요… 이제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사실 그녀 자신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이제 정말 괜찮다고.

덜컹!

준영의 손에서 전기톱이 떨어졌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았다.

“알겠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감정의 고저조차 없는 음산하고, 무언가 목에 꽉 찬 듯한 어색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지금 은용에게는 그때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몸을 돌린 준영은 손을 뻗어 괴물들의 머리에 마력을 쏘아 내었다.

퍽! 퍼벅!

준영이 걸을 때마다 괴물들의 머리가 수박 터지듯이 연달아 터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괴물들을 정리한 그는 두려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각성자들에게 다가갔다.

준영의 음산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이 주변의 괴물들은 모두 정리했다. 중급 천사와 저 정도 규모의 괴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곳은 없었다.”

각성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준영은 퀭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설명해라. 어찌된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