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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사람들이 거주할 공간은 충분했다. 조재도와 그의 수하들이 떠나갔기 때문에 건물과 천막 등이 많이 남았다.

이틀 정도에 걸쳐 정비가 대충 끝났다. 노인과 아이들 우선으로 빈 건물에 자리를 잡았고 비교적 건강한 사람들은 밖의 천막을 정비하고 그곳에 묵기로 하였다.

거주 공간이 정리되자 이번에는 급히 필요한 식량이 우선 문제로 떠올랐다. 이곳에서 보유하고 있는 괴물은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내가 해결해 주지.”

준영은 그 한마디와 함께 모두에게 놀랄 기적을 선사했다. 수많은 쌀과 고기,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의 구황작물과 각종 야채의 종자들이 쏟아졌다.

물론 준영이 그런 것들을 다 아는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 어설프게나마 아는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준비한 것이었다.

‘모두 있는 것이 아니군.’

아예 생소한 이름과 함께 머릿속에서 이미지조차 잡히지 않는 것들은 준영도 구할 수 없었다. 시스템의 리스트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엄청난 식량의 확보로 사람들은 준영을 신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절까지 하는 노인도 있었다.

이러다 보니 같이 온 은용과 서원호의 입지가 엄청나게 올라갔다. 기존에 욜로회에 소속되어 있던 각성자들조차 무언가 결정하고 의견을 구할 때 두 사람에게 물어볼 정도였다.

준영은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가오기 어려워했다. 그는 그저 필요한 것들을 요청받으면 조용히 그것을 내어 주었다. 물론 그 요청은 은용과 서원호를 통해서 그에게 전달되었다.

“엣헴, 엣헴. 줄을 서시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의 간청에 은용은 식량 분배라는 나름 중요한 일까지 맡았다. 사또 옆의 이방처럼 보이는 게 흠이지만, 귀찮아하지 않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모습에 사람들은 오히려 은용을 더 좋아하고 의지하였다.

“크, 그러니까 형님이 말이지.”

서원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매일 돌아다니며 떠들기만 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준영과 피를 나눈 의형제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준영이 서원호의 인품에 반해 간절하게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했다는 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허풍은 날로 커져 며칠 전 준영이 1만 마리의 괴물들을 한 번에 죽였다고 소문이 났다.

서원호의 허풍 덕분에 사람들은 준영을 경외하고 거의 신처럼 모셨다. 종교까지 생길 기세였다. 정작 당사자인 그는 그런 소문도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

급한 식량 분배 이후, 비축 분량들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게 계획을 짜고 분류하였다.

이것이 떨어지기 전에 종자를 키우고 식량 수급을 원활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 필요한 것이 있는가?”

준영의 말에 사람들은 의약품을 원했다. 이 시대는 병원도 없고 약도 구할 수 없었다. 감기 몸살 하나도 혹시나 몸이 악화되어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특히나 무리한 작업을 하다가 심한 상처가 나면 치료를 제때 못 해 죽을 수도 있었다. 상처가 덧나는 것도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었다.

다시 수많은 약들이 떨어졌다. 준영도, 사람들도 정확한 약의 이름은 모르지만, 비슷한 효과를 가진 각종 복용약과 연고, 붕대 등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술을 할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에 중상자를 위한 포션까지 수백 병을 마련해 줬다.

사람들은 그 신비한 약에 열광했고 준영을 더욱더 추앙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정착지를 정비하면서 무기를 비롯해 필요한 것들을 준영이 지속적으로 챙겨 주었다. 이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준영이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 입장에서 그는 이 시대의 구세주이고 신이었다. 이 정도 생활만 유지할 수 있다면 평생 바랄 것이 없을 정도였다.

‘포인트 소모가 역시 크군.’

준영 또한 무한하게 물건들을 뿌릴 수는 없었다. 물건 하나를 생성하거나 구매하기 위해서는 괴물을 잡아 얻은 포인트가 필요했다.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혼자서 살아왔기 때문에 포인트가 부족할 일이 없었다. 엄청나게 많은 괴물들을 도륙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명이 넘는 사람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챙기려 하니 포인트가 엄청나게 소모됐다. 물론 아직은 이런 짓을 수백 번 더 해도 괜찮을 만큼 포인트가 남아돌았다. 그래도 앞으로 어떤 식으로 얼마나 필요하게 될지 모르기에 준영은 틈날 때마다 조금씩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에 걸쳐 정비가 끝나고 필요한 물건들도 얼추 확보가 되자, 준영은 김종문을 비롯해 몇 사람을 선별했다.

“일단 이 사람들이 우선 각성한다.”

준영이 뽑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마력이 개화된 자들이었다.

인간들은 모두 마력을 아주 조금씩이라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마력은 각성자들에 비하면 아주 극소량인, 마력이라 불리기도 민망한 그런 수준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미지의 기운인 그것을 기(氣), 또는 차크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러왔다. 지금에 와서는 각성자들의 영향으로 마력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준영은 그중에서 마력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사람들을 우선으로 추렸다. 일정 선만 넘는다면 이들은 각성할 것이었다.

김종문을 포함해 총 일곱 명의 사람이 선별됐다. 준영은 그들을 이끌고 정착지 밖을 몇 번이나 나갔다.

욜로회에서도 식량 수급의 문제 때문에 근처의 괴물 서식지는 위치를 어느 정도 파악해 놨다. 번식이 꽤 진행되면 토벌도 정기적으로 진행되었다.

준영은 그런 곳들의 정보를 듣고 적당히 처리해 나갔다. 괴물들이 부족한 거 같으면 더 멀리 나가서라도 사람들이 최대한 많이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다섯 명이나 각성에 성공했다. 준영의 도움으로 쉽고 빠르게, 엄청난 수의 괴물들을 잡아 각성의 속도도 빠른 것이었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기뻐하였고 드디어 정착지에 서원호를 포함해 열 명의 각성자가 주둔할 수 있게 되었다.

‘으으, 나는 왜 빨리 안 되는 거야.’

은용은 열심히 인형 언니의 휠체어를 끌고 다니며 준영을 따라다녔다. 사람들이 잡을 때, 자신도 똑같은 양의 괴물을 꼬박꼬박 잡았는데 각성은커녕 몸만 더 피곤해지고 있었다.

다급해진 마음에 자신이 괴물을 더 잡게 해 달라고도 졸랐다. 하지만 준영은 항상 공평하게 괴물의 수를 사람들에게 할당해 주었다.

“넌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재능이 없군. 누나에 비하면 태양과 반딧불 수준이다. 아니, 그런 비교조차도 누나에게 실례군. 넌 그냥 빛이 없다. 어둠, 그 자체다.”

준영조차도 이례적으로 말을 길게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그런가 싶어 세심히 관찰까지 해 보았지만, 마력이 정말 쥐꼬리만큼만 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죄라면 은용은 사형감이었다. 그것도 능지처참 수준이었다.

“흥, 칫, 핏!”

무표정한 얼굴로 팩트 폭행을 하는 준영에게 대들지는 못하고 볼만 뾰로통하게 부풀렸다. 하도 그러니 나중에는 볼이 터질 것처럼 보였다.

“하하, 다급해하지 마라.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될 것이야.”

“히잉, 종문이 아저씨.”

김종문이 종종 은용을 위로해 줬다. 그는 이미 각성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등급을 더 올려야 된다며 준영이 계속 사냥에 참가시켰다.

정착지는 안정화되었고 사람들은 많이 친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준영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 특유의 분위기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신처럼 모시는 사람이라 감히 말 걸기고 송구한 것이었다.

덕분에 휠체어와 인형에 대해 준영에게 대놓고 물어본 사람은 없었다. 그 때문에 이런저런 소문만 퍼질 뿐, 아무도 진상을 알지 못했다.

다시 두어 달이 지났다. 준영이 선별한 사람들은 은용을 제외하고 모두 각성자가 되었다. 하지만 등급을 올리기 위해 사냥은 계속 되었다. 적어도 E 등급은 되어야 이들이 힘을 합쳐 안전하게 다른 사람도 각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조금 더 멀리 나가야겠군.”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등급도 한 단계씩 올랐다. 준영은 아직 등급이 안 오른 세 사람과 은용을 데리고 조금 더 먼 곳까지 이동하였다. 이 주변은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한 달만 지나도 다시 바글바글해지겠지만, 당장 잡을 수 있는 괴물이 필요했다.

준영은 이제 떠날 생각이었다. 자신이 계속 사람들을 돌볼 수는 없었다. 어떻게 연이 되어 도와줬지만, 자신은 우선적으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냥은 보통 이틀에서 사흘 정도 걸렸다. 이번에도 이틀 정도 사냥하고 사흘째가 되는 날 정착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희숙이가 말이죠. 깔깔깔.”

“듣고 싶지 않다.”

은용은 여전히 준영의 옆에서 휠체어를 밀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다른 세 사람은 말도 걸지 못하고 묵묵히 뒤를 따를 뿐이었다. 여전히 준영은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는,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말 들어보세요. 희숙이가 글쎄…….”

“잠깐.”

준영이 쉴 새 없이 떠드는 은용의 입을 손을 들어 막았다. 은용은 또 자기 얘기가 듣기 싫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볼을 뾰로통 부풀렸다.

갑자기 준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태양이 높이 떠 있었다. 오후밖에 되지 않았고 정착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금방 도착할 거리였다.

으드득.

준영의 이가 갑자기 갈렸다. 은용을 포함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와 함께 와라. 먼저 가겠다.”

팡!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준영의 몸이 순식간에 뻗어 나가고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에, 내 얘기가 그 정도로 듣기 싫었나?”

은용은 자신의 얘기가 그 정도로 재미없었나 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갑자기 사라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흐, 흥. 우리도 빨리 가요!”

은용이 삐진 표정으로 힘차게 휠체어를 끌고 달렸다. 사람들도 어리둥절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정착지까지는 멀지 않으니 곧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흥, 흥, 두고 봐. 다음에는 더 재미없는 얘기를 해 줄 테니까.’

은용이 야무진 생각을 하며 달리고 있을 때, 준영은 이미 정착지에 도착한 상태였다.

“아아악!”

“살려줘!”

“도와주세요! 으아아아악!”

크와와와와!

정착지는 아비규환이었다. 사람들이 힘을 모아 정비한 건물과 천막은 불타고 부서지고 있었다.

두근!

준영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으아아아앙!”

한 아이가 피를 흘리며 부모의 시체를 잡고 울고 있었다.

“아아아악!”

한 여자가 괴물한테 온 몸이 찢기며 뜯어 먹히고 있었다.

“사, 살려 줘!”

한 중년 남성이 다리가 잘린 채 손을 뻗으며 기어갔다. 괴물은 그를 놓치지 않고 덮친 채 머리부터 잡아먹었다.

두근!

다시 준영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크와와와!

괴물들의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자신을 따라온 세 명을 빼도 아홉 명의 각성자가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D등급이고 한 명은 C등급이었다. 능히 막을 수 있어야 했다.

쿠오오!

한쪽에 거대한 괴물이 보였다. 다른 괴물들보다 훨씬 큰 덩치의 괴물이었다. 4~5m는 되어 보였다. 그리고 네 장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확연하게 다른 모습. 바로 중급 천사였다.

여섯 명의 각성자가 그 괴물 하나에 묶여 있었다. 겨우겨우 막아 내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 세 명의 각성자들이 사람들을 구하려 하지만, 수에서 너무나 차이가 났다. 전부 다 막을 수가 없으니 사람들은 계속 비명을 지르며 죽어 나갔다.

두근!

다시 준영의 심장이 거세게 뛴다. 머릿속에 예전의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두근!

“형님!”

그때, 그를 발견한 서원호가 크게 외쳤다.

그와 동시에 준영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